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무죄 판결 소감 딴따라가 고고한 미술하니 곱게 안 보는 것

조수 두는 것은 미술계 관행, 전업작가들 좌절감엔 미안한 마음 있어

                

그는 거실에서 계속 통화 중이었다.

대법관들 검사들이 총동원돼 나를 화가로 만들어줬어. 고마워하하

2016년 작품 대작 사건에 연루돼 사기죄로 기소됐다 지난 25일 대법원의 무죄 판결로 혐의를 벗은 가수 조영남(75). 판결 다음 날인 26일 오전 서울 강남구 청담동 자택에서 만난 그는 별로 고생한 게 없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이어지는 축하전화에 응대했다. 판결 뒤로 최소 100통 이상의 전화가 왔다고 했다.

그는 90년대 이래 화투 그림을 그리는 작가로 활동하다 2016년 조수를 시켜 그림을 그리게 한 뒤 작품을 팔아 1억원대의 돈을 챙겼다는 이유로 4년여간 사기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하지만 대외활동만 못 했을 뿐 그림과 글을 더 열심히 그리고 썼으며, 딸도 그림 조수로 합류해 가족관계·대인관계도 더욱 돈독해졌다고 자랑했다.

이번 판결의 취지는 자신의 아이디어만 있으면 조수가 대신 그림을 그리게 하는 대작은 사기가 아니며, 그 사실을 구매자에게 고지할 의무도 없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한국 현대 미술사에 획을 긋는 사법적 판례가 될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조씨 또한 이번 판결이 세계사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강조했다. “국가가 아마추어 미술 애호가였던 한 사람을 전업작가로 승격시켜준 케이스죠. 조수 쓰는 작가들은 눈치 안 보고 편안해질 것이고. 미술사를 보면 미대 공부를 하나도 안 한 사람이 대가가 된 경우가 많아요. 나도 미대를 안 다니고 학원도 안 다녔어. 그래도 하니까 되잖아요. 아트라는 게 그래야지요. 나름대로 열정을 갖고 오랫동안 꾸준히 하면 되죠.”

자신만만해 하는 그에게 공격적인 질문을 던져봤다. 대법원 판결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면 적대적이고 비호감 일색인 반응이 압도적인데, 이유가 무엇일 것 같냐는 물음이었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정색하고 말했다. “대중가수가 현대미술이란 영역을 왈가왈부하는 게 기분 나쁜 거죠. 딴따라가 왜 고고한 미술까지 하냐 이거지. 난 평생 그런 편견 속에 살아왔어요. 판결이 반가운 사람들, 날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단히 많지만 점잖으니까 댓글 안 올려요. 나쁘게 보는 사람들이 댓글 올리는 거고. 이렇게 말하면 또 난리 치겠지.”

이번 판결에 대해 미술계에선 작품의 가치를 사법적인 잣대로 따지는 건 문제가 있기에 당연한 판결이라는 반응이 많다. 하지만 조수를 두는 것이 미술계 관행이라는 애초 그의 발언에 대해서는 지금도 분노하거나 거부감을 드러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에 대해 그는 지금도 두루두루 다 아는 사실 아니냐고 되물었다. 이어 “2016년 사건이 불거졌을 때 미술계 11개 단체에서 조수 쓰는 것이 관행이라는 발언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던 것 알아요? 그런데 기각, 각하됐어요. 그걸 제일 걱정했는데. 거들떠볼 필요도 없다는 뜻이에요. 조수를 두는 건 문젯거리가 안 돼요. 당연하지. 바쁜 화가가, 잘 나가는 팝아트 화가가 화투짝을 어떻게 일일이 그려요?”

그는 약간 흥분하더니 최근 딸이 조수로 참여해 대작한 화투 그림을 들고 와 과거 대작 작가의 그림과 비교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훨씬 세밀하게 잘 그렸지만, 엄연히 내 작품이지.”

작업에 동참하고 그림의 대부분을 그린 대작 작가에게 1점당 10만원밖에 안 준 것은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지 않냐는 지적에 대해서도 실상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대작했던 씨는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여비가 없고 생계도 막연하다고 했어요. 처음엔 3백만원 선금도 줬고 작업공간도 제공해주면서 나름대로 돌봐줬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대작 작가를 구할 경우, 소품은 시간당 7000~8000, 4시간에 4만원에 할 수 있어요. 그게 미술계 대작의 실상인데, 제가 박하게 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대작 작가가 조씨의 작업에 참여하면서 색깔이나 구성 등에 독창성을 가미해 작업했다면 저작권을 주장할 수 있는 협업관계라 할 수 있지는 않을까. 이에 대해서도 그는 법적으로 주장할 수 없다고 했다. “화투짝 아이디어가 나한테서 나왔는데, 어떻게 법적으로 (저작권을) 주장할 수 있을까요. 코카콜라 병을 그린 앤디 워홀의 작품을 누가 뭐라고 할 수 없듯, 그 역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봐요. 일부 미술단체에서 다시 저작권 소송을 준비한다는데 신경쓰지 않아요.”

그는 이번 판결이 자신처럼 아무나 미술을 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면서 편견을 가지고 보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마르셀 뒤상은 백 년 전부터 변기 작품을 통해 미술이 없어졌고 해체됐다고 말했고, 개념미술가인 조셉 보이스와 백남준도 이런 주장을 계승했는데 사과를 보고 똑같이 그려야 한다고 말하는 지금 한국의 미술교육이나 미술인식이 너무 답답하다고도 했다. 다만, 그는 홀로 작업하면서 수십 년 자기 화풍을 만들기 위해 고투하는 전업작가들의 좌절감에 대해서는 창작의 고통을 가진 나로서도 이해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다. “한국 미술계에 대해 오래전부터 연민을 갖고 있고, 이런 연민을 표출할 기회를 갖고 싶어요. 대법원 판결 전인 지난달 28일 열린 공개변론에서 전업미술가협회 신제남 이사장이 작가 개인의 수작업 중요성을 강조한 부분에 대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공박한 부분에 대해서도 미안함을 갖고 있습니다. 좀 더 뛰어난 작업을 하면서 적절한 기회에 사과하는 자리를 만들려 합니다.”

그는 다음 주 초, 쉬운 100가지 문답 형식으로 현대미술의 요지경을 풀어낸 <이 망할 놈의 현대미술>을 출간한다. 4년간의 재판 기간 중 절절하게 느낀 현대미술에 대한 대중의 무지를 자신의 체험적 지식을 통해 풀어주면서 미술은 자유로운 게임이라는 개념을 역설한 책이다. 8월에는 자신이 광팬으로서 흠모해온 이상, 말러, 피카소, 아인슈타인, 니체와 가상밴드를 결성해 공연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들의 가상 문답과 대화로 풀어낸 이야기책 <시인 이상과 5인의 아이들>이란 작품도 발표할 계획이라고 했다. < 노형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