▶꼼짝 않고 렌즈를 노려보던 블러디 메리가 시선은 그대로 둔 채 비트를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 2002년 12월, 박수용 촬영 )


박수용 씨의 시베리아 호랑이 일가 추적기
심장이 쿵! 머리 위에서 호랑이 네 마리가…

▶백두대간 생태계의 원형을 간직한 한반도 생물의 원류인 러시아 우수리에서 한 다큐멘터리 감독이 머물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반도에 살던 호랑이가 오가던 곳이다. 박수용 감독은 한겨울 비트 속에서 먹고 자며 호랑이 ‘블러디 메리’와 그의 증손주까지 지켜봤다. 한국 호랑이의 원류를 쫓는 박 감독이 한겨레에 ‘블러디 메리’ 일가 조우기를 보내왔다.


오늘도 눈이 내린다. 어제도 눈이 내렸고 그제도 눈이 내렸다. 눈 내리는 산야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그녀를 기다린다. 눈 쌓인 덤불을 툭툭 치며 그녀가 나타나는 듯싶다가도 눈을 씻고 다시 보면 하늘과 잇대어 눈송이만 흘러내린다. 누구도 본 적은 없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블러디 메리’(Bloody Mary)라 부른다. 
그녀는 사냥할 때 주변을 온통 피투성이로 만든다. 사슴의 목줄을 일격에 물어 죽이는 건 다른 호랑이와 마찬가지지만, 그녀는 이미 죽은 사슴의 목줄도 악착스럽게 물고 흔들며 확인사살을 한다. 그러다 커다란 송곳니가 목줄의 상처 구멍을 크게 만들고 결국 동맥까지 터뜨려 피를 많이 흘리게 한다. 그래서 우수리(연해주) 원주민들은 16세기 수많은 신교도와 성공회 교도를 처형했던 영국 여왕 메리 1세의 별명, 블러디 메리를 그녀의 이름으로 붙였다. 그러나 블러디 메리가 사람에게 피해를 입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사람을 극도로 피하는 조심성과 매사 끈질긴 집요함 덕분에 스스로를 잘 지키고 새끼도 잘 키운다.
 
나는 그녀를 보고 싶었다. 그래서 오랜 시간 그녀의 흔적을 조사하여 그녀가 나타나리라 예측되는 이곳을 골랐고, 여기에 지하 비트(잠복지)를 파고 들어와 매년 6개월씩 3년 예정으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오지의 한 평짜리 지하 비트에 갇혀 대소변을 해결하고 얼어붙은 주먹밥을 녹여 먹으며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북서풍과 싸운다. 씻지도, 소리 지르지도, 불을 켜지도 못하고 갇혀 지낸 시간이 3개월이 넘어가자 독방에 갇힌 죄수가 부러워진다. 
비트 입구로 내놓은 렌즈를 천천히 돌리며 숲을 살폈다. 뷰파인더 속으로 눈 쌓인 덤불이 지나가고 느릅나무가 지나가고 다복솔밭이 지나갔다. 다복솔밭 밑에 뭔가 어두운 음영이 서 있었다. 심장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서서히 줌인하며 포커스를 맞추자 호랑이의 전신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천지백이었다. 천지백은 뒷산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 방향에서 다른 호랑이 두 마리가 화면 속으로 걸어 들어와 서로 목을 비비고 푸르릉 콧소리를 내며 정을 나눴다. 월백(月白), 설백(雪白), 천지백(天地白), 블러디 메리의 세 자식들이다. 오랜 기다림 끝에 삼남매가 나타나자 꿈에 사무치던 연인을 만난 듯 반가웠다. 환희가 밀물처럼 밀려오며 짧은 순간 영원을 느꼈다. 
 
그 순간 뿌드득 뿌드득, 잠복지 뒤에서 부드러운 발로 눈을 밟는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뒤통수가 섬뜩했다. 블러디 메리? 발자국 소리는 점점 가까워오더니 지붕 위로 올라섰다. 지붕이 울컹거리며 혈류가 급속히 돌아갔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아무리 되뇌어도 워낙 기습적으로 당한 일이라 가슴이 요동치고 숨이 막혔다. 그토록 보고 싶었지만 몇 년을 따라다니며 조사하면서도 흔적 외에는 한번도 볼 수 없었던 그녀가 바로 내 머리 30센티미터 위에 있다. 왜 비트 위로 올라왔지? 들킨 걸까? 1초, 2초, 3초… 30초가량 머물렀던 것 같다. 그 시간이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 순간, 그녀는 위장한 잠복지 입구를 풀쩍 뛰어넘었다. 나지막한 관목에 쌓인 눈더미를 흩뜨리며 새끼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뷰파인더에 호랑이 네 마리가 모두 들어왔다. 짐작한 대로 블러디 메리였다. 드디어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게 늘어뜨린 꼬리 끝은 갈고리처럼 살짝 치켜 올라와 뱀처럼 꿈틀거렸다. 늘씬한 몸체가 팽팽하게 이어지다 불쑥 튀어나온 견갑골, 그 위로 당당히 치켜든 강인한 얼굴, 정갈한 외모, 정제된 행동, 깨끗한 모습이었다. 생존을 위한 가혹한 투쟁에서 자신과 가족을 보존하기 위해 움직임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제어하는 침착함이 묻어 있다. 삶을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싸워 살아남은 자만이 뿜을 수 있는, 위엄과 의지가 느껴졌다.
 
푸르릉, 푸릉, 새끼들이 정겨운 소리를 내며 어미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그러나 블러디 메리는 대꾸하지 않고 서늘하게 날 선 의심과 경계의 빛으로 사방을 살피기만 했다. 자애로운 어미 눈빛이 아니었다. 주변을 둘러보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시선이 그녀를 따라가던 렌즈와 마주쳤다. 렌즈를 멈췄다. 마주친 시선 그대로 그녀도 몸을 멈춰 세웠다. 뚫어질 듯 렌즈를 노려보는 눈빛은 고정된 채 흔들림이 없었다. 심장박동이 급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처음 드러난 그녀의 모습에 서둘렀다. 그녀가 노련한 어미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꼼짝 않고 노려보던 블러디 메리가 렌즈를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것은 자신의 새끼들을 위해서라면 온 세상과도 싸우려는 암호랑이의 모습이었다. 소름이 돋았다. 구렁이처럼 긴 꼬리를 번쩍 쳐들고 눈꽃 핀 덤불밭을 헤치며 일직선으로 다가왔다. 비트 위 느릅나무에 쌓인 눈이 바람에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렌즈를 노려보며 다가올수록 뷰파인더 속 그녀에게 맞춰진 초점이 흐릿해지다 이윽고 사라졌다. 더이상 그녀의 눈빛을 확인할 수가 없다. 렌즈를 돌릴 수도 없다. 비트 입구를 가린 세 겹의 위장담요를 뚫고 밖으로 내놓은 렌즈의 포커스 링 위에 왼손을 올려둔 채 나는 숨을 죽이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뿌드득, 뿌드득, 눈을 밟으며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한 발, 두 발, 세 발, 이윽고 비트 입구에 멈췄다. 피가 얼어붙었다. 훅, 후-우욱, 렌즈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블러디 메리가 냄새를 맡았다. 예민한 포커스를 만지느라 장갑을 벗은 왼쪽 손등 위로 뜨뜻한 콧김이 훅 끼쳐왔다. 등골이 깨질 듯 경직되며 소름이 솟아올랐다. 콧김과 함께 그녀의 뻣뻣한 수염이 왼쪽 손등을 스쳤다. 렌즈를 꽉 움켜쥐었지만 손등의 살은 저 혼자 푸들푸들 떨렸다. 그 순간, 그녀의 앞발이 카메라 렌즈를 강력하게 후려쳤다. 렌즈가 틀어지고 마이크가 부러졌다. 딸려 나간 줌 케이블이 끊어지면서 드러난 구리선이 오른 손등을 베고 지나갔다. 섬뜩한 통증이 왔다. 크르르렁, 커헉, 형언할 수 없이 오싹한 소리와 함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됐다. 어미가 비트를 공격하자 새끼들이 몰려와 삽 같은 앞발로 비트를 위장한 관목과 덤불, 흙을 긁어내고 덧댄 판자를 뜯어냈다. 비트 귀퉁이마다 작은 구멍들이 뚫리고 그 사이로 코를 들이대며 냄새를 맡자 사방에서 호랑이 숨소리가 쏴악 쏴악 들려왔다.
 
그렇게 시작된 블러디 메리와의 만남은 그녀의 죽음을 목격하고 그녀의 핏줄인 월백, 설백, 천지백의 삶을 거쳐 월백의 새끼인 헨젤과 그레텔에게까지 이어졌다. 지금은 그레텔이 낳은 세 마리 새끼들을 관찰하고 있으니 블러디 메리의 윗대인 ‘꼬리’라는 호랑이까지 합치면 5대째 계속되고 있다. 열대지방 호랑이와 달리 평생 한번 보기도 힘든 시베리아호랑이를 오랜 기간 관찰한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인내와 끈기를 필요로 했지만, 사라져가는 그들의 애환을 이해하고 그들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영혼을 가지고 살아감을 깨닫게 되었다. 지난해 10월 미국 공영방송 PBS와 독일 테라마터(Terra Mater)사는 나와 블러디 메리의 이야기를 담은 책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2011년, 김영사)을 ‘시베리아호랑이를 추적하다’(Siberian Tiger Quest)라는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세계에 방영하기도 했다.
 
한반도의 백두대간은 만주의 장백산맥을 거쳐 우수리의 시호테알린 산맥으로 뻗어 올라간다. 시호테알린 산맥은 울창한 온대림으로 덮여 있어 지금도 시베리아호랑이, 조선표범, 스라소니 등 세계적으로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과거 호랑이를 비롯한 많은 생물들이 이 산맥에 잇닿은 장백산맥과 함경산맥을 타고 우리나라로 넘나들었다. 시베리아 수호랑이 한 마리가 돌아다니는 영역이 보통 벵골호랑이의 100배에 가까운 2000㎢(지리산 국립공원 넓이가 472㎢)라는 걸 고려하면 한반도 깊숙이 들어왔을 것이다. 지금은 북한과 만주에 대략 50여마리, 우수리에 350마리 정도가 서로 고립된 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우수리에 살아남은 350마리 정도의 시베리아호랑이가 그나마 그 개체수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어 유전적, 생태적으로 어느 정도 유효한 시베리아호랑이의 ‘종자(種子) 저수지’ 역할을 하고 있다. 
시베리아호랑이는 원래 만주에 살면 만주호랑이, 우수리에 살면 우수리호랑이, 한반도에 살면 한국호랑이라 불렀다. 모두 ‘Panthera tigris altaica’라는 학명을 가진, 같은 호랑이 아종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러시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역 기반인 아무르강을 따 아무르호랑이라 부르고, 중화민족은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동북(東北)호랑이라고 부른다. 시베리아호랑이라는 명칭도 서구 영어권에서 붙인 이름인데, 사실 이 호랑이들이 사는 지역이 시베리아가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 호랑이를 어떻게 부르든, 또 국경을 어떻게 나누든 이 호랑이들이 살아남아 백두대간과 장백산맥, 시호테알린 산맥을 활보하기를 바란다. 지구상에 400여마리밖에 남지 않은 시베리아호랑이는 우리 민족의 소중한 자연유산이다. 북한 사회과학원,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와 함께, 또 내가 독자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북한의 양강도 북부 6개군과 함경산맥에 15~20마리 정도의 시베리아호랑이가 살고 있다. 1996년 이래로 북한과 중국의 국경을 여러 차례 조사했는데 백두산 천지와 함경북도 무산군 사이에서 북한과 중국 장백지역을 넘나드는 호랑이의 흔적을 세번 목격했다. 최소한 세 혈통(패밀리) 이상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구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로 인한 사회혼란기 때 시베리아호랑이의 개체수가 절반으로 뚝 떨어진 적이 있다. 사회혼란기엔 사람이 힘들기 때문에 자연에 온정을 베풀 여유가 없다. 야생호랑이 한 마리를 잡아 팔면 팔자를 고칠 정도니 숲에 무인총이 깔리고 심지어 지뢰까지 깔렸었다. 북한에 살아남은 시베리아호랑이가 잘 보전되고 남북통일의 사회혼란기에 멸종되지 않는다면, 또 우수리 지역의 시베리아호랑이가 꾸준히 보호되어 시베리아호랑이의 종자 저수지 역할을 잘 해낼 수 있다면, 그래서 남북통일 이후 한국 호랑이의 보호, 복원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한반도의 백두대간에서도 호랑이가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 분야에서도 통일에 대비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 관계하는 모든 이들이 자신의 이익이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시베리아호랑이의 생명권을 위해 정성을 쏟아야 한다.
 
< 박수용/독립PD: 시베리아호랑이보전협회 공동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