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다음의 비유를 들어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관론자와 낙관론자와 현실주의자가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떻게 다른지를 터널에 빗대어 비유한 우화가 있는데요. 비관론자는 터널의 입구만을 보는 자입니다. 터널에 출구는 없고 입구만 있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두움으로 가득 차있는 곳, 소망이라고는 전혀 없는 곳으로 봅니다. 이것이 비관론자들이 삶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이와 반대로 낙관론자들은 터널의 출구를 봅니다. 터널이 제 아무리 길다 하더라도 출구가 반드시 있다는 것을 보며,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따라서 터널을 지나가는 동안 캄캄하기 때문에 넘어질 때도 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걸어가고, 결국에는 환한 빛이 기다리는 출구에 도착합니다.


분명 비관론보다는 낙관론이 삶을 바라보는 더 좋은 태도인 것은 사실입니다만, 문제는 낙관론도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전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일부분만을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부분은 현실주의자의 관점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가 되는데, 현실주의자들은 터널의 어느 부분을 볼까요? 입구와 출구를 모두 봅니다. 그리고 터널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수많은 터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또한 봅니다. 한 부분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보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인생에는 어두움의 입구로 들어서야 할 때가 있고, 그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을 환하게 볼 수 있는 형통함의 때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둘 다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터널 하나 통과했다고 해서, 고생 끝, 행복 영원이 아니며, 또한 그 반대로 행복은 순간이고 고생이 오래 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 역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모두 겪어보아서 아시겠지만, 이것이 우리네 인생살이이지 않습니까? 문제가 해결되어서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하였는데, 그렇게 좋은 때가 제법 오래 갈 때도 있지만 금세 지나가버리고 또 다른 문제 앞에 고통스러워하고 신음하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잖아요. 그리고 반대의 경우, 앞이 막막하고 고생만 죽어라 할 줄 알았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행운이 찾아올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결국, 인생이란 전화위복이 되는 때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전복위화’가 될 때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인생, 특별히 신앙생활을 비관적으로 바라봐서도 안되고 무조건적인 낙관론에 사로잡혀 있어서도 안됩니다. 그 대신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상황이 아닙니다. 상황을 바라보게 되면 터널의 입구를 막 통과했을 경우 낙심하거나 두려워하게 될 것이고, 출구를 막 빠져 나왔을 경우에는 긴장을 풀어버리고 기고만장해지기 쉬울 거에요. 하지만, 인생 전체의 그림을 보게 되면, 순간순간의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겠지요.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상황과 여건이 어떠하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우리 힘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혀 있어야 하고, 성령께서 우리 속 사람을 강건케 해주셔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관점으로 삶을 바라보느냐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요. 우리의 삶이 형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든,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든, 모두들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어차피 지나가는 시간, 그렇다면 상황에 따라 마음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우리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믿으며 그런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멋진 인생이고 행복한 인생이지 않을까요?

< 송만빈 목사 - 노스욕 한인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