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암울한 일제강점기와 혼란기를 기도와 찬송의 힘으로 살아낸 분들 속에서 자랐다. “빈들에 마른 풀같이 메마른 나의 영혼, 주님이 허락한 성령 간절히 기다리네.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 생명 주옵소서” 그분들이 즐겨 부르신 찬송가다.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주권국가’에서 태어나 점점 좋아지기만 할 세상에서 살 것이라 믿었던 나/우리는 비틀스와 작년 노벨 평화상을 탄 밥 딜런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세계 평화를 구가했다. 꿈에 부풀어 문명개화, 민족 해방, 조국 근대화와 민주화를 이루는 역사의 시간에 몸을 맡기고 우울이라는 것을 모른 채 달려왔다. 역사가 개인을 배반하지 않은 진보의 시대를 말이다. 그런데 지금, 진리나 사실보다 감정이나 신념이 더 중요한 탈계몽의 ‘포스트-진실’ 시대를 맞아 곧잘 우울에 빠진다.


사회학자 김홍중은 최근 저서에서 대한민국 국민들이 앓고 있는 정치적 우울 현상을 ‘파상’의 개념으로 풀고 있다. 파상은 개인이나 집단을 사로잡고 있던 꿈이 깨지면서 삶의 근거가 부정되는 체험을 말한다. ‘세월호’라는 파국의 시간을 목격하고 마음이 부서지면서 그간 꿈꾸었던 세상의 붕괴를 참담하게 바라보게 되는 그런 체험 같은 것이다. 그는 섣부른 대안을 찾아 나서지 않고 파국 속에 던져지는 것, 현실의 고통과 비참을 마주하는 것, ‘무너지는 마음’을 바라볼 것을 당부한다. 그 무너짐의 과정이 도덕적 인지적 종교적 힘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 전환의 힘은 그간 사회를 지탱했던 꿈과 욕망 구조가 만들어낸 허상을 깨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


내게 광화문 광장의 촛불은 바로 이 파상의 경험을 공통적으로 하게 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을 사건이다. 그 광장에서 시민들은 그간 홀로 겪은 ‘파상’의 경험을 다른 시민들과 공유하며 도덕적 인지적 종교적 힘을 키울 수 있었다. 그리고 공론장에 대한 감을 회복하게 되었다. 광화문의 촛불 집회와 태극기 집회가 다른 점은 바로 이 점이며 이 둘이 힘겨루기 판이 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간 대통령 탄핵이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줄 것같이 달려왔지만 실은 긴 흐름의 단층일 뿐, 시간 자체를 바꾸어가는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모두가 서로에게서 떨어져 나가서 각자 자기에게 가장 고유한 피로 속으로 빠져드는 “피로사회”(한병철)의 시간, “역사를 불신하고 절망하게 만드는 감각을 생산하는 장치를 벗어난”(엄기호) 시간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긴다고 해도 또 다른 광야를 지날 준비를 해야 한다. 작은 오아시스 하나씩 만드는 거로 견디어진 지난 경험을 떠올리며 마음을 모으고 있다”는 광화문 청년의 말은 그래서 미덥다.


대선주자들은 “국민은 공짜를 원하지 않는다”거나 “과외 금지 국민투표”, ‘대연정’과 같은 단어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사회가 어떻게 무참하게 깨져나가는지를 통감하고 있을까? 개발독재 시대의 시간성에서 벗어나기나 한 걸까? 여론조사를 둘러싼 킹메이킹 놀이로 분주한 그들은 대한민국의 촛불 시민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어떤 나라보다 급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루어냈고 그렇기에 어느 나라보다 급속도로 추락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는 대단한 파상력을 가진 시민들이 아주 많다. 그들이 만들어낸 시대 용어와 유튜브 작업만 봐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정치 대연정은 시민정치가 꽃피는 곳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청년들이 팬클럽 멤버가 아니라 밴드를 만들고 신문사를 만들고 정당을 만들어 시민정치의 장을 활짝 열어갈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탄핵 정국에 자극을 받아 ‘제1회 부끄러운 동문상’이 대학별로 제정되고 있는 모양이다. 바야흐로 부끄러움을 아는 세상이 돌아오는 것일까? 짐작하건대 이 능동적 청년 국민들은 공짜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과 바람과 물과 흙을 포함한 공유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지구를 망치는 것에 대한 정당한 세금을 매기고 지구를 살릴 시간을 벌기 위한 시민배당을 청구할 것이다.
‘1인 1표 대의제’를 ‘1인 1주 시민배당제’로 보완하는 것은 붕괴하는 중산층을 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 정도는 대선 후보들이 기본으로 알고 시작하면 좋겠다.
다음 대통령은 파상력과 공론의 감각을 가진 사람이 당선되기를! 그렇지 않다 해도 언제든 탄핵할 수 있는 시민력을 충분히 키워가기를!

< 조한혜정 - 문화인류학자, 연세대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