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5·18묘지 시민들 추모 행렬 이어져

 

지난 24일 광주시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은 전남 영암 삼호고 학생들이 5·18 항쟁 이야기를 듣고 있다. 국립5·18민주묘지 관리사무소 제공

 

‘사과받지 못한 분함 위로드립니다.’

 

26일 오전 광주시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5·18묘지) 들머리에 놓인 방명록에 장아무개씨가 적은 추모의 글이다. 같은 날 서울에서 온 박아무개씨는 “80년 5월 5세였던 아이가 그 시절을 잊지 않습니다”라고 적었다. 지난 23일 전두환 사망 이후 5·18묘지를 찾은 추모객들은 방명록에 “끝까지 기억하겠습니다”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도합니다” 등을 남겼다. 시민들이 쓴 추모의 글엔 아무런 반성도 없이 사망한 전씨의 잘못을 꾸짖는 듯 오월 영령들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들이 가득했다.

 

80년 5월, 5살이던 아이가 그 시절을 잊지 않습니다

 

이날 이른 아침인데도 추모객 세 팀이 5·18묘지를 찾았다. 전씨 사후 5·18묘지가 궁금해 친구 4명과 함께 온 김용주씨는 “아유, 사과 한마디 없이 죽었으니 참…. 한 나라를 통치했다는 사람의 마지막 몰골이 뭐요? 노태우처럼 사과 한마디라도 했어야지요”라고 했다. 경기도에서 왔다는 박아무개씨 부부도 이날 10대 두 아들과 여행을 하던 중 5·18묘지를 처음 찾았다고 했다.

 

지난 25일 광주시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들머리에 놓인 방명록에 적힌 추모의 글. 장아무개씨가 ‘사과받지 못한 분함 위로드립니다’라고 적은 글이 눈길을 모은다.

 

전씨 사후 학생들이나 단체로 찾는 추모객들이 늘고 있다. 지난 24일 이후 이날까지 영암 삼호고(130명), 홍농서초등학교(80명), 숭의과학기술고(30명) 등 학생들이 다녀갔고, 제주협동조합(40명), 우성지역아동센터(80명), 한국교수발전연구원(30명), 경기기자협회(15명) 등이 방문했다.

 

추모객들 “전두환 비석 어디 있습니까?”

 

특히 추모객들은 최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와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가 밟아 화제가 된 ‘전두환 비석’에 관심을 보였다. 이 비석은 원래 광주 인근 담양군의 한 마을에서 세운 전씨 부부 민박 기념비였다. 광주·전남민주동우회가 1989년 1월13일 망월동 5·18 옛 묘역 들머리로 옮겨와 “5월 영령의 영혼을 달래는 마음으로 짓밟아달라”(표지판)는 취지로 묻은 것이다. 국승진 국립5·18민주묘지 의전계장은 “참배객들이 5·18묘지를 둘러본 뒤 요즘 화제가 됐던 ‘비석’을 찾아 인근에 있는 5·18 옛 묘역으로 이동하는 분들이 늘었다”고 말했다.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된 김태훈(서울대 경제학과 4학년) 열사의 묘지.

 

5·18묘지엔 ‘사과받지 못한 사람들’ 918명이 안장돼 있다. 이날도 5·18 유공자 3명이 새로 묻혔다. “5·18에 원한도 없으려니와 작은 서운함들은 다 묻고 간다”며 떠난 이광영(68)씨, 군부독재로부터 강제해직 고통을 겪은 노희관(87) 전 전남대 명예교수, 그리고 강대웅(61)씨 등이다. 4묘역에 들어섰다. “전두환 물러가라”고 외친 뒤 도서관에서 투신한 김태훈 열사 묘지에 가을 햇살이 쏟아졌다. 비석의 날짜는 1981년 5월27일이다. 망월동 5·18 옛 묘역에도 58명의 넋이 묻혀 있다. ‘전두환’ 비석을 지나 1986년 4월 반외세·반독재 시위 중 숨진 이재호 열사의 묘지 앞에 섰다. 전두환·노태우 집권기인 1980~92년에 분신하거나 투신한 이만 47명으로 알려져 있다. 정대하 기자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자녀와 가족을 잃은 시민들이 설립한 사단법인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제공

 26일 아침 광주시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들머리에서 추모객들이 방명록에 추모의 글을 쓰고 있다.

                          광주 망월동 5·18 옛 묘역 들머리에 박혀 있는 전두환 비석.

 

영화에서도 실패한 ‘전두환 단죄’…광주 관객들 “쏴, 당겨”

 

전두환 본격 다룬 영화 적어

‘26년’  ‘남산의 부장들’ 정도

이젠 새로운 전두환 영화 나올 때

 

    영화 <26년> 속 전두환 모습. 청어람 제공

 

지난 40년간 한국영화가 전두환을 다룬 방식은 정면의 역사가 아니었다. 일종의 측면의 역사였으며 굴곡을 넘어 어느 정도는 굴종의 역사 서술방식이었다. 한 번도 전두환의 범죄 행위를, 그 극악한 반역과 반동의 행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했다. 그건 이 정치군인의 범죄가 역사적으로 정리가 돼 있지 않아서가 아니다. 현실 생활 속에 아직도 이들 무리를 지지하는 극우 집단들이 뿌리 깊게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전후 세대인, 반공교육으로 세뇌된 일베 집단들의 난동과 방해, 협박이 일상 속에서 횡행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를 만드는 투자 제작자의 입장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이 여론이라는 미명하에 벌어지는 린치 행위다. 광주 학살이 사실은 북한군의 침투 해서 이들을 소탕하기 위한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식의 주장이 여전히 버젓이 방송과 언론을 타고 있는 한 ‘용기 있는’ 영화가 나오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5.18 당시를 둘러싼 여러 의혹이 아직도 풀리지 않은 상태다. ‘본격’ 전두환 영화는 좀 더 기다려야 할 판이다. 어떻게 보면 독재자 박정희의 본색을 그린 영화 역시 아직 제대로 나온 것이 없다. 예컨대 그의 만군 시절의 얘기 같은 것은 그려진 것이 없다.

 

    영화 <택시운전사>. 더램프 제공

 

만약 전두환과 그의 1980년 12.12쿠데타를 제대로 다뤘다면 한국에도 진작에 <다운 폴>같은 독일영화가 나왔을 것이다. <다운 폴>은 전쟁에서 패하기 직전 지하벙커에서 작전 회의를 하는 히틀러의 모습을 통해 파시즘의 광기가 얼마나 극악한 것인가를 웅변하는 작품이다. 브루노 간츠의 명연기로도 유명하며 에스엔에스(SNS)를 통해 그의 연기 모습이 많이 패러디되기도 했다.

 

지금껏 전두환을 비교적 정면에서든, 아니면 우회적으로든 묘사한 작품들이 있다면 그것은 대개 광주항쟁을 다룬 작품들이다. <화려한 휴가> <택시 운전사> <변호인> <1987> 등이지만 이들 영화에서 전두환은 묘사만 될 뿐 그 모습을 직접 드러내게 하지는 않는다. 전두환의 모습을 거의 처음, 희화시킨 영화는 <26년>이다. 1980년에서 26년이 지난 2006년 세명의 젊은이들이 의기투합해 독재자 전두환을 처단하려 한다는 얘기다.(정작 영화는 2012년에 개봉됐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에서 간절히 원하고는 있지만 현실 세상은 결코 그럴 수 없게 하는 이야기, 곧 전두환 처단이 영화 속에서 진행된다.

 

    영화 <변호인>. 위더스필름 제공

 

이 영화가 상영됐던 당시 광주의 한 극장에서는 영화 속 저격수(한혜진)가 멈칫멈칫 사격을 망설이는 장면에서 관객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쏴! 당겨!’라고 외치기도 했다. 영화의 열린 결말을 두고는 감독 조근현을 향해 불만을 터뜨리는 관객들도 적지 않았다. 전두환을 연기한 장광의 대사 만큼은 리얼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철통 경비를 뚫고 자신의 아방궁에 침투한 호남 조폭 곽진배(진구)에게 전두환은 결코 뉘우침이 없다. 그렇게 당당할 수가 없다. 너희들이 무엇을 아느냐는 식이다. 장광은 그런 식의 비아냥거리는 어투의 연기에 능하다. 원한을 품고 일차적으로 전두환을 암살하려 하는 김갑세(이경영)도 속절없이 그와 경호원들에게 당하고 만다. 지금 생각하면 거들먹거리는 영화 속 전두환의 모습은 실제로도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라고 짐작하게 한다. <26년>은 그런 인물 묘사의 리얼함만으로도 평가되고 기억될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 속 전두환(오른쪽). 하이브미디어코프 제공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전두환의 저열한 인간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영화는 우민호 감독의 2020년작 <남산의 부장들>이다. 여기서 배우 서현우는 전두환의 대머리를 표현하기 위해 앞머리를 삭발하고 나온다. 영화 속에서 전두환은 거의 대사가 없는데, 10.26 직후의 밤을 묘사한 마지막 장면에서 전두환에 대한 인물평에 있어 영화는 화룡정점을 찍는다. 거기서 전두환은 박정희의 집무실 비밀 금고에서 돈을 훔친다. 카메라는 금고를 열면서 흘깃 눈치를 보는 전두환의 비열한 얼굴 표정을 담는다. 결국 전두환은 도둑놈이었음을, 저열한 절도범에 불과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박정희의 비자금은 물론이고 정권과 정부까지 훔친 장본인 전두환의 모습이 가장 적극적으로 그려진 셈이다.

 

어찌 보면 폭도의 우두머리 전두환과 그 일당들에 대한 영화는 아직 시작도 못 한 셈이다. 아직 할 얘기가 무궁무진하게 많다. 영화가 스스럼없이, 아무런 제약과 방해 없이 나올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1980년이라는 어둠의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늘 시대의 아픔을 극복하게 한다. 전두환의 사망을 계기로 새로운 전두환 영화들이 나와야 한다. 그래야 결국 이겨 낼 수 있을 것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등 916명, 국가 상대 940억원대 소송

 

지난 25일 오전 전두환씨 빈소가 마련된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5공 피해자 11개 시민단체' 회원들이 사과 없이 죽음을 맞이한 전씨를 규탄하고, 재산을 피해자와 사회에 환원할 것을 촉구하는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와 가족 등 5·18 관련자 916명이 ‘정신적 피해를 보상하라’며 국가를 상대로 943억여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5·18구속부상자회는 회원 916명이 국가를 상대로 약 943억원의 위자료 지급을 구하는 소송을 26일 서울중앙지법에 제기했다고 밝혔다. 소송은 모두 3건이다. △5·18유공자 본인과 유공자의 생존부모 등 882명이 913억여원을 구하는 소송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학생운동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기소돼 옥중 단식투쟁을 벌이다 숨진 고 박관현 열사 가족 9명이 제기한 17억원 규모 위자료 청구소송 △5·18민주유공자 유족 25명이 12억5천만원을 구하는 소송이다.

 

원고들은 “기존의 손해배상은 유공자와 가족 등의 정신적 손해를 전혀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고 소송 이유를 밝혔다. 그동안 5‧18 관련자들은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5‧18보상법)에 따라 보상금을 받았는데, 여기에 정신적 손해배상은 포함되어 있지 않아 논란이 있었다. 이에 관련 조항을 심리한 헌법재판소는 지난 5월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5·18 보상법에 근거해 보상금을 받았어도 정신적 손해에 대한 보상을 추가로 요구할 수 있다’는 취지의 결정을 내렸다. 원고 법률대리를 맡은 법무법인 엘케이비(LKB)는 “5‧18 생존자 대부분이 장래 사회생활을 한창 준비해야 할 청년기였음에도 국가에 의한 부정적 낙인과 감시‧사찰로 현재까지 정상적인 사회생활로 복귀가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이번 소송에 참여하지 못한 유공자 등에 대한 소송을 추가로 진행할 예정”이라고 했다.

 

5·18민주화운동 피해자들의 국가배상 소송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5·18 당시 무력 진압으로 사망하거나 다치고, 유죄 판결을 받은 피해자와 가족 70여명을 대리해 지난 24일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한다고 밝혔다. 피해자들을 대리하는 조영선 변호사는 “그동안 피해자들이 받은 보상 또한 지나치게 낮거나 모욕적이었다. 국가배상 청구소송을 통해 그 죄를 국가에 묻고자 한다”고 밝혔다. 신민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