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REA
멋진 ‘외교 · 안보 용어’ 속 숨겨진 음흉한 의도
시사한매니져
2025. 12. 11. 04:29
진실 호도하는 선전술에 더 이상 속지 말아야

대학교 1학년 때, 미국이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는 미사일에 ‘어네스트 존(honest John)’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을 비판한 놈 촘스키의 글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무고한 사람을 대량으로 죽일 수 있는 끔찍한 무기에 ‘착한 이웃 아저씨’를 떠올리는 명칭을 붙임으로써 전쟁과 폭력의 모습을 감추고 순화하여 대중의 비판의식을 무디게 하려 한다는 내용입니다.
대학 입학 직전까지 줄곧 주입식·암기식 교육만 받고 자란 사람에게 쉽게 소화하기 어려운 글이었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하고, 주체적인 사고의 중요성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됐습니다.
경계해야 할 ‘언어 세탁’ 통한 여론조작
미국의 대표적인 비판적 지성인이자 언어학자인 놈 촘스키는 나이가 90살을 훌쩍 넘었는데도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주요 활동의 하나가, 이 시대의 강자들이 ‘언어 세탁’과 ‘언어 기만’을 통해, 대중이 도덕적 분노나 비판 없이 그들의 폭력적 행위에 순응하도록 여론조작을 일삼고 있다는 사실을 까발리는 일입니다. 미국이 다른 나라를 공격할 때 발생하는 민간인 사상자와 비군사 시설 파괴를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로, 다른 나라에 대한 공습을 ‘외과적 타격(Sugical Strike)’으로 부르는 게, 그가 제시하는 대표 사례입니다.
시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2차대전 때 일본제국주의를 결정적으로 항복으로 이끈 두 발의 원자폭탄 이름에도 그 파괴적 위력을 숨기는 ‘언어 세탁’이 사용되었습니다. 10만 명이 넘는 사망자를 낸 히로시마 투하 원폭의 이름이 ‘리틀 보이(Littie Boy, 꼬마)’였고, 7만 명 이상을 불귀의 객으로 만든 나가사키 투하 원폭의 이름이 ‘팻맨(Fat Man, 뚱보)’이었으니까요.
외교·안보·군사 분야에서 흔히 벌어지는 이런 언어 세탁과 언어 기만은 남의 나라에만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한국과 관련한 사안에서도 자주 벌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힘의 격차가 심한 한미 관계에서 두드러집니다.

‘한미동맹 현대화’는 ‘한미동맹 종속 심화’의 다른 말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정상회담을 계기로 타결된 한미 경제·안보 협상의 팩트 시트에는 ‘한미동맹 현대화’라는 항목이 있습니다. 한미동맹 현대화의 표면적인 의미는 21세기 안보 환경에 맞게 동맹을 개선하고 강화하자는 것입니다. 내세우는 명분만 바라보면 누구도 쉬이 반대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실상을 보면, ‘양의 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파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그럴듯한 표현과 달리 미국이 한국에 안보 비용을 전가하고 군사 종속을 심화시키는 게 핵심입니다. 팩트 시트의 한미동맹 현대화 부분에 나오는 “한미 양국은 북한을 포함한 동맹에 대한 모든 지역적 위협에 대응하여”라는 문구는 미국이 관여하는 분쟁에 한국이 빨려 들어갈 여지를 한층 넓혀 놨습니다. 이전에 한미 간 큰 쟁점이었던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도 일반 사람은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2006년 이후 관련 양해각서’라는 암호로 부활했습니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란 쉽게 말해 주한미군을 마음대로 대만 등 다른 분쟁 지역으로 빼내어 쓰겠다는 미국 쪽 구상입니다. ‘2006년 이후 양해각서’라는 것은 “한국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존중하고, 미국은 한국이 한국민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 지역 분쟁에 개입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한다”라는 두루뭉술한 타협이 담긴 양국 외교 수장의 공동성명을 말합니다. 한미 정상회의 팩트 시트, 그 뒤 나온 제57차 한미 군사안보협의회(SCM) 공동성명을 아울러 보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관한 한국의 입장이 2006년보다 훨씬 미국 쪽으로 기울어졌음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