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범국민위)가 ‘제주 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라는 릴레이 캠페인을 지난달부터 펼치고 있다. 올해 제주4·3 70주년을 계기로 삼은 이 캠페인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란 말이 언뜻 국가주의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4·3 피해자 다수가 국가폭력에 희생된 것을 고려하면, ‘대한민국’이란 국가를 강조하는 게 이치에 맞느냐는 의문이 들었다.


또 제주도가 분리 독립한 ‘탐라국’도 아니고 엄연히 대한민국 땅이다. 따라서 제주4·3은 당연히 대한민국 역사의 일부다. 범국민위는 이 당연한 이야기를 왜 강조하는 것일까?
범국민위는 4·3이 대한민국의 역사로 온전히 자리 잡지 못한 현실을 드러내는 역설적 표현이라고 설명한다. 4·3은 ‘제주만의 역사’로 갇혀 있다. 상당수 국민들은 4·3에 대해 모르거나 관심이 없다.
지난해 11월 제주4·3평화재단이 국민 1천명을 조사했더니, 응답자의 3분의 1은 4·3이 무슨 일인지조차 몰랐다. ‘4·3을 알고 있다’고 응답한 68.1%를 대상으로 4·3 발생 시기(1948년)를 물었더니, 한국전쟁(1950~1953년) 후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49%였다. 28.3%만이 한국전쟁 전이라고 정확하게 답했다. 또 국민(제주 제외) 인식조사에서, 4·3에 대해 ‘관심 없다’(50.2%)는 답변이 절반을 넘었다.


70년 동안 4·3은 침묵, 금기, 왜곡에 포위됐다. 희생자를 추모하는 울음마저 죄가 됐다. 1954년 1월23일 ‘아이고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날 4·3 때 600명 이상이 희생된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마을 사람들이 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여, 군대에서 숨진 이 마을 청년의 장례절차를 밟고 있었다. 한 주민이 “오늘은 6년 전 마을이 불탄 날이고 억울한 죽음을 당한 6주년 기념일이니 당시 희생된 영혼을 위해 묵념하자”고 제안했다. 설움에 복받친 주민들이 “아이고아이고”라고 대성통곡을 했다. 이 일로 경찰에 불려간 주민들은 ‘다시는 집단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80년대 군사독재 시절까지 4·3에는 ‘빨갱이 폭동’이란 딱지가 붙었다. 소설가 현기영 선생은 지난달 범국민위가 연 4·3 70주년 기념행사 보고대회에서 “대한민국의 역사는 기득권, 서울의 역사로, 민중의 역사가 없었고 3만명 대학살이 벌어진 제주4·3의 역사는 부정되고 외면당해왔다”고 말했다. 현 선생은 ‘제주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라는 캠페인 구호에 대해 “이제 제주4·3도, 민중의 역사도 인정해달라는 것”이라며 “제주4·3이 제주만의 역사가 아니기에 분단과 해방공간에서 벌어진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고 기억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런 설명을 들으니 제주 여행 때 들렀던 4·3 유적지에 어김없이 걸려 있던 태극기가 기억났다. 서귀포시 성산읍 터진목 학살터, 서귀포시 대정읍 섯알오름 4·3 유적지 등의 국기게양대에는 깃봉에서 내려진 태극기 조기가 있었다. 당시에는 ‘유족들이 돈을 모아 세운 희생자 추모시설에 태극기는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다시 생각해보니 이 태극기들이 70년간의 왜곡·편견, 무지·무관심에 맞서 ‘제주4·3이 대한민국의 역사’임을 알리고 명예회복을 외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아닐까 싶다.
‘제주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4·3의 전국화, 세계화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 권혁철 - 한겨레신문, 사회2 에디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