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칼럼] 5.18에 되새기는 의분의 혼
[편집인 칼럼- 한마당] 5.18에 되새기는 의분의 혼
동학 농민들이 들불처럼 들고 일어났을 때 조선 조정은 동학의 거두 최제우를 처형해 기세를 꺾으려 했다. 그러나 교조의 억울한 죽음은 더욱 거센 반발을 부른다. 학정에 시달린 농민들의 항의와 시정요구가 빗발치는데, 위 아래 관청은 모두 외면하고 오히려 ‘처벌능사’의 태도로 민심을 짓밟았다. 부패와 무능으로 도탄에 빠진 국정을 척신들과 무속 주술정치로 주무르며 권세유지에 급급한 자들에게 백성의 신음과 절규는 ‘동구 밖의 개짖는 소리’쯤이나 여겨졌던 것이다.
분노한 민심이 폭발하자 왕실은 허둥대며 사익과 당파적인 권력의 득실 활용에 급급하다 외세를 끌어들인다. 마치 홍수에 빠져 허우덕대다 악어 등에 올라간 격이니, 나라 꼴이 어찌되겠는가. 동학혁명은 그렇게 미완에 그쳤고, 조선은 악어의 제물이 되어 망국의 길로 달려갔다.
일제의 국권침탈과 민생수탈에 견디지 못한 민족적 봉기가 3월1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번졌다. 방방곡곡의 남녀노소가 “왜놈은 물러가라”면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불의와 부정에 민감한 백의민족의 정의감과 저항의 피와 혼이 되살아 난 것이다. 하지만 일제는 총칼로 무도하게 진압했다. 거기에 부역하며 호사한 민족의 배반자들, 가령 이완용 같은 매국노는 “독립운동이라는 선동은 미친 짓” 이라고 나무라고 “깨닫지 못한 불쌍한 자들이 몰지각한 행동을 하니 몽둥이를 들 수밖에 없다”고 동족을 위협했다. 강경대처로 소요가 잦아들자 이제는 “여러분이 잘못과 오늘의 시국을 깨달아서 그런 줄로 알고 기분이 상쾌하다”고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객의 비수에 당해 시름시름 앓다 저승사자에게 끌려갔다. 불행한 말로는 자업자득이요, 후손들까지 수치 속에 사는 저주를 원망하게 만들었다.
삼일혁명으로 부터 40년이 지날 즈음, 이승만의 독재와 부정부패에 민족의 의로운 피는 다시 들끓기 시작한다. 4.19 혁명의 전운이다. 독립운동을 했다는 인물이 친일 고등경찰을 등용해 독립투사들을 핍박했다. 6.25 와중에 수도 서울을 버리고 도주했던 트라우마의 발로였는지, 반공을 빌미로 수많은 양민을 학살한 패악질의 상처는 지금도 아프다. 헌데 그것도 모자라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영구집권을 꾀하다, 민심의 거대한 파도에 맞닥뜨린 것이다.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번져 경찰이 무차별 발포하는 사태까지 이르자 이승만은 개각과 자유당 탈당, 내각제 개헌 운운 급조한 수습책을 내고 게엄령 선포로 맞선다. 하지만 권력자의 무능과 무지한 현실인식은 성난 민심에 불을 붙였을 뿐이다. 이승만의 담화는 사태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제시하지 않은 채, 시위가 “그저 불평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호도했다. 민의가 버린 정권은 하루 아침에 무너졌고, 그는 이른 새벽에 허겁지겁 하와이로 망명, 다시는 한국 땅을 밟지 못했다.
5.18 민주화운동은 4.19 혁명으로부터 20년만에 일어났다. 무소불위 독재자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진 뒤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일당에게는 보이는 게 없었다. 정치와 행정에 깜깜이 군인들이 국가권력을 석권하고, 국회와 언론, 경제와 문화까지 입맛대로 칼질했다. 박정희를 능가하는 전두환 성역화에, 국민을 겁박하는 독재공포로 뒤덮었다. 어김없이 독재 장기화를 꿈꾸며 재계를 쥐어 짠 수렴청정의 토대까지 만든다. 하지만, 민족의 의로운 저항의 혼과 피는 결코 권력의 오만과 못된 짓거리들을 두고보고만 있지는 않는다. 대학의 젊은이들이, 그리고 깨어있는 시민들이 주먹을 부르쥐었다. 서울의 봄을 외친 신군부 타도의 함성은 전국에 번져 부마항쟁의 기세가 살아난 부산에서, 대구에서, 대전에서 거센 풍랑을 일으켰다. 그 중에도 광주는 동학이 휩쓸었던 곳이고 일제 치하 학생운동이 잦았던 곳이다. 전두환 일당이 두려워할 만한 경계지역이었다. 5.18 광주학살은 그래서 은밀히 표적이 된 계획범죄 였다.
무고한 시민을 향해 뭉둥이질에 대검과 총탄, 헬기사격까지 자행한 전두환 쿠데타 세력의 짐승같은 만행과 달리 광주시민들은 의분의 항거 속에서도 질서를 지켰고, 나눔과 베품과 희생으로 민주주의와 ‘대동세상’의 비전을 보였다는 사실. 그것은 동학혁명 때도, 3.1혁명 때도, 4.19에도, 그리고 지난 6.10과 촛불혁명 때도 볼 수 있었던 우리 민족의 근성이고 저력이었다. 올해 5.18 항쟁 44주년 기념식을 통해 그 정신을 되새기며, 여전히 흐르고 있을 저항의 피와 혼, 정의로운 기개를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의 한국 정권이 드러내고 있는 말기적 증상을 떠올리게 된다. 나라의 경제와 외교는 삼류국으로 전락하고, 민생은 도탄지경인데, 권력방어에 몰두해 국가기관을 총동원하고 있다. 일가 비리를 덮으려 공권력을 사유화하고 거부권을 남발하는 후안무치와 법치유린-. 5.18 기념식에 몸은 참석했다 하나, 허언으로 장식한 기념사와 식장 안팍의 원성들을 보노라면 민중의 분노와 외침을 ‘개짖는 소리’쯤으로 여겼던 불행한 역사의 권력자들이 오버랩 된다. 깨어있는 시민들이 주말마다 경고의 촛불을 켜들었고, 지난 4.10 총선에서 거듭 적신호를 주었다. 임계점에 이른 국민의 의분을 거슬러 무슨 험한 꼴을 당할 작정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