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REA
희대의 졸속 판결, 세종이 가장 멀리했던 행위
시사한매니져
2025. 9. 24. 11:48
9일 만에 정치편향적 엉터리 결정 내리지 않아
남 얘기가 아니라 자신의 행위를 먼저 밝혀야 한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22일 “세종대왕은 법을 왕권 강화를 위한 통치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고 강변했다. 조희대는 이날 열린 ‘2025 세종 국제 콘퍼런스’ 개회사에서 “세종대왕은 정의롭고 공정한 사법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면서 이와 같이 말했다. 정부 여당이 추진하고 있는 사법 개혁에 대한 반대를 노골적으로 표현한 ‘정치 발언’이다.
그러나 그의 이 발언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견강부회에 지나지 않는다. 전에 내란수괴 윤석열은 “실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마치 그 어떤 호수 위에 떠있는 달그림자 같은 걸 쫓아가는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다”라는 궤변을 늘어놓기도 했다. 우리는 도대체 이런 터무니없는 궤변이나 견강부회를 언제까지 들어야 하는 것인지. 조희대 본인이 단 9일 만에 전대미문의 속전속결로 이재명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에 대해 파기환송 결정을 한 것은 과연 “정의롭고 공정한” 행위였다는 것인가? 조희대는 무엇보다도 가장 부정의하고 가장 불공정한 그 행위에 대한 입장을 가장 먼저 밝혀야 한다. 이제 남 얘기가 아니라 자신의 얘기를 먼저 해야 한다.

세종 시대 당시, 농민에 대한 세금은 ‘손실답험법(損失踏驗法)’에 따라 관리나 감사가 해당 지역에 나가 그 해의 곡물 산출량을 조사해 올리면 그 기준에 따라 세금으로 거두어들일 미곡의 양을 결정하였다. 문제는 조사의 정확성과 야합이었다. 관리가 해당 지역 양반과 친분이 있을 경우 비리의 온상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토지의 비옥도와 지역별 날씨 그리고 산출량에 관계없이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것에 문제가 있었다. 세종은 중국의 법제를 연구하고 조선의 현실을 고려하여 의정부와 호조 등과 여러 차례 논의를 거쳐 ‘공법(貢法)’을 만들고자 하였다.
하나의 법 시행을 위해 20년 넘게 혼신의 힘을 쏟은 세종
세종은 이 문제에 무려 20년에 걸쳐 연구하고 논의를 하였다. 하지만 이 제도를 시행하려 하자 신하들이 시기상조라며 막고 나섰다. 이에 세종은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하여 제도를 계속 보완하도록 하였다. 특히 토지가 척박한 지역의 주민에게 과도한 세금이 매겨지지 않도록 보완하게 하였다. 세종은 이와 함께 산출량이 많고 신법에 대한 여론의 호응 정도가 높았던 전라도와 경상도의 한 고을씩 두 고을에서 시범적으로 시행 해보라고 명령하였다. 2년 뒤에는 충청도까지 실시하도록 하였다. 세종은 이렇게 전라, 경상, 충청 3도에 시행하도록 명하면서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기 위하여 오늘날로 말하면 일종의 ‘주민투표’를 실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430년 3월, 세종은 총 17만 2,806명의 신민(臣民)을 대상으로 공법에 대한 찬반 여부를 조사하게 하였고 그 결과 찬성은 9만 8,657명이었고 반대는 7만 4,149명으로 나왔다.
이렇게 여론조사와 어전회의에서 찬성 의견이 높았지만 세종은 곧바로 신법을 실시하지 않고 보류하면서 척박한 토지에 무거운 세금이 책정되지 않도록 제도적으로 정비하고, 흉년이 들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계속 보완해갔다. 이와 동시에 대신들에 대한 설득 작업도 계속 추진하여 그 동안 반대해오던 황희와 맹사성 등도 공법 시행에 찬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세종 26년, 세종은 풍·흉작에 따라 연분(年分) 9등으로 구분하고,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전분(田分) 6등으로 분류하는 방식을 내용으로 하는 수정된 공법을 마침내 정식으로 시행하도록 하였다.
조희대는 2025년 4월 22일 이재명 후보 사건을 갑자기 대법원장 직권으로 전원합의체로 회부했고, 전대미문으로 회부한 지 단 9일 만에 원심의 결론을 정면으로 뒤집는 판결을 선고했다. 이는 6만~7만 쪽에 달하는 사건기록과 당사자의 주장을 충분히 검토하기에도, 대법관들 간 충분히 논의하고 결론을 도출하기에도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시간이었다. 더구나 그는 이 재판을 생중계하도록 함으로써 이재명 후보를 노골적으로 폄훼하고 그의 피선거권 박탈을 가장 직접적으로 기도하였다.
세종이 법을 왕권강화를 위한 통치수단으로 삼지 않았다는 조희대의 말은 세종대왕을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견강부회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가 소환한 세종대왕은 법 시행을 결코 ‘조희대식’으로 운용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을 포함하는 기득권 정치세력의 이익 실현을 위해 가장 정치편향적이며 졸속적으로 진행된 ‘조희대식’ 결정이야말로 세종대왕이 가장 멀리하고자 한 행위였다.
조희대는 이날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법치와 사법 독립의 정신을 굳건히 지켜내고 정의와 공정이 살아 숨 쉬는 미래를 함께 열어갈 지혜를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자신과 지귀연 등으로 대표되는 사법농단으로 국민들의 사법 불신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데도, 일언반구의 자기 성찰과 반성은 없다. 오직 끝까지 자신이 보유한 무소불위 권한이라고 믿는 ‘법치’와 ‘사법 독립’만을 내세운다. 그에게서 ‘민주’라는 말도 거의 듣기 어렵다. 개혁을 철저히 거부하는 완강한 기득권의 자세로 일관할 뿐이다. 이 나라의 사법개혁이 반드시 그리고 시급히 이뤄져야 하는 근본 이유다. < 소준섭 전 국회도서관 조사관 >
추미애 “세종대왕 끌어 쓴 조희대, 윤석열한테 일갈하지 그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