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봄을 기다리는 마음

● 칼럼 2017. 11. 29. 12:37 Posted by SisaHan

잠깐 반짝했던 날씨가 다시 비구름을 몰고 왔다. 짙게 드리운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열리기를 기대하지만 조만간 그럴 기색은 없어 보인다. 가을도 그렇다고 겨울도 아닌 애매한 십일월, 모호한 계절답게 눈, 비, 진눈개비를 연일 뿌리니 세상이 온통 회색빛으로 출렁이는 듯하다. 때문인지 기쁜 소식보다 신경 쓰이는 일이 더 많은 요즘 며늘아기 미나가 근심거리 하나를 더 보탠다. 다름 아닌 자신이 보살피고 있던 아이들을 몇 주째 만날 수 없다며 불안해 한다. 부모들의 끊임없는 불화로 인해 마음의 병이 깊었던 아이들이 조금씩 좋아져 간다는 소식이 있었는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건 아닐까 염려스럽다.

매주 수요일 오전이면 미나는 동네 카페에서 제시카, 캐런 자매에게 그림을 가르치며 그들의 카운슬러 역할을 한다. 부모의 불화로 힘겨운 유년기를 보낸 아이들이 사고사로 엄마까지 잃어 이모 슬하에서 자라고 있다. 아직 십대인 이들은 마음의 문을 굳게 닫은 채 학교마저 거부하니 가족들은 물론 마을 전체의 걱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 날 자매의 딱한 사연이 우리 가족에게 전해졌고 아들 내외가 선뜻 이들 곁으로 다가갔다. 외부 사람들을 극도로 경계하던 아이들이 다행히 거부감 없이 아들내외의 뜻을 받아들였고 서로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며 소통을 시작했다.
수업을 시작한 지 몇 주 지난 어느 날, 미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사진으로 보여주었다. 사진을 넘길 때 마다 검정 싸인 펜으로 그린 온갖 무서운 형상들이 스케치북에서 난무하고 있었다. 십대들이 그렸다고 하기엔 믿기지 않는 출중한 실력이었지만 그들의 내면은 우리가 상상한 것 보다 더한 암흑 속에 있는 듯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부모들이 다투는 살얼음판 같은 환경도 모자라 어미까지 잃었으니 아이들의 탈출구는 오로지 그림 그리기가 아니었나 싶다. 두려움, 불안함, 무서움 등 매 순간 느꼈을 아이들의 심리 상태가 고스란히 스며있는 아픈 그림에서 벗어날 때는 언제쯤일까. 한창 맑은 기운으로 충만 해야 할 꿈나무들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어두운 요소들을 어떻게 와해 시켜야 할 지, 긴 세월 인내와 사랑으로 보살펴야 할 듯싶었다.

수업이 거듭될수록 미나의 시름이 깊어져갔다. 아이들의 생김새나 성품은 넉넉한 부모의 사랑 속에서 자란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 없으나 속으론 그렇지 않으니 더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다양한 교재 준비와 갖은 지혜를 짜내어 수업에 임하는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고 열성적이었다. 열과 성을 다해 꾸준히 노력한 결과 마음을 조금씩 열기도 하고 그림도 미미하게나마 순화되어 간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비록 더디긴 해도 가능성이 엿보여 열렬히 응원하고 있었는데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니 안타까웠다.

착잡한 마음으로 겨울 색이 완연한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그토록 선망했던 고적하고 한가로운 강마을엔 내 발자국 소리만 또박또박 들릴 뿐이다. 사람 사는 마을이 이토록 조용해도 되는 걸까. 가끔은 싸우는 소리도, 아이 우는 소리도, 하다못해 개 짖는 소리라도 들려야지. 나무 타는 냄새 사이로 아들의 푸념이 들려왔다.
‘엄마, 이 동네 아이들은 꿈이 없어요.’ 평소 청소년들과 수시 대화하며 그들의 안목을 넓혀주려 애써보다 지치면 하는 말이다. ‘꿈이 없는 청소년’, 서글픈 일이다. 허황된 꿈일지라도 자주 꾸다보면 목표도 생기고 의욕도 뒤 따를 텐데, 제한된 생활환경이 그들을 무력하게 하는가 보다.

한동안 소식이 없었던 제시카, 캐런 자매는 평소 앓아왔던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 신세를 졌다는 소식이 왔다. 켜켜이 앉은 마음의 상처가 이젠 떠나야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모양이다. 앞으로 그들에겐 아픔에 대한 치유 못지않게 꿈과 희망도 함께 심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긴 겨울 지나 봄이 오면 건강한 모습으로 등하교 하는 자매들을 떠올리며 찬바람 부는 저녁 심란한 마음을 잠재운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