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성 폐쇄성 폐질환을 앓아온 빅토르 에스코바르(60)가 안락사 전인 2021년 10월19일 집에서 부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 로이터 제공/연합뉴스

 

몸을 잘 가누지 못하는 루게릭병을 앓아온 여성이 법적 다툼 끝에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안락사를 허가받고 스스로 숨을 끊었다. 시한부 환자가 아닌 이에게 안락사가 허용된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콜롬비아의 51살 여성 마르타 세풀베다가 8일 “자율과 존엄이라는 본인의 생각에 따라”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고 미국 <워싱턴 포스트>가 그의 변호사를 인용해 9일 보도했다. 변호사는 성명에서 “세풀베다가 (숨지기 전) 어려웠던 몇달 동안 공감과 애정의 말을 건네고 기도하며 지원해주고 동행해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남겼다”고 밝혔다.

 

세풀베다는 2018년 11월 근육세포가 파괴되어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근위축성측삭경화증을 진단받았다. 1920~30년대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의 강타자 헨리 루이스 루 게릭이 사망한 뒤 ‘루게릭병’으로 널리 알려진 병이다. 세계적인 영국의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1942~2018)도 이 질환으로 고통받다 숨졌다.

 

세풀베다는 병세가 심해지면서 몸을 잘 가누지도 못하는 등 고통이 커지자 안락사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콜롬비아는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97년 안락사를 허용했지만, ‘6개월 이하의 시한부 판정을 받은 환자’만 대상자가 될 수 있었다. 근위축성측삭경화증은 병세의 진행 속도에 따라 2년에서 10년, 또는 그 이상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해 7월 콜롬비아 헌법재판소가 안락사 권한이 시한부 환자뿐 아니라 “심각한 불치의 질병으로부터 심각한 육체적 또는 정신적 고통”을 받는 환자에게도 적용된다고 결정하면서 걸림돌이 사라졌다.

 

세풀베다는 이 결정이 나온 뒤인 10월10일 안락사를 결심했다. 그러자 교회 지도자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가톨릭 주교회의에서는 세풀베다에게 안락사 결정을 “조용히 반성”하라고 촉구하며, 신에게 용서를 비는 기도회를 열었다. 안락사를 집행하기로 했던 ‘콜롬비아 통증 연구소’(인코돌)도 증상이 그 사이에 나아졌다며 안락사를 갑자기 취소했다.

 

세풀베다는 즉각 법원에 안락사 취소가 부당하다고 호소했다. 법원은 이를 받아들여 그의 안락사 권한을 재확인하며 인코돌에 안락사 집행을 명령했다.

 

세풀베다는 숨지기 전 콜롬비아 방송에 나와 자신의 가톨릭 신앙에 대해 짧은 언급을 남겼다. “신이 우리 삶의 주인이라는 걸 안다. 그러나 신도 내가 고통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세풀베다의 아들 페데리코 레돈도는 어머니가 죽기 이틀 전 트위터에 엄마의 어깨에 손을 얹고 함께 웃고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올렸다.

 

8일 죽음으로 세풀베다는 콜롬비아에서 시한부 질병 외에 안락사로 숨진 두번째 인물이 됐다. 첫 주인공은 말기 만성 폐쇄성 폐질환으로 그보다 하루 앞서 안락사를 선택한 빅토르 에스코바르(60)였다. 박병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