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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팬지 연구로 세상 통념 바꾼 제인 구달 타계

시사한매니져 2025. 10. 5. 01:10
 

강연여행 중이던 1일 91세로 수면중 영면
“지칠 줄 모르는 자연 보호와 복원 옹호자”

침팬지 육식, 도구 사용 사실 처음으로 발견
"우리는 자연의 주인이 아니라 그 일부일 뿐"

현장연구 은퇴한 뒤에도 환경보호운동 계속

 

제인 구달, 침팬지와의 교감.   가디언 10월 1일
 

침팬지 등 영장류 현장연구의 최고 권위자이자 생명과 자연환경 보호운동 선구자였던 제인 구달이 10월 1일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34년 영국 런던 태생인 제인 구달은 그의 나이 23세 때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곰베 국립공원 숲 속의 야생 침팬지 서식지로 찾아 들어가 현장에서 그들을 관찰하면서 그들이 인간처럼 도구를 사용하고 육식도 하며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사고력과 감정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해 동물과 영장류에 대한 인간의 인식에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만년에 생명과 환경보호 운동가로 활동하면서도 운동과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지난 주에 미국 뉴욕에서 강연하고 월스트리트 저널 팟캐스트에 출연한 그녀는 3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자신의 60여년의 연구와 삶의 이력을 되돌아보는 행사에 참석한 뒤 다음 주에는 워싱턴 D.C. 행사에도 참석할 예정이었다.

 

1977년에 설립된 제인구달연구소는 1일 구달이 미국 강연투어의 일환으로 캘리포니아에서 행사를 진행한 뒤 수면 중에 노환으로 자연사했다고 발표하고, “동물행동학자로서 구달 박사의 발견은 과학에 혁명을 일으켰다”면서 그녀가 “자연세계의 보호와 복원을 위한 지칠 줄 모르는 옹호자”이기도 했다고 기렸다.

 

제인 구달. 2017년 런던에서 촬영. 가디언 10월 1일

 

타잔처럼 살고 싶었던 구달

 

가업인 카드 제조로 벌어들인 돈을 상속받은 카 레이서 모티머 구달과 영국 남부 본머스의 교회 목사의 딸이었던 마가렛 조지프 부부의 두 딸 중 맏이었던 제인 구달은 가난하지만 쾌활하고 자상한 여성들로만 구성됐던 가정에서 자랐다. 할머니, 어머니(2차 대전에 참전했던 모티머 구달과는 1950년에 이혼), 그리고 2명의 미혼 이모가 그 가정을 이끌었다. 어머니는 규칙보다는 합리적 이성을 우선하는 양육방식을 믿었고, 소녀들에게 기회가 제한돼 있던 그 시절에 딸들에게 열심히 노력하면 뭐든 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어린 시절 달걀이 어디서 나오는지 관찰하기 위해 닭장 안에 몇 시간이나 숨어 지켜보던 딸을 찾지 못해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던 어머니는 딸이 나타나자 벌을 주는 대신 발견한 것들에 대한 구달의 얘기를 주의깊게 들어 주었다.

 

어린 구달이 가장 되고 싶었던 것은 나무 가지 위에 앉아 읽던 책 속의 영웅 타잔처럼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밀림 속을 줄을 타고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타잔처럼 아프리카의 유인원들과 함께 사는 삶을 꿈꿨다. 그것을 위해 어릴 적부터 동물들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침실 창문으로 다가오는 새들을 길들이고 말을 타는 법도 배웠다. 혼자 절벽을 오르내리며 여러 작은 포유류들도 만났다.

 

23세 때 옛 학교친구 초청으로 케냐 나이로비로

 

20대 초에 그 꿈을 이루게 해 줄 기회가 찾아 왔다. 예전 학교 친구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그 친구는 영국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케냐의 나이로비 외곽 언덕에 있던 자신의 아버지 농장에 와서 지내라고 구달에게 권했다. 1951년 남부 풀에 있는 남녀공학 업랜즈 고교를 졸업하고 비서 출신의 어머니 권유에 따라 옥스퍼드와 런던에서 비서 일을 하고 있던 구달은 옛 학교친구의 초청을 받고 어머니 고향 본머스로 가서 아프리카행 배 표값을 벌기 위해 웨이트리스로 일한 뒤 23번째 생일을 맞기 직전인 1957년 4월에 나이로비로 갔다. 친구 아버지의 농장에서 한 달을 지낸 뒤 구달은 마을에서 방을 잡고 비서일을 시작했다. 목표는 타잔처럼 아프리카 야생동물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구달이 찾아낸 방법은 나이로비에 있던 코린던 자연사박물관의 큐레이터였던 고인류학자 루이스 리키의 비서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리키는 인류의 진화가 아프리카에서 시작됐다는 확신을 갖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것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유인원 조상들의 행동을 이해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인류와 가장 가까운 친척인 아프리카 유인원, 특히 침팬지를 연구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야생의 침팬지를 어디서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침팬지는 사납고 변덕스러웠으며, 사람보다 몇 배나 힘이 세서 총 없이 침팬지를 찾아다니는 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로 여겨졌다. 

 

가디언 10월 2일

 

1960년 탕가니카서 침팬지 ‘과학탐험’ 시작

 

바로 그때 구달이 리키 앞에 나타난 것이다. 리키는 첫인상이 좋았던 구달을 박물관 비서로 채용했다. 구달이 동물들과 오랜 시간 함께 지낼 수 있는 열정과 능력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리키는 서부 탕가니카 지역(지금의 탄자니아)으로 야생 탐험을 떠나기로 했다. 구달은 영국이 곰베 스트림 침팬지 보호구역으로 지정한 탕가니카 호숫가 숲 외딴 곳에 캠프를 설치했다. 거기에는 야생 침패지들이 있었고, 리키는 비서가 자신의 확신을 뒷받침해줄 유용한 뭔가를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다.

 

그때도 구달을 밀어준 것은 어머니였다. 원래 영국 식민당국은 여성이 혼자 숲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구달과 함께 들어가겠다며 그 금역을 허물어준 것이 어머니였다.

그리하여 1960년 7월 “세계에서 가장 믿기 어려운 과학탐험이 시작됐다.”(<가디언> 10월 2일)

 

침팬지 육식, 도구 사용 사실 발견

 

그해 말 탄자니아 곰베 국립공원에서 당시 26세였던 제인 구달은 야생 유인원 연구 현장 과학자로서의 그녀의 명성을 굳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첫째는 침팬지가 그때까지 알려졌던 것과는 달리 붉은 고기(red meat)를 먹는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했다. 그 전까지는 그런 사실을 현장에서 확인하는 관찰이 거의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침팬지는 채식주의자’라는 것이 정설로 굳어져 있었다.

 

또 한 가지는 더 놀라운 사실이었는데, 그것은 침팬지가 인간처럼 도구를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침팬지는 흰개미가 세운 높다란 흙탑 옆에 웅크리고 앉아 긴 풀줄기를 손질해 흙탑 속 구멍 깊숙이 찔러넣는 ‘탐침’(probe)이자 낚싯대로 활용했다. 침팬지가 그 탐침을 좁다란 흰개미 흙집 속 터널 안 깊숙이 찔러넣으면 굴 안에 있던 병정계급 개미들이 본능적으로 강력한 턱을 침입물체에 박어넣었다. 그러면 침팬지는 조심스레 그 풀줄기를 빼내서 달라붙어 있는 병정개미들을 훑어 먹었다.

 

흰개미는 동아프리카 지역의 여러 종의 원숭이들에게 먹이가 될 만큼 그들에겐 맛있는 먹이였으나 그들을 이처럼 낚아서 먹는 전통(tradition of fishing)으로 발전시킨 것은 침팬지뿐이었다.

 

야생 침팬지가 물체를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처음 목격한 사람은 구달이 아니었으나, 그 행동을 그토록 면밀하고 반복적으로 관찰하면서 철저하게 기록한 최초의 인물은 구달이었다.

침팬지가 고기도 먹고(육식) 도구를 사용한다는 것을 확인한 것은 놀라운 발견이었고, 구달은 그것으로 영쟝류학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원래 6개월 정도로 끝낼 예정이었던 그 연구 프로젝트는 구달의 그런 발견으로 새로운 지원 속에 더 많은 연구로 이어졌다.

 

당시까지 동물들은 대체로 반사작용과 본능의 무의식적 연쇄로 엮인 존재로 여겨졌으나, 구달은 야생 침팬지 관찰과 연구를 통해 그들이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예측하며, 계획을 세우고, 감정적인 삶을 영위하며 개별적인 성격(personality)과 특성(character)에 따라 행동하는 신중한 생명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가디언 10월 2일

 

케임브리지대 동물행동학 박사학위

 

구달은 자신만의 방식, 그리고 결단력과 용기, 회복력과 열정으로 동물관찰과 과학에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하는데 기여했다. 현장연구를 통해 그것을 보여 줌으로써 구달은 그때 이미 세계 최고의 야생 침팬지 전문가가 됐다. 그것으로 그녀는 대학 학부 졸업자에게 주는 학사학위도 없이 1962년에 캐임브리지대 동물행동학 박사 과정생으로 입학해 1966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시절 그녀는 이미 미국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에 자신의 연구 주제들에 관한 글을 써서 더욱 유명해졌다. 그런 글들을 바탕으로 쓴 <인간의 그늘에서>(1971)는 국제적인 베스트셀러가 됐다.

 

과학적 명성과 세속적 인기의 충돌

 

한동안 그녀의 인기는 그녀가 쌓은 과학적 명성을 능가해 때로 그것이 서로 충돌하기도 했다. 좋은 과학이란 원래 지루해야 하는 것(boring) 아니냐는 당시의 통념과, 어떻게 그렇게 예쁘고 젊은 여성이 일류 과학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라는 경이의 충돌. 그런 논란의 중심에 동물학자 솔리 주커먼이 있었다. 1962년 구달이 과학 학회에서 첫 논문을 발표했을 때, 주커만은 침팬지 육식에 대한 그녀의 그 보고를 일상적이지 않은 일회성 기담(anecdote)에 토대를 둔 아마추어의 것이라 질책했다. 주커만은 그때 동물행동학자 데스몬드 모리스에게 보낸 짧은 서신에서 구달의 학회 발표에 의해 자극받은 자신의 ‘불안감’에 대해, “보통 비과학적인 취급을 받아 온 주제가 화려함(glamour. 젊고 아름다운 구달의 매력) 때문에 계속 비과학적인 그늘 속에서 다뤄지게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썼다.

 

그런 비난에도 구달의 전문가적 명성은 높아갔다. 1970년대 초에 구달은 스탠퍼드대의 정신의학 및 인간생물학 방문교수, 탄자니아 다르에살람대 동물학 방문교수가 됐다. 나중에 그녀는 미국 터프처대, 남가주대, 코넬대 교수도 역임했다. 하버드대 출판부에서 낸 <곰베의 침팬지>(1986)는 곰베에서의 연구에서 얻은 야생 침팬지 연구 초기 25년의 지식을 요약한 것이었다. 이는 시카고 과학 아카데미에서 영장류학자들이 국제총회를 열게 만들었다. 그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야생 침팬지가 아프리카 전역에서 감소하면서 멸종 위기에 처해 있고, 외부로 유출돼 우리에 갇힌 침팬지들은 종종 학대와 혹사 위협에 직면해 있다는 냉엄한 공통인식에 도달했다.

 

현장연구에서 은퇴한 뒤 환경보호운동가로

 

25년 넘게 곰베 숲에 직간접적으로 꾸준히 관여했던 구달은, 현역 과학 연구직에서 은퇴하고 환경보호론자이자 활동가로 주 활동영역를 바꾼 뒤에도 곰베 스트림 연구센터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곰베 센터는 오늘날 가장 오랫동안 운영된 과학 현장 연구 시설로 남아 있다.

 

1991년, 연구소는 젊은이들을 환경 보호에 참여시키기 위해 '뿌리와 새싹(Roots and Shoots)'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는 구달과 함께 활동하는 학생들로 시작되었지만, 이후 약 100개국에 걸쳐 활동적인 젊은이들의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올해 초, 연구소의 '행동을 통한 희망(Hope Through Action)' 프로젝트는 5년간 2950만 달러(약 415억 원)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 계획은 탄자니아 서부의 멸종 위기에 처한 침팬지와 그 서식지를 재조림과 "지역사회 주도 방법론"을 통해 보호하고 생물 다양성을 보존하며 지역 사회의 생계를 개선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하지만 1월 20일 출범한 도널드 트럼프 2기 정부는 그 지원금을 삭감해버렸다. 

 

80대가 넘은 나이에도 구달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 글을 쓰고 강연을 이어가며 활동의 속도를 늦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한국도 여러 차례 방문했다.

 

“가장 조용했지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

 

오랜 기간 그녀와 긴밀히 협력해 온 이스트 앵글리아대 생물학자 벤 개로드 교수는 타계 소식을 듣고 말했다. "제인 구달은 세상을 바꾼 인물이었다. 그녀는 시끄러운 방에서 가장 조용한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녀는 젊든 나이들었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인간이든 동물이든 모두를 위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녀는 1년에 300일을 여행하며 쉬지 않고 일했다. 내가 그녀를 아는 동안 매일 일하며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환경 변호사 파르하나 야민은 구달이 "유인원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며, “그녀의 탁월한 관찰 덕분에 우리는 언어, 사랑, 배려가 인간을 넘어선 세상의 핵심 요소이며, 우리는 자연의 주인이 아니라 그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배우이자 환경운동가인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는 구달이 "자신의 영웅"이라고 했다. "탄자니아 침팬지에 대한 그녀의 획기적인 연구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친척들이 어떻게 살고, 사회화하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변화시켰다. 우리는 침팬지를 비롯한 유인원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리고 인스타그램에 이런 글을 남겼다. "그녀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 한승동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