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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80주년, 태극기의 진짜 주인은 누구인가?
시사한매니져
2025. 8. 16. 00:27
소음과 폭력으로 오염된 태극기 되찾아와야

우리는 흔히 조선이 맺은 최초의 근대 조약이 1876년 일본과 체결했던 강화도조약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만 하더라도 아직 태극기가 등장하지 않았어요. 그 이유는 조선이 이 조약을 교린관계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양일체론을 주장하며 조약체결에 반대하는 보수 유생들에게 조선 정부는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잇는 것에 불과하다고 반박하였어요.
1882년 조미조약 체결 때 성조기와 함께 처음 등장한 태극기
그러므로 청과의 사대외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병자호란에서 패배한 이후, 조선은 청의 속방이 되었어요. 그에 따라 청에게 조공을 바쳐야 하기 때문에 독립국이라고 할 수 없었지만, 내정과 외교는 자주국이었습니다. 사대외교는 전근대 사회에서 강대국과 약소국이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방식이었어요. 조선의 입장에서는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강화도조약 1조에서 조선이 ‘자주지방’이라고 한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그들은 독립과 자주를 분리해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라고 종용한 것도 청이었고 1881년에 「조선책략」을 통해 미국과의 수교를 주선했던 것도 청이었어요. 그들은 오히려 이런 기회를 통해 조선이 청의 속방이라는 것을 세계적으로 과시하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미국은 청이 조미수호조약 체결과정에 개입하려는 것을 원치 않았어요. 속방이라는 문구를 넣으려는 이홍장의 요구도 거절했습니다. 따라서 1882년 5월 22일 조약이 체결될 때, 태극기가 미국의 성조기와 함께 게양되었어요. 조선은 엄연히 독자적인 국가라는 것을 표시한 것입니다. 당시 미국 측 대표였던 슈펠트가 보관하고 있던 문서를 통해서도 확인이 되었는데요.

이후에도 1883년 영국과 수호조약을 맺을 때, 1886년에 프랑스와 수교를 했을 때에도 태극기를 사용했습니다. 당시 조선이 제공한 태극기가 그들의 외교문서에 그대로 남아 있어요. 1883년 미국에서 루시어스 푸트 공사를 조선에 파견한 것에 대한 답례로 민영익과 홍영식 등의 보빙사가 미국에 파견되었습니다. 이들은 9월 19일 숙소였던 보스턴의 호텔에 처음으로 태극기를 걸었어요.
독립의 상징 독립문 위에 새겨진 태극기
태극기가 조선의 국기로 제정된 것은 1883년 1월 27일이었습니다. ‘이미 국기가 제정되었으니 팔도와 사도에 알려 사용하라’는 고종의 지시가 기록되어 있는데요. 하지만 그에 앞서 1882년 9월에 일본에 파견되었던 개화파 박영효가 고베의 숙소에 태극기를 게양했습니다. 그가 남긴 기록에는 ‘일찍이 임금에게 명을 받았던 것이다’라고 해서, 독자적인 시도가 아님을 알 수 있지요.

그 후에도 청은 끊임없이 세계 외교무대에서 조선이 속방이라는 것을 강조하려 들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상태를 유길준은 양절체제라고 설명했는데요. 그것은 청에게는 속방이면서 세계 각국과는 독립국으로 조약을 체결한 모순적인 상태를 의미했습니다. 고종은 청의 속방론에 맞서 일본과 미국에 상주 외교사절을 파견했어요.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참석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두 나라가 맺었던 시모노세키 조약의 결과 청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철회하였고 조선은 이제 독립국이 되었어요. 그런데 그 독립은 스스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얻어진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청의 간섭 없이 조선에 대한 보호국화 정책을 시도했던 것인데요. 그러나 삼국간섭을 주도한 러시아의 개입으로 좌절하고 말았습니다.

아관파천으로 인해 러시아의 영향력이 극대화 되었음에도 고종의 정치적 주도권이 회복되었어요. 당시 갑오개혁의 주역들은 살해, 유배, 망명을 당했지만 구미세력과 가까웠던 개화파들이 정권에 참여하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협회를 구성했습니다. 이들은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국민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독립문의 건립을 추진했어요. 그래서 독립문 위에 태극기가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 태극기는 당연히 금지되고 말았어요. 하지만 태극기는 곧 국권회복의 상징이 되었고 1919년 3.1 운동에서도 전국적으로 한국인들은 태극기를 들고 나왔습니다. 따라서 일제는 태극기를 '불령선인'의 상징으로 보아 제조 및 소지를 금지하였어요. 따라서 깊숙이 감추어 두었던 태극기가 진관사, 백양사 등에 보관되어 훗날 발견되었습니다.

3.1 운동 때도, 임시정부도, 독립군도 사용한 한국인 공통의 상징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설립되면서 민주공화국을 선포했지만, 대한이라는 국호와 태극기라는 국기를 그대로 사용했어요.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독립군도, 미국에 이주한 동포들이 설립한 대한인국민회도 태극기를 한국의 국기로서 활용했습니다. 태극기는 한국인이라는 동질성을 확인하는 공통의 상징이 되었어요. 따라서 해방의 날을 맞이했을 때 태극기의 물결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1945년 12월 중앙문화협회가 발행했던 「해방기념시집」에는 좌우를 막론하고 24편의 시가 실려 있는데요. 그 가운데 ‘아침’을 썼던 창원 출신의 김달진 시인은 “천길 만길 깊은 바다 밑에/ 긴 밤을 어둠 속에 몸부림 치며/ 큰 열을 가슴 속에 쌓고 달구었더니/ 집집마다 추녀 끝에 태극기 나부낀다/ 거리마다 지축을 울리는 함성/ 오늘 이땅 산천은 크게 웃었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일장기가 게양되어 있던 조선총독부 국기게양대에 나부낀 것은 성조기였어요. 9월 8일에 들어온 미군이 군정을 실시했기 때문입니다. 태극기가 올라간 것은 1946년 1월 14일이었는데요. 김구 주석을 비롯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지도자들이 귀국했을 때에도 태극기를 흔들며 행진을 했습니다. 이어서 열린 모든 행사에서도 태극기는 한국인을 상징하는 깃발이 되고 있었어요.
북한에서도 1948년 7월 10일까지 태극기를 사용했음이 당시의 모든 영상자료를 통해 확인됩니다. 그런데 1947년 소련 측이 불만을 제기하여 결국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는데요. 그 결과 1948년 7월 10일에 열린 북조선인민회의 제5차 회의에서 태극기를 내리고 인공기로 교체했습니다. 태극기의 근거가 된 주역이 미신이며 일정한 표준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내세웠어요.
1948년 7월 1일 대한민국 제헌 국회는 국기로 태극기를 정식으로 채택하였습니다. 다만 대한민국 국기를 태극기로 한다는 조항은 헌법에는 넣지 않기로 했어요. 그런데 태극기가 구체적으로 어떤 도안인지는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확정할 필요가 있어서 1949년 1월 '국기시정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마침내 1949년 10월 15일에 「국기제작법」 고시가 확정되어 규격이 확정되었어요.
‘국기에 대한 맹세’ 강요한 박정희, 태극기에 발포한 5.18 계엄군
박정희 정부는 특히 새마을운동을 통해 태극기를 보급하고 국기에 대한 예절교육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유신 선포와 함께 국기게양식과 강하식을 진행하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제정하여 강제로 외우게 하였지요. 1978년 국군의 날부터는 전국의 모든 방송을 통해 국기강하식과 함께 애국가를 내보냈습니다. 이는 독재정권이 자신들의 권위를 뿌리내리려는 의도가 있어 반발을 사기도 했어요.
그러나 이에 맞선 민주화운동 세력들도 태극기를 자신들의 상징으로 사용했습니다. 특히 1980년 광주민주항쟁에서는 태극기를 앞세워 자신들이 국민주권을 대변하고 있음을 나타내려 했어요. 오히려 계엄군이 시민군이 태극기를 달고 다니는 것을 폭도의 행동으로 매도했습니다. 광주 시민들은 태극기로 희생자들을 담은 관을 감싸며 애도했어요. 태극기를 든 시위대에게 발포한 것은 계엄군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