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속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복잡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걸리고 막히는 데가 많아서 고통스럽고 괴로울 때가 많다. 그러나 이 세상에 속해 살아가지 않는 사람들에겐 복잡한 것도 없고 괴로운 것도 없다. 만일 지금 내 마음이 복잡하고, 내 속이 괴롭다고 한다면, 아직도 세상에 속해서 살기 때문이다. 그럼 세상에 속하지 않으려면 어디에 속해야 하는가? 바로 하늘에 속해야 한다. 하늘에 속해 살면 간단하고 쉽게 살아 갈 수 있다. 믿음의 사람들, 하늘에 속한 사람들은 날개를 가졌는데, 이것을 발견하는 것이 곧 신앙이다. 이 날개를 다른 식으로 말하면 자유라고 할 수 있다. 고린도후서 3장17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느니라” 고 말씀했다. 즉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에게는 자유(날개)가 주어진다는 말씀이다. ‘인생의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없어지는 것이다’는 말이 있다.

삶의 문제는 내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큰 돌들이다. 그 돌을 치우기 위해서 개미나 애벌레들은 얼마나 땀 흘리며 수고하는가? 그러나 근원적인 방법은 바로 그 애벌레가 나비로 성숙하면, 길가에 돌맹이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사실 믿음 안에서 자유(날개)롭게 살아가는 사람에겐 돈도, 명예도, 인기도 도무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현대인들 속에 있는 갖가지 문제들! 시기, 미움, 질투, 싸움, 고민, 가책, 죽음…이런 문제들은 모두 외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이다. 내적으로 해결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내가 자유인이 되는 길 밖에 없다. 성숙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나를 초월해 살아가는 자유인, 더 쉽게 말하면 영생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삶이 자유인이다. 특별히 죽음이라는 문제는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죽음은 어찌할 수 없다. 죽음은 넘어가야지 없앨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가장 핵심은 부활이다. 예수님의 부활! 바로 내 속에 부활할 가능성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 가능성이 있다면 그는 믿는 사람이요 자유인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다. 부활할 가능성이 있는가? 그 가능성을 붙잡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하면 내게 날개가 있다. 내게 있는 그 날개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이 내 속에서 확실한 증거를 잡는 것이다. 그러면 부활의 가능성을 어디서 붙잡나? 바로 십자가에서 붙잡아야 한다. 십자가는 고난이다. 부활한다는 말은 나를 고난 속에 집어넣는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부활은 나비고, 십자가는 고치가 되는 것이다. 바라는 것의 실상은 나비이고, 보이지 않는 증거는 십자가다. 나를 고난 속에 집어넣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다. 사람은 약한 것 같지만 고난 속에 집어넣어 보면 굉장히 강하다. 인간은 고난에 처해야 자기의 강인함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사람은 죽음에 처하면 자기의 불멸을 알 수가 있다고 한다. 원래 인간은 죽는 존재가 아니었다. 인간에게는 이성을 넘어서는 영성(靈性)이 있다. 이 영성 때문에 인간은 죽을 수가 없다. 인간은 또다시 새로운 몸을 입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부활이다.

애벌레가 고치가 되는 것이 십자가요, 나비가 되는 것이 부활이다. 나비가 되어 땅에 속하지 않고 하늘에 속하여 살게 되는 것이다. 자유롭게 온전히 영원한 생을 살게 된다. 부활은 죽어서 부활하는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 11장25절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했다. 하늘에 속한 내가 부활이다. 자유가 부활이요, 나비가 부활이다. 나비에게는 죽음도 삶도 문제 되지 않는다. 이런 삶이 죽어도 살고, 살아도 사는 것이지, 이런 삶이 못되면 죽어도 못 살고, 살아도 못 죽는 것이다. 이런 삶이 대아(大我)의 삶이다. 이제 기독교의 명절 부활절을 지나면서 나의 신앙의 모습을 진솔하게 한 번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땅에 속한 소아(小我)의 삶이 아닌, 하늘에 속한 부활의 삶! 대아(大我)의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 정태환 목사 - 한인은퇴목사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