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커상에 노벨 문학상까지…한국문학 세계 문학계 주류에 입성
한강, 2016년에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한국작가 3년 연속 부커상 최종후보
번역 역량 커지면서 국제문학상 '단골' 수상…직접 외국어로 집필한 작품도
소설가 한강(54)의 한국인 작가 최초 노벨 문학상 수상은 최근 몇 년간 국제적 명성을 쌓기 시작한 한국문학이 이룩한 쾌거다.
이번 노벨 문학상 이전에도 수많은 한국 작가가 유수의 국제 문학상에 이름을 올리며 한국문학의 저력을 세계에 알렸다.
특히 한국 작가들은 노벨 문학상·프랑스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부커상 최종후보에 계속해서 이름을 올리며 세계 문학계의 주류에 편입했다.
공교롭게도 한국 작가들의 이 같은 행보의 시작도 한강이었다. 한강은 2016년 소설 '채식주의자'로 인터내셔널 부커상의 전신인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한국인 최초로 수상하며 한국문학의 높은 수준을 세상에 알렸다. 인터내셔널 부커상은 영어로 번역된 비영어 문학작품에 주는 부커상의 한 부문이다. 한강은 2018년에도 또 다른 소설 '흰'으로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르며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올랐다.
한강에 의해 확인한 한국문학의 가능성은 2022년 이후 3년 연속 부커상 최종 후보에 한국 작가가 이름을 올리면서 더욱 뚜렷해졌다.
2022년에는 정보라의 SF·호러 소설집 '저주토끼'가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라 화제가 됐다. 비록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저주토끼'는 지난해 전미도서상 번역문학 부문 후보에 오른 데 이어, 올해 3월에는 '저주토끼'의 독일어판 번역가 이기향이 독일 라이프치히도서전에서 번역서 부문을 수상하는 등 성과를 냈다.
지난해에는 천명관의 장편소설 '고래'가 부커상 최종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아쉽게 수상은 불발했지만, 힘 있는 서사로 세계 문학계에서 큰 호평을 얻어냈다.
이어 지난 5월에는 황석영의 장편소설 '철도원 삼대'가 최종 후보 명단에 올라 한국문학은 3년 연속 부커상 최종후보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철도원 삼대'는 오랜 시간 한국문학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해 온 '이야기꾼' 황석영이 내놓은 선 굵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기대를 모았지만, 끝내 수상에는 실패했다.
한국 문학의 연이은 성과는 내적 역량과 자산이 축적되는 가운데, 정부와 민간의 체계적인 번역 지원이 더해지면서 안정적 성장기에 진입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지난 3월에는 김혜순의 시집 '날개 환상통'(영어판 'Phantom Pain Wings'. 최돈미 번역)이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NBCC 어워즈) 시 부문에서 한국 최초로 수상했다. 또 지난해 11월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불어판 'Impossibles Adieux'. 최경란·피에르 비지우 번역)가 프랑스 메디치 외국문학상을 받은 것도 외국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하는 번역가들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단 분석이다.
물론 번역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작가 본인이 직접 외국어로 쓴 작품이 해외에서 문학상을 받은 사례도 있다. 지난 8월 미국 윌리엄 사로얀 국제문학상을 받은 이미리내의 장편소설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원제 8 Lives of a Century-old Trickster)이 대표적이다.
한국에서 초·중·고를 마치고 미국으로 유학해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이미리내는 홍콩에 거주하며 한국어와 영어로 습작을 병행했다. 그러다 지난해 영어로 발표한 첫 장편소설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으로 미국에서 문학상까지 수상하는 성과를 냈다. < 연합 임순현 기자 >
'고래' 천명관 작가와 김지영 번역가= '고래'의 천명관 작가(오른쪽)와 김지영 번역가가 23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스카이가든에서 개최된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시상식에 참석해 취재진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3.5.24
문학계, 한강 노벨상에 "변방서 세계 문학 중심으로"
"여성적 상상력과 시적 화법으로 인간의 고통 다뤄"
소설가 한강이 10일 한국 작가 최초로 노벨 문학상에 호명되자 문학계는 "한강의 영예이자 한국 문화에 대한 세계적인 인정"이라며 함께 축하했다.
문학평론가인 이광호 문학과지성사 대표는 "한국문학은 세계문학계에서 주변부 문학이었다"며 "세계문학 중심이 아시아 여성 언어에 주목하는 흐름 속에서 한국이 더 이상 변방의 문학이 아니라, 세계 문학 중심에 있다는 걸 보여준 쾌거"라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시인으로 출발한 한강의 소설은 여성적인 상상력과 시적인 화법을 통해 인간의 고통과 아름다움에 관심을 가졌다"며 "이런 작품을 옮기는 좋은 번역가들이 생겨났는데, 그만큼 한국 문학 수준이 올라갔다는 의미"라고 덧붙였다.
문학평론가이자 번역가인 김화영 고려대 불문과 명예교수는 "한국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며 "말하자면 '예술 분야의 BTS' 아닌가. 한국이 가진 저력과 문화에 대한 관심이 쏠린 가운데 굉장한 일이고 큰 경사"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한강의 문학적인 장점은 한국인이 안은 여러 문제를 여성의 관점에서 유니크한 서사로 표현한 것"이라며 "세계인이 주목할 만한 문학세계를 갖고 있다"고 평했다.
유종호 문학평론가도 "한강 작가는 영국 부커상, 프랑스 메디치상을 받으며 세계 문학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며 "K팝과 영화, 드라마 등 한국 문화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가운데, 이번 수상은 작가의 개인적인 영예이자, 한국 문화에 대한 세계적인 인정이다. 우리 모두 축하해야 할 일"이라고 기뻐했다.
정여울 작가 겸 문학평론가는 한강 작가가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 등을 통해 개인이 역사 속에서 커다란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작품을 써왔다고 평했다.
정 평론가는 "멀리서 보면 연약해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강인해 보이는 사람들이 한강 소설의 눈부신 주인공들"이라며 "한강 작가도 다른 활동 대신 작품에 몰두하는 문학적인 삶을 살아왔다. 그의 대표작들이 전 세계 독자들에게 치유와 감동의 서사로 다가왔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허희 문학평론가도 "내면을 탐구하는 섬세함, 인간의 감정에 대한 탐색이 한강 작가를 규정해 오던 방식"이라며 "나아가 '소년이 온다'를 통해 5·18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작별하지 않는다'로 제주 4·3이란 국가 폭력을 다뤘다. '채식주의자'를 시작으로 폭력에 대한 저항이란 점에서 일관성을 가졌는데, 우리 역사를 응시하는 방향으로 작가의 문제의식이나 사상의 깊이가 좀 더 심화하는 양상을 보였다"고 평했다.
허 평론가는 "노벨문학상은 그 나라를 대표하는 작가에게 주는 상이어서 역사적 깊이의 무게를 많이 따지는데, 그의 이런 문제의식을 노벨위원회가 높이 평가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정세랑 소설가도 수상 소식에 크게 기뻐하며 "평소 워낙 뛰어난 작품을 쓰셔서 놀랍다기보다 그저 기쁘다"며 "이번 수상으로 작가님의 작품이 세계적으로 깊이 널리 읽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강의 책을 펴낸 출판사들도 빠르게 소식을 전했다.
'소년이 온다'·'채식주의자' 등을 낸 창비는 SNS를 통해 "독보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며 세계를 감동하게 한 작가 한강이 한국 최초의 노벨문학상 작가로 선정됐다"고 축하했다.
'희랍어시간'·'흰' 등의 책을 펴낸 문학동네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인간 삶의 유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하고 시적인 산문"이라는 노벨상 선정 이유를 소개했다. 구병모, 김초엽 작가도 SNS로 짧은 글을 올리며 축하했다. 구 작가는 "참 아름다운 말들의 조합이다. 아시아 여성 최초!"라고 적었고, 김초엽 작가도 "너무 벅차고 좋다"고 소감을 전했다.
한국문학번역원은 "한국 문학을 꾸준히 해외에 소개해 온 노력의 결실이자 한국 문학이 전 세계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상징적인 순간"이라고 말했다. 한강 작가의 작품들은 문학번역원의 지원을 받아 18개 언어로 번역됐으며 전 세계에서 총 76종의 책으로 출간됐다. < 연합 이은정 김예나 오명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