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 U턴, 다시 ‘지정학’ 시대로

● WORLD 2017. 1. 10. 19:43 Posted by SisaHan

2017 국제정세 전망

“2017년은 1월20일 낮 12시 미국 워싱턴 의사당 서쪽 잔디광장에서 시작된다.” 도널드 트럼프가 성서에 손을 얹고는 미국의 대통령직을 성실히 수행하겠다고 선서하는 순간, 미국과 세계는 낯선 항행에 들어간다.

■ 세계화 노선과 지정학의 충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주는 의미는 한마디로 ‘세계화의 시대’에서 ‘지정학의 시대’로 회귀이다. 세계화는 상품과 자본의 자유로운 유통에 국가의 공간을 여는 거다. 미국은 1980년대 이후 이런 이동을 제한하는 장애들을 제거하고, 상품과 서비스의 교역이 확장될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드는 세계화를 주도했다.
트럼프와 그를 지지한 미국인들은 세계화를 거부했다. 미국뿐만 아니다. 유럽의 각국도 거부했다. 영국은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를 선택했다. 세계화를 주도하고 그 이데올로기를 만든 두 나라인 미국과 영국에서 먼저 세계화를 거부하는 명백한 선택을 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지정학 시대로의 회귀다. 지정학은 영토 안의 공간과 자원, 산업, 인구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추구한다. 국가의 영향권을 확대하려 한다. 세계는 이미 지정학의 시대를 경험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이다. 영토 등 국가의 배타적 영향권을 확대하려는 다툼이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한 미국은 세계를 자신의 영향권으로 두려는 세계화를 주도하다가, 국내에서부터 역풍을 맞았다. 트럼프를 선택한 미국인들은 세계화를 위해 미국이 치르는 비용을 인내하지 못했다. 미국 주도의 질서를 위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등 동맹 유지 비용이나 자본과 상품의 자유로운 유통으로 인한 미국의 일부 산업이나 계층의 희생에 불만을 터뜨렸다.
그래서 트럼프는 세계화 대신에 미국의 배타적 영향권만을 더 확장하려는 지정학적 노선을 천명했고, 추진하려 한다. 자유무역협정의 폐기, 동맹국에 비용의 전가, 국내외 화석연료 개발과 기후변화협정의 부정, 중국에 대한 통상 압력, 이민 제한과 멕시코 국경 장벽 설치, 강경한 반이슬람 정책, 미국 국내로의 기업체 이전 등이다.
그렇다고 2017년이 세계화 노선 폐기와 지정학적 노선 회귀의 원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두 노선의 충돌이 빚는 거센 파고가 국제사회에 출렁이는 원년일 것이다.


■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안착하나
미국에 2017년은 트럼프 행정부의 안착과 작동이 가능한지를 놓고 씨름하는 한해다. 트럼프는 자신의 시대를 알리는 첫 조처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 탈퇴를 선언할 것이다. 환경 및 기업에 대한 규제 철폐, 비자 심사 강화 등 취임 뒤 첫 100일간의 우선과제를 추진할 방침이다.
반작용도 크다.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 전국위원회 서버를 해킹한 러시아의 대선개입 파장은 그의 대통령직 수행에 발목을 잡는 차원을 넘어, 미국의 국가안보 사안으로 부상될 수 있다. 대선 득표에서 힐러리 클린턴보다 300만표나 적게 얻은 것과 맞물려, 그는 한해 내내 대통령직 정통성 논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 지명자 등 친러시아 인사 및 각료 지명자들의 이해충돌로 의회 인준 과정에서 1~2명 낙마로 이어질 수 있다.
퇴임하는 버락 오바마가 클린턴 가문을 대신해 민주당 진영의 대표 인사로 부상해, 그 정치적 영향력을 지속할 것이다.


■ 논란 많은 트럼프의 공약은 이행되나
트럼프는 논란 많은 포퓰리즘 공약을 이행하는 흉내만 낼 수밖에 없다. 멕시코로 이전하려는 에어컨 제조업체 캐리어의 일부 공장을 주저앉힌 것에서 보듯, 그의 일자리 지키기는 언발에 오줌을 누는 정도다. 멕시코 장벽 설치 역시 상징적 조처에 머문다. 이미 양국 국경의 3분의 1에는 담장이 설치돼 있다. 트럼프는 일부 구간에 장벽을 추가하고, 멕시코 정부 팔을 비틀어 공사비를 부담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그가 말하는 ‘뚫을 수 없는’ 남부 국경 장벽과는 거리가 멀다.


■ 미-중 대결은 격화되나
애초 트럼프가 당선되면, 미-중 갈등은 경제나 무역 차원에 국한될 것으로 예상됐다. 이런 전망은 빗나가고 있다. 중국의 아킬레스건인 ‘하나의 중국’ 정책까지 부인하는 트럼프의 등장으로 미-중 대결이 지정학적 대결로 치달을 전망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신년사에서 “영토주권과 해양권익을 결연히 수호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하나의 중국’ 정책에 트럼프가 이의를 제기한 이상, 중국이 더 단호한 대응으로 나가는 양상이다. 남·동중국해에서 미국과 중국의 군사대결 역시 우려된다. 한국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에 대한 중국의 각종 경제 보복과 미국의 한-미-일 동맹 강화 요구 사이에 운신 폭이 더욱 좁아질 것이다.


■ 브렉시트로 유럽연합은 해체되나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오는 3월말 유럽연합 회원국의 탈퇴 절차인 유럽연합 협약 50조를 발동하도록 요청할 예정이다. 늦어질 수도 있다. 영국 대법원은 1월 내에 50조 발동에 의회의 동의가 필요한지 등을 판결한다. 하지만, 영국의 탈퇴는 돌이킬 수 없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유럽연합은 결국 해체된다고 전망했다. 올해 유럽연합 회원국들에서 커지는 반유럽연합 포퓰리즘은 더 극성을 부릴 것이다. 무엇보다도, 독일을 제외한 유럽연합 회원국들이 심각한 경기침체를 겪고 있다. 이를 타개할 수단이 없다는 점이 반유럽연합 원심력을 키운다. 공동통화 유로와 여전히 계속되는 긴축정책 등은 회원국들이 경기침체에 대처하는 정책수단들을 거의 봉쇄하고 있다.


■ 프랑스에서는 르펜, 독일에서는 메르켈?
유럽에서 극우 포퓰리즘 정당의 선두 주자인 프랑스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 대표는 4월 대선에서 약진한다.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할 수도 있으나, 결선투표에서 승리할 수는 없다. 결선투표에서 좌파 지지를 받아 당선될 프랑수아 피용은 프랑스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조류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 프랑스의 반유럽연합 정서는 더욱 커진다.
서구 자유주의의 최후 보루로 부상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오는 가을 4선에 도전한다. 그의 관대한 이민정책에 대한 대중들의 반감, ‘독일을 위한 대안’ 등 극우 포퓰리즘 정당의 약진은 그와 기민련 정부의 의석을 감소시키나, 그의 4선 집권은 성공할 것으로 보인다. 사민당과의 대연정을 통해서라도 메르켈은 독일과 유럽의 자유주의 보루로 남을 것이다.


■ 이슬람국가(IS)는 붕괴되고, 시리아 내전은 종결되나

이슬람국가는 더 약화되고, 결국은 붕괴된다. 트럼프 행정부가 대규모 지상군 투입이라는 헛발질만 하지 않고, 현지에서의 반이슬람국가 병력 양성, 미군의 공습 지원 및 선택적인 특수작전 등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전술을 강화한다면 이슬람국가의 패퇴는 시간문제다. 이슬람국가는 붕괴하지만, 그 주축 세력들은 여전히 중동과 세계 전역에서 끊임없는 결집과 재조직을 통해서 심각한 위협으로 남을 것이다.
시리아 내전은 형식적인 종전을 볼 수도 있다. 바샤르 아사드 정권 지원을 통해 중동에서 입지를 강화한 블라디미르 푸틴의 러시아, 중동분쟁 해결에 성과를 보여야 하는 트럼프의 미국은 내전의 당사자들을 압박해 타협을 볼 것이다. 알레포 탈환으로 강화된 아사드 정부군 진영, 약화되는 이슬람국가와 친서방 반군 진영의 입지도 이런 타협의 배경이다.
하지만 종전이나 휴전협정 문서상의 조약일 뿐, 실질적인 종전과 휴전은 난망하다.


< 정의길 선임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