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글마당] 낚시

● 교회소식 2015. 8. 28. 13:29 Posted by SisaHan

자의반, 타의반으로 올해들어 낚시를 자주 다녀왔습니다. 낚시를 하다보니 낚시에서도 느끼는 점이 많이 있습니다.
보통 “몇마리 잡았어요?”하고 묻습니다. 마리 수에 따라 “와!”, 아니면 “애걔!”라는 대꾸를 하십니다. 그러나 마리 수와 관계없이 수없이 여러 번 미끼를 갈아 끼우고 던지기를 반복하였기에, 그 열정(?)은 칭찬 받을만한 것 입니다. 놓친 물고기가 크다고 하는데, 정말 대부분 놓친 고기가 클 확률도 높습니다. 고기가 커서 몸부림 치는 과정에서 놓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드넓은 호수에 낚시 하나 던져 놓고, 거기에 물고기가 걸려들기를 원하는 낚시꾼의 마음이 허황돼 보이기도 합니다. 곧은 낚싯바늘을 강물에 던져놓고 하염없이 기다렸다는, 세월을 낚는 강태공은 누구나 다 아시는 인물입니다. 강태공 만큼은 아니지만 낚시는 기다림 입니다. 그리고 물고기가 낚싯바늘에 달린 미끼를 먹을 때의 챤스를 놓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어쩌면 얄팍한 인간의 마음 같기도 하지만, 배울 점과 느끼는 감정은 참 많습니다.
낚시를 하기 위해서 준비해야 하는 것도 참으로 많습니다. 어떤 고기를 잡을 것인가에 따라서, 낚싯대를 골라야 합니다. 낚싯줄도 그 굵기가 수없이 많고, 낚싯바늘도 크기가 아주 다양합니다. 미끼의 종류도 수 없이 많습니다. 혹시 모를 사고를 예방하려면, 상비약도 챙겨야 하고, 음식과 빈봉투까지 챙겨야 할 것들이 수 없이 많습니다. 낚시터에서는 몫이 좋은 곳이 따로 있습니다. 장소와, 때도 중요 합니다. 세상에 절대 공짜는 없습니다. 노력과 정성을 다 하지 못하고 수고의 대가를 바라는 것은 잘못입니다.


낚시에서 인생을 배웁니다. 낚시를 하면서 어부의 마음도 읽게 됩니다. 생선은 우리가 기르는 것이 아니요 창조주께서 기르십니다. 스스로 자라는 생물을 노력과 기술과 정성을 합하여 취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부들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배드로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 하셨으니, 예수님께서 이미 낚시에 도통(?) 하신 것 같습니다. 물고기와의 밀고 당기는 씨름은 경력에 따라 더욱 숙달되게 됩니다. 낚싯대를 잡고 있는 손으로 전해 오는 감각으로 물고기가 크다, 작다를 판단합니다. 너무 큰 고기는 억지로 끌어 올릴 수 없습니다. 낚싯줄이 끊기기 때문입니다. 줄을 풀어주기도 하며 살살 달래어서 끌어 와야 합니다. 다 잡았다고 방심하는 순간 뜰채 바로 앞에서 줄을 끊고 도망가기도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모든 과정을 너무나도 잘 아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어부들을 제자로 삼으셨던 것 같습니다. 우리네 인생살이도 이제와서 돌이켜 보면, 서툴렀고, 준비가 완전하지 못하였고, 때와 장소를 구분하기에 서툴렀습니다. 끈기와 인내도 부족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어둠을 뚫고 낚시터에 도착하면 동이 틉니다. 그러면 좋은 몫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아침의 고요함과 떠오르는 여명의 아침은, 은혜로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공짜입니다. 수 없이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 왔습니다만, 차마 아버지의 귀한 선물을 사진에 담기엔 역부족 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공짜로 주셨지만, 수고와 노력이 없다면, 부지런하지 못하다면, 은혜로 주신 선물들을 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다면, 그 은혜에 감동을 받았다면 기쁜 소식을 이웃에게 전해야겠습니다. 여기에도 낚시의 이론이 성립됩니다. 끈기, 인내, 때와 장소, 부지런함과 정성, 그리고 방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 입니다. 요즘, 아내가 낚시의 맛을 알아버렸습니다. 함께하니 기쁨이 열 배 입니다.

< 정훈태 - 동산교회 장로 >



구약 성경 요나서에는 박넝쿨의 이야기가 있다.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니느웨 성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였으나 그는 민족 선지자로 차마 갈 수가 없었다. 그는 적진 나라가 잘되는 것이 자신의 나라에 불리하다는 편협한 생각에 다시스로 도망을 간다. 가는 도중 풍랑을 만나게 되며 제비를 뽑아 결국 바다에 던짐을 받았으나 하나님은 큰 고기를 준비하여 그로 하여금 회개하고 다시금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복음을 들은 왕은 온 백성과 짐승으로 하여금 베웃을 입고 회개하므로 요나는 기뻐하기 보다는 자신의 나라의 불이익을 생각하며 나라가 망하기를 박넝쿨 아래에서 기다린다. 그러나 햇빛으로 인하여 박넝쿨이 시들게 되므로 뜨거운 태양 아래서 불평을 할 때에 하나님은 네가 심지않은 박넝쿨도 사랑하는데 하물며 온 백성을 아끼는 것이 합당치 않느냐고 반문하신다.


나는 지난해 뒷마당에 호박 씨앗을 심고 물을 주어 잘 자란 아름다운 토종 호박 몇 덩어리를 추수 감사절에 하나님의 전에 감사 예물로 드렸다. 열매가 얼마나 큰지 모두가 호박 농사를 잘 지었다고 칭찬을 들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은 호박 넝쿨이 담을 타고 열매가 열렸을 때에 잘 크도록 받침대를 놓아두었더니 얼마나 더 크게 잘 자라는지…. 올해는 그냥 담 주변에 줄을 쳐 주었는데 호박 넝쿨은 신기하게도 줄을 따라 나날이 뻗어가며 주렁주렁 열렸다. 그런데 호박이 작년만큼 크지는 않는 것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더 클 수 있는 받침대가 없었던 것이다. 미물인 채소도 자신의 넝쿨에 비례해 어느 정도 계산을 해서 열매인 호박을 키운다는 사실이다, 호박이 넝쿨에 비해 너무 크면 모든 줄기가 다 끊어지지 않겠는가. 하찮은 호박도 열매를 계산하여 그 크기를 조절하는 것 같아 신비로움을 새삼 느꼈다. 그렇다고 거름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이 했다고 생각하면서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 보았다. 하지만 올해는 호박 크기가 작았다.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엣 선조들이 지붕에 올라간 호박이나 박에 받침대를 해준 이유를 그제야 알아채고 놀란다. 더 크게 결실하도록 손을 쓴, 식물인 호박의 습성을 잘 아는 참 지혜였음을 깨닫게 해준다. 농부가 식물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소출이 좌우되므로 생각과 태도가 정말 중요하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이런 말이 생각난다. ‘밭에 있는 곡식은 농부의 발자국을 들으면서 자란다’ 는.


요사이 목축을 하는 분들은 소나 젖소의 우사에 음악을 들려주면 더 잘 자라고 젖도 더 많이 생산된다고 한다. 말 못하는 식물도 동물도 주인이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현저히 달라짐을 새삼 느끼게 된다.
식물의 세계를 바라보면서도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능력을 깨닫게 되고 또 나 자신에게 주는 말없는 언어를 읽게 된다. 그렇다. 무어라는 신학자는 “자연은 하나님의 상형문자”라고 했다. 사물을 바라보면서 주는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 마치 솔로몬 왕이 하나님이 숨겨준 보물을 인간이 찾아내는 보물찾기와 같다고 한 것처럼 말이다. 초등학교 시절 봄과 가을 소풍에 빠지지 않는 놀이가 있다면 보물찾기다. 찾는 자의 기쁨은 말 할 수 없이 즐겁고 기쁜 일이 아닌가?


호박아, 너도 주인에게 사랑받는 더 큰 호박으로 거듭나고 싶다고, 볼 때마다 느끼게 하는구나, 자신을 땅에 심어준 농부의 마음을 헤아려 주렁주렁 열린 큰 열매로, 심어준 자에게 기쁨을 주고 싶다는 너의 간절한 소원을 읽게 하는구나. 오늘도 호박을 바라보면서 그래, 내년엔 꼭 더 클 수 있도록 거름도 많이 주고 꼭 받침대를 해주겠다고, 네가 주는 아름다운 모습과 지혜에 새삼 약속을 다져본다.

< 안상호 목사 - 동산장로교회 담임목사 >



[1500자 칼럼] 소나기

● 칼럼 2015. 8. 28. 13:08 Posted by SisaHan

오늘 아침 신문 기사 하나가 눈길을 끈다. <지구촌, ‘보트 피플’로 몸살>, 이 기사 제목은 오래 전에 잊혀진 무덥던 여름 한 자락으로 나를 이끈다. 돌이켜보니 겁이 없었던 젊은 날에 남긴 에피소드의 하나이지 싶다.
 
그날 우리는 피서 겸 지인을 만날 계획을 했었다. 개학을 앞둔 내 아이들과 가까운 친구 가족이 함께 어울려 심코 호수 쪽으로 향했다. 두 시간을 달려 도착한 지인의 가게는 휴가철인만큼 정신 없이 바빴다. 먼 길을 달려왔지만 우리를 위해 그의 생업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대신 모터 보트를 빌려 시원한 뱃놀이에 나섰다.
호수 물빛을 닮은 푸른 하늘은 티 없이 맑은 얼굴이었다. 힘차게 밀려왔다 하얗게 부서지는 짙푸른 파도는 무더위에 지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시원하게 달래줬다. 온갖 걱정과 근심이 물거품과 함께 저절로 사라지는 것 같았다. 호숫가에 즐비한 커티지들은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요정의 집처럼 신비로웠다. 같은 나이 또래의 아이들 넷은 오랜만에 보트를 탄 즐거움으로 신바람이 나서 재잘거렸다. 문득 잠시 올려다 본 하늘빛이 전과 같지 않은 느낌이었고, 그 위로 간간이 회색 구름이 몰려들고 있는 듯도 하였다. 그러나 마냥 즐거웠던 우리는 무작정 호수 한가운데를 향하여 계속 모터 보트의 속력을 냈다.


어쩌다 보니 호수 위에 나뭇잎 하나가 떠있듯 우리의 보트가 호수 중앙에 오롯이 떠있는 게 아닌가. 와락 두려움이 일기 시작했다. 호숫가에서 바라볼 때보다 그 크기가 엄청나게 컸던 것이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우리 인간은 지극히 미약한 존재임을 절실하게 느끼는 순간, 시나브로 주위가 어두워지며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졌다. 뱃놀이에 팔린 우리는 순식간에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아차 하는 순간에 소나기가 세차게 퍼붓기 시작했다. 사전에 아무 준비없이 무작정 보트를 탔던 우리는 몹시 당황했다. 수영도 못하는 어른들과 구명 조끼조차 입지 않은 아이들로 안전수칙 제로였으니 말이다. 별 수 없이 최대한 빠른 속도로 호숫가로 돌아나가야 했다. 허나 세찬 빗줄기로 인해 속도가 붙지 않았다. 짧은 여름 옷차림의 아이들은 추위에 웅크린 채 겁에 질려 떨고만 있었다. 무엇보다도 시간을 오래 끌수록 보트 안으로 물이 차올라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 놀란 두 가장(家長)은 필사적으로 보트를 운전하고, 나는 아이들이 동요하지 않게 보살폈다. 얼마 후, 그렇게 멀어 보이기만 하던 호숫가의 커티지 근처로 무사히 접근할 수 있었다.


멀리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노부부가 손짓을 했다. 막상 보트를 어디에 대야 할지 몰라 허둥대는 우리에게 자기집 보트가 매어 있는 덕(dock)으로 오라는 표시였다. 갈수록 더욱 거세진 빗줄기에 온 몸을 적시며 겨우 보트를 안전하게 정착시켰을 때는 모두 기진맥진하고 말았다. 흠뻑 젖은 우리를 집안으로 끌어들이며 마른 수건을 건네준 친절한 노부부는 구식 스토브에 물을 끓였다. 아이들에게는 핫 초컬릿을, 어른들에게는 향이 은은한 커피를 대접했다. 어느 정도 긴장과 추위에서 벗어난 우리에게 그들은 상냥하게 물었다.
“당신들은 어디에서 왔나요?”
“우리는 토론토에서 왔습니다. 잠시 이곳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왔다가 보트를 빌려 탔지요. ” 그 대답을 들은 노부부는 활짝 웃었다.
“우리는 당신들을 ‘보트 피플’로 생각했어요.” 하는 게 아닌가.
당시는 베트남 전으로 발생한 ‘보트 피플’이 세계적 이슈가 되었던 때이니 당연한 상상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날 우리들의 비에 젖은 몰골이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노 부부의 집을 나서니 어느 새 강한 햇살이 뜨겁게 내려 쬐고 있었다. 거짓말처럼 온 세상이 소나기 퍼붓기 전 그대로였다. 그토록 풍랑이 일고 파도가 치던 호수도 잔잔하기 그지 없었다. 인생 여정에서 맞닥뜨리는 삶의 소나기도 그렇게 후딱 지나가 버리고 만다. 갑작스레 만날 땐 버겁고 괴로워 죽을 것만 같다가도 지나고 나면 별 거 아님을 깨닫게 된다. 비록 작은 상처와 흔적을 남긴다 해도 돌아보면 한결 영롱한 빛으로 단단하게 여물어가는 성장의 기회였지 싶다.
그 여름의 억센 소나기가 홀연히 떠오른 날이다.

< 원옥재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



TFSA와 유산계획

지난 2009년에 도입된 TFSA(면세저축계좌)는 그간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이제는 캐나다의 가장 대표적인 절세 및 저축투자 수단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투자 가능한 금액도 최근까지 3차례나 변경되어 도입 후 4년간 5천 달러에서 2013년부터는 5,500달러로 늘어났고, 다시 금년부터는 1만 달러로 증액되어 1인당 최대 4만1천 달러, 부부 8만2천 달러까지 투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이 면세저축계좌는 명칭의 오류로 인해 한동안 은행저축으로만 할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하여 올바로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이제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가장 먼저 고려하는 저축투자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이 TFSA(Tax Free Savings Account)가 절세수단이라는 본연의 취지를 잘못 이해하고 수시로 필요할 때 찾아 쓰는 단기예금으로 인식하는 사람들도 많아 올바로 활용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TFSA의 저축이나 인출규칙에 대해서는 비교적 많은 정보가 알려져 있지만 TFSA와 관련한 중요한 사항의 하나인 유산상속 등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 같아 여기서는 사망 시에 어떻게 하면 경제적으로 TFSA자산을 활용할 수 있는지 알아본다.


우리가 TFSA투자자산을 갖고 있다면 사망 시 세금을 줄이고 자산을 이전하기 위해 유산상속관련 규칙들과 사례들을 살펴보고 현재의 TFSA투자나 저축이 적절하게 되어 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유산상속과 관련하여 초기 TFSA계약서들은 올바른 양식을 갖고있지 않은 경우도 있고, 지방에 따라서도 TFSA에 관한 법이 다르기 때문이다.먼저, TFSA자산을 사망 시 지정된 사람에게 주려고 할 때 퀘벡지역을 제외하면 2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TFSA자산 이전 방법으로 소유권 상속자(Successor holder)를 지정하여 할 수 있는데 배우자만이 이러한 상속자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상속자로 지정된 경우 사망 시 모든 TFSA자산이나 소득은 세금보고 할 필요가 없다. 사망시 생존 상속자는 즉시 TFSA자산의 소유권자가 되고, 금융기관이 모든 행정적인 절차를 처리한다. 상속자는 모든 TFSA자산과 소득을 세금의 영향없이 받을 수 있다. 또한 유산으로 받은 TFSA자산은 본인의 TFSA 기여가능금액에 영향을 받지 않고 본인의 TFSA계좌로 이전하여 사용할 수 있다. 이 방법은 유산상속비용이 없고, TFSA에 있는 자산을 해약할 필요가 없이 이전하여 사용하며, 세금문제가 없다는 장점이 있다.


둘째, 사망 시 TFSA자산을 이전하는 다른 방법은 일반 RRSP와 같이 수혜자(Beneficiary)를 통해 이전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사망시 본인의 세금보고를 할 필요가 없지만 사후에는 수혜자가 세금면제 혜택을 받을 수 없다. 또한 수혜자는 모든 TFSA자산을 본인의 계좌로 이전할 수 없다. 단 소유권 상속자로 지정이 안된 생존 배우자는 사망한 날 TFSA자산금액만큼은 이전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다음해까지 이전하고 이전한 후 30일내에 본인이 직접 이전관련서류를 완성하여 정부(CRA)에 제출해야 한다. 또한 사후에 발생한 자산증식분은 이전할 수 없고, 생존 배우자의 소득으로 처리된다.


셋째, 상속자나 수혜자를 지정하지 않는다면 TFSA에 있는 자산은 유산 일부로 취급되고, 유산은 유언장이나 관련 법에 따라 처리된다. 상속자나 수혜자로 지정하지 않고 유산으로 처리되면 상속절차를 거쳐야만 자금을 사용할 수 있고, 상속관련 비용은 물론 사후 발생한 소득에 대한 세금혜택도 받지 못하게 된다.

< 김경태 - 은퇴투자 상담사, Maxfin 증권·보험 >
투자상담 및 문의: 416-512-9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