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제목이 너무 살벌해서 놀라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죽기를 원했던 엘리야의 고백입니다. 열왕기상 19장에 보면 엘리야가 로뎀 나무 밑에 누워 있으면서 죽기를 원하여 하나님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애원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위대한 선지자가 지금 죽기를 원할까요?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겨루어 놀라운 승리를 거둔 불의 선지자, 엘리야가 왜 지금 연약하고, 힘없는 모습으로 죽기를 원한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는 이것을 영적 지도자의 탈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탈진(burn-out)이란 말은 영어 단어 그대로 다 타버렸다는 말입니다. 1970년대 초부터 정신분석가인 허버트 프로이덴버거(Herbert Freudenberger)가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탈진’(burnout)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이래로 탈진에 대한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탈진 연구가들은 탈진이 주로 사람을 돕는 일에 종사하는 이들에게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사회복지사, 유치원교사, 교사, 특수학교 교사, 간호사, 의사, 정신과 의사, 경찰 같은 사람들입니다. 목회자들 역시 사람을 돕는 일이 주 업무이기 때문에 여기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탈진이란 몸도 마음도 다 타버려서 남은 것이 없으며, 더 이상 일어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지쳐있는 것을 의미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목회 현장에서 받는 스트레스의 정도를 넘어서 이제 더 이상의 의욕이 일어나지 않는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게 교회와 교인들을 위해 헌신하고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때, 또한 아무도 자신의 노력과 희생을 알아주지 않을 때, 자신의 부족함과 무능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주저앉거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감의 결여, 의욕상실, 인간관계의 두려움, 사명감 상실, 자기비하, 실패의식, 자존감 상실, 등의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누구에게도 이러한 자신의 마음을 나눌 수 없다는데 더 힘이 드는 것입니다. 심하면 우울증에 걸릴 확률도 높습니다.
주변에 많은 목회자들이 탈진으로 지쳐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탈진을 경험했던 목회자로서 이 탈진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며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몸부림치는 목회자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사역이 있다면 참으로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토론토 요한계시록 연구회」(토요회)가 마련하는 ‘요한계시록 세미나’가 열립니다. ‘토요회’는 2년째 이필찬 교수를 모시고 세미나를 주관하고 있습니다. 올 해는 이 교수님을 다시 모시고 6월21일부터 밀알교회에서 신학적 논쟁거리가 많은 종말론에 대한 세미나를 갖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7월에는 해외한인장로회 캐나다 동노회 교육부 주관으로 <공관복음의 통일성과 다양성>이란 큰 주제를 가지고 “어떻게 공관복음을 해석하고 설교할 것인가?”에 대한 세부 주제로 목회자를 위한 세미나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 세미나들은 목회자들이 잠시 사역을 멈추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 동역자들이 함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시간, 그리고 잃어버린 열정과 비전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혹시 탈진을 예방하거나 혹은 치유할 수 있는 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은 분들이 있다면 이 사역에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강성철 목사 - 우리장로교회 담임목사 >



옛날에 학교 다닐 때, 일본문학을 부전공으로 공부하면서, 일본 영화라는 과목을 택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처음 본 영화가 구로사와(Akira Kurosawa) 감독의 ‘라쇼몬(Rashomon)’이었다. 스토리도 간단해 보이면서, 돈도 들이지 않았고, 출연 배우도 많지 않고, 촬영 장소도 몇 곳 되지 않았는데 큰 감동을 주었다. 그 이후로 기회가 있으면 그의 영화를 찾아보았다. 그 때 본 영화가 ‘이키루’, ‘7인의 사무라이’, ‘요짐보’, 등의 옛날 흑백영화였고, 당시 이곳 극장에서 상영한 ‘가게무샤’, ‘난’, ‘꿈’등을 보았다. 그는 참 운이 좋은 영화감독, 예술가였다. 세계적인 감독으로 명성을 떨쳤을 뿐 아니라 자기가 사랑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은 대로 마음껏 만들 수 있는 여건을 가졌기 때문이다. 내가 김기덕 감독을 이야기하면서 구로사와 감독을 이야기하는 것은 좋아하는 영화감독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베니스 영화제> 때문이다. 그리고 시대적 차이는 있지만 그 당시의 일본영화계와 오늘 날의 한국영화계를 부분적으로나마 비교하고 싶기 때문이다.


구로사와의 ‘라쇼몬’은 1951년에 베니스 영화제에서 일본영화 최초로 상을 받았다. 그 수상소식이 전해지자 일본영화계는 난리였다. 그들은 일찌감치 자신들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는 영화가 가장 좋은 매체라고 알고 있었고, 권위있는 국제 영화제에 입상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한가지 재미있는 일화는 다른 작품을 보내기로 거의 결정했는데, 때마침 베니스 영화제와 관계가 있는 이태리 여성이 일본에 있어, 그들은 그녀에게 후보작을 보여주었다. 뜻밖에 그녀는 구로사와의 영화를 선택했다.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고 이상한 작품이기에..


내가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처음 본 것은, 이곳 토론토 영화제에 출품한 ‘섬’이었다. 그 영화는 베니스 영화제에 초대받아 상영된 작품이었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상당히 감동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보기에는 너무 멋진 영화였고, 무엇보다도 여태껏 내가 보아온 한국영화와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뒤늦게 출발한 토론토 영화제가 세계적인 영화제로 급속히 자라는 동안 그의 영화는 계속 초대를 받아 볼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다. ‘섬’으로 시작해서 ‘수취인 불명’, ‘나쁜 남자’, ‘사마리아’, ‘빈집’, ‘시간’ 등이 꾸준히 초청받았다. 그처럼 자주 초청 받은 감독도 없으리라. 마치 영화만 만들면 초대받은 것 같다. 영화제는 아니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이곳 극장에 상영되어 비평가들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사마리아’로 2004년에 베를린 영화제, ‘빈집’으로 2004년에 베니스 영화제, 아리랑으로 2011년 칸 영화제, 2012년 ‘피에타’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수상을 했다. 사실 주요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것도 드물지만 짧은 시간에 받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러한 재능있는 영화감독이 영화를 만들려 해도 투자자가 없고, 어렵게 만들어도 국내에서 상영할 극장을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운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 그가 최근 들어 너무 잠잠해, 한국영화계, 나아가서는 사회라는 거대한 벽에 부닥쳐 영화 만들기를 결국 포기하지 않았나 생각 들기도 했다. 며칠 전 지인으로부터 토론토에서 하는 Toronto Korean Film Festival 프로그램을 받았다. 무심히 펼쳐보는데,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있었다. ‘Stop’. 그가 가장 최근 2015년에 만든 영화였다. 그리고 그 이전에 ’One on One’이라는 영화도 만들었다. 그가 아직도 계속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나는 여간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영화가 한일합작으로 나와 있고, 일본어에 영어자막으로 만들어졌다는… 내용이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배경으로 한 것이지만, 그리고 아직 한국에서 상영할 계획이 없다는 사실에 씁쓸했다.


사실 요즘 한국영화 대단하다. 재미있고 잘 만든다. 툭하면 1000만 관객 돌파한다고 한다. 영화는 돈을 벌기 위해 만드는 하나의 상품이다. 그리하여 대박나기를 바란다. 누가 어떤 영화를 보고 하는 것은 개인적인 선택이다. 그러나 그 틈새에 세계적인 영화제가 인정하는 영화가 숨을 쉴 틈 하나 만들 여유가 우리는 없는가?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



[칼럼] 북한고립 외교 허실

● 칼럼 2016. 6. 28. 19:07 Posted by SisaHan
2010년대로 넘어오면서 미-중 관계가 1960년대 중-소 관계처럼 갈등-분쟁-충돌의 수순을 밟아나가고 있는 느낌이다. 중-소 갈등은 50년대 중반 이념분쟁으로 시작됐지만 본질은 사회주의권 내 패권 싸움이었다. 60년대로 넘어오면서 그건 결국 영토분쟁-군사충돌로 이어졌다. 현재 심화되고 있는 미-중 갈등도 본질은 아시아 지역에 대한 패권 싸움이다.

북핵 문제로 시작된 미-중 갈등 전선은 한반도에서 남중국해로까지 뻗어나가고 있다. 아시아의 주인 자리를 되찾겠다는 뜻인 ‘중화부흥’을 선언한 중국은 산호초였던 난사(남사)군도를 개발해 비행장까지 건설하였다. 이건 태평양과 인도양에서 그동안 미국이 행사해오던 제해권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자 일본과 필리핀은 중국과 영토분쟁 중인 섬들 때문에 일찌감치 미국 편에 섰다. 지난달 말 오바마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과 베트남에 대한 미국 무기 금수조치 해제로 베트남도 이제 군사적으로 미국과 한배를 탔다. 도전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은 ‘아시아 회귀’ 정책에 입각해, 동북아에서 북핵 문제를 구실로 미-일-한 3각 군사동맹 체제를 구축했다. 동남아에서는 남중국해 문제를 구실로 미-일-필리핀-베트남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미국 중심의 대중 압박에 대해 최근 중국이 실력행사를 시작했다. 지난 9일 새벽 중국 군함들이 중-일 영토분쟁 중인 센카쿠열도 접속수역을 항행했다. 일본이 해상관활권 침범이라며 즉각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같은 시간대에 러시아 군함도 같은 수역을 항해했다. 동중국해에서도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대결하는 형국이다.

19세기 중반 이후 아시아에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힘겨루기가 군사충돌로 번질 때 그 무대는 매번 한반도였다. 청일전쟁이 그랬고 러일전쟁이 그랬다. 6.25 한국전쟁도 처음에는 남북 전쟁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미-중 전쟁으로 번졌다. 그런 점에서 중국의 군사력이 막강해지기 시작한 2010년대 이후 동아시아에서의 미-중 갈등은 반도국가인 우리에게 강 건너 불이 아니다.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문제로 한반도에서 다시 불꽃이 튈 가능성이 충분이 있다. 그리고 그 불꽃은 평양에서 먼저 튀어 동북아의 산불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이런 상황에 대해 전혀 걱정을 안 하는 것 같다. 강대국들의 대외정책 관련, 중요한 의미가 있는 주요 7개국(G7) 회의가 아주 가까운 히로시마에서 열리는데도 박근혜 대통령은 그 시간에 머나먼 아프리카로 갔다. 옵서버 자격으로라도 G7 회의에 참석해서 참가국들, 특히 미·일이 우리의 안보 상황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미-중 관계와 동아시아 관련해서 어떤 꿍꿍이를 하는지 현장에서 참모들과 함께 지켜봤어야 한다.

아프리카의 북한 ‘절친’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인다고 북한이 아파하면서 핵을 포기할까? 우간다는 북한에 도움을 주기보다 받는 나라다. 그런 나라를 우리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 북한보다 얼마나 더 주기로 약속했을까. 우간다-북한 협력관계 단절 여부 관련 발표가 오락가락했던 일이 그런 의문을 자아낸다. 아무튼 지원한 만큼 이득이 돌아올지는 의문이다. 쿠바 문제도 마찬가지다. 쿠바도 북한의 ‘절친’이지만, 우리가 쿠바와 수교한들 무슨 대수인가. 기껏해야 동시수교 정도에 그칠 것이고, 쿠바가 북핵 관련 대북제재 대열에 동참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지금은 미-중 갈등이 장차 한반도에 전쟁을 몰고 올지 모른다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입각해 양국 움직임을 예의 주시해야 할 때다. 지금은 북한 압박한답시고 머나먼 곳까지 가서 북한고립 외교나 하고 돌아다닐 때가 아니다. 핵·경제 병진노선 비판이나 하고 북한의 선행동이나 요구할 것도 아니다. 관·학 협의체라도 만들어 우리가 입을 수 있는 불이익을 최소화할 대책을 마련해 나가야 한다. 평양발 불꽃이 동북아 산불로 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북한을 관리해 나갈 묘수를 찾아야 한다. 나라를 살리는 힘은 편견과 원칙이 아니라 통찰력과 상상력에서 나오는 법이다.

< 정세현 - 전 통일부 장관, 평화협력원 이사장 >



미국 플로리다 올랜도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49명이 숨지는 최악의 총기난사 사건은 어떤 이유에서든 무고한 민간인을 살해한 것으로 용납될 수 없다.
이슬람 수니파 무장단체인 이슬람국가가 범인과 조직적 연계를 가진 것 같지는 않다. 여러 건의 무기를 준비한 범인이 평소 이슬람 과격세력에 동조해온 사실에 비춰볼 때 자생적 테러일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12월 캘리포니아 샌버너디노에서도 이슬람 극단주의에 빠진 파키스탄계 부부의 자생적 테러로 14명이 숨진 바 있다. 이런 테러는 미리 대비하기가 아주 어렵다는 점에서 미국 사회의 취약성을 보여준다. 최근에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사실상 확정된 도널드 트럼프가 이슬람 신자들에 대한 차별적인 발언을 해 미국 안팎에서 거센 반발을 산 바 있다.


또 하나 지적돼야 할 것은 총기 규제 문제다. 지금 미국 안에는 인구 규모와 비슷한 3억정 안팎의 무기가 유통되고 있다고 한다. 총기 규제를 강화하려는 버락 오바마 정부의 최근 시도 역시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다른 나라와 달리 미국의 총기 범죄자들은 여러 건을 사용해 대형 사건을 일으키는 경향을 보인다. 한 조사를 보면, 미국 인구는 세계의 5% 정도이지만 지난 수십년 동안 대형 총기사건(일반인을 4명 이상 살해한 사건)의 31%가 미국에서 일어났다.


성소수자에 대한 증오가 이번 범행의 동기로 작용했는지도 논란이 된다. 그런 점이 있더라도 범인의 개인적 잘못이지 이슬람이라는 종교 또는 특정 이슬람권 국가와 연결해서는 안 된다. 성소수자 차별은 보편적 인권에 대한 도전이다. 미국에서 태어난 범인(30)은 아프간 문제에 꾸준히 관심을 보였으며 보안요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고 한다. 미국에는 그와 비견될 수 있는 주민이 많이 있다. 미국 사회나 정치권이 제대로 방향 설정을 하지 못한다면 좌절 상태에서 과격한 행동을 할 젊은이가 적지 않다는 얘기다. 이번 사건은 우리 사회에도 타산지석이 된다. 테러 거부, 테러가 발생할 수 있는 토양에 대한 경각심, 소수자에 대한 편견·차별과 싸우기, 사회 통합 노력의 중요성 등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