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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원-웨스팅하우스 ‘노예 계약’, 유효기간 50년 아닌 ‘영원히’

시사한매니져 2025. 9. 6. 11:25

 

웨스팅하우스가 파기 원치 않으면 5년씩 자동연장
기술실시권 없어…이의·분쟁 제기도 불가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9월 체코 플젠시에 있는 두산스코다파워 공장에 방문에 현지 관계자들에게 인사말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과 한국전력(한전)이 원전 수출 때 미국 웨스팅하우스에 1기당 1조원에 육박하는 대가를 지급한다는 내용으로 ‘노예 협정’ 논란을 일으킨 협정이 사실상 영구적인 효력을 지닌 것으로 확인됐다. 유효기간 자체는 50년이지만, 웨스팅하우스가 원하는 한 ‘자동 연장’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어서다. 한수원·한전 쪽 문제로 협정이 해지될 땐, 원전 수출을 위해 웨스팅하우스의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기술실시권)를 부여받지 못할 뿐 아니라 관련한 이의나 분쟁조차 제기할 수 없다는 조건도 추가로 확인됐다.

 

5일 한겨레가 서왕진 조국혁신당 의원을 통해 확인한 ‘한국수력원자력·한국전력-웨스팅하우스 간 기술사용 협정’ 내용을 보면, 당사자들은 이 협정이 “발효일로부터 50년간 효력을 유지하며, 이후 쌍방이 종료하기로 합의하지 않는 한 5년씩 자동 연장”하는 데 합의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수원·한전이 원전 수출 때 웨스팅하우스에 1기당 8억2500만달러(1조1500억원) 규모의 대가를 지급한다는 내용이 담긴 이 협정의 유효기간은 애초 50년으로 알려졌었다. 그런데 더 뜯어보니, 대가를 받는 입장인 웨스팅하우스가 종료를 원하지 않는 한 협정이 영구적으로 효력을 지닐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한겨레 취재 결과, 웨스팅하우스는 처음부터 협정의 영구적인 효력을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협정 상황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한겨레에 “유효기간이 없는 데 대해 (한전·한수원) 이사회 반발이 있었고, 추가 협의 과정에서 50년 유효기간을 넣은 뒤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자동 연장 조건을 붙인 것”이라고 밝혔다.

 

이밖에 웨스팅하우스에게만 일방적으로 유리한 ‘노예 협정’ 성격을 보여주는 또 다른 조항도 확인됐다. 한쪽이 중대한 의무 위반을 했을 때 상대방은 협정을 해지할 수 있는데, 유독 한수원·한전의 위반으로 웨스팅하우스가 협정을 종료시킬 땐 “한수원·한전은 원전 수출을 위해 웨스팅하우스 기술실시권이 필요하다는 것에 대해 이의 및 분쟁을 제기할 수 없다”는 내용이 명시된 것이다. “한국형 원전 수출을 위한 웨스팅하우스의 기술실시권을 보유하지 못하고 허여받지 못한다”는 내용도 여기 포함됐다.

 

한국형 원자로 에이피알(APR)1400 설계가 반영된 신고리 3·4호기 전경. 에이피알1400에서 출력을 줄인 에이피알1000 모델이 체코 두코바니 지역에 건설될 예정이다. 한국수력원자력 제공

 

이 협정의 주된 내용은, 한수원·한전이 웨스팅하우스 기술이 포함된 원전을 수출할 때 웨스팅하우스로부터 기술실시권(재실시권 포함)을 부여받고 그 대가로 웨스팅하우스에 1기당 8억2500만달러(약 1조1500억원) 규모의 기술료 및 설계·부품조달·시공(EPC) 역무를 제공하는 것이다. 심지어 웨스팅하우스는 일부 국가들(체코, 사우디, 아랍에미리트, 튀르키에, 요르단 및 중앙·동남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에 대해서만 기술실시권을 허용해, 한수원·한전은 북미 및 유럽 등 알짜배기 지역에선 수주전에 참여할 기회조차 박탈당했다. 기타 국가들에 대한 기술실시권 부여 여부가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경우 “웨스팅하우스가 최종 결정한다”는 조건도 포함됐다.

 

이처럼 한수원·한전이 협정의 유효기간을 사실상 영구적으로 설정하는 데 동의한 것은, 그간 ‘독자 기술’을 강조하며 추진해왔던 대형 원전의 독자적인 수출 자체를 포기한 것으로 읽힌다. 실제로 웨스팅하우스와의 협상 뒤 한수원 사장이 ‘유럽 시장에서 대형원전 수출을 접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바도 있다. 황주호 한수원 사장은 지난 5월 체코 현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유럽 시장은) 전쟁터다. 법률적으로 몹시 복잡해 입찰을 뚫기가 어렵다. 대형 원전 대신 소형모듈원전(SMR)을 뚫어야 한다”고 말했다. 협정은 출력 170㎿e 이하 ‘한국형’ 소형모듈원전은 웨스팅하우스에 대가를 내야하는 ‘상업조건’에서 예외로 했지만, 웨스팅하우스 기술을 포함하지 않았음을 웨스팅하우스에게 확인받아야 하는 건 대형 원전과 마찬가지다. “웨스팅하우스 기술이 포함되지 않았음을 명확히 확인하기 전까지 구속력 있는 제안을 하거나 공급하지 못한 ”다고도 못박았다 .

 

전문가들은 윤석열 정권의 ‘체코 원전 수출’이란 치적을 쌓기 위해 세계 원자력사에 전례 없는 기술권 종속 계약이 맺어졌다고 지적했다. 석광훈 에너지전환포럼 전문위원은 “세계 어떤 종류 기술권 협정에도 효력 기간이 영구적인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며 “기술권자에게 이견을 제기 못 하고, 일방적인 결정에 따른다는 조항까지 포함된 건 협정이 아니라 ‘징벌’ 계약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서왕진 의원은 “경제·정치 현안을 뒤로하고 체코까지 날아가 ‘원전 세일즈’를 벌였던 윤 전 대통령을 비롯해 수주 일등 공신이 대통령이라고 치켜세우던 안덕근 전 산업부장관, 황주호 한수원 사장 모두 굴욕적인 협정에 관여한 책임자”라며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 옥기원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