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87>은 열사의 죽음으로 시작해 열사의 죽음으로 끝난다. 1987년 1월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숨진 박종철과 그해 6월 최루탄에 정통으로 머리를 맞은 이한열은 독재의 잔혹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그렇게 ‘열사’들이 무수히 출현하던 5공화국의 마지막 시기를 영화는 담고 있다. 꽃다운 젊은이들의 죽음에 시민들은 분노했고, 이 분노가 철옹성 같던 군부독재를 무너뜨렸다. 경찰에 쫓기는 시위학생을 숨겨주는 신발가게 아줌마, 그리고 연희(김태리)가 버스 위에 올라서 바라본 서울시청 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의 모습은, 그 시기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민주 진영의 힘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그토록 뜨거웠던 국민 열망에도 민주화는 온전히 이뤄지지 않았다. 직선제 개헌에도 불구하고 그해 12월16일 대선에선 군부 출신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됐다. 선거 몇달 전 이한열의 장례식에서 문익환 목사는 전태일부터 이한열까지 26명의 민주열사 이름을 목놓아 불렀다. 문 목사는 열사의 호명이 마지막이길 바랐다. 하지만 그 뒤로도 훨씬 더 많은 ‘열사’들의 출현을 막을 수는 없었다.
87년보다 더 참혹했던 시기는 1991년이었다. 1991년에만 15명이 스스로 또는 타의에 의해 숨을 거뒀다. 그중 명지대생 강경대는 경찰 폭력에 의해 숨졌고, 성균관대생 김귀정은 시위 도중 경찰에 쫓기다 사망했다. 국가 폭력에 의한 죽음은 87년이나 91년이나 크게 다를 게 없었다. <1987>이 보여주는 감동스러운 장면의 뒤편엔, 그 이후에도 길고 길게 이어진 폭압과 고통의 역사가 소환되지 못한 채 웅크리고 있다. 그래서 1987년 6월의 ‘짧은 승리’는 더욱 가슴 아프고, 마음을 시리게 한다.


‘열사’라는 단어가 신문 사회면에서 사라진 건 1999년 들어와서다. 1997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반세기 만에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뤄졌기 때문일 터이다. 박종철과 이한열의 죽음이 ‘민주정부 탄생’이란 열매를 맺는 데 꼭 10년이 걸린 셈이다.
1987년 12월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된 직후 이재경씨는 창간 준비 중이던 한겨레신문을 찾아와 “한판의 선거로 민주화를 이룰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게 어리석은 생각이었다”고 토로했다. ‘민주화는 한판의 승부가 아닙니다’라는 한겨레 창간준비위원회의 유명한 신문광고 카피는 그로부터 탄생했다. 맞다. ‘한판의 대통령선거’로 민주주의를 이룰 수는 없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민주화가 ‘한판 승부’가 아닌 건, 1987년이나 2017년이나 다르지 않다. 광장을 밝힌 수백만 촛불의 힘으로 무도한 권력자를 내쫓고 다시 ‘민주정부’를 탄생시켰지만,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2017년 대선의 압도적 승리가 정치·사회개혁 과제의 성공을 담보하진 못한다. 박종철 이한열 이후의 수많은 죽음을 떠올린다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련이 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987년엔 정치적 자유 확대에 주력했다면, 지금은 그때 놓쳤던 사회경제적 평등과 분배의 가치에 더 힘을 쏟아야 한다. 촛불이 외친 건 단지 ‘박근혜 퇴진’만이 아니라, 정유라의 이화여대 부정입학으로 상징되는 우리 사회 정의의 실종과 부의 대물림, 양극화의 심화에 대한 전면적 문제제기였기 때문이다. 과제는 산적해 있고 저항은 훨씬 더 거세다. 검찰개혁 핵심으로 꼽히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신설은 국회 법사위에 묶여 한발짝도 움직이질 못하고 있다. 국정원 대공수사권 폐지는 ‘좌파의 국가안보 포기 선언’이라는 야당과 극우보수 진영의 강한 반발에 부닥쳤다.


87년 개정한 헌법 전문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란 문구를 ‘자유롭고 평등한 민주사회 실현’으로 바꾼 국회 개헌특위 자문위 초안을 두고, 어느 보수신문은 ‘국가체제의 근간을 이루던 개념을 빼거나 수정한 좌편향 개헌안’이라 공격했다. ‘자유롭고 평등한 민주사회’란 표현이 국기를 흔든다는 엉터리 주장은 ‘빨갱이 잡는 걸 방해하면 모두 빨갱이’라는 <1987>의 박처원 치안감(김윤석) 시각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세월이 흘렀어도 민주주의 가치를 핵심에 둔 싸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래서 30년 전의 신문광고 카피를 다시 꺼내 읽는다. ‘민주화는 한판의 승부가 아닙니다.’ 운동화 끈을 바싹 조일 때다.

< 박찬수 -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