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 세대는 비주얼 문화의 시대이다. 즉 눈에 보이는 것이 중요한 시대이다. 사실 눈으로 보는 것은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보이는 것(What is seen)을 요구한다. 이렇게 보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인간을 인간학에서는 호모 이마기쿠스(Homo Imagicus)라고 부른다. 그리고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내적 욕구는 보아서는 안될 곳도 보고 싶어한다. 그래서 몰래 카메라가 곳곳에서 불의한 욕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텔레비전, 영화 등 미디어 산업의 부흥은 보는 것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확장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세대는 음악을 듣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않는다.

그래서 음악과 영상이 결합된 뮤직 비디오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교회에서도 성도들은 설교를 듣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무엇인가를 보기 원한다. 그래서 목사들은 영상이나 연극 혹은 예술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줌으로서 성도들의 눈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 노력한다. 결국 이 세대는 보이는 것, 즉 이미지(image)의 시대이다. 이미지가 곳곳에서 유혹의 눈짓을 보내고 있다. 이미지가 모든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아는 것이 힘(Knowledge is Power)이었던 근대를 넘어 보이는 것이 힘이 되어 버린 이미지 권력의 시대가 되어 버렸다. 결국 이 세대는 눈에 보이는 대로 행하는 세대이다.


나무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부분은 뿌리이다. 나무의 뿌리는 제일 중요한 것이면서도 땅속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때론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가치있을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가치에 사로잡혀 있어서 그 너머의 진정한 가치를 보지 못할 때가 많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의 위대함을 볼 수 있는 영안(Spiritual Eyes)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필요하다. 그러나 보이는 것, 즉 육체적인 것은 항상 반(anti)영적이고, 영적인 것은 항상 비육체적이고 비가시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항상 대립적인 이원론의 양태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죽은 육신과 타락한 영혼이 온전히 하나된 구원의 모습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이 하나된 새 하늘과 새 땅이 그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이상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이라는 존재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이 모두 필요한 존재이다. 영이 없는 육신, 육이 없는 영혼은 둘 다 불완전한 모습이다.

그래서 인간은 영과 육에 모두 다 갈증을 느끼는 존재이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는 영(적인 것)은 어떤 의미에서 매우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우리는 늘 육신의 것들에 일차적으로 노출되고 그래서 보이는 것들, 세상의 것들에 함몰되어 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온전히 성화(Holification)되지 못한 우리의 육은 우리의 주변 물질 세계를 통제할 힘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우리의 육체적 욕망을 제어할 내면의 힘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내면의 힘을 기르고 훈련하는데 너무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영적인 갈급함에 너무 둔하다. 그래서 육의 비대함으로 기형아가 되어 버린 우리의 존재를 영의 회복으로 정상화시켜야 한다. 보이는 것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의 가치 기준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이전되어 균형을 잡아야 한다. 믿음은 가치에 대한 눈이 바뀌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세상의 가치에 끌려 다닐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끌고 가야한다.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셨다. 어두운 세상에 한 줄기 빛으로.

< 박원철 목사 - 늘사랑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