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정치검찰에 새 이름을

● 칼럼 2012. 3. 10. 19:30 Posted by SisaHan
노무현 정부 초기 ‘검사와의 대화’ 직후 ‘검사스럽다’는 말이 유행했다. 지금도 네이버 전자사전을 치면 ‘행동이나 성격이 바람직하지 못하거나 논리 없이 자기 주장만 되풀이하는 데가 있다’라는 설명이 등장한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단연 ‘정치검찰’의 활약이 눈부시다. 별명도 따로 지어줘야 한다. 뭐가 어울릴까? 
정치검찰의 특징부터 보자. 우선 ‘줄서기’에 능하다. 어디에 ‘힘’이 있는지 귀신같이 아내는 것은 필수.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해야 살아남는다는 게 몸으로 익힌 생존 철학이다. 그래서 이 정부 초기 인사권자의 의중을 헤아려 끈 떨어진 이전 정권 인사들에게 그렇게 가혹하게 칼질을 해댔다.

일단 가야 할 길이 보이면 물불 가리지 않는 것도 이들의 특징이다. 겁없이 덤비는 자들에 대해선 정치권이고 언론계고 영역 불문에다 수단방법도 가리지 않는다. 안마시술소 카드사용 내역도 무기로 삼고, 사돈의 팔촌까지 친인척을 불러다 조지는 건 기본이다. 형평이고 정의고 다 부질없는 소리, 남들의 손가락질에도 눈 질끈 감고 잠시의 쪽팔림만 참아내면 된다. 몸을 던진 만큼 응분의 보상이 주어지는 ‘기브 앤 테이크’는 이 바닥 거래의 기본이기 때문. 그래서 <PD수첩> PD들을 기소한 부장검사는 서울중앙지검과 대검의 요직을 꿰찼고, 정연주 한국방송 사장을 배임죄로 엮은 부장검사도 다음 인사에서 법무부로 영전했다. 그 위의 차장검사들 역시 법무부와 대검의 요직으로 발탁돼 갔다. 무리한 수사로 무죄가 나와도, 조직 내부에서조차 손가락질을 해도 확실하게 뒤를 보장받았다. 이보다 더 믿을만한 거래가 어디 있겠는가.
 
‘조직’에 대한 충성심이 남다르다는 것도 이들의 특징. 조직이 침탈당하는데 가만있으면 칼잡이의 도리가 아니다. 이 한몸 바쳐서라도 막아야 한다. 검찰 조직 손보겠다는 야당에 적극 동조했던 여당 의원을 겨냥해 총선 코앞에 성매매 사건을 다시 들춰내는 지저분한 일에도 망설임이 없다. 비명에 간 전직 대통령 딸을 향해 욕먹을 각오 하고 다시 칼을 빼든 것도 다 조직 보호를 위한 일이다. 총선 뒤 우리 조직을 대대적으로 손보겠다는데 그런 야당을 그대로 둘 수는 없는 일. 칼잡이 최고수들이 모인 대검 중수부가 총대를 메는 게 당연하다. 
자기 밥그릇, 즉 ‘나와바리’를 넘보는 자는 피를 봐서라도 보복하고, 이권 지키려 힘센 권력에 줄 대는 건 당연시하며, 큰 칼을 주무기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이들과 꼭 닮은 집단이 대한민국에 딱 하나 있다. 어렵다는 사법시험 패스하고, 때로는 남의 눈총을 받아가며 넉넉잖은 월급에도 밤샘을 일삼아 하는 대다수 검사들까지 매도될까 차마 그 이름은 붙여주기가 꺼려진다. 하지만 무모한 칼질 끝에 부엉이바위 아래 아직도 핏자국이 선연한데 3년상도 지나지 않아 그 유가족을 인질로 잡겠다고 다시 나선 정치검사들은 검사로서의 금도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염치도 상실했다고 나는 본다.
 
‘조폭 검찰’, 그들에겐 그 이름조차 아깝다. 영화 <친구>의 조폭 두목(유오성)도 “쪽팔리기 싫어서” 구차한 변명 늘어놓지 않고 중형을 감수했다. 조폭 사회에서도 선을 넘거나 의리를 저버린 삼류 조폭에겐 다른 이름을 붙여준다. 양아치라고. 유오성이 선생님한테 맞을 때 내뱉던 그 양아치 말이다. 
그러나 칼도 잘못 쓰면 결국 자기가 당하는 법. 양아치들이 벌건 대낮에 여의도 한복판에 뛰어들어 큰 칼을 마구 휘두르는데 가만히 두고 볼 국민이 어디 있는가. 잠시 겁먹은 것 같아도, 속은 것을 알면 그 칼이 바로 그대들을 향할 것이다.

<김이택 - 한겨레 신문사 논설위원>


[1500자 칼럼] 알을 품은 어미의 꿈

● 칼럼 2012. 3. 10. 19:26 Posted by SisaHan
어쩌면 이렇게도 클까. 특대란을 산 기억이 나서 아침에 달걀 프라이를 하려고 냉장고를 열다가 두 줄로 도열해 있는 알들에 시선이 잡히고 만다. 이 정도 크기면 아무리 몸집이 큰 암탉이 낳았다 해도 산통이 여간 크지 않았으리라. 어쩌면 알 하나하나에 ‘어머니’의 간절함과 소망이 담겨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동료 교사가 귀농을 생각하며 양계장 체험을 써 보낸 이메일을 받고 나서부터이다. 달걀은 달걀일 뿐이지 음식 재료 이상으로는 연상하지 못했는데 자식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산고 끝에 낳은 달걀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바뀌면서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지금은 청년이 된 아들을 분만할 때 3.85킬로그램이 주던 산통이 아직까지 선명한 것처럼 어미 닭들에게도 생명을 품은 알을 낳기 위해서는 그만한 통증쯤은 있으리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24시간 불 밝힌 양계장의 어미 닭 이야기를 글로 쓴 적이 있다. 인간의 끝간 데 없는 탐욕과 이기심과 잔혹함에 대하여, 그리고 그 알 속에 들어있을 암탉들의 불안한 정서와 누적된 피로와 인간을 향한 혐오감을 걱정했다. 나는 그 글을 쓰며 암탉과 수탉의 사랑을 듬뿍 받고 태어난 달걀이 그리웠고, 그리운 만큼 닭장 속의 어미 닭이 낳은 알들이 창백해 보였던 기억이 있다.
그 때문인지 잎싹이라는 이름을 가진 닭 생각이 난다. 동화책 <마당을 나온 암탉>을 읽으며 마당에 흩어져 노니는 닭들을 부러워하는 양계장 철망 속의 주인공 ‘잎싹’의 소망을 듣던 기억에 아마 그럴 것이다. 아무리 목을 길게 내밀어도 빠져나갈 수 없는 닭장 속의 소외된 세상. 그 안에서 내다본 마당의 햇살은 잔인하리만치 따스했고, 사랑 가득한 바깥은 철망 밖의 생명들을 위한 또 다른 세상이었다. 잎싹은 무정란인 줄도 모르는 채 제가 낳은 알을 품 안에 넣어보았다. 맨 살에 닿는 알의 촉감에 무조건적인 애정을 느끼며 껍질 속에서 조그맣게 뛰는 심장 소리를 들을 만큼 잎싹은 엄마가 되고 싶어 했다. 엄마가 되겠다는 헛된 소망에 사로잡혀 애를 쓰는 잎싹이 애처로워 “그건 아무리 품어도 부화할 수 없는 알이야”라고 소리쳐 알려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목숨을 건 탈출 끝에 이해와 사랑으로 인연을 맺은 청둥오리의 알을 정성껏 품어 부화시키는 것으로 잎싹은 철망 안에서부터 지니고 있던 오랜 소망인 ‘어머니’의 꿈을 실현시켰다. 그렇게 태어난 아기 ‘초록머리’는 어미 닭의 지극한 돌봄 속에 자랐다. 언젠가 해야지 하고 미루던 그 많은 사랑의 말들은 가슴에서 꺼내지도 못했는데, 시간은 덧없이 흘러 초록머리를 청둥오리 무리 속으로 떠나 보낼 때가 되었다. 이별을 서운해 하며 떠나는 초록머리에게, 엄마에게는 추억이 있으니까 외롭지 않을 거라고 안심시킨 후 잎싹은 껍데기뿐인 엄마로 주저앉았다. 자식도 떠나 보내고 홀로 살아야 한다는 현실을 두려워하던 엄마 닭은 숨쉬는 것만큼이나 간절한 또 하나의 소망이 제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음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날고 싶다는 소망, 알을 품어 산란하는 어미로서의 사랑만큼이나 소중한 제 꿈이 있었음을 뒤늦게 발견한 것이다.
 
지금 내 앞의 이 달걀을 낳던 어미 닭도 꿈이 있었을까, 있다면 어떤 꿈이었을까. 이루지 못했을 것만 같은 꿈. 그건 어미가 닭장에 갇혀 있으면서 자신의 꿈까지 가두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무정란처럼 부화할 희망이 없는 꿈이었기에 이루지 못했을 수도 있다. 본능처럼 그들 핏속에 흐르는 ‘날고자 하는 욕망’을 어떻게 가두고 살 수 있었을까. 잎싹처럼 어머니가 되고자 하는 소망이 너무 강해서 본래 제가 지닌 꿈을 기억하지 못했을까. 아니면 철망 속의 운명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 자신에게 날개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았던 것일까. 
어미 닭의 소망을 통해 내 안에 아직도 살아있을지 모를 이루지 못한 꿈의 조각들을 들춰본다. 커피를 잔에 가득 담아 아침햇살 가득한 식탁에 앉아 생각한다. 나의 꿈을, 엄마가 되고 싶다는 소망 저 아래 깊숙이 묻혀있을 아득한 나의 꿈을.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협 회원, 한국 문인협회 회원>


[한마당] 방송 장악의 부메랑

● 칼럼 2012. 3. 10. 18:09 Posted by SisaHan
<문화방송>(MBC)과 <한국방송>(KBS), YTN이 한꺼번에 파업에 들어갔다. 방송사들의 동시파업은 1997년 노동악법 반대, 2009년 언론관계법 날치기처리 항의 파업에 이어 세번째다. 4.11 총선을 한달 남짓 앞두고 벌어지는 방송 대투쟁의 뿌리는 이명박 정부의 무리한 방송 장악에 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지난 1월30일부터 시작한 문화방송 노조 파업에 이어, 한국방송 새 노조(전국언론노조 한국방송본부)는 6일 새벽 5시부터 무기한 파업에 들어갔다. YTN 노조는 배석규 현 사장 연임을 결정하는 주주총회(9일)를 앞두고, 8일 아침 8시부터 10일까지 3일간 1단계 파업을 벌인다. 
파업 방송인들의 핵심적인 요구 사항은 ‘공정방송 복원, 낙하산사장 퇴진, 해고자 복직’이다. 사쪽의 공정방송 훼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게 이번 동시파업의 특징이다.
 
한국방송 기자협회는 제작거부 선언문을 통해 “정권에 예민한 뉴스를 회피하고 약자들의 입장을 충분히 대변하지 못했다”고 지난 4년간의 보도 현실을 반성하면서 “이젠 국민의 품으로 돌아가겠다”고 밝혔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집요하게 방송 장악을 시도했다. 대통령의 멘토라 불린 최시중씨를 방송통신위원장에 임명한 게 신호탄이었다. 이 대통령 선거캠프 특보였던 구본홍씨를 YTN 사장에 임명했고, 정연주 당시 한국방송 사장을 감사원, 검찰까지 동원하며 불법적으로 내쳤다. 엄기영 사장이 중도 퇴진한 문화방송 사장엔 친한나라당 성향을 보여온 김재철씨를, 한국방송 사장엔 이병순씨에 이어 이 대통령 선거참모였던 김인규씨를 앉혔다. 
이들 방송사에선 크고 작은 제작자율성 침해 논란이 끊임없이 일었다. 보도·제작 책임자들은 정권에 불리한 보도나 제작 아이템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4대강 문제처럼 현 정부의 실정을 짚는 기사들을 공영방송에선 제대로 볼 수 없었다”고 한국방송의 한 기자는 토로했다. 지난 4년은 방송 제작현장의 자율성을 보호하는 제도적 장치들이 허물어져간 시기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게 문화방송의 국장책임제다. 경영진의 자의적인 보도·제작 관여를 막기 위한 이 제도가 김재철 사장 취임 이후 경영진의 일원인 본부장이 책임지는 구조로 바뀌었다. 결과적으로 사장의 통제 권한이 훨씬 커졌다. 공정방송을 위한 노사간 협의 통로도 유명무실해졌다.
 
취재 현장에선 방송사의 이니셜을 따서, 문화방송은 ‘엠비(MB)씨’로, 한국방송(KBS)은 ‘김 비서’로 불릴 정도였다. 방송사 파업의 구호가 경영진 퇴진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방송 독립성과 공정성 훼손을 주도하는 이가 결국 최고경영진이라고 보는 것이다. 
방송사 경영진은 강경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여기엔 청와대의 상황 인식도 깔려 있다고 정치권과 방송계에선 분석한다. 임기 말에 처한 청와대로선, 어느 한곳이라도 무너지면 다른 방송사들까지 연쇄적으로 경영진을 교체해야 하는 처지에 몰릴 걸 우려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방송파업은 지난 4년동안의 후유증에 다름 아니다. 이는 이명박정권이 스스로 만들어낸 부메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번 사태를 통해 정권이 방송을 장악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방송장악이 결코 정권유지나 창출에 도움이 되지 않을뿐 아니라 그런 생각을 해서도 안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미디어의 진화는 소통방법의 혁신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권력의 주구(走狗)가 되는 언론은 없는 게 훨씬 낫다. 방송전파는 국민이 공유하는 재산이다. 방송의 공정성이 강조되는 이유다. 방송 총파업은 그 증거를 스스로 만들어낼 의무를 안고 있다.


[한마당] 신문의 신뢰

● 칼럼 2012. 3. 5. 20:42 Posted by SisaHan
인터넷 고발전문 사이트인 <위키리크스>는 지지난해 세상을 뒤흔든 대특종을 앞에 두고 <뉴욕 타임스> <르몽드> <가디언> <슈피겔> <엘 파이스> 다섯 매체에 손을 내밀었다. 독차지할 수 있는 과실을 함께 누린 것이다. 줄리언 어산지가 추려낸 다섯 매체를 꿰는 공통어는 신뢰다. 
이는 위기가 수식어가 된 지 오랜 신문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인터넷과 SNS 시대, 신문과 같은 전통매체의 고민은 깊다. 속보 경쟁도 의미를 잃어간다. 탐사보도는 돈이 많이 들어간다. 황색 저널리즘을 추구하기엔 온라인에 재미있는 게 너무 많다. 그나마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해법은 좀더 예민한 잣대로 사실을 준별하는 것이다. 인터넷의 정보 포화에 멀미를 느끼는 이들에게 지갑을 열게 할 유용함을 신뢰 아닌 다른 것에서 찾기는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현실은? 신뢰는 커녕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는 보도들이 잇따른다. 

감사원은 지난 2월26일 카메룬 다이아몬드 광산 의혹에 대한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중앙일보>는 다음날 지면에서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과 통화한 내용을 이렇게 전했다. “제가 언론 경험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수치를 내는 어설픈 짓을 하겠느냐.” 비언론인인 박 전 차관조차 어설프다고 폄하한 그 보도자료를 중앙은 어떻게 보도했을까. 경제면 4단 크기로 후하게 대접했었다. 업체 이름도 제목에 달았다. 이 보도자료를 접했던 한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통상적인 외교부 보도자료와 너무 달랐다. 수치가 자세히 적시되는 등 경제부처 보도자료처럼 너무 친절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해 다루지 않았다.” 

“그 체형에서 나오기 힘든 MRI.” “박원순 아들이 낸 MRI, 본인 것 맞다.” <동아일보>의 지난 2월22일과 23일치 1면 머리기사 제목이다. 전날 한껏 의혹을 부풀린 뒤 바로 다음날은 강용석 의원이 ‘무리한 주장으로 자충수를 뒀다’며 한발 뺐다. 그렇게 중요하다는 박 시장 아들의 체형 확인 없이 기사를 썼다가 폭로가 엇나간 것으로 드러나자 이번에는 공격의 화살을 매몰차게 강 의원에게 돌린다. 

<조선일보>가 고침까지 낸 김정남 이메일 관련 보도(지난 1월17일치 1면 머리기사)는 어떤가. 조선은 보도 사흘 뒤 ‘<월간조선>이 요약해 본지에 전달’ 운운하며 주로 자매 월간지에 책임을 떠넘기는 정정기사를 냈다. 하지만 월간조선 기자가 쓴 허위의 텍스트만 보더라도 ‘김정남 “천안함, 북의 필요로 이뤄진 것”’이라는 조선의 1면 머리기사 제목이 나오기 어려워 보인다. 
「천안함 침몰 사건에 대해서는 “북조선 입장에서는 서해5도 지역이 교전지역이라는 이미지를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핵, 선군정치 모두 정당성이 부여되는 것”이라고 했다」가 김정남이 언급했다는 해당 기사 내용이다. 김정남 이메일 내용을 직접 발췌한 대목에 천안함이란 단어는 없다. 제목처럼 김정남이 북의 소행이라고 단정해 밝혔다고 해석하기도 무리해 보인다. ‘북이 했다면 그런 의도였을 것’으로 보는 게 상식적인 해석일 듯하다. 하지만 조선일보의 제목은 달랐다. 사실에 대한 존중 없이 독자의 신뢰를 붙들 수 있을까. 

조선일보가 공들여 만들고 있는 지면이 있다. ‘신문은 선생님’이란 신문활용교육(NIE) 면이다. 그 누구도 선생님이 될 자격이 있지만, 정말 신문은 선생님이 되어야 할 이유가 많다.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신문에 실린 내용은 참이다. 정직은 학생뿐 아니라 선생님에게도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내가 일하는 곳을 포함해 모든 신문들이 부끄럽지 않게 선생님이란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길 정말 바란다.

<한겨레신문 강성만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