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명상가 평화운동가 틱낫한 별세

● 토픽 2022. 1. 23. 04:18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지금 여기 ‘깨어있는 그 길’로 떠나다,

고향인 베트남 중부의 뚜 히에우 사원서 입적…향년 95

“타인은 틀리고 열등하다는 생각이 폭력 · 갈등 낳는다”

2003년 3월 방한 직후 ‘틱낫한 붐’ ‘걷기명상 붐’ 일기도

 

21일 입적한 틱낫한.

 

세계적인 명상가이자 평화운동가인 틱낫한 스님이 베트남 중부 도시 후에의 뚜 히에우 사원에서 21일 입적했다. 향년 95. 법랍 79.

 

베트남 출신인 틱낫한은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와 함께 ‘살아있는 부처’, ‘영적 스승’으로 꼽혔다.

 

고인은 베트남 중부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한 사진 속의 평화로운 스님의 모습을 보고 그처럼 평화로워지기 위해 1942년 16살에 출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외세와 투쟁하는 전쟁판에서 사찰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1946~1954년 베트남 지배를 유지하려고 전쟁을 벌인 프랑스의 군인들은 먹을 것을 뺏으려 사찰을 공격했고, 저항운동에 가담한 승려들을 잔인하게 처형했다. 틱낫한은 “당시 프랑스 병사들이 너무나 싫었다”고 고백할 만큼 자신도 고통 속에 있었지만, 그는 그 증오심에 매몰돼 있지 않고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프랑스 병사를 진정한 친구이자 형제로 받아들였다.

 

그는 60년대 미국 순회 강연을 하면서 미국에 의한 베트남 전쟁의 비극과 반전 평화를 호소했고, 불교평화대표단 의장으로서 파리평화회의를 이끌며 비극의 종식을 호소했다. ‘참여불교’란 말이 세계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것은 틱낫한에 의해서였다.

 

고인은 생전에 미국의 인권 운동가인 마틴 루서 킹 목사와 만나 갈등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달라고 당부했는데, 틱낫한의 사상에 감명을 받은 킹 목사는 그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기도 했다.

 

그러나 베트남 정부는 평화에 대한 솔직한 표현들을 문제삼아 틱낫한의 귀국을 금지했다. 그 때문에 그는 1973년 프랑스로 망명해 시골마을에 ‘플럼빌리지’(자두마을) 공동체를 설립해 고국의 전쟁 고아들을 지원하고, 걷기 명상과 마음챙김 등과 같은 명상 프로그램을 이끌어 유럽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정치적 입장이 아니라 철저히 불교적 자비심에 따라 고통 받은 사람들에 대한 연민에 준거해 행동했다. 이라크를 공격한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는 “고통을 준 만큼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고, 2001년 미국 뉴욕의 9·11 테러 이후에는 현지에서 10일간의 단식을 이끌며 희생자와 가족들을 위로했다.

 

2003년 3월 방한 기간 중에 걷기 명상을 이끌고 있는 틱낫한.

 

그는 “고통을 회피하지 말고, 고통의 원인을 직시하고, 이해하는 게 수행”이라며 “고통을 통해 (상대에 대한) 이해와 자비를 가질 수 있으며, 이해와 소통을 통해 평화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는 붓다 당시의 계율을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근본주의자들과 달리, 시대와 과학 문명에 따라 새로운 계율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가 만든 플럼빌리지에서 첫 계율은 ‘모른다’이다. 둘째 계율은 ‘지금 아는 지식이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틱낫한은 ‘자신만 진리를 독점하고, 타인은 틀리고 열등하다는 생각이 평화를 깨고 갈등과 폭력을 낳는다’고 했다. 그는 또 “소통이야말로 이해심과 자비심과 평화의 길”이라며 이토록 겸허한 계율을 제시했다.

 

플럼빌리지에 붓다와 예수의 사진을 나란히 걸어놓게 한 그는 “우리는 서양 사람들에게 자기 종교를 버리라고 요구하지 않고, 자기 종교를 이해하기 위해 불교를 공부하라고 한다”며 “불교를 이해하면 기독교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고, 그 뒤 자기 종교로 돌아가 깊이 탐구하면 불교와 비슷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플럼빌리지에선 하나님의 왕국이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한다고 가르친다”고 말했다.

 

                             명상하는 틱낫한.

 

명상가로서는 그는 “자신의 나쁜 습관에 대해 화를 내지 마세요. 그 습관과 싸우지 말고, 웃음을 머금으세요. 그렇게 할 때 서서히 변화될 수 있답니다”라고 사람들을 부드럽게 변화시켰다. 플럼빌리지의 그의 법회장에선 청중들이 잔디밭에 엎드리거나 누워서도 법문을 들을 수 있도록 했다.

 

틱낫한은 고행이나 좌선을 권유하기보다는 “무슨 일을 하든 걱정과 불안, 망상에 한눈을 팔지 않고, 마음을 호흡과 발밑에 집중하며, 온전히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라”며 “지금 여기 깨어있는 마음이 바로 정토요. 천국이다”고 했다. 그는 “길에는 차가 많다. 아이에게 관심을 갖지 않으면 언제든 차에 치일 수 있다. 아이를 보호하려면 아이와 항상 함께 있어야 한다. 어린 아이와 항상 함께하는 것이 수행이다. 여러분은 자신의 ‘수호천사’가 되어야 한다. ‘깨어있는 마음’이 바로 수호천사다”라고 말하곤 했다.

 

쉽고 명쾌한 그의 저서도 미국과 유럽 서점의 동양 및 불교 코너에서 달라이 라마의 저서와 함께 주류를 차지했다. 달라이 라마도 그의 저서를 애독한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가르침은 간단 명료하면서도, 진리의 정수를 분명하게 설명했다.

 

한국에선 그의 저서 <화>가 베스트셀러가 된 직후인 2003년 3월 방한하면서 ‘틱낫한 붐’과 ‘걷기 명상 붐’이 일었다. 방한 기간에 그는 경기도 파주 도라산역에서 걷기 명상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했고, 서울시청 앞에서 10만여명이 모인 가운데 이라크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평화염원 걷기 명상’을 이끌기도 했다.

 

그는 가장 전통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란 것을 보여주었다. 프랑스에서도 베트남 사찰에서 배운 불교 전통을 고수하면서 종교와 인종, 국적에 상관없이 교류했다. 간디와 함석헌 등도 영향을 받은 미국 펜들힐과 영국 우드브룩 등 기독교 퀘이커(무교회주의) 공동체들에서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이 적지 않다. 개신교의 대표적 영성 공동체인 브루더호프도 그의 영향으로 식단의 음식 수를 줄이며 더욱 검소한 삶을 지향했다.

 

틱낫한은 지난 2003년 7월 프랑스 플럼빌리지에서 이뤄진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돌아온 뒤에도 일주일 동안 한국 얘기만 했고, 송광사에서 자면서 그렇게 편할 수 없었다. 전생에 한국의 스님이었던 것 같다”고 고백했다.

 

 2003년 7월 프랑스 플럼빌리지에서 걷기 명상을 이끌고 있는 틱낫한.

 

그는 인터뷰하는 날 아침 현대그룹 정몽헌 회장의 자살 소식을 듣자 “미리 나와 얘기라도 했으면 그렇게 뛰어내리지는 않았을 텐데…”라고 몹시 안타까워하며, “정치 지도자들과 기업가들을 정신적으로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어떻게 우리를 평화의 언덕으로 데려다 주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스트레스를 받고 절망하고 갈등하는 세상 사람들을 불교가 실질적으로 도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2014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말을 할 수 없게 되자 여생을 고향에서 보내기 위해 2018년 베트남으로 돌아가 지냈다. 그는 사후에 주검을 화장해서 전 세계에 있는 플럼빌리지 명상 산책로에 뿌려 달라고 유언했다.

 

그는 생전에 “이 몸은 내가 아니며 이 몸은 나를 가둘 수 없으며, 생사는 오고가는 출입문일 뿐이며, 태어나고 죽는 것은 숨바꼭질의 놀이일 뿐이니 내 손을 잡고 웃으면서 잘 가라고 인사하면 근본 자리에서 항상 다시 만나고, 삶의 수많은 길에서 항상 다시 만나게 될 것”이란 말을 남겼다. 조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