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율법사 출신 강경파…최고지도자 하메네이의 대리인

미국과의 핵협상 고비…취임 전까지 기회의 창

‘핵 협상 타결 부담을 온건파 현 정부에 떠넘길 것’

 

*이란 대통령에 당선된 에브라힘 라이시를 지지하는 이란 시민들이 19일 테헤란에서 그의 사진을 들고서 축하 집회를 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닉슨만이 중국에 갈 수 있었다.” 미국의 반공산주의 강경파인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이 오히려 1979년 중국과 수교의 문을 열 수 있었다는 이 말이 이란에서도 통할 수 있을까?

 

이란 대통령 선거에서 강경파인 에브라힘 라이시(60)가 당선돼, 미국과의 이란국제핵협정 복구 등 대외관계에 큰 전기가 예상된다. 라이시는 이슬람공화국인 이란에서 권력 체제의 핵심인 종교율법사 출신이다. 최고 권력자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의 전폭적 지지를 받은 사실상의 대리인이자, 그의 후계자로 지목된다.

 

하지만, 선거결과는 이란 체제의 위기를 드러낸다. 압돌레자 라마니 내무장관이 투표일 하루 뒤인 19일 국영 텔레비전을 통해 발표한 선거결과를 보면, 이번 선거는 5900만명 유권자 중 과반에도 못 미치는 2890만명이 투표해 투표율은 48.8%였다.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 이후 가장 낮았다. 무효표는 370만표에 달한다. 라이시는 약 1790만표를 얻어서, 약 62%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2위인 모센 레제이 전 혁명수비대 사령관에 비해 340만표를 더 얻었다.

 

이란 대선의 투표율은 지난 대선 때 72% 등 보통 70%가 넘었는데, 이번에 과반에도 못 미친 것은 유력 후보들의 출마가 막히고 경제난 등에 분노한 유권자들의 투표 거부에 따른 것이다. 대선에 출마하려면 헌법수호위원회의 심사를 거처야 하는데, 600명의 출마 신청자 중 7명만이 승인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유력 온건파 후보 3명 등 라이시에 대항할 수 있는 후보들이 모두 탈락했다. 입후보가 승인된 주자들은 라이시의 당선을 돕는 페이스 메이커라는 혹평을 받았다.

 

성직자 집안 출신인 라이시는 이슬람법을 전공하고 이란 혁명 뒤 검사로 공직을 시작해 검찰총장을 거쳐, 대법원장에 해당되는 사법부 최고재판관을 역임한 보수적인 이슬람 성직자이다. 그가 검사를 시작할 때 후견인이 현재 최고지도자인 하메네이다. 그는 이란 혁명 뒤 수감 중인 5천여명의 ‘반혁명분자’들이 처형한된 것으로 추정되는 비밀재판에 관여한 재판관으로 지목되고 있다. 그는 이 사건 등으로 미국의 제재 대상에 오른 인물이다.

 

그의 입후보와 당선은 이란의 이슬람 성직자와 강경파들이 지난 2015년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탈퇴한 이란국제핵협정인 포괄적공동행동계획(JCPOA) 파기 이후 이란의 경제난 등 체제 위기를 정면으로 돌파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라이시는 당선 뒤 성명에서 “여러분의 고귀한 투표와 예외적인 자신감으로 나는 열심히 일하는 혁명적인 반부패 정부를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그의 당선으로 이란은 미국과의 핵협상에서 강경 자세를 강화할 것이나, 타결 가능성 역시 높아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란과 서방의 분석가들은 그가 취임하는 8월 초까지 6주간이 협상 타결 문을 열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고 <뉴욕타임스>가 전했다.

 

핵협정 복구는 최고지도자 하메네이의 의지여서, 그의 대리인인 라이시가 취임하기 전에 협정 복구의 부담을 물러나는 정부에 지울 것이라는 분석이다. 복구된 협정이 이란의 경제난 등을 완화하지 못하면 그 책임을 온건파 등 전임 정부에 돌리고, 결과가 좋다면 라이시 정부의 공으로 주장하겠다는 의미라고 신문은 전했다.

 

현재 빈에서 유럽 국가 중재로 협정 복구 협상을 벌이는 이란과 미국은 이미 몇주 전에 복구되는 협정의 세부사항을 마련해 놓고, 이란 대선 결과를 기다려왔다고 신문은 전했다. 다만, 이란은 미국이 향후에 복구되는 협정을 다시 파기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공식 문서로 요구하고, 미국은 협정 복구 뒤 미사일이나 2030년 이후 이란 핵 개발 문제 등에 관한 포괄적 추후 협상을 요구하고 있다.

 

이번 협상에 정통한 발리 나스르 존스홉킨스 국제대학원 교수는 <뉴욕 타임스>에 “이란에 지금은 닉슨이 중국에 가는 순간이다”며 “보수파가 아닌 이들이 바이든과 협상을 타결한다면, 그들은 견뎌낼 수 없을 것이다. 보수파 외에는 타결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라이시의 이란 대통령 당선으로 결단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정의길 기자

 

 

국제앰네스티 "이란 새 대통령, 반체제인사 대숙청…수사받아야"

"재작년 반정부시위 때 당국 불법행위도 면책"

 

*18~19일(현지시간) 치러진 이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강경보수 후보인 세예드 에브라힘 라이시가 18일 테헤란 투표소에서 투표를 마치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세예드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 당선인이 과거 반(反)체제인사 대숙청을 주도했으니 범죄 수사를 받아야 한다고 국제인권단체가 주장했다.

 

국제앰네스티는 19일(현지시간) 성명에서 "반인도범죄를 저지른 라이시 당선인은 수사받아야 한다"라고 요구했다.

 

아녜스 칼라마르 앰네스티 사무총장은 "라이시 당선인이 살인과 고문, 강제실종과 같은 반인도 범죄에 대해 수사받는 대신 대통령직에 오르게 된 것은 이란에서 대권을 잡으면 처벌받지 않는 점을 암울하게 상기한다"라고 말했다.

 

국제앰네스티는 2018년 보고서에서 지난 1988년 이란 정부가 감옥에 수용된 반체제 정치범 수천명을 비밀리에 처형하고 시체를 유기했을 때 이를 주도한 소위 '사망위원회'에 라이시 당선인도 속해있었다고 고발했다.

 

이란 정부는 아직도 당시 상황과 시체유기 장소를 조직적으로 은폐하고 있으므로 반인도범죄는 현재도 진행 중이라는 것이 국제앰네스티 주장이다.

 

검사 출신 라이시는 1988년 이란과 이라크 간 전쟁이 끝난 뒤 당시 최고지도자 아야툴라 루홀라 호메이니 지명으로 반체제인사 숙청을 주도했다.

 

국제앰네스티는 라이시가 사법부 수장으로서 반체제인사와 인권옹호가, 소수자 인권탄압을 주도했다고도 주장했다.

 

또 재작년 11월 이란에서 대규모 반정부시위가 벌어졌을 때 정부와 보안군이 저지른 불법행위에 대해 라이시의 사법부가 포괄적 면책을 해줬다고도 비판했다.

 

칼라마르 사무총장은 "과거에 발생하고 현재도 진행 중인 국제법상 범죄에 개입한 라이시 당선인 수사를 지속해서 요구할 것"이라면서 "보편관할권 행사도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보편관할권은 반인도 범죄에 대해서는 발생 장소나 가해·피해자 국적과 무관하게 모든 국가가 관할권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란 강경보수 대통령에 이스라엘 촉각 "핵시설 공격 불가피“

 

*라이시 이란 대통령 당선인 [AFP=연합뉴스]

 

이란 대선에서 강경보수 성향의 세예드 에브라힘 라이시가 당선되자 적성국 이스라엘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들을 비롯한 관리들은 라이시가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의 뜻에 따라 핵무장에 속도를 낼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각에서는 이스라엘이 다시 한번 이란 핵시설 공격을 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나프탈리 베네트 이스라엘 총리는 20일(현지시간) 취임 후 처음으로 TV 중계된 각료회의를 주재하면서 라이시의 당선을 경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베네트 총리는 라이시가 자유로운 선거가 아닌 아야톨라 하메네이의 뜻에 따라 선출됐다면서 "라이시 당선은 세계 강국들이 핵합의 복원 이전에 현실을 자각하고 그들이 누구와 함께 일하는지를 깨닫는 마지막 계기"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잔혹한 사형집행인의 정권이 대량 파괴 무기(핵무기)를 갖게 해서는 안 된다"며 "이에 대한 이스라엘의 입장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베네트 총리의 연정 파트너이자 정부 내 서열 2위인 야이르 라피드 외무장관도 라이시의 당선을 경계했다.

 

라피드 장관은 전날 트위터에 "'테헤란의 도살자'로 불리는 이란의 새 대통령은 이란인 수천 명의 사망에 책임이 있는 극단주의자로, 이란 정권의 핵 야욕과 테러 실행을 위해 전념할 것"이라며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또 "라이시 당선은 이란 핵 프로그램의 즉각적인 제지와 파괴적인 야욕의 종식에 대한 새로운 결단을 촉발했다"고 덧붙였다.

 

그뿐만 아니라 베니 간츠 국방부 장관도 지난 17일 미국과 함께 이란의 핵 프로그램을 면밀하게 주시하고 있다면서, 이란 핵무장 제지를 위한 준비상태와 관련 "(군사적 타격을 포함해) 모든 옵션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런 가운데 이스라엘의 일부 고위 관리들은 이란 핵시설에 대한 공격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고 채널 12 방송이 전했다.

 

방송에 따르면 이스라엘 관리들은 새 대통령 취임 이전인 오는 8월까지는 이란이 핵 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 복원에 합의하지 않은 상태로 최대한 많은 양의 농축 우라늄을 축적할 것으로 판단하고 대응책을 고심하고 있다.

 

한 이스라엘 고위 관리는 "이란 핵 프로그램 공격 준비를 다시 하는 것 이외에 대안이 없다. 이를 위해 예산과 자원 재배치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란 나탄즈 지하 핵시설의 우라늄 농축용 원심분리기

 

중동의 유일한 비공식 핵보유국인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무장을 극도로 경계하면서 이른바 '그림자 전쟁'을 통해 이란 핵시설을 공격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스라엘은 지난 2010년 미국과 함께 스턱스넷(Stuxnet)이라는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나탄즈 핵시설 컴퓨터에 침투시켜, 1천여 기의 원심분리기를 무력화했다.

 

또 지난해 8월 나탄즈 핵시설의 고성능 원심분리기 캐스케이드(연결구조)가 폭발과 지난 4월 나탄즈 핵 시설 화재 사건이 벌어졌을 때도 이스라엘이 배후로 지목됐다.

 

이달 초 퇴임한 이스라엘의 대외 정보기관 모사드 전 국장 요시 코헨은 최근 현지 언론과 인터뷰에서 이란 핵시설 공격을 시사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