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기다림의 끝

● 칼럼 2017. 12. 13. 13:39 Posted by SisaHan

식품점에서 특가로 판매하는 자반고등어를 마주하니 퍼뜩 지난 여름이 떠오른다. 퀘벡주가 자랑하는 아름다운 관광지의 하나인 가스페 반도는 한번쯤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장거리 운전에 대한 부담으로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지난 7월 초에 그곳을 다녀올 기회가 생겼다.
순전히 낚시에 조예가 깊은 문우(文友) 남편 C씨의 배려로 시작하여 세 부부가 일단 날짜를 정하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리스트를 적어가며 조목조목 준비를 시작하였다. 특히 남편들은 고등어 낚시에 관심을 갖고 있어 각 집마다 바다 낚시 도구와 잡은 고등어를 집까지 가져올 아이스 박스(2개)와 플라스틱 용기(20개)까지 철저하게 준비하여 짐은 산더미처럼 늘어나 차 안의 좌석조차 불편할 정도였다. 그래도 자반 고등어를 선물로 받고 행복한 미소를 지을 친지들을 그려보면서 9박10일간의 먼 노정은 야무진 꿈으로 활기가 넘쳐흘렀다

퀘벡 주 세인트 로렌스 만을 끼고 북쪽 해안선을 따라 협곡을 돌 때마다 만나는 빼어난 풍경은 탄성이 절로 나왔다. 숲을 가득 채운 녹색의 활엽수와 소나무의 신비한 조화, 수평선이 보이지 않고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옥색의 망망한 바다, 물밀듯이 밀려왔다 흰 거품을 남기고 훌쩍 돌아서는 거센 파도, 바다를 배경으로 우뚝 솟은 교회의 철탑과 방금 페인트를 마친 듯 아담하고 예쁜 마을정경에 매혹되고도 남았다. 온 몸과 마음에 가득 담긴 바다의 강렬한 남빛으로 인해 오가는 내내 평안에 푹 빠져 대화마저 필요 없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가스페 반도의 유명한 관광지인 페르세 (Perce)에서 7일간을 머물렀다. 마침 우리가 숙박한 아담한 캐빈에서는 이 고장의 명물인 코끼리 모형을 닮은 페르세 바위(Perce Rock) 전면을 바라볼 수 있는 행운도 잡았다. 바다 위에서 장엄하게 떠오르는 해돋이와 훌쩍 사라지는 해넘이도 충분히 구경할 수 있는 좋은 위치였으나 여독에 지친 우리는 번번이 기회를 놓쳐 아쉬움을 남겼다. 캐빈과 모터홈이 즐비한 샛길을 따라 산책을 하거나 바다가 정면으로 내려다보이는 동산에 앉아 동심으로 돌아간 우리의 대화는 나날이 깊어만 갔다. 60여 년 살아온 세월을 더듬기도 하고 앞으로 살아갈 날에 대한 번뜩이는 혜안을 서로 나누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선명한 색채로 남아 내 영혼이 파도 칠 때마다 한번쯤 돌아보고 싶은 정다운 곳이 되었다.

낚시는 기다림이다. 고등어 떼를 기다리고 배를 띄우기에 안전하고 쾌적한 날씨를 기다려야만 했다.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산티아고 노인이 대어(大魚)를 낚기 위해 84일간을 기다렸듯이 우리도 5일간을 무료하게 기다렸는데, 무지개 빛 희망 하나만으로 버텨낼 수 있었다. 유독 변화가 심한 금년의 날씨 탓인지 시간은 흘러가는데 고등어는 전혀 얼굴을 내밀지 않아 우리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아내들은 가벼운 자유와 대화의 즐거움에 만족했지만 남편들은 달랐다. 바다는 연일 그들의 속타는 심정도 모른 채 안개만 자욱해서 앞이 분별 안되거나, 강한 바람이 만든 거센 파도로 배를 띄우지도 못하고, 기온이 내려가 고기잡이에 적절치 못한 날들만 계속되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여러 날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돌아오기 전날에서야 최적의 날씨를 만났으나, 우리의 철저한 준비가 일을 그르쳤는지 고등어는 도통 물리질 않았다. 그런 중에도 경력 있는 낚시꾼은 알아보는지 간간히 우리의 선장인 C씨의 낚시대만 흔들렸고, 여러 번 허탕 끝에 잠시나마 고등어를 낚는 희열을 모두 맛보게 된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겨우 두 번의 수확은 계획했던 것에 비해 형편없이 초라해서 그간 소요한 경비와 시간을 계산하면 야무진 꿈은 무참하게 부서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예상했던 낚시 시즌이 빗나간 결과이니 누구를 탓하랴. 그러고 보니 우리들이 삶 속에서 때를 놓치고 뒷북 친 일이 어찌 이번 한번뿐인가 싶다.

여행은 목적 자체보다 누구와 동행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우리 역시 함께 간 세 부부들이 서로를 알아가고, 기다리며 인내를 배우고, 무슨 일이든 함께 헤쳐나갈 수 있는 끈끈한 동지애로 뭉쳤으니, 이것이 이번 여행의 큰 결실이다. 더군다나 보트까지 매달고 자동차 두 대가 안전운행을 할 수 있었으니 어찌 70대 남편들을 노년이라 치부만 할 수 있으리. 비록 고등어를 향한 일시적 꿈은 사라졌다 해도 그들은 이 여행으로 말미암아 아직도 젊음의 활기와 자신감을 되찾은 듯 하다.
<노인과 바다>에 남긴 헤밍웨이의 명언으로 마음을 달랜다.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하는 일에 있지 않고 하고자 노력하는데 있다”.

< 원옥재 -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