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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목사 32주기…늦봄은 지지 않는다
시사한매니져
2026. 1. 18. 11:44
역사는 더디게 움직이지만 결국 옳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믿음
그는 신앙이 현실을 비켜가는 순간 거짓이 된다고 보았다.
“신앙은 세상을 바꾸지 못하면 거짓이다”라는 선언
그는 말했고, 걸었고, 감옥에 갔다.

1월 18일, 오늘은 문익환 목사가 세상을 떠난 지 32년이 되는 날이다. 시간은 그를 역사 속 인물로 밀어 넣었지만, 그의 이름은 여전히 현재형으로 우리 앞에 서 있다. 민주주의가 위태로울 때마다, 분단이 일상처럼 굳어질 때마다, 종교가 자기 안전과 체제 순응으로 기울 때마다 우리는 다시 문익환을 떠올린다. 그는 이미 끝난 인물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문익환의 부재는 단순한 상실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그의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의 호 ‘늦봄’은 계절의 비유를 넘어선 삶의 선언이었다. 늦게 오는 봄, 그러나 쉽게 지지 않는 봄. 그는 빠른 승리를 믿지 않았고, 단기적 성과에 기대지 않았다. 역사는 더디게 움직이지만 결국 옳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믿음, 그 믿음을 그는 신앙이라 불렀다. 그러나 그 신앙은 개인의 위안이나 사후 구원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것은 이 땅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였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겠다는 선택이었다.
문익환에게 성서는 하늘의 책이 아니었다. 성서는 땅의 책이었고, 사람의 역사였다. 출애굽은 고대 신화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반복되는 해방의 이야기였으며, 예언자들의 분노는 오늘의 권력 앞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언어였다. 그는 성서를 연구하는 학자였지만, 성서를 해석하는 데 멈추지 않았다. 성서가 요구하는 삶의 자리에 자신을 내놓았다. 그래서 그의 설교에는 늘 구체적인 현실이 등장했다. 가난, 분단, 독재, 고문, 침묵의 공모. 그는 신앙이 현실을 비켜가는 순간 거짓이 된다고 보았다.
그가 남긴 가장 불편한 말 가운데 하나는 “신앙은 세상을 바꾸지 못하면 거짓이다”라는 선언이다. 이 말은 종교를 위로와 안정의 장치로 소비해 온 한국 사회에 지금도 날카롭게 꽂힌다. 그는 기도를 부정하지 않았지만, 기도가 행동을 대신할 수는 없다고 믿었다. 신앙은 현실을 견디는 도구가 아니라, 현실을 바꾸는 힘이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말했고, 걸었고, 감옥에 갔다.

그의 삶에서 감옥은 예외가 아니라 일상이었다. 유신 독재와 군사정권 아래 그는 반복해서 연행되고 수감되었다. 그러나 그는 감옥을 피해자의 자리로만 이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감옥을 민주주의의 교실로 만들었다. 억압의 구조를 몸으로 겪으며 그는 더욱 분명해졌다. 민주주의는 제도만으로 유지되지 않으며, 헌법 조항만으로 살아남지 않는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달았다. 민주주의는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감수성이며, 침묵이 안전하다고 느낄 때 말하는 용기이고, 다수가 옳지 않을 때 기꺼이 소수가 되는 결단이다.
그의 민주주의는 온건하지 않았다. 동시에 폭력적이지도 않았다. 그는 비폭력을 말했지만, 그것은 무력함이나 체념이 아니었다. 불의 앞에서 중립을 가장한 침묵이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음을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권력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언제나 권력에 의해 밀려난 사람들의 언어를 선택했다. 그 선택은 편안하지 않았지만, 그는 불편을 기꺼이 감수했다.
1989년의 방북은 그의 삶에서 가장 큰 논쟁을 불러온 사건이었다. 정부의 허가 없이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만난 그의 선택은 곧바로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이름으로 처벌되었다. 사회는 그를 둘로 나누어 평가했다. 어떤 이는 용기라 불렀고, 어떤 이는 무모함이라 불렀다. 그러나 문익환 자신에게 그 선택은 계산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분단이라는 구조적 폭력을 더 이상 관념으로만 다룰 수 없다는 절박함의 표현이었다.

그에게 통일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었다. 통일은 사람의 문제였다.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만나지 못하게 막는 체제, 왕래해야 할 삶을 가로막는 분단은 그 자체로 폭력이었다. 그는 법을 어겼을지 모르지만,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더 큰 윤리에 충실했다. 그의 방북은 체제 승인도, 이념 동조도 아니었다. 그것은 분단의 금기를 몸으로 건너는 신앙적 실천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묻는다. 법은 누구를 보호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떤 법에 복종해야 하는가.
문익환은 시인이기도 했다. 그의 시는 화려하지 않았지만 깊었다. 그는 언어를 장식하지 않았고, 언어로 숨지 않았다. 그의 시에는 분노와 연민이 함께 있었고, 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배어 있었다. 그는 절망 속에서도 노래했고, 감옥 안에서도 웃었다. 그 웃음은 체념이 아니라 저항이었고, 그 노래는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 관통이었다. 시는 그에게 휴식이 아니라 다시 싸우기 위한 호흡이었다.

문익환의 영성은 그래서 특별하다. 그것은 개인적 내면에 머무는 영성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으로 확장되는 영성이었다. 그는 신앙과 정치, 기도와 행동을 분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들을 하나의 삶으로 엮어냈다. 오늘날 종교가 자주 권력과 타협하고, 중립을 가장한 침묵으로 자신을 보호하려 할 때, 그의 삶은 더욱 또렷한 대비를 이룬다.
1985년 봄, 나는 문익환 목사님을 민통련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김의기 열사가 나의 처남이라는 사실을 아시고,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보내셨다. 김의기의 삶과 죽음을 단순히 가족의 아픔으로만 여기지 않고, 민중과 민족의 고통으로 인식해 주셨다. 그 마음은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민족 전체의 고통과 정의의 자리로 자연스럽게 확장되었다. 그의 연대와 애정은 단순한 동정이나 위로가 아니라, 사랑과 정의를 행동으로 구현하는 길이었다. 이 연대는 내게 신앙이 결코 개인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와 역사 속에서 증명되어야 함을 가르쳐 주었다.
32년 전 문익환 목사가 세상을 떠나신 때, 눈이 많이 내렸다.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길은 유난히 고요했고, 사람들은 말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이 땅이 한 사람의 죽음을 함께 애도하는 듯했다. 영정 앞에서 나는 삼배를 올렸다. 사진 속 그는 여전히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절을 하며 어떤 기도를 드렸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한 개인의 죽음이라기보다 한 시대가 떠났다는 감각이 더 또렷했다. 장례식장을 나설 때도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 그날 이후, 눈이 오는 날이면 나는 늘 문익환 목사를 떠올린다. 눈 속에서도 봄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을.

문익환 목사 32주기를 맞은 오늘의 한국 사회는 여전히 그가 던진 질문 앞에 서 있다. 민주주의는 제도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사회 곳곳에서는 배제와 혐오, 침묵의 공모가 반복되고 있다. 분단은 더 이상 긴장으로조차 인식되지 않을 만큼 일상화되었고, 통일은 말하기 조심스러운 주제가 되었다. 종교는 도덕적 권위를 말하지만, 정작 가장 약한 이들의 곁에서는 자주 침묵한다.
이런 시대에 문익환이 살아 있다면 그는 아마 이렇게 물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누구의 편에 서 있는가. 편안함을 위해 외면하고 있는 고통은 무엇인가. 신앙과 양심을 분리한 채 살아가는 것을 우리는 언제부터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는가. 그의 질문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지만, 바로 그 불편함 속에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
그를 기린다는 것은 과거를 추억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질문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묻는 일이며, 그의 용기를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실천해보는 일이다. 거창한 결단이 아니라, 불의 앞에서 한 발짝 물러서지 않는 태도, 분단을 숙명처럼 받아들이지 않는 상상력, 신앙과 양심을 삶의 가장 낮은 자리까지 끌어내리는 선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