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입여는 5.18 여성들
“반인도적 범죄로 수사, 처벌해야”

38주년을 맞는 5.18 당시 여성들이 당한 고초들, 고문과 집단 성폭행을 포함한 반인도적 국가폭력의 실체가 이제야 드러나고 있다. “설마 국군이 그런 짓까지야”라는 의구심과, 여성과 가정의 치욕을 숨기려한 사회분위기 등으로 덮여온 범죄들이 ‘#미투(Me Too)운동’ 등에 힘입어 추악한 베일을 벗기 시작했다.
5·18 때 여성들은 가두방송을 하고, 주먹밥을 만들고, 도청 앞 상무관에서 희생된 주검에 염을 하면서 항쟁에 참여했다. 광주시의 5·18 민주화운동 보상 집계를 보면, 5·18 유공자로 보상을 신청해 인정받은 5천767명 가운데 여성이 300명(5.2%)이다. 5·18 당시 여성 사망 인정자는 2명이고, 다쳐서 상이 후 사망자로 인정된 이는 8명이다. 하지만 5·18 여성들이 당한 성적 수치심 등 항쟁과 수사 과정에서의 잔혹 행위는 아직껏 역사 기록으로도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향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꼭 밝혀 책임자를 가리고 처벌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북 모란봉에서 2년간 교육받고 온 여간첩 ‘모란꽃’이 바로 너라고 하더라구요.” 5·18 가두방송의 주인공 전춘심(68·경기도)씨는 “수사관들이 나를 간첩으로 몰기 위해 잔혹하게 고문했던” 38년 전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는 1980년 5월19일 “군인이 시민들을 개 패듯 때린다”는 소식에 분노해 시내를 돌며 차를 타고 가두방송을 하다가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 505보안대로 끌려갔다.
그는 다짜고짜 개머리판으로 이마를 맞아 피가 흘렀다. “손가락 사이마다 볼펜을 끼워 넣고 두 손으로 쥐어뿔고….” 전씨는 “곤봉으로 나의 ‘여성’(성기) 쪽을 막 (때리며) ‘니가 처녀냐?’고 했다”는 증언을 하다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보안대의 협박을 받은 전씨의 가족은 “간첩도 자수하면 살려준다고 하니까 솔직하게 이야기해버리라”고 했다. “나는 경찰관 가족이고, 간첩이 아니라고 이야기해도 들어주지 않았어요.”


광산경찰서 이송 뒤 매일같이 하혈을 해 인근 병원에서 보름간 치료를 받다 국군통합병원에 이감됐다. 15년형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에서도 독방에 수감됐다. “하혈을 하고 저녁이면 공포에 떨고,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1981년 4월 사면돼 출감한 뒤에도 ‘간첩’이라는 시선을 견디며 실어증에 걸리기도 했다. “어쩔 때는 땅이 푹 꺼진 것 같고. 꿈을 꾸면 자주 쫓겨가요. (다리 마비 증상으로) 걸음을 5분 이상 걷질 못해요. 밤중에 (나도 모르게 걸어나가) 남의 집 문을 두드린 적도 있어요.” 전씨는 신경정신과 병원에 딱 한번 갔지만 치료는 받지 않았다. (엄마가 정신과 병원에 다니면) 4남매 자녀들의 장래에 해가 될까 두려웠다.
5·18 가두방송의 또 다른 주인공 차명숙(59)씨도 최근 기자회견을 통해 “보안대에서 고문을 받고 광주교도소에서 징벌방에 갇혀 30일 동안 ‘혁시갑’을 차고 짐승처럼 지냈다”며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이성순(59)씨도 여전히 후유증을 안고 산다. 그는 5월21일께 광주시 서구 화정동 아파트 거실에서 학생들을 쫓던 공수부대가 쏜 M16 유탄에 맞고 정신을 잃어 국군통합병원에서 10일 만에 깨어났다. 보안대 수사관들은 휠체어를 탄 이씨를 병원 지하실로 끌고 가 취조했다. “‘누구 지시를 받고 데모했느냐’고 물으며 머리와 어깨 등을 각목으로 마구 때렸어요. ‘나는 폭도’라고 자술서를 쓰라고 했고요.” 지금도 납탄 파편이 무수히 박힌 그의 온몸엔 ‘저승꽃’(검버섯)처럼 얼룩이 남아 있다.


당시 계엄군이 여성들만을 집단 납치해 성폭행했다는 구술 자료도 확인됐다. 증언자는 당시 군인들에게 납치돼 집단 성폭행을 당한 뒤 승려가 된 ㅇ씨다. 이는 항쟁 당시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이 군에 의해 집단적으로, 상습적으로 벌어졌을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 2000년 ‘5·18기념재단’이 5·18 생존자들을 직접 만나 기록한 구술 자료집을 보면, 당시 여고생이었던 ㅇ씨의 증언이 실려 있다. ㅇ씨는 1980년 5월19일 계엄군인들에게 성폭행을 당했을 때 “다른 사람들 서이(셋) 있었는데 그들은 아줌마 같애”라고 말했다. 계엄군에게 끌려가 성폭행당한 여성이 3명 더 있었다는 이야기다. 성폭행 피해가 단발성 사건이 아님을 보여주는 증언이다. ㅇ씨의 증언은 계엄군의 여성 납치와 성폭행 정황이 잘 드러난다. ㅇ씨는 “(광주시) 유동에선가 어디서 잡혔는디, 집에 갈려다, 맞아 갖고 차에 끌려갔어요. 살려달라고 막 난리가 아니제”라고 기억했다. 당시 이들을 납치하고 성폭행했던 계엄군은 계획적으로 범죄를 저질렀을 가능성도 있다. 군인들이 여성들만 납치했기 때문이다. 그는 원래 처음부터 여자들만 태웠다고 증언했다.


가족들에 의해 불임수술까지 받았던 ㅇ씨는 두 차례나 자살을 기도했다. 혼자 웃어대거나 동네 사람들에게 욕설을 하기도 하는 등 불안 공포증을 보이다 점차 상태가 악화돼 집을 나가 행방불명이 되기도 했던 ㅇ양은 1987년 3개월여 동안 나주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그 뒤 ㅇ씨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번에 승려가 됐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5·18 민주유공자 김선옥(60)씨는 “얼마 전에 여검사가 미투를 해서 38년 만에 나도 용기를 냈다”며 그동안 묻어뒀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5·18 당시 그는 전남대 음악교육과 4학년으로, 책을 사러 나갔다가 시위에 휩쓸려 학생수습위원으로 도청에서 항쟁을 도왔다. 항쟁 종결 후 교생실습을 나갔던 김씨는 그해 7월3일 학교에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수사관들에게 옛 상무대 영창으로 연행됐다. 공포의 시작이었다. “처음엔 막 들어가자마자 발로 지겨불고(짓누르고) 엄청나게 때리더라고요. 여기 이마가 폭 들어간 데가 있는데 그때 책상 모서리에 찧어서 그래요. 피가 철철 나면서 정신없이 맞았어요.” 폭행과 고문으로 점철된 조사 끝에 9월4일 소령 계급을 달고 계장으로 불리던 수사관이 김씨를 데리고 나가 비빔밥 한 그릇을 사주더니 인근 여관으로 끌고가 대낮에 성폭행했다. “죽도록 두들겨 맞았던 일보다도 저항하지 못하고 당했다는 사실 때문에 비참했어요. 자존심과 말할 수 없는 수치감….” 꼬박 65일 동안 구금됐던 그는 기소유예로 풀려난 뒤 자살시도와 암 투병 등으로 인고의 삶을 살아오며 5·18의 ‘5’ 자도 꺼내지 않고 숨어 살았다고 했다.


여성·인권 단체들은 5·18 당시 국군이 여성들에게 저질렀던 이들 사건을 단순 성폭력이 아니라 국가폭력으로 규정하고 진상조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당시 군인들의 학살과 폭력은 전쟁범죄와도 같았다. 5월22일 광주시내에서 시위대는 온몸이 두부처럼 짓이겨지고 가슴이 잘린 여성 시신을 발견했다. 사망자는 당시 19살이었던 ㅅ씨였다. 1980년 6월20일 광주지검 공안과에서 작성한 검시 조서는 “ㅅ씨가 가슴이 날카로운 것에 찔린 ‘좌유방부 자창’에 골반부와 대퇴부에 여러 발의 총탄이 관통했다”고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계엄군은 대검으로 ㅅ씨의 젖가슴을 찔렀고, 실신했거나 죽은 상태에서 성기 쪽에 집중적 총격을 가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여성 가슴과 성기를 난자하는 행위 등은 전쟁 때 진압군이 피지배 여성들의 전의를 꺾기 위한 전형적 ‘과시적 성폭력’으로 분석된다. 안진 전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5·18 때 여성에 대한 공격이 더 잔혹했던 이유는 시민들에게 공포를 조성하기 위해 더 효과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가 2005년 집계한 통계를 보면, 항쟁 관련 사망자는 모두 606명으로, 이 가운데 165명은 항쟁 당시 숨졌다. 당시 숨진 165명 중 여성은 13명이다. 165명 중 129명은 총상, 9명은 자상, 17명은 타박상으로 희생됐다.


5·18 당시 성폭력에 대해 김희송 전남대 교수는 “진상 규명을 철저히 해야 역사적 심판이 이뤄져 비극이 반복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군인들의 성폭력을 ‘인도에 반하는 범죄’라는 시각에서 다뤄야 한다는 강조도 한다. 박경규 경북대 연구교수는 “군대가 총기를 이용해 체계적이고 광범위하게 민간인을 학살한 행위와 그 와중에 발생한 여성에 대한 성폭행은 ‘인도에 반하는 범죄’에 해당된다”며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이런 범죄는 아예 공소시효 자체가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기소해 처벌할 수 있다”고 밝혔다.

< 안광옥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