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세상에 무명씨란 없다

● 칼럼 2011. 5. 30. 16:40 Posted by Zig
유명인들의 사진과 맛 소감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간이 맞지 않아 주인에게 말했더니 대답이 가관이다. “그거 현빈도 맛있다고 한 건데….” 그 말을 전하는 주인의 얼굴에는 의아함과 짜증이 역력하다. 폭발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유명인들의 취향과 내 입맛이 무슨 상관인가.
세상에 이름 없는 사람은 없을 터이니 무명씨는 유명인의 반대말쯤 될 것이다. 대한민국은 그 이분법적 인적 구성이 정점에 달한 사회다. 공인이란 개념도 지위에 걸맞은 책임과 권한에 의해서가 아니라 얼마나 유명하냐에 좌우될 정도다. 대중의 관심이 폭발적인 여고생 가수에게 공인의 책임의식을 강요하고 해병대를 자원한 인기 절정의 연예인은 사회지도층 인사로까지 격상된다. 그렇게 따지면 신창원도 공인이고 뽀로로도 사회지도층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 유명인과 무명씨의 관계는 병적일 정도로 비대칭적이고 비상식적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불편부당한 공생관계 같다. 무명씨들은 닥치고, 찬양하고, 복종하라는 구조다. 투명인간 취급한다.

로마의 귀족들은 노예가 있건 말건 그 앞에서 모든 일을 했다. 심지어 배설이나 섹스까지 거리낌없었다. 노예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짐승이나 투명인간 정도로 취급해서 그렇다.
세계적 핵물리학자가 피교육생 신분으로 앉아 있는 민방위 교육장에서 원전의 경제성과 안전성을 한치의 머뭇거림 없이 강요하는 강사에게 자신 앞에 앉아 있는 모든 이들은 무명씨다. 자기보다 생각이 짧고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 투명인간에 가깝다. 계몽질과 훈계질의 대상에 불과하다. 유명인으로 대변되는 권력자들은 무명씨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잘 알리기만 하면 흰 꽃도 까망 꽃으로 인식시킬 수 있다고 자신한다. 착각이다.
한 미국 영화에서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민간인 학살까지 서슴지 않는 상원의원은 정의와 진실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진실은 내가 정한다”며 코웃음 친다. 무명씨들을 투명인간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발언이다. 공정사회를 ‘공무원이 정하는 사회’로 재규정하는 시중의 우스개에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도 그래서다.
내가 누군가에게 무명씨로 취급받을 때 그 모욕감과 낭패감은 제어하기 어렵다. 종내엔 부당하고 억울하다는 느낌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투명인간이 아닌 한 시인의 절규처럼 ‘가슴이 못질을 알아본 날’들로 살아갈 수는 없다. 부당하고 억울한 감정은 사람을 분노케 하고 무릎 꺾이게 한다.
살아생전 작가들의 스승으로 추앙받던 한 소설가는 ‘이름 없는 들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따위의 표현을 엄하게 질책했다. 세상에 이름 없는 꽃은 없다는 것이다. 무지하거나 관심이 없어서 모를 뿐이라는 것이다. 사람에 이르면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무명씨의 개념이 아무렇지도 않게 통용되는 사회는 절대로 지속되기 어렵다. 유명인 정우성이 땀을 닦은 손수건엔 열광하고 무명인의 피눈물이 묻어 있는 손수건은 거들떠보지 않는 사회에서 제대로 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란 단언컨대, 없다.
데이비드 소로는 <시민불복종>에서 “우리는 시민이기 이전에 사람이어야 한다”고 했다. 시민이라는 역할 이전에 단독자로서 자신의 인간적 품위와 존엄을 지키는 게 더 우선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쌍용자동차 문제와 관련해 만난 몇몇 이들은 유명하지 않지만 내 가슴에 태산처럼 우뚝하다. 저 홀로, 인간의 품위와 존엄의 가치를 깨닫고 실천하는 사람들이라서 그럴 것이다. 그들을 단지 이름 없는 해고노동자, 가족, 자원봉사자, 치유자의 큰 테두리에서만 보면 절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봐야 안다. 주변의 다정한 이름을 열 명만 되뇌어보시라. 그 이름들이 모이면 결국 그것이 당신의 얼굴이다. 세상엔 단 하나의 무명씨도 존재할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소스라치게 깨닫게 될 것이다.

 < 이명수 마인드프리즘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