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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칼럼] 뻔뻔한 낯짝들

시사한매니져 2025. 10. 4. 01:36

[편집인 칼럼- 한마당]     뻔뻔한 낯짝들

 

 

오늘은 공자님의 가르침으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공자는 논어 위령공편(衛靈公篇) 29장에서 2500년이 지난 오늘도 모두가 새겨들을 경구를 남겼다.

 

위나라의 28번째 군주였던 위령공을 공자는 무도한 혼군, 즉 도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군주였다고 보았다. 실제로 위령공의 아들이 왕후인 어머니를 죽이려다 실패해 다른 나라로 도주하는 일도 있었다니,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와는 거리가 멀었던 인물인 것 같다.

 

공자는 논어 위령공 편에서 41장에 달하는 문답 가운데 29번째 장에서 “과이불개 시위과의(過而不改 是謂過矣)니라”고 했다. 풀이하면 "허물이 있는데도 고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허물이다." 라는 준엄한 꾸짖음이다. 공자는 논어 학이편에서도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 즉 "잘못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고 가르쳐, 잘못은 인정하고 바로잡을 것을 강조했다. 앞서 위령공편 14장에서는 ‘궁자후이박책어인(躬自厚而薄責於人)이면 즉원원의(則遠怨矣)니라’고 했다. "자신에게 엄하게 꾸짖고, 남에게는 가볍게 꾸짖으면 원망이 멀어진다."는 것이다.

 

 

짐작들 하겠지만, 공자의 교훈을 거론하는 것은 내란청산 작업이 진행 중인 요사이 ‘과이불개’의 인물들 민낯을 너무 많이 보는 괴로움 때문이다.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사과나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모르쇠 발뺌이나 책임전가, 뭉개기, 심지어 “그래서 어쩔건데” 라는 적반하장까지, 뻔뻔한 얼굴들과 몰염치 작태가 국내외 동포들의 스트레스와 불안을 조장하고, 나라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을 본다.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 내란우두머리 윤석열 부부의 남탓과 오만과 억지, 교활한 오리발 행진을 필두로한 공범과 종범들, 당시 주도적 고위직들의 발언과 행태는 몰양심·철면피 외에 묘사할 말이 없다. 자기들만 살겠다고 발버둥칠 뿐, 국민과 국가는 안중에 없다.

 

탄핵과 선거로 명백한 심판을 당했으면서도 여전히 ‘윤 어게인’을 외치며 내란선동과 국정혼란을 꾀하는 국민힘당과 소속 의원들, 그들은 사이비 종교단체에서 뇌물과 당원가입에 의한 선거개입이 드러나는 데도 극구 부인하며 “탄압과 보복”이라는 물타기와 되치기 수법 후안무치로 일관하고 있다.

 

유례없는 법해석으로 내란수괴를 석방해 국민을 놀라게 하고, 늘어진 재판으로 지탄받는 지귀연 판사, 그는 룸살롱 접대의혹에도 꿋꿋이 버티는 쇠심줄을 과시한다. 윤석열 간택에 보은행태인지 모르나, 항소심 무죄사건을 단 9일만에 파기환송해 대통령후보를 제거하려 한 ‘사법쿠데타’ 장본인 조희대 대법원장은 법원직원들의 규탄에도 아랑곳 없이 “사법독립”만을 중얼대며 역시 두꺼운 얼굴로 버티고 있다.

 

민족 정체성을 더럽히는 식민사관으로 무장한 뉴라이트들은 어떤가. 국사편찬위원회, 독립기념관, 한국학중앙연구소, 동북아역사재단 등 국가 주요 역사단체를 장악한 자들도 물러날 기미가 없다. 권위를 자랑하던 인권기관의 국내외 위상을 망친 국가인권위원장, 권익 향상이 아니라 국민고충을 가중시킨 국민권익위원장, 진실화해위원장, 대통령 하명 감사에 열올렸던 감사원장도 안면몰수는 마찬가지다. 사죄와 개심(改心)도 부족하거늘, 헌법소원을 하겠다는 둥 파렴치 반발하는 패가망신 정치검찰족의 일부와 방송장악의 앞잡이로 온갖 구린내를 풍긴 방통위원장까지….

 

 

다윗은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다. 이스라엘이 국기에 다윗의 방패를 의미하는 육각별을 새긴 연유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신임을 한 몸에 받은 다윗왕은 그러나 일생일대의 악행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된다. 수많은 처첩을 거느렸음에도 부하 장군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적진에 내몰아 죽이는 잔인하고 사악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앞서 그는 밧세바가 임신하자 전장에서 우리아를 호출해 밧세바와 동침하도록 술수를 부리기도 했다. 두 차례나 명하는 다윗의 ‘음흉한 호의’에도 불구하고 우리아는 전쟁 중에 전우들 처지를 아는 군인이 호사를 누릴 수 없다고 고사하며 자기 집에 가지 않고 왕궁문에서 잠을 청한다. 아무 죄없는 충직한 참 군인이 여색에 눈먼 다윗의 비열한 모략에 아내를 빼앗기고 목숨까지 희생을 당한 것이다.

 

인면수심의 죄악을 범한 다윗은 밧세바를 아내로 맞이해 태연한 일상으로 돌아가려 한다. 하지만 선지자 나단을 통해 하나님의 서릿발같은 징벌경고를 듣게 된 다윗은 자신의 중죄를 자인하게 된다. 그리고 곧바로 사죄한다. 진정어린 참회에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다. 이후 왕자의 모반을 비롯해 책벌과 저주를 감당해야 했지만.

 

다윗은 그런 악독한 범죄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이 가장 사랑했던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잘못을 덮거나 회피하지 않고, 즉시 솔직하게 인정하며 엎드려 회개, 사죄했기에 하나님의 신임을 회복했던 것이다.

 

성경에는 다윗 외에도 죄를 자복(自服)하고 회개하여 용서받고 사함을 받은 수많은 인물들이 나온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를 필두로, 십자가에 달려 죽기 직전 구원받은 강도는 대표적 사례다. 인류의 원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대속으로 사면하고 구원한 ‘사랑과 용서’가 기독교의 본령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세상을 미혹하는 일부 정치목사와 교계원로라는 이들은 범법처벌을 ‘종교탄압’이라고 강변하며 회개와 용서를 외면하고 있다.

 

 

누구나 죄는 지을 수 있고, 허물없는 인간도 없다. 다만 범죄와 허물을 쌓은 이후의 개과천선 여부다. 죄과를 성찰하는 양심과 인성, 지성, 도덕과 윤리감각 등을 얼마나 발휘하느냐에 죄와 벌의 경중과 인간됨의 척도가 달려있을 것이다. 특히 공직에 나가 국민을 섬길 사람들은 거기에 더해 멸사봉공의 소양이 필요하니, 최소한  ‘뻔뻔한 낯짝’ 소리는 듣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