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박근혜, 리더인가 팔로어인가

● 칼럼 2012. 2. 20. 15:07 Posted by SisaHan
새누리당이 13일 전국위원회 의결로 새단장을 마무리지었다. 당명과 로고, 정강·정책을 바꾸고 새출발을 선언했다. 총선 목전의 부산한 치장을 국민이 변신으로 봐줄지, 본디 모습을 알아채지 못하게 하려는 변장으로 치부할지 모르지만, 보수정당도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 국민의 변화 요구가 거세다는 점은 분명해졌다.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도 새출발에 대한 기대에 설렌 듯했다. 전국위 연설에서 “당의 겉모습과 속 내용을 확 바꾸고 공식적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역사적인 날을 맞았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짧은 연설에서 ‘새로움’이란 표현을 10차례나 사용했다.
 
그런데 박 위원장은 당을 바꾸는 데 무슨 기여를 했을까. 별로 없다. 오히려 변화에 반대하며 저항하다가 대세에 떠밀려 할 수 없이 수용한 게 대부분이다. 비대위 구성과 박근혜의 전면 등장도 그의 결단에 따른 게 아니었다. 그는 인기없는 여당의 얼굴로 나서기를 머뭇거렸다. 최고위원 3명의 동반사퇴로 지도부 공백이 초래돼 추대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은 뒤에야 나섰다. 당명과 로고 개정도 쇄신파의 재창당 요구를 거부하다가 찾은 절충점이었다. 
그는 정강·정책 개정에 대해 “새로운 시대정신과 국민 눈높이에 맞춰 당이 나갈 비전을 새롭게 바꾸는 것”이라고 상찬했다. 실천이 문제지만 정강·정책에 경제민주화 조항을 넣은 데 대해선 평가가 좋다. 이걸 박 위원장이 주도했나? 아니다. 
박 위원장은 꺼렸고 김종인 비대위원이 사퇴 배수진을 친 끝에 관철했다는 게 정설이다. 박 위원장은 지난 연말 소득세 최고구간을 신설해 최상위 부유층의 세금을 늘리는 방안에도 끝까지 반대하다가 의총에서 다수가 찬성해 대세가 결정된 뒤에야 반대론을 접었다. 그러고도 본회의 표결에는 불참했다.
 
정강·정책에 ‘유연한 대북정책’과 ‘인도적 지원’을 삽입한 것 등도 전향적이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새누리당이 ‘천안함 발언’을 문제 삼아 조용환 헌법재판소 재판관 후보자 선출안을 부결시키면서 이런 평가가 무색해졌다. 박 위원장이 눈짓으로라도 가결 신호를 보냈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조차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사망을 계기로 천안함 문제의 ‘출구전략’을 모색하는데 박 위원장은 요지부동이다. 친박의 한 중진 의원은 “김 위원장 사망 당시 조문 기회를 활용하지 못한 게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박 위원장이 남북관계 변화를 주도할 기회를 놓쳐버렸다는 탄식이다. 
박 위원장이 변화를 주도한 게 있다. 지도부 회의 방식이다. 지도부가 아침 공개회의에서 마이크를 잡고 돌아가며 한마디씩 하는 것은 한국 정당의 유구한 전통이다. 진보정당들도 이 전통은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새누리당 비대위 공개회의는 박 위원장 말이 끝나면 곧바로 비공개로 전환한다. 다른 비대위원들 앞에 있는 마이크는 무용지물이다.
 
박 위원장은 국민만 바라보고 정치하겠다고 누차 얘기했는데, 그를 뺀 다른 비대위원들은 공식회의 자리에서 국민에게 공개발언할 기회조차 원천봉쇄당한다. 쇄신보다 퇴행에 가까운 변화다. 
박 위원장은 이제 명실상부한 정치 주류다. 10년간의 야당생활에 이어 여당 의원이 된 18대에도 대통령의 견제를 받는 비주류였으나 지금은 대통령이 눈치를 살펴야 하는 여당의 유력 대통령 후보이자 대표다. 그에겐 이제 힘이 생겼다. 바꾸려고 마음먹으면 정책이든 행태든 얼마든지 과감하게 바꿀 수가 있다. 
변화를 거부하다 대세로 확인된 뒤에야 수용하는 것은 리더보다 팔로어에 가깝다. 
그가 변화를 망설이며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여당의 대통령 후보 자리를 지킬 수는 있을 것이다. 그 이상은 아니다. 

<임석규 - 한겨레 신문 정치부 정치팀장>


자주·자립·주체는 우리 공동체의 가치를 나타내는 좋은 말들이다. 그러나 언론이나 실생활에서 잘 쓰이지 않는다. 북한이 애용하거나 미국을 거역하는 느낌의 용어들이기 때문이다. 어쩌다 자주외교라는 말을 쓸라치면 나도 모르게 반미적으로 비칠까봐 움찔한다. 주체적으로 살자는 말은 북한의 주체사상 때문에 친북이라는 말을 들을까봐 더 겁난다. 그래서 이 말들은 남북 간 이념 대결 속에서 분단에 갇힌 언어가 되었다.
그러나 이 언어들에 대한 유폐는 부당하다. “자주적인 역량의 구축과 주체의식의 확립”, “자주국방과 자립경제 달성이 지상목표”, “투철한 자주의식과 민족주체의식이 뒷받침하는 국력.” 이는 박정희 대통령이 재임중에 주장한 말들이다. 미국의 도움으로 나라를 꾸려가고 북한에 뒤지던 시대에 자주·자립·주체를 강조한 박정희야말로 수구세력의 기준에서 보면 영락없는 ‘친북좌파’이며 정신 나간 ‘반미자주파’다. 그러나 그들은 비난은커녕 이런 박정희를 숭배한다.
그런데 30년 후 박정희가 사용한 기치를 노무현이 사용하자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노무현 대통령은 힘이 닿는 한 내 나라는 내가 지켜야 한다는 자주국방을 제창했으며 이를 위해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추진했다. 그러나 수구세력은 여기에 반미와 친북의 올가미를 씌우려 했다. 박정희에 대한 태도와 비교해 보면 지독한 자기모순이다.
 
우리는 오늘날 북한을 압도하는 경제력을 보유하고 북한보다 최소 10배 이상의 국방비를 지출하며 미국을 돕기 위해 자비로 해외파병까지 하는 시대에 살건만 자주도 주체도 자유롭게 쓰지 못한다. 왜일까? 민주주의의 발전과 세계 냉전의 해체라는 시대적 조류에 역행하여 우리 사회에서 이 언어들이 금기시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6월 항쟁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이데올로기 지형이 확장되지 않는 특이한 경험을 해왔다. 즉, 수구세력이 기득권 유지를 위해 좌파 척결이라는 시대착오적인 네거티브 전략을 내세워 반사적 이익을 얻으려 하면서 이념적 포용성이 오히려 좁아지는 절름발이형의 자유민주주의 성장이 이루어졌다. 이명박 정부 4년은 그 절정을 보여주었다.
분단이 반쯤 불구로 만든 언어도 있다. 조선이다. 1910년까지 이 땅을 통치한 왕조가 조선이지만 북한의 국가 명칭도 조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줄임말)이다. 남북한이 각각 유엔에 가입한 주권국가지만 북한을 조선이라고 부르는 것이 금기처럼 돼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말을 쓸 때는 역사 속의 조선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며 조심스럽게 사용한다. 엄연히 중국이 북한을 조선이라 부르고 있고 국가보안법에 저촉될 것 같지도 않지만, 누구도 이 언어를 사용할 엄두를 내지 않는다. 물론 북한한테도 우리는 한국이 아니라 남조선이다.
 
그러나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최근까지 평등은 수구세력에게 사회불안을 조성하는 급진좌파의 용어처럼 취급받았지만 뉴욕에서 불어온 ‘99%의 분노’가 단숨에 이를 일상 언어로 되돌려놓았다. ‘1% 부유층의 탐욕에 저항하는 99%’라는 자극적인 말 덕분에 평등은 이제 논란의 여지가 없는 상식이 된 느낌이다.
이제 분단에 갇힌 언어들이 머지않아 우리 사회의 중요한 가치로 떠오를 것다. 대외 경제의존도가 100%에 이르고 세계화라는 미명 아래 고유의 삶과 문화가 사라지고 있는 극단적인 대외 의존적 삶에 대한 반성 속에서 우리는 곧 자주적 삶과 자립지향형 경제를 희구하며 ‘나’라는 ‘주체’ 찾기에 나서주체와 세계가 균형을 이루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날을 위해서라도 이 언어들은 본래 모습으로 해방돼야 한다. 이 언어들에 대한 유폐가 비합리적인 우리 사회의 단면이었기에 그 해방은 합리적인 사회로의 진전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명박 정부 4년은 한반도 냉전구조의 본질이 남북대결이 아니라 우리 사회 속에 겹겹이 박혀 퇴장을 거부하는 냉전 인식과 우리 안의 적대적 대결심리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래서 진정한 냉전 종식을 위해서는 우리 안의 냉전부터 해소해야 한다. 이 작업을 위해 우리가 한 발짝만 내디뎌도 그곳에서 분단에 갇혀 해방을 기다리는 소중한 언어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


[1500자 칼럼] 정월 대보름

● 칼럼 2012. 2. 13. 18:04 Posted by SisaHan
싸늘한 바람이 코 끝을 매콤하게 해준다. 겨울 하늘 여기 저기 흩어진 별들 사이 커다란 쟁반 같은 둥근달이 하늘 한복판에서 현현한 빛을 발하고 있다. 아! 오늘이 정월 대보름이든가.
이때가 되면 계수나무 밑에서 토끼가 방아찧는 모습 보고 싶어 맑은 하늘 점지해달라고 얼마나 기원했었던가. 진정 이 달은 그 시절 내 고향 충남 홍성 땅에서 올려 보았던 그 달과 같은 것인가? 그 때의 보름달은 이렇게 차갑게도, 이토록 정 없이도 안보였는데….
이미 도시는 잠자리에 들어갔을 이 시간. 하늘을 올려다보는 내 눈 속 하나 가득히 하얀 달빛이 가슴을 파고 들어온다. 그리곤 정 없는 달이라고 불평했던 나를 이끌고 동화 속의 어린시절 내 고향 땅을 찾아간다. 
나와 동생은 어머니 곁에 붙어 앉아 곱게 물들여 다듬어진 명주치마 저고리가 어서 만들어 지기를 고대하고 있다. 어머니의 한 올 한 올 바느질 손끝이 자꾸 더디다 생각되면 밖으로 나가 한바탕 눈싸움을 하고 돌아왔다. 노랑저고리 분홍치마 눈이 부셨다. 어머니는 동생에게도 나에게도 옷을 입혀보고 옷고름 매는 법을 가르쳐 주며 우리 딸들 참 예쁘기도 해라 하며 머리를 곱게 빗겨주고 댕기도 드리워 주었다. 곱게 차려입은 우리는 설빔자랑하고 싶은 아이들과 어울려 거리를 꽃밭으로 만들었다.
 
양지바른 선례네 마당엔 이미 널판이 놓여있다. ‘쿵더쿵 쿵더쿵’ 널뛰는 소리에 가슴 설레며 동생의 손을 잡고 부지런히 뛰어갔다. 널판 양 끝에 올라 탄 우리는. 땀이 흥건히 날만큼 신나게 널을 뛰었던 것이다. 
열나흘 날 저녁이 돌아왔다. 정초 명절의 축제가 최고조에 다다르게 된다. 동네 머스마들과 함께 구멍이 숭숭 뚫린 깡통 속에 떨어진 고무신 조각과 광솔 붙은 나뭇가지를 쑤셔 넣고 철사를 꿰어 단단한 끈을 만들곤 깡통 속에 성냥불을 그어 댕겼다. 이 산마루에서 저 산마루로 뛰어다니며 쥐 불울 놓으며 크고 작은 깡통불은 지금의 불꽃 놀이만큼 화려하고 보기 좋았다. 어른들은 불끈 솟아오르는 보름달을 향해 활을 쏘고 우리들은 신바람이 나서 응원하곤 했다. 온 동네 사람들은 우리 집 옆 신작로 길 냇물을 이어주는 다리로 모여들었다. 나도 동갑내기 아이들과 손에 손을 잡고 나이수대로 그 긴 다리를 열 번 건너고 나면 다리가 뻐근해 오지만 일 년 내 내 다리 병 앓지 않고 튼튼하게 지낼 수 있다기에 아파도 열심히 달렸다.
 
자정이 훨씬 넘었다. 몽당귀신이 들어와 눈썹을 하얗게 쉬게 할까봐 무서워서 한잠도 못자고 대보름 전야를 꼬박 새웠다. 어머니는 어느새 잣과 부럼(밤 호도 땅콩 은행 등)을 준비해놓고 이른 새벽까지 탐스런 잣 끝에 불을 붙여 그해 운수 점을 치고 부럼을 깨물면 한해의 치통을 예방하는 것이라며 밤도 은행도 한 옹 큼 쥐어주곤 했다.
오곡(五穀) 밥, 아홉가지 나물로 아침을 먹고 집집마다 떡을 돌리며 열두 집을 찾아 열두 공기 잡곡밥을 얻어먹으며 튼튼한 몸, 잘 크라는 어른들의 이 말에 잘도 뛰어다녔다.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연 날리는 재미였다. 창호지에 온갖 그림을 그려 오빠가 만들어준 연을 하늘 꼭대기까지 날리면 나도 둥실 하늘을 날았다. 지금도 생생히 각인되어있는 어린 시절 설 명절에서 정월 대보름까지 이어지는 축제가 세상의 어느 것 보다 재미있었고 행복했다.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아이들을 본다. 동리아이들과 신바람 나게 어울려 놀았던 내 어린 시절의 풍경은 민속촌에서나 볼 수 있는 고풍이 되었다. 한국이 놀랄만큼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세계국가 경쟁력 순위에서 한국의 행복 지수는 178개국에서 102번째라 했다. 행복지수는 경제력과 비례하지 않았다. 실종된 동화속의 유년 시절을 우리 아이들에게 다시 찾아주는 길은 없을까?  서양권에서 정월 대보름은 한갓 여느   달과 다름없는 만월(full moon)인지 모르나 이 시절을 공유하며 살아왔던 우리들에겐 영악해진 아이들을 대할 때 마다 가슴이 서늘해진다.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전 회장>


[칼럼] 최시중, 그 이후

● 칼럼 2012. 2. 13. 18:03 Posted by SisaHan
자질의 제1순위가 정치적 중립성이라 할 방송통신위원장이 정치권에 거액의 돈봉투를 돌렸다는 의혹 자체가 해외토픽감이다. 자신의 멘토를 극구 방통위 수장에 임명해 결과적으로 이런 코미디를 만들어낸 장본인은 이명박 대통령이다. 늘 그렇듯 반성이나 성찰은 없다. 시치미 뚝 떼고 후임자를 임명하면 그만이다. 
중립성과 전문성. 방송과 통신 정책 수장에게 요구되는 핵심 자질이다. 두 조건을 완벽하게 비켜 간 최시중 위원장이 공공의 가치에 무관심한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그의 마음속엔 방송의 공영성 강화나 시청권 보장 같은 공적 가치 대신 정치공학이나 사업자들의 이해관계만 그득했다. 예컨대 그가 수신료를 6000~7000원(현 2500원)까지 올려야 한다고 운을 떼면서 앞세운 논리는 방송산업의 발전이었다. 시청자 편익 증대가 아니었다. 종합편성채널 광고 늘려주자고 수신료를 2배 이상 올려야 한다고 강변한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문화방송>(MBC)에 제자리를 찾으라고 요구했다. 공영방송의 외피를 벗으란 이야기였을 것이다. 공영적 소유구조에 광고로 먹고사는 방송들이 세계 여러 곳에 많음에도 억지를 부렸다. MBC 앞에 자주 붙는 공영이란 말이 마뜩잖았을 것이다. 대신 IP-TV 도입이나 종편 도입과 같은 유료채널 확충엔 적극적이었다.
 
2010년 <에스비에스>(SBS) 월드컵 단독중계나 케이블의 지상파 재전송 대가 산정을 둘러싼 갈등도 마찬가지다. 시청권보다는 사업자 이해가 우선이다. 결과적으로 많은 시청자들이 월드컵을 지상파로 보지 못했다. 케이블 가입자 수백만명이 지난달 <한국방송>(KBS) 2채널을 하루 이상 보지 못했다. 
방송과 통신은 모두를 위한 재화다. 이게 편파적으로 혹은 배타적으로 쓰였을 때 공공에 미치는 화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시민들은 가장 먼저 방송사에 분노를 터뜨렸다. 
오죽했으면 언론학자 200여명이 이 정권 초 미디어공공성포럼이란 단체를 만들었을까? 공공성이 위기에 처했는데 대학에서 학문적 논의만 할 수 없다는 절박감의 소산이다. 
최 위원장이 남긴 상처는 깊다. 2010년 말 종편 4곳을 허가한 최 위원장은 직접 광고영업 혜택까지 줬다. 종편에 준 이 떡이 재앙이 되고 있다. 종편의 미디어렙(방송광고 판매대행사) 위탁이 풀리지 않으면서 미디어 공공성을 지켜낼 방송광고판매제도의 도입이 장기간 늦춰지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종편 쪽의 무리한 영업과 SBS의 코바코(한국방송광고공사) 체제 이탈 등의 여파로 미디어 다양성의 토대인 작은 매체들 광고가 줄고 있다. 
그가 방통위원장 취임 뒤 바로 벌인 공영방송 사장들 물갈이는 방송뉴스의 공정성 상실과 신뢰도 위기로 이어졌다. 기자들은 취재 대신 낙하산 사장과 싸우는 데 에너지를 소진하고 있다. 

언론계에선 최 위원장 후임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는 듯하다. 정도 차이야 있겠지만, 정책 방향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다. 올바른 방송철학이나 전문성과는 동떨어진 법 전문가가 후임으로 유력하다는 예상을 보건대 이런 우려는 크게 빗나가지 않은 듯하다. 
오는 4월 국민의 선택이 각별하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무너져 내린 미디어 공공성의 가치를 다시 세울 수 있는 근본 틀을 다음 국회에서 설계하거나 마련해야 한다. 방통위 체제 개편은 물론 공영방송 사장 선임 방식 개선과 공익적인 방송광고판매제도 마련, 여론 독과점 규제 강화 등 숙제가 수두룩하다. 국민이냐, 특정 업자 편이냐? 유권자들의 선택에 따라 해법지가 달라질 것이다.

<강성만 - 한겨레신문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