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 채택이 러시아와 중국의 반대로 무산된 뒤 시리아 사태가 더욱 급박하게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이미 정권의 종말이 가깝다는 관측도 나돌고 있지만 참혹한 유혈사태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저항 격화와 진압 강화라는 악순환 속에 민간인의 피해 규모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국제사회가 이런 인도주의적 참상에 대한 뾰족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참담한 일이다. 시리아 사태를 자국의 이해관계로만 접근하는 강대국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당장 러시아와 중국은 안보리 결의를 무산시킴으로써 독재정권을 지지한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됐다. 시리아 사태가 튀니지나 이집트식의 새로운 민중혁명이 아니라 리비아식 서방 식민주의 부활로 귀결될 가능성을 우려해 시리아 사태에 대한 국제사회의 개입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러시아와 중국의 개입 반대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방의 개입으로 자국 무기판매 이권을 상실하는 것은 물론 자신들의 중동지역 핵심 교두보인 시리아를 서방 손에 넘기게 될까 우려해 오명조차 감수하는 것이다.

한편 미국과 유럽은 아랍연맹 쪽과 연락기구를 만들고 반정부세력 지원 국제연대를 결성하는 등 독자 행보를 본격화하고 있다. 하지만 리비아 사태를 돌아볼 때 서방식 개입이 해결책이 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독재 타도와 저항시민 보호라는 인도주의를 명분으로 한 서방의 리비아 무력개입에 대해서도 엇갈린 평가가 나오기 때문이다. 서방의 개입을 ‘아랍의 봄’ ‘중동 민주화’에 대한 배신이며, 해방자로 위장한 식민주의 부활 시도라고 비판하는 시각들이 있다. 실제로 서방은 카다피 제거 뒤 결국 카다피 정권에서 노른자위를 차지했다가 서방 개입 때 그들과 손잡은 세력을 권좌에 앉혔다. 그들이 카다피와 다른 점은 오직 친서방파라는 것뿐이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퇴행적이고 반인권적인 아랍국가들이 카다피와는 달리 서방의 보호를 받는 이유도 그들이 친서방이기 때문이다.
 
서방이든 반서방이든 대국들의 이런 패권주의 행태가 오늘의 중동분쟁을 낳았고 시리아 사태 해결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아사드 정권 만행을 막아야 한다는 데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국제사회가 더욱 중지를 모아야 한다. 그러려면 다시 유엔이 나서는 수밖에 없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지도력을 발휘해, 러시아와 서방이 타협할 수 있는 새로운 중재안을 마련하고 시리아 민중들을 참상에서 구해야 한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이 자신이 보유한 안철수연구소 지분의 절반을 출연한 공익재단의 밑그림을 밝혔다. 아이티 기반으로 수평적 나눔을 통해 사회적 기회의 격차를 줄이는 데 기여하겠다는 것이다. 안 원장은 “나눔은 많이 가진 사람이 적게 가진 사람에게 시혜성으로 베푸는 것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받은 몫을 다시 돌려주는 수평적인 개념이어야 한다”며 일자리 창출, 교육 지원, 세대간 재능 기부를 중점적으로 추진하겠다고 한다.
안 원장은 지난해 안철수연구소 지분을 출연하겠다면서 우리 사회의 핵심 문제는 가치의 혼란과 자원의 편중된 배분이며 그 근본에는 교육이 자리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공익재단이 새로운 기부문화로 더 많은 동참과 의미있는 변화를 이끌어내기 바란다. 공익재단에 정치적 해석을 덧붙이는 사람들도 있지만 기부 자체만으로도 그 무엇보다 충분히 의미있고 값진 일이다. 안 원장은 자신이 말한 대로 우리 사회의 긍정적인 발전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하면 좋을지 끝없이 고민하며 살아온 사람인 만큼 그 연장선상에서 받아들이면 될 법하다.
 
웹이나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기부자가 수혜자의 다양한 요구를 파악하고, 수혜자도 기부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며,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선택적으로 기부를 할 수 있게끔 하겠다는 것도 눈에 띈다. 실제로 외국의 키바, 코지스 등은 소셜네트워크 기술을 사회활동에 접목해 100년 이상 활동한 단체 이상의 성과를 낸다고 하니 기대해볼 만하다. 안 원장이 재단 설립과 기부로 본인의 역할을 한정하고 다양한 분야의 인사들로 구성된 이사진이 재단을 이끌어가도록 하겠다고 한 점도 신선하다. 재단 쪽 계획대로 공익법인으로 시작해 성실공익법인으로 자리매김하면 운용소득의 80% 이상을 직접 공익 목적에 사용하고 기부금 운용의 투명성과 독립성이 보장될 것이다.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서도 기부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갤럽이 조사한 2010년 세계기부지수를 보면 153개국 중 81위로 경제규모에 비해 무척 낮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 각인된 개인 기부자의 이미지는 시장에서 평생 콩나물을 팔아 모은 재산을 내놓는 할머니 같은 분이었다. 재벌총수 등의 사재 출연은 사회적 물의를 빚고 면죄부를 받기 위한 방편에 머물렀고, 거액 기부는 기업의 회삿돈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는 가진 이들이 새로운 기부문화 조성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그러려면 기부를 그 자체로 바라보는 성숙한 분위기도 필요하다.


[한마당] 나라자산 팔아먹은 엘리트들

● 칼럼 2012. 2. 10. 16:46 Posted by SisaHan
미국계 펀드회사 론스타는 지난 2003년 외환은행의 지분 51%를 인수한 뒤 그동안 4조6000억원의 수익을 올리고 드디어 손을 털었다. 1000억 사회공헌 약속도 흐지부지한 채, 막대한 수익에 대한 세금도 내지 않은 채 외환은행을 하나은행에 넘겼다. 4조6000억원은 전국의 26만 국공립대 학생들이 3년 동안 무상으로 대학을 다닐 수 있는 돈이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말 속이 몹시 쓰리다. 
외환은행 인수 자격 여부조차 의심되었던 론스타가 어떻게 주가조작 등 금융범죄를 저지르고, 종업원들을 무자비하게 해고하는 등 사회적 책임은 전혀 하지 않은 채 철저히 배당금을 챙겨갈 수 있었을까? 2003년 당시 외환은행을 팔아치우는 것이 마치 금융 선진화의 길이라는 식으로 떠들던 언론이나 학자들은 오늘 한국의 금융시스템에 문제가 있었고, 우리가 외국자본에 너무 배타적일 필요는 없다고 <월스트리트 저널>의 논설을 또다시 반복한다. 그들이 말하듯이 이제 과연 한국 금융시스템의 문제일까?
 
1910년 일본은 총칼을 들이대면서 조선 각료들을 위협하여 강제병합을 성사시켰다. 이완용 등 현지 대리인들은 그것을 문명화를 위한 시대의 대세라 말했다. 2002년 론스타는 김앤장을 앞세워 한국의 재경부와 금융당국의 최고위층에 외환은행 인수를 위한 전방위 로비를 펼쳤다. 그들은 외환은행 매각을 ‘외자유치’라 표현하였다. 조선왕조는 종이 한 장의 서명으로 일본에 넘어갔지만, 국민의 피땀으로 만든 외환은행은 정체불명의 팩스 1장으로 론스타에 넘어갔다. 조선의 각료들은 ‘나라의 힘이 없어 스스로 문명개화할 수 없다’는 명분하에 나라를 팔아넘겼지만, 2003년 론스타의 현지 대리인들, 김앤장, 금감위, 외환은행장, 재경부 최고위층 관리들과 보수언론들은 멀쩡한 은행을 부실은행으로 판정하고, ‘외자유치’ 안 하면 곧 망한다고 협박하고, 금융 선진화라는 그럴듯한 명분하에 위에서 바람잡고 아래서는 비밀리에 회동해서 마치 군사작전 하듯이 외환은행을 팔아치웠다.
과거 조선의 각료들은 일본의 총칼이 두려워 굴복을 했지만, 오늘날 국내 대리인들은 스스로 앞장서서 법과 절차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면서 공공자산을 팔아넘겼고, 론스타가 주가조작 등 용납할 수 없는 금융범죄를 벌여도 면죄부를 주었으며, 9년여 동안 온갖 논리와 법 지식을 동원하여 그들이 돈을 챙겨서 떠날 수 있도록 충실히 봉사했다. 그래서 외환은행 노조는 이 모든 일이 “대한민국 법과 원칙에 대한 사망선고”라고 말한다.
 
외환은행 매각 당시 이들 현지 대리인들이 많은 돈을 챙긴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이번의 론스타가 하나은행에 외환은행을 넘기며 거둔 수익의 일정 부분도 바로 국내 대리자들과 투자자들, 즉 ‘검은 머리의 외국인’들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선진 금융기법 도입, 동북아 금융허브 등 그들이 그렇게 귀가 아프게 떠들었던 거짓말의 성찬을 지금 떠올려 무엇하랴? 분명한 사실은 과거나 오늘이나 국민의 세금으로 일하는 당대 최고의 엘리트 국가의 공복들이 그럴듯한 논리와 법을 무기로 하여 국가 자산을 투기자본에 팔아넘겼고, 그 대가로 막대한 사적 이득을 취했다는 사실이다. 오늘 그들은 또다시 ‘미래의 경쟁력’을 들먹이며 인천공항을 매각하겠다고 하고, 효율성 운운하면서 케이티엑스 매각 카드까지 만지작거리고 있다. 
옛 한나라당과 민주통합당은 선거를 앞두고 ‘경제민주화’를 내걸고 있지만 그들은 지난 9년 동안 과연 이 일과 관련해서 한 게 무엇인가? 
그들이 과연 앞으로도 반복될 이 국내 법률자문회사-국가관료들의 국민 배신 행각을 막을 의지와 힘이 있을까?

<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


[1500자 칼럼] 빈 둥지, 새 둥지

● 칼럼 2012. 2. 5. 16:35 Posted by SisaHan
무성한 나뭇잎에 가렸지만 보일 듯 말 듯 뭔가 있는 것 같았다. 이층에 올라가 창문으로 내다보니 나뭇가지와 마른 풀잎, 그리고 어디서 구해왔는지 가느다란 헝겊쪼가리까지 이용해서 지은 새 둥지였다. 알을 품는 것 같더니 어느 사이에 새끼가 태어났는지 종일 조잘거리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부지런히 먹이를 물어 나르는 어미 새와 새끼들을 보는 재미에 더운 줄도 모르고 여름을 났다. 나뭇잎이 헐거워질 무렵 문득 바깥이 조용하고 나뭇가지 사이가 허전한 것 같아 살펴보니 둥지가 비어있었다. 내 집이 빈 것처럼 가슴이 공허했다.
 
아들이 학교에서 늦게까지 공부하거나 약속이 있는 날이 잦아지면서 식구가 많은 것도 아닌데 다같이 저녁을 먹기가 어려웠다. 곧 독립을 하겠다는 아들과 밥 한끼라도 더 먹고 싶어 애가 달았기 때문일까. 그날 저녁을 집에서 먹는다는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번갯불처럼 저녁 메뉴가 결정되었다.  
별 것도 아닌 아구찜이지만 세 식구가 다 있을 때 먹겠다고 며칠 전부터 벼르던 중이었다. 아구를 꺼내고 콩나물을 다듬어 준비를 하는 동안 없던 힘도 솟는 듯 부엌을 날아다녔다. 탁구공이 튀는 것처럼 정신 없이 일하는데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친구들과 갑자기 약속을 하게 되어 저녁을 먹고 온다는 내용이었다. 준비하고 있던 아구찜 생각에 언제쯤 들어오는지는 묻지도 않고 전화를 끊고,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 맥이 풀려 앉아있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남편은, 우리끼리 먹으면 되는 거지 아구찜 하나 먹는 게 무슨 대단한 일이나 되는 것처럼 그러냐고 했다. 그런데 나는 그렇지가 않았다. 여름내 정성스럽게 제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던 어미 새 생각이 났던 것이다.
 
마음 없이 만든 음식치고는 맛이 있었다. 매운 음식은 조심하고 있기에 고구마를 굵직하게 썰어 넣었더니 맵고 쏘는 맛을 상쇄시키는지 한결 부드러웠다. 얼큰한 음식을 만든 날에는 늘 그렇듯 남편이 소주잔을 내오고 술을 따랐다. 이름처럼 정말 ‘백 세까지 살 만큼 이로운 술’인지는 몰라도 혀에 감기는 달차근한 맛에 알코올을 의식하지 않고 한 잔 정도는 마실 수 있는 술이다. 알싸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과정이 섬세하게 느껴졌고 지나간 자리마다 불이 붙는 것처럼 화끈거렸다. 술은 벌써 위장까지 단숨에 달려갔을 텐데도 불티가 떨어진 자국이 오늘따라 바느질 하듯 한 땀 한 땀 더딘 반응을 보이며 오래 따끔거렸다.
우리는 술잔에 기대어 자식의 독립에 대해 이야기했다. 빈 둥지를 지키는 노부부가 된다는 의미 이상의 허전함 때문인지 휑하니 커 보이는 식탁이 술 한 잔에 출렁였다. 흔들리는 게 어디 식탁 뿐이었을까. 남편의 얼굴에도 쓸쓸한 그림자가 스치듯 지나갔다. 자식이 성인이 되면 마땅히 독립시켜야 하고 흔쾌히 그리하리라고 다짐한 일이만 막상 눈 앞에 닥치니 가슴이 허락하지 않았다. 물러서야 할 때조차 미련을 거두지 못하는 부모의 자식에 대한 집착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꼭꼭 닫은 창문으로도 겨울 바람이 비집고 들어오는 것처럼 등이 시렸다.
 
어린 아들이 그토록 함께 보내고 싶어하던 때에는 맞벌이 부부로 뛰느라 못했던 일들. 비어있는 채 지나가버린 시간들이 아프게 파고 들었다. 함께 채워가며 살고 싶고 막상 그럴만한 형편이 되니, 아들은 과거 우리 부부가 돌던 ‘현실’이라는 시간 궤도에 이미 들어선 모양이었다. 엇물려 돌아가는 시간들이 문득 두려웠다.
자식을 둔 부모라면 의당 한번쯤은 겪는 일이다. 희망과 체념의 끈을 번갈아 쥐는 손에 미련과 아쉬움이 땀처럼 묻어난다. 새는 낙엽을 떨군 빈 나무에 둥지를 틀지 않는다. 겨울을 견디어낸 후 잎이 무성해지면 떠나갔던 새들이 돌아와 다시 둥지를 틀게 마련이다. 덮어주고 가려주어 아늑하게 품어줄 무성한 잎들을 준비하고 기다린다면, 제 짝과 함께 지은 새 둥지에서 들려오는 재잘거림으로 아침을 열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때쯤 우리는 빈 둥지를 지키며 아구찜을 먹던 오늘의 허전하면서도 평화롭던 시간을 추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김영수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협 회원 / 한국 문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