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죽은 류샤오보’도 경계

● WORLD 2017. 8. 1. 17:13 Posted by SisaHan

반정부시위 우려 ‥ 사망 이틀만에 화장해 ‘수장’

생전에 류샤오보를 결박했던 중국 당국이 사후엔 그의 주검을 흔적도 없이 세상에서 지웠다. 중국 정부가 지난 13일 숨진 류샤오보를 이틀 만에 화장해 바다에 뿌리게 한 것과 관련해, 그의 묘역이 ‘민주화의 성지’가 될 가능성을 사전 차단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AP> 통신 등 외신은 “류샤오보의 형 류샤오광이 15일 오후 중국 당국이 마련한 기자회견에서 이날 오전 동생의 시신을 화장하고 정오께 유해를 바다에 뿌렸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류샤오광은 당국이 동생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 인도주의적 배려를 해줬다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류샤오보의 아내 류샤는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기자회견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신화통신>도 이날 류샤오보의 주검을 화장하기에 앞서 류샤와 친구들이 참석한 가운데 간단한 장례 의식이 열렸고, 가족의 뜻과 지역 풍습에 따라 유해를 바다에 뿌렸다고 보도했다.

류샤오보의 지인들은 평소 고인과 소원한 관계였던 류샤오광과 중국 쪽 발표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뉴욕 타임스> 등 외신은 유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가 화장을 강행했다고 전했다. 유족들은 중국 장례 풍습대로 류샤오보의 주검을 7일간 보존하려 했으나 당국이 서둘러 화장을 치르게 했다는 것이다. 홍콩 소재 중국인권민주화운동정보센터는 16일 오전 누리집을 통해, 류샤가 유골을 바다에 뿌리는 데 동의하지 않았으며 기자회견이 가능해지면 직접 밝힐 것이라는 류샤 친척의 말을 전하고 당국이 류샤오보의 친필 원고와 책, 서평 등 옥중 유품을 류샤에게 넘기지 않으려 하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뉴욕 타임스>는 “(류샤오보의 무덤이) 공산당에 저항하는 시위대를 집결시키는 자석이 될까 우려했다”고 풀이했다.


바다에 수장하는 유해를 슬피 바라보는 아내 류샤.

타계한 ‘중국 민주화 상징’ 류샤오보

“내겐 적도, 원한도 없다”

중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류샤오보는 13일 오후 5시35분 아내 류샤, 형 류샤오광, 동생 류샤오쉬안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아내 류샤에겐 “잘 사시오”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1938년 나치 수용소에서 숨진 독일 평화주의자 카를 폰 오시에츠키에 이어 두 번째로 구금된 상태에서 사망한 노벨상 수상자다.
“나에겐 적이 없다. 나에겐 원한도 없다.” 류샤오보가 평생 강조한 이 말엔 1989년 천안문 민주화 시위에서 출발해 30년 가까이 수없는 탄압과 고통 속에서도 중국의 억압적 현실을 바꾸기 위한 분투를 멈추지 않은 강력한 ‘저항’ 정신이 담겨 있다. 그는 중국 당국에 의해 지워진 ‘천안문 정신’의 산증인으로 끝까지 천안문의 이상에 충실했고 그것을 위해 목숨을 내놨다. 여러 차례 해외로 망명할 기회가 있었으나 끝까지 중국에 남아 뿌리내리고 분투하길 원했다. 그의 죽음은 중국 체제 내에서 민주화 개혁을 꿈꿨던 희망의 종말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1955년 12월 지린성 창춘의 지식인 가정에서 태어난 류샤오보는 문화대혁명(1966~76년) 때 하방(下放·지식인을 농촌 등 노동 현장으로 보냄)돼 건축 노동자로 일했다. 문혁이 끝난 뒤 1977년 지린대 중문과에 입학했고, 베이징사범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당대를 대표하는 철학자 리쩌허우에 도전하는 글을 발표하고, 개혁개방 이후 중국 문화에 대한 미학, 문화 평론들을 내놓으면서 촉망받는 스타 학자이자, 평론가, 시인으로 떠올랐다. 1989년 봄, 그의 인생도 중국 사회도 큰 전환점을 만났다. 천안문광장에서 민주화와 부정부패 타파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