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칼럼] 초심을 잃어버린 업보

● 칼럼 2024. 4. 15. 06:39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한마당]   초심을 잃어버린 업보

 

 

이번 총선에서 ‘채상병 사건’은 판세에 영향을 준 주요 이슈의 하나였다.

수해 현장 해병대 장병 익사 사고의 책임규명 과정에 대통령이 개입한 정황이 드러난 때문이다. 험한 물살에 들어가라고 명령한 사단장을 처벌하지 말라고 대통령실이 외압을 행사한 사실이 밝혀지고, 출국금지 된 피의자 전직 장관을 대사로 발령하는 꼼수까지 쓰면서다. 격노했다는 대통령의 개입이 확인되면 탄핵 사유라는 지적이 나왔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탄핵에 몰려 임기중 사퇴한 닉슨 대통령에 비견되는 사건이라는 진단도 한다.

닉슨은 하원의원과 상원의원을 지냈고, 부통령도 역임했다. 대통령 재임 중에는 ‘데탕트’와 월남전 종전, 아폴로11호 달착륙 등 업적을 쌓아 압도적으로 재선됐다. 하지만 거기까지 였다. 대통령선거 과정에 ‘워터게이트’ 사건을 지휘한 사실이 드러나며 마침내 역사상 처음으로 중도 사퇴하는 불명예로 마감했다.

닉슨은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의원 시절부터 그야말로 충직하게 봉사하며 신망을 얻어 최고 권좌까지 올랐다. 하지만 그의 초심은 권력이 커질수록 ‘변심’이 되어갔고, 결국은 대통령 권력을 지키려고 무리수를 쓰면서 일거에 파탄을 맞았다.

강직한 검사로 대권까지 거머쥔 윤석열도 취임연설에서는 ‘국리민복’에 성심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는 취임 직후부터 그 초심을 져버렸다. 언행과 국정 모두에서 국민을 우습게 여기는 안하무인(眼下無人)과 내로남불로 일관했다. 국민들에게는 불편과 불안과 고통을 안기면서 자기 식구들은 감싸고 덮기에 급급했고, 정책실패 경제악화로 나라 곳간은 비는데 국비를 제 주머니 돈처럼 펑펑 썼다. 오죽하면 선거 와중에 채상병 사건을 포함한 이른바 ‘이-채-양-명-주’라는 조어까지 유행이 됐을까.

구약성서에 나오는 사울은 백성들의 요구에 하나님이 마지못해 왕으로 세워준 이스라엘 최초의 왕이다. 그는 준수하고 신심이 깊은 지도자였으나, 연전 연승하면서 교만해져 하나님을 후회하게 만든다. 법도를 무시하고 제사장 사무엘을 대신해 제사를 행했고, 전쟁터에서 적군을 전멸하고 노획물도 챙기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 그는 진정한 참회를 외면하고 정적인 다윗을 죽이는데 몰두하다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초심을 져버린 업보를 잘 보여준다.

초심을 지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듯이, 해마다 각오를 새로이 하는 년초의 결심조차도 지켜내기가 어려울진 대, 수십 년을 처음의 마음가짐과 자세로 성심을 다하기가 어찌 말처럼 쉽겠는가. 특히나 갈수록 영역이 넓어지고 막강해지는 권한에 자부심과 자만이 생겨 도취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초심이란 온데간데 없어지는 것이다.

검사로, 판사로, 또 경찰관으로 임용되면서 국민을 하늘같이 섬기고 봉사하겠다는 공복의 자세를 선서하지만, 차츰 국민이 어리석게 보이고 함부로 대해도 될 존재들로 여겨지는, 의식 속의 ‘신분역전’ 현상이 벌어진다. 정론직필을 결심했던 기자가 회유와 권력에 굴복해 ‘기레기’소리를 듣고, 페스탈로치를 신봉했던 교사가 학생 차별에 익숙해지고 학부모들 향응에 넘어간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외친 의사, 나이팅게일을 품었던 간호사에게 언젠가부터 환자는 시혜의 대상으로, 돈벌이 수단으로도 변질된다. 안수받으며 하나님의 종으로 충성하겠다 맹약했던 목사와 장로들이 자기도 모르게 성도들의 상급자로, 교회의 주인으로 거들먹거리는 변심도 얼마든지 본다.

그만큼, 시종여일(始終如一), 초지일관(初志一貫)의 삶이란 참으로 어렵고 힘든 도정이고 또한 성취할 귀한 가치이기도 하다.

사서삼경(四書三經) 중 시경(詩經)에는 옛 군왕들에게 진언했다는 “미불유초 선극유종”(靡不有初 鮮克有終: 시작은 쉬울지 모르나 유종의 미는 어렵다는 뜻)과 “행백리자 반구십”(行百里者半九十: 백리를 갈때 구십리가 반으로 여겨지듯, 마무리가 중요하다는 뜻) 이라는 말이 있다. 특히 지도자들에게 초심을 잃지말고 노력하라는 훈계라고 하겠다.

이번 총선을 돌아보면 초심과 변심을 지켜보고 준엄하게 던진 표심과 민심을 읽게된다. 대통령과 정부의 무지막지한 변심에 뿔이난 민심이 그야말로 혹독한 심판의 표를 던졌음이 드러났다. 많은 국회의원들은 초심을 잃어버린 오만의 업보로 공천 혹은 경선에서 탈락하는 징벌을 받았고, 선거에서 표를 얻지못해 쓴잔을 마시고는 뒤늦게 후회하는 구차스런 몰골들도 보여준다.

그렇다고 당선자 모두가 초지일관의 평가로 영예를 얻은 것은 물론 아니다. 혹은 재수가 좋아서, 어떤 이는 유권자를 기막히게 속여서 표를 모은 정치꾼도 있을 것이다. 어느 경우든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선거의 가르침을 실감했음에는 틀림없다고 보아, 앞으로 4년간 과연 어떤 자세로 국정과 의정활동을 하는지에 향후의 정치적 생명과 행로가 좌우되리라는 것도 자명하다.

총선결과를 받아든 집권세력은 과연 개과천선할 것인가. 민심을 엎고 정권심판을 공약한 야당은 다수 국민의 여망을 얼마나 충성스럽게 받들어 실행해 나갈 것인가. 지금의 초심이 지켜지는지를 국민들은 다시 냉철하게 감시해 나갈 것이다.

[목회 칼럼] 순종과 영성

● 칼럼 2024. 4. 15. 06:31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순종과 영성

 

송민호 목사 <토론토영락교회 담임목사>

 

영성하면 꽤나 대단한 단어로 떠오릅니다. 무엇인가 추상적이고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목표처럼 보입니다. 반면에, 순종이란 단어는 조금 더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렇다고, 순종이 쉽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저 단어의 의미가 좀 더 빨리 이해된다는 말입니다. 순종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대로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이 단어는 ‘듣다’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순종을 직역하면 ‘아래에서 듣다’이고 불순종은 ‘옆에서 듣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 아래 자세를 낮추고 말씀을 듣는 사람이고, 불순종하는 사람은 옆에서, 거슬러, 혹은 대항하며 듣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않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이유는 교만함입니다. 주님의 뜻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내 생각을 앞세우며 관철하려는 마음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 대표적인 케이스가 사울 왕입니다. 사무엘 상 15장에 보면 분명히 아멜렉군과 모든 소유를 진멸하라고 하셨는데, 사울은 1) 아멜렉 왕 아각을 과시 목적으로 생포했고 2) 흠 없는 소와 양들을 전리품으로 가져왔습니다. 사울의 속셈을 알 수 있습니다. 생포한 아각을 백성 앞에서 과시하며 자신의 인기를 올리려 했고, 전리품을 가져와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옆에서 들으며 거슬러 대항한 태도였습니다.

결국 사울의 종말은 비참했습니다. 전쟁에서 패배하자 사울은 자기 칼로 자결하였고, 그의 부하도 따라 자결합니다(삼상 31:4-5). 우리는 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하고,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순종은 나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나의 생각이 옳게 보여도, 먼저 무릎 꿇고 겸손히 주님의 뜻을 구하며, 나의 교만한 마음을 뒤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잡히시던 날 밤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눅 22:42). 십자가 처형을 눈앞에 두고 순종하며 드리신 기도였습니다. 영성이란 단어는 좀 거창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순종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단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순종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순종하지 않으면서 믿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편집인 칼럼-한마당] 그들만의 세상을 사는 자들과 '심판'

 

 

유튜브가 그야말로 ‘만연한’ 시대다. 사람들의 취향도 관심사도 천차만별이다 보니, 별별 기이한 것들이 많아서 짭짭한 ‘간접경험’의 재미를 주기도 한다.

얼마전 우연히 ‘500억 초특가 펜트하우스’라는 제목에 호기심이 생겨 도대체 얼마나 엄청난 집일까 클릭해 보았다. 서울 서초동에 있다는 이 아파트는 영화관과 수영장은 물론, 무려 핵 대피시설까지 갖췄다고 한다. 차량을 지하주차장이 아니라 고층의 집안에 주차하는데, 외제차 여러 대가 거실 옆에 2~3층으로 서있다.

놀라운 세상이다. AI 알고리즘 탓인지, 서울 강남 일대에 수두룩하다는 수백억대 초고가 아파트와 빌라들의 호화로운 실태가 줄줄이 이어진다. 마치 한국이 아닌 별세상을 구경하는 것만 같다.

평범한 월급쟁이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황제적 삶’ 들이다. 핵전쟁이 나도 끄덕없다니, 그들에게 안보가 위기라는 말이 들릴 리가 없다. 경제가 어려운지 민생이 폭망인지, 대파 한 단이 얼마인지에 관심은 있을까. 아마 종부세· 재산세 깎아준다는 말에는 솔깃할지 모르나, 전세 사기당해 울부짖는 사람들, 반지하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새벽부터 심야까지 등짐을 지다 못해 목숨까지 끊는 사람들의 신음소리는 딴 세상의 일일 것이다.

서울의 강남 일대는 한국의 부와 권세를 대표하는 지역이다. 권력기관인 법원, 검찰, 변호사들도 몰려있는 법조타운도 거기다.

지금 한국 권력의 ‘모든 것’으로 통하는 서초동 검찰의 위세와 공포는 하늘을 찌른다. 눈엣가시들의 없는 죄를 만들고, 작은 죄는 부풀린다. 무소불위 압수수색을 야당대표의 경우 3백번 넘게 했다 하고, 언론자유의 ‘성역’에도 압색에 거침이 없다, 그런데, 증거가 없어 쩔쩔매거나 용두사미이기 일쑤다. 중대 경제범죄인 주가조작과 명품백 수수 같은 명백한 권력부패는 모른 척 뭉갠다. 총선 공천에 꽂으면 된다는 곳들만 골라 검찰 수족들을 심었다고 한다. 비례 뒷번호라고 발끈한 검찰수사관 친구를 즉시 대통령특보 자리를 만들어 달래주는 민첩성을 보였다. 자기 사람 제편은 끔찍이 챙기는 조직사랑과 내로남불의 세계, 바로 정치검사 그들만의 세상이다.

법원은 민주와 민권의 최후 보루라고 한다. 정말 그런가. 최근 권력 편에 선 판결들이 잇달고 있다. 검찰 눈치를 보는 이상한 재판도 논란이다. 서민들 삶과는 동떨어진 상식 밖의 선고에 ‘유전무죄, 유권무죄’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반면 사법농단으로 법원신뢰에 먹칠한 전임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은 신묘한 법기술로 재판을 질질 끌더니 하나같이 무죄로 풀려나 제식구 감싸기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그들만의 강고한 성 안에서 사는 방식이다.

다선 국회의원들이 공천과 경선에 밀리자 탈당한 사람, 아예 당적을 바꿔버린 사람도 있었다. 여당은 ‘검찰 캐비넷’이 무서웠는지 입들을 닫았지만, 야당은 성토로 시끌벅적 했다. 하나같이 “내가 누군데 졸 취급이냐, 사당(私黨)돼 사천(私薦)을 한다”고 화를 냈다. 언론은 공천파동이라고 대서특필, 지지율 급락을 보도했다. 그런데 공천이 끝난 뒤 지지율이 급등한다고 한다. 욕하며 탈당해 변신한 후보들은 하나같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총리와 당대표까지 지냈던 사람은 당을 새로 만들어 제1당이 될 것이라고 큰소리쳤는데, 현재로선 단 1명의 당선자를 낼지도 불투명하다. 고향 땅에 출마했지만 정치 후배에게 큰 지지율 격차로 망신을 당하는 참이다. 어느 정치평론가는 “평소 만나 어울리던 사람들이 그에게 망상을 현실로 착각하게 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니까 정치인이 국민과 당원의 소리는 듣지않고 주변의 듣기좋은 그럴 듯한 말에 도취되어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고 세상을 ‘우습게’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부 기득권화한 정치인들이 자신을 뽑아준 국민은 안중에 없이 그들만의 세상을 산다는 이야기다.

선거철에 특히 첨예해진 ‘그들만의’ 이기적 악습이 만드는 위기의 심각성을 본다. 권력의 선택적 행사와 편향언론의 행패, 적개심 넘친 갈라치기 언사, ‘강남불패’니 영호남 지역색 등등…거기에 부자도 판검사도, 정치인도 의사도 성직자까지, 모두가 그들만의 세계에 빠져살면 그야말로 각자도생 그 자체다. 특히 정치인과 지도자가 자기들만의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독단과 폭주로 흐를 때 얼마나 세상이 위험하고 살벌한가를 절감한 나머지 선거심판의 철퇴를 청하는 것이다.

부활절을 앞두고 고난주간을 지나고 있다. 예수님은 존귀한 하늘나라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찾아와 병약자와 억눌린 자들의 친구가 됐다. 그러나 ‘그들만의 세계’에 살던 이스라엘의 지배층 바리새·사두개인들 서기관 제사장들은 그를 적대시하고 핍박하여 십자가에 매달았다. 천상에서 지상에 내려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한,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삶을 묵상하는 절기다.

성경은 공감능력을 강조해 말씀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자기들만 누리는 세상은 위험하다. 서로 어울리며 돌보고 살아야 안전하게 행복을 향유하며 발전도 기대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세상을 이해하고 함께 품고 섬길 때, 비로소 공동선의 비전에 다가갈 수 있다는 말이다. 선거는 그에 합당한 정치인과 정당을 선택하는 일이다.

[목회칼럼] 사순절에 시도한 헌혈

● 칼럼 2024. 3. 31. 12:20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사순절에 시도한 헌혈

김덕원 목사 <열린교회 담임목사>

 

작년 이맘때 쯤, 그러니까 사순절 어느 날, 나는 헌혈 부스에 누워 도우미의 만족해 하는 얼굴을 올려보고 있었다. 기대했던 것 보다 훨씬 쉽게 헌혈 팩이 채워지고 있다는 것을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사실은 접수하고 헌혈 적합성 검사를 할 때부터 모처럼 튼실한 헌혈자를 발견했다는 듯 미소를 머금은 직원들을 보면서 괜히 어깨가 으쓱 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가느다란 호스가 터지기라도 할 듯 내 심장은 힘차게 펌프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교회는 해마다 되풀이 되는 습관처럼 지나가는 사순절이기 보다는, 뭔가 의미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면서, 헌혈 캠페인을 시작했다. 헌혈차를 부를까, 헌혈하는 곳을 다같이 방문할까, 다양한 생각들을 해 보았지만, 캐나다의 행정 특성상 각자 가까운 장소를 선정하여 예약하고, 헌혈한 다음에 사진을 올려 서로 격려하기로 결정을 했다.

오래 전 한국에 있을 때, 헌혈차를 도로에 세워두고, 행인들을 억지로 끌고 가던 때와는 달리, 예약도 쉽지 않았고, 시간 맞추기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예약된 날짜에 현장에 와 보니, 수많은 민족이 모여 사는 도시답게, 각양 각색의 서로 다른 인종들이 같은 목적으로 팔을 걷어 붙이는 것을 보는 것은 참 가슴이 벅차 오르고, 행복한 일이었다. 겉 모습은 그렇게도 다른데, 그 안에는 서로 주고 받고 할 수 있는, 그러니까 공유할 수 있는 같은 종류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니……

옆 부스에 미리 채혈을 시작한 동양계 한 아가씨는 팔을 주무르기까지 하면서 마지막 몸부림을 치고 있는 듯 했고, 또 저 쪽에 있는 중년의 한 남자도, 손에 든 공을 연신 주무르며, 가뭄에 깊은 샘 두레박질이라도 하는 듯 열심을 내고 있다. 감사하게도, 늦게 들어왔지만, 누구보다도 빠르게 헌혈 팩을 채운 나는 도우미의 칭찬과 박수를 받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내 것을 나눠 주면서 이렇게 기쁘고 행복할 수가 있을까?

그런데 일주일쯤 지나 헌혈을 관리하는 기관으로부터 일곱 장이나 되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편지를 읽어 내려가다 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각설하고, 편지의 요지는 “성의 있게 헌혈에 참여한 것은 고맙지만, 다음에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었다. 상당수의 한국인들은 예방접종을 통해서 항체가 생기거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증세가 스쳐 지나가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되면 피에 그 흔적이 남기 때문에 안전상 피를 수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올 해도 여전히 같은 캠페인이 진행되고 있지만, 나는 참여할 수가 없다. 단 한 사람을 위해서조차 피를 공유할 수 없는 부족한 나를 보며, 이천 년이 넘도록 세상에 태어난 모든 생명에게, 더 새로운 새 생명을 나눠주시는 주님의 피의 효력이 그저 놀라운 사실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을 뿐….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 2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