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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관 증원 ‘보복’ 안 되려면…‘제2 사개추위’ 꾸려 논의를
시사한매니져
2025. 6. 18. 09:19
해묵은 과제 ‘상고심 개혁’


이재명 대통령 취임 뒤 ‘대법관 증원’이 사법개혁의 첫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대법관 1인의 사건 부담이 큰 상황에서 대법관 증원을 비롯한 상고제도 개혁은 법조계의 해묵은 과제였다. 그만큼 폭넓은 동의를 바탕으로 논의가 필요한 제도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 전 대법원이 이 대통령 공직선거법 사건을 유죄 취지로 서둘러 처리하고,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대법관 증원 법안을 우후죽순 발의하면서 논의는 첫 단추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민주당은 이 대통령 임기 첫날인 지난 4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를 열어 대법관 증원이 담긴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통과시켰고, 결국 대법관 증원은 대법원의 판결에 대한 보복성 법안이라는 의심을 지우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법조계에서는 상고제도 개혁에 더욱 면밀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대법관 늘리면 전원합의체는 어떻게?
상고심 개혁은 국민이 충실하게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한다는 차원에서 시급한 과제다. 대법관 한명이 연간 3천건이 넘는 사건을 처리하게 되면 사건을 세세하게 들여다볼 물리적 시간이 부족하다. 징역 등 개인에게 치명적인 불이익을 줄 수 있는 형사 사건은 물론이고 민사 사건 또한 피해의 유형이 다양화되는 만큼 세심한 심리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난해 법원행정처가 제출한 자료를 보면 대법원은 2023년 처리한 민사 사건 가운데 70%를 별도의 심리 없이 사건을 마무리(심리불속행 기각)했다. 주심 대법관이 나름의 검토 끝에 ‘심리불속행 기각’ 결정을 한다는 반론도 있지만, 대법원 소부에서 본안 심리 없이 사건을 종결되기 때문에 적지 않은 사건의 판결이 충실한 심리 없이 확정되고 있는 셈이다.
한국처럼 미국(9명), 영국(12명), 일본(15명)도 소수의 대법관이 상고심을 담당한다. 그러나 이들 나라의 경우 상고허가제 등을 통해 법률 해석이 쟁점인 사건들만 처리해서 선별하기 때문에 한국의 대법관처럼 과도한 업무부담을 짊어지지 않는다. 미국 대법관 9명이 연간 처리하는 사건 수는 100여건에 불과하다.
민주당이 지난 4일 법사위 법안심사소위에서 처리한 법원조직법 개정안에서는, 현재 14명인 대법관 수를 30명까지 늘리도록 했다. 1년에 4명씩 총 4년간 16명을 증원하며, 법안이 공포된 뒤 1년간은 시행을 유예한다는 내용의 부칙이 담겼다. 그러나 대법관이 2배 이상 늘어난 상황에서 전원합의체를 어떻게 운영할지 관련 논의는 전혀 없었다. 전원합의체에서는 판례 변경이나 사회적으로 파급력이 큰 주요 사안에 대해 대법원장을 재판장으로 대법관 전원이 논의해 결론을 내린다.
법원의 가장 권위 있는 결정인 동시에 치열한 논쟁의 장이다. 하지만 지난해 전원합의체 판결은 13건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법관 수만 늘리는 것은 전원합의체를 오히려 부실하게 만들 수도 있다. 수도권의 한 부장판사는 “대법관 30명의 전합은 실질적으로 이뤄지기 어렵고 나뉘어서 진행되어야 할 것 같은데 관련 논의조차 이뤄진 적이 없다”며 “실제로 한 사람당 3천건의 사건이 절반으로 줄어든다고 해서 대법관들이 사건 기록을 일일이 볼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대법관 증원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려면 엄청난 보조인력과 재정 투입도 필요하다. 현재 대법관을 도와 사건 검토 업무를 수행하는 재판연구관은 근무연수가 14년차 정도 된 판사들이 주로 맡는다. 현재 기준으로만 법관 출신 재판연구관 101명이 근무하는데 대법관 증원이 2배 이상 된다면 산술적으로 재판연구관도 같은 비율로 늘어나야 원활한 재판이 가능하다.
지금 당장 100명이 넘는 연구관을 증원하려면 하급심 법원에서 차출해야 한다. ‘상고심 충실화’라는 대법관 증원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상고심이 권리구제의 역할을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기반도 함께 갖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한 고법 판사는 “재판연구관이 있어야 대법관이 늘어나도 업무의 질이 유지된다. 밑에서부터 구조를 만들어서 적당한 대법관 수를 확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회 특위 구성해 입법하는 방식으로”
대법관 증원 논의 과정에선 최고법원(연방일반법원)에 130여명의 판사가 근무하는 독일 사례가 참고할 만한 모델이 될 수도 있다. 독일 연방일반법원의 경우 민사부와 형사부가 나뉘어 있으며, 이들 사이에 쟁점 등이 있을 때는 민사연합부, 형사연합부 등을 꾸려 사건을 심리한다. 필요한 경우에는 민사·형사 재판부를 합친 대연합부에서 논의해 판결하면서 재판의 일관성을 유지한다.
독일은 연방일반법원 외에도 연방행정법원, 연방재정법원, 연방노동법원 등 분야별로 상고심 담당 법원이 있다. 수도권의 한 부장판사는 “대법관 숫자만 독일 사례를 따를 게 아니라 각 전문 분야를 분리하는 제도도 같이 도입해야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다”며 “혹은 상고법원을 만들고 대법관이라는 개념보다 ‘대법원 판사’ 느낌으로 기록을 볼 만한 다수의 판사들이 100여명 들어오는 게 진정한 의미에서 상고심을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말했다.
서보학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사건이 대법원에 올라가면 처리에 몇년씩 걸리는 현 상황을 생각하면 대법관 증원의 필요성은 분명하다”며 “이를 계기로 우리도 더 전문화된 제도를 구축하고 분야를 나누는 시스템을 제대로 만드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고 짚었다.
앞선 사법개혁의 선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참여정부 시절이던 2005년 사법개혁은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사개추위)를 중심으로 당시 국무총리와 법조계 재야인사, 행정 각부 장관과 학계·재계 등 민간위원까지 포함해 깊이 있는 논의를 진행했다. 이를 통해 공판중심주의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도입 등의 성과를 끌어내기도 했다.
2005년 사개추위 기획추진단장을 맡았던 김선수 전 대법관은 대법관 증원 등 사법개혁 과제에 대해 “국회 내에서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단기·중단기·중장기 개혁 과제로 구분해 단기는 6개월 내에 입법을 완성하고, 중장기 과제는 6개월이나 1년을 더 연장해 22대 국회에서 그간 미진했던 사법개혁 부분을 종합적으로 완성하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고 짚었다. 김 전 대법관은 “특위를 구성하고 과제를 선정하며 공청회 등을 병행해 의견 수렴할 기간을 갖는다면 법원도 더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 김지은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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