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의 시대에 되살리는 녹두장군의 일갈과 ‘프레임 전쟁’
어찌하여 날더러 난을 일으켰다고 하느냐
왜놈한테 나라 팔아먹은 너희들이 반란자다
허락을 받았느냐고? 진리 펴는데 무슨 허락!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허락받고 치우나
강수돌 고려대 명예교수, 전 마을이장
동학농민혁명(1894~5)의 주역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이 봉기한 지 1년 만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사형을 당하기까지 모두 5차례 심문을 받았다. 당시 법무부 재판관과 일본 영사가 배석했고, 법무부 관료 서광범이 묻고 전봉준이 답했다.
문: 네 이름이 무엇이냐?
답: 전봉준이다. (중략)
문: 왜 난을 일으켰느냐?
답: 어찌하여 날 보고 난을 일으켰다 하느냐? 난을 일으킨 것은 바로 왜놈에게 나라를 팔아먹고도 끄떡없는 부패한 너희 고관들 아니냐?
문: 관아를 부수고 민병을 일으켜 죄 없는 양민을 죽게 한 것이 난이 아니고 무엇인가?
답: 일어난 것은 난이 아니라 백성의 원성이다. 민병을 일으킨 것은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함이요, 백성의 삶에서 폭력을 제거하고자 했을 따름이다. (중략)
문: 그럼 너도 최시형(해월)에게서 봉기의 허락을 받았는가?
답: 진리를 펴는데 무슨 허락이 필요한가? 충의(忠義)란 본심(本心)이다. 그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면 그대는 그것을 허락을 받고 치우겠는가?
자유의 본질 꿰뚫은 동서의 두 혁명가와 친일파 이광수의 ‘강자 동일시’
나는 이 짧은 대화(?) 속에 ‘프레임 전쟁’이 있다고 본다. 비록 전봉준은 물리적 전쟁에선 져서 만 40에 세상을 떠났지만, 프레임 전쟁에서는 이겨서 지금까지 생생하게 살아 있다. 프레임 전쟁에서 이기는 비법은 사물을 풀뿌리 민초의 입장에서 보는 것, 가장 낮은 자의 관점을 잃지 않는 것, 사태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그러나 춘원 이광수는 이와 180도 다르게 보았다. 그에게 ‘프레임 전쟁’은 없다. 차라리 대적할 수 없는 강한 상대방의 프레임 속으로, 그것도 아주 깊숙이 들어가 버리는 게 그의 ‘생존전략’이었다. 그는 1940년 9월 <매일신보>에서 “조선인은 전연 조선적인 것을 잊어야 한다고/ 아주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버려야 한다고/ 이 속에 진정으로 조선인의 영생의 길이 있다고/ 조선 놈의 이마빡을 바늘로 찔러서 일본인 피가 나올 만큼 조선인은 일본인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읊어댔다. 강자를 만나 도저히 싸울 수도, 도망갈 수도 없을 때는 차라리 강자 앞에 무릎 꿇고 ‘형님, 뭐든 할 테니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쇼’하는 마인드, 한마디로, ‘강자 동일시’ 심리다. 그 뒤 80여 년이 흐른 지금, 서글프게도 우리는 개인 이광수가 아닌, 대통령 이광수를 보고 있다. 미국과 일본 앞에 간과 쓸개까지 모두 내어줄 것처럼 행세하는 대통령 이광수! 그에게 까짓것, 독도 정도야 ‘껌값’ 아닐까? 만일 녹두장군이 ‘환생’하여 대통령 이광수와 독대한다면 과연 뭐라 일갈했을까?
당시 조선에서 혁명가로 ‘짧고 굵게’ 살고 간 전봉준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지구 반대편에서 살았던 혁명가가 있었다. 쿠바의 독립 영웅, 시인이자 교육자인 호세 마르티(1853~1895)다. 그는 “억압받고 있는 나라에서 시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혁명전사가 되는 것뿐”이라며 기꺼이 투쟁에 나섰다. 오랫동안 쿠바를 지배, 수탈, 착취하던 스페인 제국주의에 맞서려는 결단! 전봉준의 일갈처럼 “그대 발등에 불이 떨어진다면 그것을 허락을 받고 치우겠는가?”하는 단호함이다. 또 호세 마르티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려 들지 않는 사람만이 자유를 위해 투쟁할 자격이 있다”고도 했다. 이는 또한 “난을 일으킨 것은 바로 왜놈에게 나라를 팔아먹고도 끄떡없는 부패한 너희 고관들이 아니냐?”며 호통을 치던 전봉준의 소신과 통한다. 130년 전 같은 지구 위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렇게도 마음이 통하는 이들이 목숨을 바쳐 참된 자유와 평등, 우애의 세상을 위해 ‘짧고도 굵은’ 삶을 살다 갔다. 새삼,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베르톨트 브레히트)을 느낀다.
국정관리 능력 자체가 없는 것 같은 ‘제왕 같은 보스’ 대통령
최근에 전봉준과 호세 마르티를 이토록 간절히 떠올리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유’를 강박적으로 외치는 2024년 8월의 윤석열 덕이다. (물론, 그의 ‘자유’는 우리가 아는 ‘자유’와 전혀 다르다. 그의 자유가 돈과 권력의 자유라면, 우리의 자유는 돈과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이니까.) 윤석열 대통령은 1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을지훈련 및 제36회 국무회의’에서도 이렇게 발언했다. “우리 사회 내부에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반국가 세력들이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다. 북한은 개전 초기부터 이들을 동원해 폭력과 여론몰이, 선전·선동으로 국민적 혼란을 가중하고 국민 분열을 꾀할 것이다. 이러한 분열을 차단하고 전 국민의 항전 의지를 높일 수 있는 방안을 적극 강구해야 한다.”
처음에 나는 귀와 눈을 의심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40년 전 전두환 시절이나 50~60년 전 박정희 시절로 되돌아간 느낌 때문! 찬찬히 행간을 읽어 보면, ‘전쟁 준비’ 중인 것으로 보인다. 2016년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특검 당시, 마치 ‘정의로운’ 검사인 것처럼 이미지 관리를 잘한 덕에 대통령 자리까지 오른 이가 불과 3년도 못 돼 ‘제왕 같은 보스’로서 국정을 주무르다니, 정말 꿈같은 이야기다, 악몽이 따로 없다!
게다가 대통령의 눈에는 사실이나 진실도 “허위 정보와 가짜뉴스”로 보이는 모양이다. 그리고 대통령 부부나 국정에 대한 비평 내지 비판은 ‘공격’으로 느껴지는 걸 넘어 “북한의 회색지대 도발”로 인식되는 것 같다. 이 정도면 국정관리 능력 자체가 검토 대상이다. 큰일이다!
통치 안정성 해치는 정권, 자본은 언제까지 용인할까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일등 공신이었던 조선, 중앙, 동아 등 보수언론조차 이미 ‘레임덕’ 같은 용어를 써가며 ‘정치적 거리두기’를 한다. 2024년 벽두의 대통령 신년사에 대해서도 조‧중‧동은 (기존의 ‘우호적’ 분위기와는 달리) 이구동성으로 “아쉽다”고 했다. 아마 4.10 총선을 앞둔 훈수였을 터! 그 뒤 조선일보는 장기적 안목 없이 즉흥적으로 행해지는 대통령실 인사에 대해 “정상이 아니”라며 꼬집었고, (검찰 조사를 받은 건지 검찰을 조사한 건지 모를 정도로 모호했던) 김건희 명품백 무혐의 결정을 앞두고 “받은 것 자체가 부적절”이라 쏘아댔다. 중앙일보는 대통령이 ‘얼차려 사망’ 훈련병 영결식 날 술자리를 가진 걸 두고 “진정한 보수라면 이럴 수 있나”며 질타했고, 동아일보도 “오염수 우려, 괴담으로만 보면 안 돼”라고 어깃장을 놓기도 했다. (작년 8월 이후 꼬박 1년간 일본은 윤 정부의 동의 아래 후쿠시마 핵폐수를 매번 8천 톤 가까이, 모두 8차례나 바다에 방류했다. 방사능투성이 바닷물은 돌고 돌다 결국 우리에게도 올 것이다.) 이제 그들도 대통령을 슬슬 ‘버리는’ 분위기 내지 ‘헤어질 결심’인 듯!
냉정히 보건대, 재벌과 파트너인 보수언론은 (마치 미국이 그러하듯) 한국 정부가 ‘통치의 안정성’을 유지해야 ‘지속 가능한 축적’을 이룰 수 있다는 계산이다. 자본의 목적은 누가 뭐래도 이윤 획득인데, 그러려면 ‘세상이 조용해야’ 한다. 이런 통치의 안정성을 기대할 수 없다면 자본은 정권을 가차 없이 ‘버린다.’ 솔직히 보자면, 그 정권이 국힘당이건 민주당이건 큰 차원에서는 마찬가지다. 이왕이면 국힘당 계열이 더 확실하겠지만, 민주당 정권조차 자본의 ‘지속 가능한 축적’에 정면으로 도발하지 않고 통치의 안정성만 유지해 준다면 ‘일단, 오케이’다. 이는 이미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를 거치면서 ‘확실히’ 증명된 바다. 물론, 보수언론과 재벌들, 그리고 정치 검찰과 정치 경찰, 나아가 보수 학계 및 보수 지식인들은 ‘민주당’ 권력을 길들이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쓴다. 그 수단은 명백히 돈과 정보, 그리고 협박이다.
정치 검사의 심문에 맞선 ‘반국가세력’의 ‘프레임 전쟁’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앞서 살핀, 녹두장군 전봉준의 심문 과정을 ‘오늘에 되살려’ 이렇게 각색하고픈 충동을 강렬히 느낀다.
문: 너희는 누구냐?
답: 너들이 말한 “반국가세력”이다. (중략)
문: 왜 “암약”을 하고 있느냐?
답: 어찌하여 우리더러 “암약”을 한다 하느냐? “암약”을 하는 건 바로 왜놈에게 나라를 팔아먹고도 끄떡없는 부패한 너희 고관들, 그리고 수사조작, 증거조작, 고발사주, 조사농단, 마약밀수, 역사왜곡 따위에 대해 전혀 진실을 밝히지 못하는 너희 정치 검사들 아니냐?
문: 허위 정보와 가짜뉴스, 사이버 공격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험에 빠뜨리고 국민의 정신을 혼란하게 만드는 게 ‘암약’이 아니고 무엇인가?
답: 자유도, 민주주의도, 역사까지도 망가뜨려 국민을 혼란하게 만든 건 우리가 아니라 바로 너희 ‘가짜 한국인들’이다. 우리가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온 건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함이요, 국민들 삶의 질과 민주주의를 고양하고자 할 따름이다. (중략)
문: 그럼 너희들도 최시형(해월)에게서 촛불 봉기의 허락을 받았는가?
답: 민주주의를 하자는데 무슨 허락이 필요한가? 정의(正義)란 본심(本心)이다. 당신 발등에 똥이 떨어졌다면 당신은 그것을 허락을 받고 치우겠는가?
문: 아직 할 말이 남았는가?
답: 제발 정신 좀 차려서, 세계 공멸 앞당길 ‘전쟁 준비’ 같은 건 않으면 쓰것다! 쿠바의 호세 마르티 선생도 “다른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려 들지 않는 사람만이 자유를 말할 자격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점점 강해지는 자본의 지배력, 대통령 이광수와 돌아온 아베
물론, 이런 식으로 전봉준처럼 깡다구 있게 ‘프레임 전쟁’을 압도하기는 쉽지 않다. 돈, 정보, 권력, 네트워크, 협박 등을 활용한 자본의 지배력(길들이기 전략)이 너무나 거대하고 교묘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돈(화폐 권력) 앞에 무너진다. 돈이 아니라도 ‘발목’이 잡힌 경우도 많다. 지배권력(자본과 정치의 동맹)은 정보력을 이용해 평소에 요주의 인물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른바 ‘검찰 캐비닛’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기에 선거 직전엔 체 게바라 같은 혁명가처럼 세상을 바꾸겠다고 목소리 높인 사람들도 막상 당선되고 나면 ‘슬슬 알아서 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가 임기가 끝나고 나면 한가하게 언론에 나와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식의 한담이나 나누기 일쑤다. 나는 일제가 남기고 간 ‘밀정들’이 죽(이)도록 밉지만, 이런 식의 ‘가짜 혁명가’는 더 밉다. 그래서도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공부가 필요하다.
특히, 1945년 8월 광복 당시 조선의 마지막 일제 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가 이런 말을 하고 떠났다 한다.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인이 제 정신을 차리고 찬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란 세월이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이미 이 땅에 대통령 이광수도 돌아왔고 아베 노부유키도 무수히 많이 돌아온 듯하다. 아, 식민지 노예 교육! 오호, 통재라!
사태의 진실을 파악하기가 이래서 힘들게 되었는데, 하물며 본질보다 현상에만 눈이 곧잘 쏠리는 보통사람들에게는 자본의 지배력이나 자본 독재의 실상이 잘 보일 리 없다. 설사 본인이 직접 피해당사자가 되는 불행한 시간이 닥쳐 어렴풋이나마 자본 독재의 실상이 보여도, 자본의 지배력에 맞서 싸울 능력도 기운도 의지도 대체로 약하다. 그래서 대다수는 기껏 ‘떡고물’이나 좀 더 많이 챙기려는 분배투쟁에만 목숨을 걸 뿐, 근본 문제를 뿌리 뽑으려는 의지는 약하다. 그러나 좌절과 포기는 영원한 패배일 뿐!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 끊임없이 균열을 내며 행진하자
따라서 스페인 카탈루냐오베르타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로라 로스 선생의 말(<녹색평론> 186호, ‘지역의 자치, 왜 중요한가’)처럼 “사람들은 비록 시스템을 무너뜨릴 수는 없을지라도 거기에 균열을 낼 수 있다.” 그리고 “(균열을 내는 식으로) 성취감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비관주의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그렇다. 반인간, 반민주, 반생명 체제의 틈새를 뚫고 부단히 균열을 냄으로써 우리는 성취감과 효능감을 느끼게 된다. 민주주의의 완성을 향한 행진이다!
마치 (전봉준과 비슷하게 꼬박 40년만 살았던) 세계혁명가 체 게바라(1928~1967)가 쿠바 혁명에 성공한 뒤 혁명 동지 피델 카스트로를 떠날 때 했던,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란 말처럼, 우리 역시 ‘영원한 승리의 그 날까지’ 결코 민주주의 행진을 포기할 순 없다. 세상이 아무리 비관적이고 정치가 아무리 더럽고 치사해도, 오늘 우리가 여기저기 뿌린 민주주의의 씨앗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이미 딱딱해진 땅조차 균열을 내며 소록소록 새싹을 틔우게 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