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탓 사전제작 영상 온라인 중계 …다채로운 기념행사 마련

위안부 문제연, 영어 웹진 '결' 개간…각종 역사자료 영어로 번역 공개

 

소녀상과 김학순 할머니= 지난해 8월14일 시민단체들이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기자회견을 연 전북 전주 풍남문 광장에 김학순 할머니 손팻말과 소녀상이 나란히 놓여 있는 모습.

 

여성가족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인 14일 오전 11시 정부기념식을 온라인으로 개최한다고 13일 밝혔다.

 

1991년 8월 14일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피해 사실을 처음으로 공개 증언한 날이다.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국내외에 알리고 피해자를 기리기 위해 2017년 기림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해 매년 기념하고 있다.

 

올해 기념식은 '김학순 할머니 증언 30주년'의 의미를 살려 '함께 지켜온 30년, 세상을 변화시킬 당신과 함께'를 주제로 진행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영상메시지를 통해 "과거의 아픔에 머물지 않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노력하신 할머님들의 헌신에 경의를 표하며, 정부는 피해자 중심의 문제해결이 이뤄질 수 있도록 역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할 예정이다.

 

정영애 여가부 장관은 미리 배포한 기념사에서 "지난 30년간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과 전쟁 중 성폭력과 같은 여성인권 침해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해왔음에도 최근 국내외에서 위안부 피해의 역사를 부정·왜곡하는 사례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며 "이러한 역사가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도록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고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한 연구와 활동에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번 행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사전 제작한 기념식 영상을 송출하는 온라인 행사로 진행되며, 여가부와 KTV국민방송 유튜브 채널을 통해 중계된다.

 

기념식은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 이후 현재까지 30년간 이어진 연대와 실천, 미래를 위한 희망을 표현한 기획 영상과 기념 공연 등으로 구성된다.

 

또 기림의 날을 전후로 여가부의 '청소년 작품 공모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연구소의 교육용 콘텐츠 공개·전시 등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린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 문제연구소는 영어 웹진 '결'(www.kyeol.kr/en)을 선보인다.

 

'결'에서는 그동안 한국어로 제공하던 위안부 관련 자료 해설과 논평, 좌담, 에세이 등을 영어로 번역해 제공한다.

 

또 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사실을 입증하는 일본군, 정부, 유엔(UN)의 공문서 등 주요 역사자료 총 150여건을 교육용 영어 콘텐츠로 제작해 13일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공개할 계획이다.

 

아울러 피해자의 증언을 영상으로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대화형 콘텐츠도 대구 중구 희움 역사관과 서울 마포구 서강대 곤자가프라자에서 오는 11월까지 만나볼 수 있다.

 

이밖에 지방자치단체와 시민단체 등도 기관별로 특색 있는 기념식과 강연회, 공연, 전시회 등 다채로운 시민 참여 행사를 연다.

 

정영애 장관은 "이번 기림의 날 행사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리기 위한 피해 할머니들의 용기와 노력을 현세대와 미래 세대가 함께 기억하고 이어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여가부도 피해 할머니들의 명예와 존엄을 회복하고, 위안부 문제를 여성 인권과 평화의 가치로서 국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2020년 8월 14일 충남 천안 국립 망향의 동산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행사에 참석한 이용수 할머니.

 

"김학순의 용기가 위안부 둘러싼 세계의 침묵 깨뜨려"

   고 김학순 할머니 공개증언 30주년 기념 학술대회

   "역사 부정주의 발호…할머니 위해 기억 이어가야"

 

'김학순 공개증언 30주년 국제학술대회'= 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청년문화공간JU동교동에서 '김학순 공개증언 3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가 온ㆍ오프라인으로 진행되고 있다.

 

"나는 부끄럽지 않다. 이 순간을 내 평생 기다려왔다."

 

1991년 8월 14일 한국에 있는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로서 처음 피해 사실을 공개한 김학순(1924∼1997) 할머니의 증언 30주년을 기념하는 국제학술대회가 13일 서울 서대문구 청년문화공간 JU동교동에서 열렸다.

 

세계 각지에서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치유를 위해 활동해온 참석자들은 김 할머니가 낸 용기를 회고하면서 역사 부정에 맞서 피해자들의 기억을 계승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김학순 공개증언 30주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고 공개적으로 증언한 김학순(왼쪽 세번째)할머니가 1991년 12월 7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일본 최초의 증언집회에 참석하고 있다.[김혜원 기증, 이나영 정의기억연대 이사장 제공]

 

◇ "김학순 증언, 세계 성폭력 여성 피해 경험 공유의 계기"

 

엘리자베스 손 미국 노스웨스턴대 교수는 "김학순 할머니는 전 세계 여러 세대의 여성들이 본인들의 성폭력 피해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줬다"며 "살아있는 증인으로서 세상에 당신의 전쟁 경험을 전하고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이 주어진 의무라고 생각하셨던 것"이라고 말했다.

 

양현아 서울대 교수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힘없고 이름 없었던 지역의 기층민에 의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국, 아시아, 세계의 깊은 침묵이 깨졌던 계기"라고 평가했다.

 

김 할머니가 일으킨 파장으로 한옥선(1919∼2009), 안법순(1925∼2003), 김화선(1926∼2012), 최갑순(1919∼2012) 등 다른 피해자들 역시 고통스럽게 자신의 아픔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해외에서도 네덜란드의 얀 루프 오헨 할머니(1923∼2019) 할머니 등이 이런 증언을 보고 용기를 냈다.

 

이런 피해 생존자 100여명의 목소리는 1993년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을 시작으로 2004년까지 나온 총 8권의 증언집 시리즈에 담겼다. 지역 단체들이 출간한 증언집을 더하면 기록은 모두 17권에 이른다.

 

나눔의집 위안부 피해 할머니 흉상

 

◇ 김학순과 함께해온 일 활동가들 "일본 돌아보게 했다"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수면 위로 떠오르자 일본 사회도 술렁였다. 김 할머니는 1991년 12월 일본 도쿄와 간사이(關西) 각지에서 자신의 증언을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집회에 참석했고, 일본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양징자 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전국행동 공동대표는 이런 집회가 이미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 중이던 일본 여성들에게 힘을 주고 운동의 후속세대를 만들어낸 원동력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공격도 만만치 않았다. 당장 김 할머니는 일본 집회에서 "어째서 전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이야기하기로 결심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기억이 진실이 아니라거나 '일본은 책임이 없다'는 주장은 일본 총리에게서까지 나왔다.

 

양 공동대표는 "당시 일본 사회는 그녀들(피해자들)이 50년 동안 사실은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왔다는 사실에 대해 상상력을 갖지 못했다"며 "운동을 위해 일어선 여성들조차 한국의 운동으로부터의 물음이 있었기에 비로소 우리들이 놓쳐 온 일본의 과거 죄악에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는 필요성에 눈 뜨게 된 것"이라고 했다.

 

아사히신문 기자이던 우에무라 다카시 '주간금요일' 발행인은 1991년 김 할머니의 사연을 일본에 처음 보도한 일로 일본 우익들로부터 극심한 공격을 당하면서도 꿋꿋이 싸워왔다고 술회했다.

 

그는 "김학순 씨가 일본 변호인단에 호소한 세 가지 바람인 일본 정부의 사과, 젊은 세대로의 기억 계승, 비석 건립이 거의 실현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다"며 "기억 계승에 대한 공격을 일본 정부가 저지하지 않는 것은 큰 문제"라고 덧붙였다.

 

램지어 사태

 

◇ "일 '역사전쟁'은 진행 중…기억 지속하는 것은 모두의 의무"

 

전문가들은 최근 '램지어 사태' 등으로 대표되는 역사부정주의에 대한 경계와 대응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야마구치 도모미 미국 몬타나주립대 교수는 현재의 '역사전쟁'을 "일본 우익이 '중국·한국이 일본을 깎아내리기 위해 싸움을 걸고 있으며 그 주전장(주된 싸움터)은 미국'이라는 인식에 근거한 일본군과 정부의 전쟁 책임을 부정하려는 움직임"이라고 정의했다.

 

강성현 성공회대 교수는 이런 역사 부정이 왜곡된 통계 수치를 나열하면서 학문적 모양새를 취하거나 피해자들의 증언을 자의적으로 절취하는 방식, 궤변임에도 목소리를 높이고 확신에 찬 지속적인 주장을 하는 방식 등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일부 지식인까지 가세한 '램지어 사태'는 이를 요약해 보여주는 현상이라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알렉시스 더든 미국 코네티컷대 교수는 "3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오늘 이 모든 여성이 거짓말쟁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은 일본의 현 정부"라며 "김학순은 20세기 가장 용감한 사람 중 한 명으로 남아 있고 그의 몸에 각인된 공포를 영원히 끝내기 위해 유산을 21세기에 지속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라고 덧붙였다.

 

부재의 무게, 현재의 책임…고 김복동 할머니를 되새기다

 

고 김복동 할머니의 유품으로 되새기는 2021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여성인권운동가’라고 자신을 소개한 명함. 김복동 할머니는 피해자의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 곳곳을 누비며 피해 사실을 용기있게 증언함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높이고, 국가를 초월한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의 연대를 이끌어낸 활동가의 삶을 살았다.

 

“본인이, 증거가 살아있는데 증거가 없다니 말이 됩니까?”

 

일본군 위안부 강제 연행 사실을 부정하는 역사수정주의를 지지하는 일본 극우 정치인들의 발언이 잇따랐던 2012년 7월, ‘국가가 소신을 가지고 국가의 의지와 소신을 가지고 여성을 납치해 인신매매했다는 사실은 없다는 게 일본의 많은 역사가들의 의견’이라는 하시모토 도루 일본 오사카시 시장 집무실 앞에서 면담을 요청하며 당당히 꾸짖던 날에 김복동 할머니는 연보라색 원피스를 차려입고 있었다. 이듬해 일본 각 지역을 순회하는 증언대회에 나섰을 때에도, 서울의 수요시위에서도 할머니는 단정한 이 원피스를 즐겨 입었다.

 

김복동 할머니가 생전에 즐겨 착용한 연보라빛 원피스와 나비 스카프

연보라빛 원피스를 입은 김복동 할머니(가운데)가 2013년 5월 25일 오후 일본 오사카 동센터에서 열린 일본 순회 증언집회에서 길원옥 할머니(왼쪽)와 증언하고 있다.

 

서울 종로구 중학동 옛 주한일본대사관 앞 평화로에 내리쬐는 햇볕을 막아주던 모자와 선글라스도 수요시위의 필수품이었다. 수요시위 현장에서 ‘할머니에게 명예와 인권을’이라 쓴 노란 조끼를 입고 찍은 사진과 함께 ‘여성인권운동가 김복동’이라 스스로를 소개한 명함은 그의 온 삶을 통한 발걸음이 어디로 향했는지 보여주는 상징이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인권이사회 참석을 위해 사용했던 유엔 출입증과 각국의 출입국 도장이 찍혀 있는 여권은 세계 곳곳을 누비며 피해 사실을 용기 있게 증언함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높이고, 국가를 초월한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의 연대를 이끌어낸 그의 발자취를 담고 있다.

 

2019년 1월28일 김복동 할머니가 영면에 든 뒤로도 피해자들의 별세는 이어져, 이제 남은 생존자는 14명. 역사의 진실을 알리고 바로잡으려던 이들이 떠나고 난 뒤 빈자리는, 치열했던 그 삶의 무게를 더해 남은 이들에게 무거운 책임이 되었다. 올해 다시 맞이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에 먼저 떠난 이의 부재를 되새겨줄 유품들을 톺아보는 까닭이다.

 

2012년 10월 3일 낮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1042차 수요시위’에 참석한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의 안경에 참석자들이 비치고 있다.

필요할 경우에 대비해 과거에 썼던 의료보험증, 수첩 등과 함께 오래된 가방에 보관했던 할머니의 증명사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인권이사회 참석을 위해 사용했던 유엔 출입증과 각국의 출입국 도장이 찍혀 있는 여권.

아흔세번째이자 마지막 생신이었던 2018년 4월 26일 오전 김복동 할머니가 서울 마포구 연남동 평화의 우리집 2층 자신의 방에서 축하하러 온 이들과 대화하고 있다.

 2019년 5월 4일 기록한 서울 마포구 연남동 평화의 우리집 2층 김복동 할머니의 빈 방. 이순덕·김복동 할머니가 별세하고 길원옥 할머니도 아들집으로 거처를 옮기며 평화의 우리집은 2020년 10월 말 문을 닫았다.  이정아 기자

 

위안부 피해 증언 첫 보도 우에무라 "용기 낸 증언에 떨렸다"

김학순 증언 30주년…"日정치 지도자 진심어린 사죄 안했다"

'날조' 비방에 맞서 싸워…위안부 문제 해결책은 "사죄 · 기억 · 비석"

 

위안부 목소리 세상에 알린 우에무라= 2015년 4월 27일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 전 아사히(朝日)신문 기자가 일본 도쿄도(東京都) 지요다(千代田)구 소재 사법 기자클럽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씨의 증언을 실은 1991년 8월 11일자 아사히신문 오사카본사판 조간의 사본을 보여주고 있다.

 

"'용기를 내서 그런 증언을 했겠구나'하는 생각에 마음이 떨렸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고 공개적으로 증언한 김학순(金學順·1924∼1997) 씨의 목소리를 처음 보도한 일본 저널리스트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는 녹음테이프로 김씨의 발언을 처음 들었던 30년 전의 느낌을 이렇게 회고했다.

 

기자회견하는 김학순=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 씨가 1991년 8월 14일 서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을 성적으로 상대하는 일을 강요당했다고 피해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김씨는 한국의 일본군 위안부 운동에서 기폭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1991년 8월 14일 얼굴과 이름을 공개한 상태로 서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일제 강점기 전쟁터에서 일본군을 성적으로 상대하는 일을 강요당했다고 증언했다.

 

성적 피해를 공개하기 쉽지 않은 시절에 이뤄진 김씨의 회견은 다른 피해자가 용기를 내 증언하는 계기가 됐다.

 

김학순 증언 첫 보도=1991년 8월 11일 발행된 아사히(朝日)신문 오사카(大阪)본사판 조간 사회면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金學順·1924∼1997) 씨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에서 말한 내용이 실려 있다. 사진은 해당 신문의 사본. [우에무라 다카시 제공]

 

당시 아사히(朝日)신문 기자였던 우에무라는 기자회견 사흘 전인 1991년 8월 11일 "감금돼 달아나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잊고 지내고 싶지만 잊히지 않는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화가 나서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는 김씨의 발언을 지면에 실었다.

 

김씨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찾아가 말한 내용을 녹음한 테이프를 듣고 기사를 쓴 것이다.

 

전쟁 중 동원됐던 '조선인 종군 위안부' 중 한 명이 서울에 생존해 있으며 "체험을 그저 숨겨오기만 했던 그녀들의 무거운 입이 전후 반세기 가까이 지나서 어렵게 열리기 시작했다"라고 의미를 부여하며 피해자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보도였다.

 

우에무라는 피해 당사자가 지원 단체의 조사에 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뉴스라고 생각했다면서 "'피해자가 간신히 그렇게 말하기 시작했구나'하는 느낌이었다"고 덧붙였다.

 

    기자회견하는 김학순 [연합뉴스]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모르는 상태로 보도했고 피해자의 정체는 기자회견을 계기로 확인됐다.

 

30년 전 우에무라의 기사는 한국에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지원 단체에 정식으로 피해 사실을 진술한 것을 처음 알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김씨는 결과적으로 위안부 운동에서 상징적인 존재가 됐다.

 

물론 이보다 앞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이야기가 보도된 사례도 있다.

 

예를 들면 일본 오키나와(沖繩) 머물다 불법 체류자로 분류돼 추방 위기에 몰렸던 배봉기(1914∼1991) 씨가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는 사실을 밝혀서 1975년 복수의 현지 언론에 소개됐다.

 

김씨의 기자회견 30주년을 앞두고 11일 연합뉴스와의 전화 인터뷰에 응한 우에무라 '슈칸킨요비'(週刊金曜日) 사장 겸 발행인은 "총리 등 일본의 정치 지도자가 진심 어린 사죄를 피해자에게 제대로 전하지 않았다"라고 여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유를 꼽았다.

 

 위안부 문제 공개 증언한 김학순과 소녀상= 7월 24일 일본 교토부(京都府) 교토시의 한 시설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이 전시된 가운데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는 사실을 공개 증언한 김학순(金學順·1924∼1997) 씨의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책을 묻자 "김학순 씨가 30년 전에 어떻게 해결 가능한지 말해줬다"며 "나는 정말 그 말을 잊을 수 없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우에무라는 첫 기사를 쓰고 3개월여가 지난 1991년 11월 25일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김씨가 "돈을 얼마를 받아도 버려진 이 몸을 되돌릴 수 없다. 일본 정부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 젊은 사람이 이 문제를 알도록 하면 좋겠다.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비석을 세워주면 좋겠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보도=1991년 12월 25일 발행된 아사히(朝日)신문 오사카(大阪)본사판 조간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金學順·1924∼1997) 씨의 발언과 사진이 실려 있다. 사진은 해당 신문의 사본. [우에무라 다카시 제공]

 

일본군 위안부나 군인·군속(군무원)으로 동원된 피해자와 유족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에 앞서 일본 측 변호사로 구성된 대리인들이 서울에서 피해자 청취 조사를 했는데 당시 우에무라가 허락을 받아 동석했다.

 

우에무라 사장은 "간단히 말하면 일본 정부의 진심 어린 사죄, 젊은 세대로의 기억 계승, 기억하기 위한 비석의 건립, 이렇게 세 가지"가 핵심이라면서 현재 일본 상황은 너무 동떨어져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특히 "위안부 할머니들이 체험한 괴로운 역사의 기억을 일본 정부와 일본 교육 당국이 젊은 세대에게 제대로 전하지 않고 있다"고 한국과 일본의 인식 차가 커지는 이유를 지적했다.

 

아울러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움직이는 이들을 우익세력이 공격해도 일본 정부가 제지하지 않고 있으며 일본 사회가 우경화하면서 '반복해 사죄할 필요는 없다'는 목소리가 강해지고 있어 더욱 어려운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위안부 문제 한일 합의…아베 사죄는 어디로=2015년 12월 28일 윤병세 당시 한국 외교부 장관(오른쪽)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당시 일본 외무상이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부에서 열린 공동기자회견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합의 결과를 발표한 후 악수하고 있다. 기시다는 당시 회견에서 "아베 (신조) 내각총리대신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으로서 다시 한번 위안부로서 많은 고통을 겪고 심신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고 말했으나 이후 아베가 실제 사죄하는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그는 일본의 '이중 잣대'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일본 정부가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에 관해서는 속아서 간 사람도 납치라고 표현하면서 유독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해서는 강제 연행을 보여주는 증거가 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는 것에 대해 "그렇다면 위안부도 다 납치된 셈"이라며 일본 측의 태도가 "더블 스탠더드"(이중적인 기준)라고 지적했다.

 

김씨의 목소리를 처음 소개한 우에무라의 기사는 일본과 한국 양쪽에서 당시에는 그리 주목받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왜곡하려는 시도가 확산하면서 우에무라가 우익 세력의 표적이 됐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 동원에 가담했다는 저술을 남겼던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1913∼2000)와 관련한 일련의 기사를 아사히신문이 2014년 8월 취소한 것이 이른바 '우에무라 때리기'를 본격화하는 계기가 됐다.

 

위안부 문제 보도 취소한 아사히신문= 2014년 8월 5일 일본 도쿄(東京)에서 배달된 아사히(朝日)신문 조간에 2차대전 때 제주도에서 다수 여성을 강제로 끌고 갔다고 밝힌 일본인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의 증언이 거짓이라고 판단하고 이에 기반을 둔 1980∼90년대 자사 기사를 취소한다는 설명이 실려 있다. 아사히신문의 기사 취소는 '우에무라 때리기'를 본격화하는 계기가 됐다.

 

아사히신문은 "요시다가 제주도에서 군 위안부를 강제 연행했다고 증언한 것은 거짓이라고 판단"했다고 기사를 취소한 이유를 밝혔다.

 

이를 계기로 김씨의 증언을 처음 보도한 우에무라가 '날조 기자'라는 비난이 들끓었다.

 

우에무라는 요시다에 관한 기사를 한 건도 쓰지 않았고 요시다 관련 기사는 다른 기자가 쓴 것인데 우에무라를 비방하는 재료가 돼 버린 것이다.

 

기사 취소 후 더 강한 공격에 직면한 아사히는 우에무라가 김씨의 목소리를 처음 다룬 기사에서 "'여자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전장에 연행됐다"고 쓴 것이 잘못됐다며 2014년 12월 정정 보도했다.

 

위안부와 정신대를 혼동해 표기했으며 속아서 따라간 것에 대해 '연행'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잘못됐다는 취지였다. 이로 인해 우에무라 때리기는 더욱 심해졌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연구가 충분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한국과 일본 모두 위안부를 정신대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흔했다.

 

딸 죽이겠다고 협박까지=아사히(朝日)신문 기자로 재직하던 시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 씨의 증언을 보도한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 씨의 딸을 죽이겠다는 내용의 협박문. 우에무라를 역적으로 규정하고 딸을 살해하겠다고 위협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우에무라 다카시 제공]

 

우에무라는 "당시에는 다 그렇게 썼다. 정신대는 위안부라는 의미로 썼다"면서 지엽적인 부분을 빌미로 유독 자신만 공격한 것은 "위안부 문제를 뭉개기 위한 것"이었다고 분석했다.

 

공격은 도를 넘은 수준에 달했다.

 

2014년 3월 아사히신문을 조기 퇴직한 우에무라는 홋카이도(北海道)의 호쿠세이가쿠엔(北星學園)대학 비상근 강사를 맡고 있었는데 우익세력의 협박으로 인해 2년 후 대학을 떠나야 했다.

 

인터넷에서 고교생 딸에 대한 비방이 난무했고 살해 협박문까지 날아들어 등교할 때 경찰차가 출동해야 할 정도였다.

 

조선학교 보조금 중단 시위 속 '한국 비하 팻말'= 2016년 3월 6일 일본 도쿄도(東京都) 주오(中央)구 긴자(銀座) 거리에서 열린 시위 참가자가 든 팻말에 '사기, 위선, 명예훼손, 선전으로 사는 이들을 저주한다'(Curse on those who live on deception and hypocrisy, defamation and propaganda.)는 글과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전 일본 중의원 의장, 박근혜 당시 대통령, 평화의 소녀상,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 전 아사히(朝日)신문 기자 등의 얼굴 사진이 담겨 있다. 또 매국노, 사기꾼, 걸식, 매춘부 등의 단어가 함께 적혀 있다. 우에무라가 우익 세력의 표적이 됐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우에무라는 굴하지 않았다.

 

위협과 비방에 맞서 소송을 제기했고 '나는 날조 기자가 아니다'는 책을 쓰며 반박했다.

 

딸이 제기한 소송에서는 배상 판결이 내려져 우익 세력의 공격에 브레이크를 거는 효과가 있었다.

 

다만 우에무라가 '기사 날조'라는 비방에 맞서 제기한 소송은 패소했다.

 

하지만 그는 "언론인 우에무라가 날조하지 않았다는 것은 멀쩡한 사람은 다 알게 됐다"며 소송 자체가 주목받으면서 판결만으로 전하기 어려운 진실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기자회견하는 우에무라 다카시= 2015년 8월 13일 우에무라 다카시 당시 일본 호쿠세이가쿠엔대학 비상근 강사가 서울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씨의 증언을 보도한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또 "내가 굴복하지 않고 싸워서 동료가 점점 늘었다. 우에무라 때리기 덕분에 인연이 확산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우에무라는 폭력적 위협에 굴하지 않고 역사의 진실을 지키기 위한 투쟁한 노력을 인정받아 2019년 리영희 상을 받기도 했다.

 

김학순 씨의 발언을 처음 보도한 기자로서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묻자 "(김학순 씨가 30년 전에 제시한) 세 가지를 실현하기 위해 협력할 것"이라고 주저 없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