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물론 유럽이나 아시아에는 한국인 유학생과 연구원, 교수들이 아주 많다. 외국에서 연구하는 한인 연구자들은 한국의 과학발전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국내 과학정책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으며 한국의 과학기술이 질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나름의 원인분석과 대안을 가지고 있다. 그들과의 대화는 한발 떨어져서 대한민국의 현실을 바라보는 경험을 제공해주곤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사랑은 짝사랑이다. 한국에선 그들이 좋은 연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하거나,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서 세계 무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지원하려고 생각조차 않고 있다. 재외 연구자들을 어떻게 지원해야 할지 제도적인 절차도 미비하다.
우리 정부가 창피하게만 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냉소하는 연구자도 여럿 봤다. 어리석게도 이번 정부는 과학기술부와 정통부를 없앴다. 또 한국 대학들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며 거액의 연구비를 지원했지만, 그 돈의 대부분은 유명 대학의 외국인 교수들에게 몇달만이라도 한국에 머물러달라고 애걸해 체류비로 사용됐을 뿐이다. 더 절실한, 어린 유학생이나 젊은 연구원이 발돋움하는 데 필요한 지원은 별로 없다.
 
외국에서 연구하는 유학생, 한인 연구원들이나 교수들도 우리 사회의 일원이다. 그들이 세계의 과학무대에서 좋은 연구를 하면 그 자체로 우리나라의 과학역량이 성장한다. 그들은 기꺼이 우리나라 과학자들이 세계무대로 진출하는 데 좋은 다리 역할을 해줄 것이며, 우리는 그들이 이 살벌한 세계무대에서 행복하게 과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의무가 있다.
국제학회에서 한국 연구자들이 더 높은 위상에서 연구 리더가 될 수 있도록 국제학회를 지원하는 일, 대규모 글로벌 연구 프로젝트에 국내외 한국 과학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 재외 한인 과학기술자 사회가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 그들에게 한국에 있는 적절한 공동연구자를 찾아주는 일, 재외 한인 과학자를 국내에 알리고 국내 학자들을 재외 한인 연구자들에게 소개하는 일 등이 무엇보다 절실히 필요하다. 
그나마 미국 동부 아이비리그에 속한 대학들은 비슷한 기회를 제공받기도 하지만, 유럽이나 아시아 연구자들은 정부의 지원정책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돼 있다. 중국이나 일본은 자국의 과학자들로 하여금 글로벌 프로젝트를 주도하게 해 세계적 위상을 갖도록 도와준다. 이런 형국을 지켜볼 때면, 옆집 잔칫상을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는 이웃처럼 우리의 처지가 한없이 처량하다.
 
이제 우리 정부도 글로벌 연구계획에 연구비를 지원해 우리 과학자들이 참여케 하고, 국제학회에서 한인 과학자들이 더 높은 위상으로 학술활동을 주도할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이 절실하다. 일례로 신경과학 분야만 해도 거대 신경망을 공동연구하는 ‘신경정보학 글로벌 프로젝트’가 한창인데, 정부의 무관심으로 우리 과학자들은 참여할 기회를 놓쳤다. 국제학회에서 젊은 유학생들과 식사 한끼 같이 먹는 ‘한국 과학자의 밤’ 행사를 위해 교수들끼리 몇달 전부터 스폰서를 구걸하는 일을 후배들에겐 물려주고 싶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기초과학 강국인 스위스에 ‘한국인 과학기술자협회’가 생긴다는 소식은 무척 반갑다. ‘스위스 한인 과학자 사회’는 앞으로 한국과 스위스의 과학기술 연구협력에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다. 우리 정부는 그들의 계획, 야심찬 아이디어를 묵묵히 지원만 하면 된다. 양국 공동 심포지엄을 핑계로 방문해 축사와 식사만 하고 돌아오는 일, 과도한 보고서 작성으로 귀찮게 하는 일만 안 하면 된다.

<정재승 - KAIST 교수 / 바이오 및 뇌공학과>


대한민국의 기득권층이 여전히 일제하 친일·매판 세력에서 독재체제 비호 세력으로 이어지는 혈통을 갖고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이 치명적인 약점을 호도하기 위해 이들은 끊임없이 반공·냉전 이데올로기와 억압체제를 강화해야 했고, 역사와 사실을 조작하고 학문을 왜곡해야 했다. 어제 개관한 박정희기념관은 바로 이들의 숙원사업이었다. 기억을 왜곡하려는 이들의 노력은 그렇게 집요했다.
현직에서 물러난 대통령을 따르는 이들이 기념관을 짓고, 각종 전시를 통해 그의 업적과 유지를 알리려는 건 나무랄 일이 아니다. 시행착오를 경계하고 치적은 승계하는 뜻깊은 교육의 장이 될 수 있다. 이런 취지로 김대중도서관은 이미 문을 열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기념관도 추진중이다. 독재자라고 해서 박정희기념관 자체를 매도할 순 없다.
 
문제는 그곳에 전시될 기념의 내용이다. 오로지 진실의 원칙에 따라야 하지만, 최소한 일방적 미화와 찬양을 위한 왜곡은 없어야 한다. 왜곡의 전당이 되어선 안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박정희기념관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 치적만을 발췌·과장해 군사쿠데타와 유신독재 등을 결과적으로 미화하고 있는 것이다. 기념사업회의 말대로 1960~70년대를 모르는 젊은 세대가 이 전시만 본다면, 박정희는 민족중흥과 근대화의 선구자로만 각인되기 십상이다. 올여름 개관한다는 도서관 역시 개인의 소장품이나 국무회의 안건, 친필 지시 등을 수집·정리한다고 하니, 박정희 미화에 온전히 바쳐진다. 이런 왜곡의 전당을 짓는 데 국민의 혈세와 시민의 재산이 투입됐다는 게 어리둥절할 지경이다.
 
유산이나 추종자들의 성금으로 지은 기념관이라면 미화 혹은 칭송을 한다 해도 그에 대한 평가는 개인의 몫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기념관엔 정부 예산이 178억원이나 투입되고, 금싸라기 터 5260㎡는 서울시가 무상 임대한 땅이다. 500억원은 전경련이 회원사로부터 기부받았다지만, 이 돈 역시 엄격히 말하면 각 기업의 수많은 주주들의 재산이다. 공공의 재산인 것이다. 기념사업회가 서울시에 기부채납하기로 한 것도 그런 까닭이었을 게다. 그렇다면 전시 내용은 바로 그런 공공성에 걸맞아야 한다.
시민은 혈세가 독재자의 망령을 되살리는 데 이용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국민의 기본권을 유린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친일매판·독재 추종 세력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는 데 이용되는 것도 원치 않는다. 정부나 서울시는 기념관이 왜곡의 전당이 되지 않도록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


‘인사가 만사’라더니 ‘망사’가 됐다. 이 말은 이명박 대통령이 인사를 할 때마다 따라붙은 상투어가 된 지 오래다. ‘베스트 오브 베스트’라고 자화자찬했던 첫 각료 인사가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출신)으로 조롱을 받은 것부터 시작해, 최근 첨단 정보기술 분야를 다루는 방송통신위원장 후보로 70대 고령에 고려대 출신인 이계철씨를 지명한 것까지, 이 대통령의 인사는 하나같이 낙제점을 면하기 어렵다.
 
여기에 또 하나의 이해할 수 없는 인사가 더해졌다. 20일부터 열리는 공관장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귀국한 한덕수 주미대사가 15일 이 대통령을 만난 뒤 갑자기 사의를 표명했다. 알고 보니 민간인이어야만 입후보 자격이 있는 무역협회 회장에 취임시키기 위한 즉흥극이었다. 후임 대사가 정해지지도 않고, 한 대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벌어진 일인 것을 보니 뭔가 급박한 사정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 정부가 그토록 중요성을 강조해온 대미외교를 고려한 인사는 아니라는 점이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이 대통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 발효 이후 실무적으로 뒷받침을 해야 할 무역협회의 수장을 찾다 보니 일이 이렇게 풀렸다고 말했다. 납득하기 어려운 설명이다. 무역협회에서 하는 일이 자유무역협정을 뒷받침하는 것이 전부도 아닐뿐더러, 대미외교보다 무역협회장을 우선시한다는 얘기인데 소가 들어도 웃을 일이다.
 
그것보다 민주통합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대해 대대적인 공세를 펴고 이 문제가 4.11 총선에서 쟁점으로 부각할 것에 대비해 ‘FTA 전도사’로 불리는 한 대사를 긴급 차출했다는 분석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한마디로 노무현 정권 때 총리 출신인 그를 내세워 같은 노 정권의 총리 출신인 한명숙 대표가 이끄는 민주통합당의 반FTA 공세를 막아보자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라는 것이다. 한 대사야 ‘나는 자유무역의 확대를 위해 시종일관 노력해온 사람’이라고 변명하겠지만, 이질적인 정권을 넘나들며 부역하는 그의 화려한 변신을 보는 눈이 고울 리 없다.
 
가장 큰 문제는 이 대통령의 천박한 인식이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 내년부터 중국을 이끌어 갈 시진핑 부주석이 미국을 방문해 한반도 문제를 비롯한 세계 현안에 대해 한창 탐색하고 있는 중이다. 대사에게 특명을 내려 두 나라가 한반도 문제 등과 관련해 어떤 생각을 교환하는지 면밀히 관찰하고 분석을 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라고 해도 시원치 않을 판이다. 소탐대실의 망국적 인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500자 칼럼] 가족이란 울타리

● 칼럼 2012. 2. 26. 17:48 Posted by SisaHan
아들 내외와 한시적인 동거를 하고 있다. 매사 자유로움을 구가하는 신세대와 홀가분함을 누리고픈 구세대와의 조합인 셈이다. 새 식구를 맞으면 무조건 2년은 함께 살겠다고 별러왔던 우리부부의 오랜 바램에 아이들도 순순히 응해 주었다. 막상 우리의 그늘 아래 녀석들을 들이고 나니 고유의 영역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물리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시간은 물론 사유의 공간까지 침입해 들어왔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일 년 남짓 동거하는 동안 신혼부부는 자리를 잡아가는 듯 하고 우리내외는 새로운 트랜드에 적잖이 당황하기도 한다. 온 식구가 몸으로 부딪혀가며 미운 정 고운 정을 쌓아가고 있는 지금 새삼스레 우리 가족의 향방을 되짚어 본다.
 
우리 이웃에는 늘 눈여겨보는 두 가정이 있다. 외딴섬처럼 동네 한가운데 홀로 떠 있는 한 백인 중년 여성의 가정과 삼대(三代)가 한집에서 오순도순 살아가는 인디언 가정이 그것이다. 후자의 가정은 요즘 심심찮게 보이는 단출한 삼대 가족이 아니라 미성년자 다섯 남매를 둔 젊은 부부가 어머니와 두 동생을 거느린 대 가족구성이다.
나는 한 때, 가족들 부양으로 허리가 휠 이 대가족의 젊은 부부를 가엾게 생각하면서 홀로 여유를 부리며 살아가는 외딴섬 백인 여성을 동경한 적이 있다. 최소한 그들의 일상을 세심하게 관찰해 보기 전에는 그랬다.
내가 일시적으로나마 동경했던 그녀는 훤칠한 키에 중년의 나이임에도 군살 한 점 없는 몸매와 특별한 직업이 없으면서도 탄탄한 경제력, 무엇보다 부양가족에 대한 책임이나 의무 없이 홀가분한 삶을 영위하는 모습이었다. 생업과 집안 일로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간이 변변치 않았던 나는 모든 시간을 자기 자신에게만 쏟을 수 있는 그녀가 자연히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매사 여유롭게 비춰지던 그녀의 환경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늘 행복과는 거리가 먼 표정이다. 정원손질을 할 때나 집수리를 할 때도 항상 혼자다. 집 치장은 동네에서 가장 부지런히, 산뜻하게 하면서도 함께 즐길 가족이 없다는 게 슬퍼 보이기도 한다. 그녀의 집은 낮엔 사람들의 왕래가 없어 적막하고 밤엔 전등을 켜는 일이 드물어 늘 암흑이다. 더구나 가족들이 모이는 크리스마스나 부활절에도 낯선 차량이 주차해 있는 광경을 본 적이 없다. 얼굴에 냉기를 띄고 홀로 나다니는 그녀를 보면 가족이란 울타리를 엮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반면 인디언 가족은 시시때때 북적거린다. 그들의 생활은 부유하지 못하고 주거환경 또한 깔끔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열 명의 식구가 넘나드는 출입문은 언제나 열린 상태다. 또한 그들이 물어 나르는 소식으로 집안은 늘 활기가 넘친다. 잠시 내가 가엾게 여겼던 그 집 가장의 팔뚝과 가슴언저리에는 다섯 아이의 생년월일과 이름 문신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가늠할 수 있다. 이런 따뜻한 가정에서 동거하는 열 식구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정이 뚝뚝 묻어날 것 같은 탐스러움이 얼굴 가득 스며있다. 만약 우리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간다면 동행하고 싶은 이웃 일 순위로 이들을 꼽는다. 
언급한 인디언 가정은 우리의 과거 모습이며 백인 여성의 가정은 우리의 현재, 혹은 미래의 모습인지 모른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동안 잘 품고 다스려서 위 두가정의 중간 어디쯤에 뿌리를 내렸으면 좋겠다.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한국문단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