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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내전이 임박했다는 영화의 예지력?

시사한매니져 2025. 10. 5. 01:13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속 미국 극좌와 극우

 

                                                                                 오동진 영화평론가

 

혁명은 낡고 퇴보하는 것이 아니라 늙고 지치는 것이다. 그래서 변질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의 변질은 어쩌면 더 인간적이고 실존적이며 미래지향적일 수 있다. 그런 행보야말로 인간의 얼굴을 한 혁명일 수 있기 때문이다. 관념적으로 과격할 뿐인 혁명 이론은 반드시 조직과 이념 자체를 배신하게 된다. 가장 경계해야 할 부류는 좌파 모험주의자들이다. 그것이 우파 기회주의자들보다 훨씬 더 인민의 적이라고 레닌은 말했다. 러시아를 혁명으로 이끌면서 레닌은 당내 투쟁 과정에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 등 한때 우파 기회주의 행태를 보였던 인물들을 용서한다. 반면 과격한 스탈린만큼은 끝내 경계했다.

 

극좌 테러리스트보다 더 강고한 백인 우월주의자 조직

 

폴 토마스 앤더슨이 내놓은 신작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사실상 미국 내에 여전히 극좌 테러리스트 조직이 존재한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그 점이 놀라운 게 아니다. 그보다는, 이제 한 줌도 안 되는 그 같은 정치 조직에 비해 그 반대편의 백인 우월주의자들, KKK의 후예들, 우생학적 인종주의자들이 더욱더 강고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 그들이 사실상 미국 정가와 군대를 운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더 놀라게 된다. 이 영화를 보면서 주목해야 할 것은 ‘프렌치75’ 같은 반체제 조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한국의 내란 음모 세력 같은, 비밀 백인 우월주의자 조직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 같은 조직이 강고하게 암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체로 이번 영화를 본 후의 반응은 폴 토마스 앤더슨이 ‘어마어마’한 역작을 만들었다고 입에 침을 튀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다. 이번 영화는 내면적으로 볼 때 일종의 리메이크이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이미 한번 만들어진 얘기이다. 2013년에 만들어진<컴퍼니 유 킵>이 그것이다. 얼마 전 타계한 로버트 레드포드가 직접 감독과 주연을 맡았다. 샤이아 라보프가 상대역으로 나왔고 수잔 서랜든, 그리고 무엇보다 줄리 크리스티(맞다! ‘닥터 지바고’에서 라라 역을 맡은 줄리 크리스티이다)가 나왔다. 예전의 <컴퍼니 유 킵>이든 이번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이든 같은 역사적 사실을 다룬다. 다만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컴퍼니 유 킵>이 묘사하는 1970년대 정치적 사건을 2010년으로 옮겨 온 것일 뿐이다. 같은 사건이란, 미국의 극좌 그룹 ‘웨더 언더그라운드’에 대한 얘기이다. 1960~70년대 미국 내에는 좌파 진영에도 주류와 비주류가 있었으며 주류는 세 그룹이었다. ‘뉴레프트’와 ‘이피’, ‘블랙 팬서’가 그들이다. 그리고 비주류가 바로 이 ‘웨더 언더그라운드’이다.

 

 

좌파 진영 주류 세 그룹 아닌 한 비주류 그룹 이야기

 

이번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 내 운동권의 세력 관계를 대략으로나마 아는 것이 중요하다. 1960~70년대 미국의 ‘뉴레프트’, 곧 신좌파는 ‘SDS(Students for a Democratic Society)’를 말하는 것이다. 일종의 학생운동 조직이다. 훗날 유명 상류층 변호사로 변절한 톰 헤이든이 이끌었다. ‘이피’는 ‘Yippie’를 말하는 것이다. ‘국제청년당과 히피연합(Youth International Party and Hippie)’을 말하는 것으로 펑크족과 선동가들로 구성된 정치집단이었다. 히피와 신좌파의 중간노선을 취했으며 아나키스트였던 애비 호프먼이 이끌었다. 호프먼은 레이건의 등장과 미국의 우경화를 비관해 자살했다. 그리고 그 유명했던 흑인 무장투쟁 조직인 흑표범당, 곧 ‘블랙 팬서’당이 있다. 이 ‘블랙 팬서’가 현대에 이르러 미국 대부호 영화사 월트 디즈니에 의해 <블랙 팬서>라는 히어로물 시리즈로 만들어진 것은 아이러니 중 최고의 아이러니이다.

 

이들 세 그룹에 비해 ‘웨더 언더그라운드’는 그다지 많이 알려진 그룹이 아니다. ‘SDS’와 ‘이피’가 대체로 백인 중심이었고 ‘블랙 팬서’가 흑인 중심 좌파 그룹이었다면 ‘웨더 언더그라운드’는 흑백 조합의 그룹이었다. 아이리스라는 이름의 흑인 지도자가 이끌었다. 이 아이리스는 버락 오바마가 자신의 정신적 멘토로 삼았음이 알려지면서 한동안 소환됐으며, 오바마가 극좌 흑인 테러리즘의 영향을 받았다는 공격의 소지로 활용되기도 했다. ‘웨더 언더그라운드’는 베트남전 반대 등을 기치로 내걸고 펜타곤 폭탄 테러 등을 ‘감행’했고 조직의 자금을 마련한다는 명분으로 미시간주의 한 은행을 털다가 경비원을 살해하는 범행을 저질러 대중의 공분을 샀다. 그 과정은 이번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 그대로 묘사되고 있다.

 

 

더 나은 사회 떠들면서 은행강도 벌이는 극좌 조직 리더

 

영화 속 정치 조직 ‘프렌치75’의 리더인 퍼피디아 베벌리 힐스(테야나 테일러)는 점점 더 이념적으로 극단화된다. 그녀는 이데올로기 못지않게 육체적 욕망, 현시욕 또한 점점 더 심해진다. 퍼피디아가 백인 우월주의자이면서 유색인종에 대한 패티시즘이 강한 스티븐 록조(숀 펜)와 외도 행각을 벌이다 결국 조직까지 배신하는 이유이다. 퍼피디아의 행동 동기는 더 나은 사회 체제를 만드는 것인 양 떠들어 대지만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채워 나가는 것에 불과했던 셈이다. 퍼피디아가 밥 퍼거슨(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어린 딸을 버리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겠다며 집을 나서지만 결국 저지른 것은 은행강도 짓이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웨더 언더그라운드’ 그룹의 미시간 은행털이 사건을 2010년대로 가져오고, 조직의 리더를 흑인 여자로 바꾸는 등(지도자가 여성이었던 그룹은 ‘블랙 팬서’였다. ‘블랙 팬서’의 지도자는 영화 속 퍼피디아처럼 쿠바로 도주했다) 역사적 사실 몇 가지를 극화시키는 과정에서 합치거나 해체시켰다. 퍼피디아의 캐릭터 자체가 ‘웨더 언더그라운드’의 아이리스와 ‘블랙 팬서’의 조앤 데버라 바이런을 합친 것으로 보인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일종의 팩션인 이유이다. 이 영화는 토마스 핀천이 쓴 『바이랜드』를 원작으로 했다. 『바이랜드』가 팩션 소설이었던 셈이다.

 

 

출세 위해 좌파 추적하고 자신의 흔적마저 지우려는 극우주의자

 

주인공 밥 퍼거슨이 퍼피디아의 은행 살인강도 이후, 원래 이름을 펫에서 밥으로 바꾼 후 박탄 크로스(엘파소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가상 공간. 이민자들의 천국으로 묘사된다)로 피신해 딸인 샬린을 윌라(체이스 인피니티)로 개명시키면서까지 16년간 은둔하며 키워 낸 것은 <컴퍼니 유 킵>의 주인공 닉 슬론(로버트 레드포드)이 짐 그랜트라는 이름으로 30년간 은둔하면서 어린 딸(영화 속에서 그는 뒤늦게 결혼한 것으로 나온다)을 키우는 설정과 비슷하다. 두 영화 모두 애지중지하는 딸이 위기에 처한다. 부성이 작동한다. 부성은 이념을 앞지르고 역사를 가로지른다. 사람들의 가슴을 훔친다.

 

같은 맥락이어도 폴 토마스 앤더슨은 이 얘기를 블랙 코미디로 풀었다. 바로 그 점이 이 역사의 얘기를 한결 가볍게 만들어서 대중들 정서에 한층 깊이 침투할 수 있게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162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의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는데 1부가 ‘프렌치75’를 중심으로 하는 펫(나중에 밥이 되는 디카프리오. 조직에서 그는 폭파 전문가이다)과 퍼피디아 베벌리 힐스의 삶, 여기에 록조(그는 이민자 수용소 소장에 불과했다)와의 만남에 치중한다면 2부는 16년 후 대령이 된 록조가 밥과 그의 딸 윌라를 쫓고, 특히 윌라를 제거하기 위해 박탄 크로스에 군대를 이끌고 치러 들어온다는 이야기로 돼 있다. 밥과 윌라를 제거하려는 록조의 행동 동기는, 자신이 순혈 백인 극우 집단인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미국의 극우들은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조직명을 동호회처럼 짓는다)의 일원이 되려 할 때, 자신과 퍼피디아와의 사이에서 혼혈인 윌라가 태어났을 수 있다는 의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는 그 의혹을 사전에 깨끗이 차단하려 한다.

 

늙고 병든 좌파와 기세등등 극우가 만드는 위태로운 코미디

 

2부의 추적 장면은 시종일관 슬랩스틱의 소동극으로 이어진다. 밥 퍼거슨은 이제 늙었다. 혁명은 결코 낡거나 쇠퇴하지는 않을지언정 늙고 병들었거나 이제는 ‘추억팔이’ 정도에 불과한 것일 수 있게 된다. 밥은 컨테이너 같은 집에서 살아가며 윌라가 벤저민 프랭클린 같은 KKK단 지도자의 초상이 걸려 있는 학교에 다니는 걸 못내 못마땅해 하고 집에서 대마초를 피워 대며 그 유명한 혁명 영화 <알제리 전투>를 보는 것으로 소일하는 정도이다. <알제리 전투>는 알제리민족해방전선(FNL)의 투쟁기를 그린 영화로 이탈리아 질로 폰테코르보가 1966년에 만든 영화이다.

 

 

폴 토마스 앤더슨이 보기에 늙고 쓸모없어진(밥은 이제 옛 조직으로부터 온 통화에서도 암구호를 외우지 못해 온갖 말싸움을 벌인다), 그리하여 이제는 미국 사회의 변방 중 변방으로 밀려난 극단의 정치 조직을 여전히 대단한 세력인 양 과장, 왜곡하는 미국 내 극우 집단들의 행태야말로 나라를 매우 위태롭게 만드는, 진정 코미디 같은 일이라는 것이다. 그 코미디가 바로 지금 트럼프 제2기 시대에 버젓이 벌어지고 있으며 아마도 자신이 묘사한 스티븐 록조의 일그러진 표정(록조는 나중에 진짜 얼굴이 구겨질 만큼의 큰 총상을 입는다)처럼 트럼프 시대가 망가질 것이라고 내다본다.

 

록조처럼 ‘한물 간’ 좌파들 들춰내 죽이고 탄압하려는 트럼프

 

영화는 일정한 예지력을 갖는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이번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알렉스 가랜드의 영화 <시빌 워: 분열의 시대>와 함께 미국에 내전 상황이 임박했음을 보여 준다. 마침 트럼프가 전 세계 모든 미군 장성들을 한 곳에 모아 놓고 정신 훈육을 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트럼프도 록조처럼 이미 ‘한물 간’ 좌파들을 들춰낼 것이다. 그리고 국가를 구한다는(MAGA 프로젝트 같은) 잘못된 사명감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탄압할 것이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이 영화는 바로 그 얘기이다. 우리가 먼저 겪은 이야기이며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이다. 영화는 늘 진짜 벌어진 일, 벌어지고 있는 일.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일을 이야기한다. 영화를 보면 세상이 보인다는 말은, 그래서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