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92)씨가 별세했다. 전 국무총리, 9선 국회의원, 당 총재 등 다양한 이력을 지녔지만 그의 이름을 딴 ‘제이피’(JP)가 익숙하다.
그가 떠나면서 디제이(DJ) 김대중, 와이에스(YS) 김영삼 전 대통령과 더불어 구가했던 ‘3김 시대’도 막을 내렸다. 두 김은 권력 꼭대기에 올랐지만 제이피만은 끝내 이인자에 머물렀다.
그의 죽음은 충청에선 더욱 각별하다. 권력 언저리에 머문 풍운아, 영원한 이인자로 불렸지만, 적어도 충청에서 그는 언제나 일인자였다. 충청에서 나고 자란 지연 끄나풀에 기인하지만, 우리도 대권을 한번 잡아야 한다는 충청의 막연한 기대감은 일찌감치 그에게 절대지존이란 훈장을 수여했다. 이른바 ‘충청 대망’이란 암묵적 합의였다.


영호남 패권의 틈바구니에서 눈치를 보던 충청은 ‘대권 허기’를 ‘충청 대망론’이란 허상으로 달랬다. 허기는 선거 때 더했다. 이를 유효적절하게 이용한 이가 제이피였다. 영호남은 물론 수도권에도 없는 ‘대망’이란 똬리는 선거 때마다 충청 표를 모았다. 표 냄새를 맡고, 표를 모으는 데 동물적 감각을 지닌 그는 때마다 충청을 자극했고, 대망에 배고픈 충청은 당하는 줄도 모르고 표를 내줬다. 권력을 좇은 합당·야합 등으로 대권 기대는 번번이 물거품이 됐지만 “그나마 제이피가 인물이여”라는 자조는 반발을 눌렀다.
‘충청도 핫바지론’이 정점을 찍었다. “경상도 사람들이 충청도를 핫바지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아무렇게나 취급해도 아무 말 없는 사람, 소견이나 오기조차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다.”(1995년 민선 1기 지방선거 천안역 유세에서)


이 말은 충청 표심을 결집했고, 그가 만든 자유민주연합이 충남의 기초·광역 단체장을 싹쓸이하는 등 충청에서 ‘자민련 광풍’을 일으켰다. 이듬해 열린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분위기를 이어갔다. 대전·충남 선거구 20곳 가운데 19석을 석권하는 등 충청은 자민련 공화국이 됐다. 뒷날 ‘충청도 핫바지’는 본말이 바뀐 그의 정치적 수사였다는 것이 알려졌지만 그의 정치 순발력은 두고두고 회자됐다.
노골적으로 지역감정을 부추겨 표를 긁어모았지만 충청에선 “우리 자존심을 지킨 건 제이피”라며 그를 두둔했고, 적어도 이곳에선 상식처럼 통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표를 챙긴 이들은 충청권 안에 머무른 채 확장하지 못했다. 영호남 패권의 중간 지대를 차지했을 뿐 핫바지가 아니라는 것을 정책으로 증명하지도, 대안 세력이 되지도 못했다. 선거 때마다 나타났지만 충청의 꿈을 지피지 못하는 도깨비불 같았다. 결국 그와 함께 자민련이라는 정당도 역사 속으로 사그라졌다. 자민련 사후 충청은 그나마 전국 민심의 척도라는 자리를 찾았지만 상실·낭패감은 컸다.


그가 정계를 떠난 뒤에도 무수한 정객들이 충청 대망이란 허깨비를 좇아 기웃거리다 결국 기진했다. 이른바 ‘포스트 제이피’였다. 충청에 뿌리를 둔 야심들은 부나비처럼 제이피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이회창 전 총리, 이인제 전 의원이 그랬다. 지난 대선 때는 반기문씨가 뒤를 이었다. 대선 유력 후보로 떠오른 2016년 5월 유엔 사무총장 신분으로 제이피의 집을 찾아 비밀 얘기를 나눴다. 사실상 정치 행보였다. 이 무렵 안희정 전 충남지사도 제이피의 마음을 얻으려 애썼다는 후문이다.
공교롭게 이들 모두 대권 시야에서 사라졌다. 제이피도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했다. 이제 지역주의에 기댄 ‘충청도 핫바지론’, 허상을 좇는 ‘충청 대망론’도 영면하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한다.

< 오윤주 - 한겨레신문 충청 강원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