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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올림픽] 전쟁에 스러진 동료들 새긴 헬멧 쓰면 안된다고?
시사한매니져
2026. 2. 11. 02:09
[올림픽의 지정학 ⑦] 정치적 의사 표현
우크라이나 스켈레톤 대표 헤라스케비치
본인은 통보 받았다는데 IOC 확인 안해
올림픽 헌장 50조 2항 시대에 뒤떨어져
독도 세리머니, 욱일기, 이순신 현수막
1968 '검은 주먹' 주역 폐지 주장하기도
트럼프, 자신 비판했다고 "진짜 패배자"
클로이 김 등 "선수도 의견 밝힐 권리"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스켈레톤에 출전하는 블라디슬라프 헤라스케비치(27·우크라이나)는 헬멧에 러시아와의 전쟁에 스러진 동료 선수 등 여러 명의 얼굴을 새겼다. 무고하게 희생된 이들의 넋을 달래고 조국의 전쟁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리겠다는 뜻에서였다.
세 번째로 올림픽 무대에 나서는 헤라스케비치가 9일(현지시간) 코르티나 슬라이딩 센터에서 이 헬멧을 쓴 채 연습 주행에 나서자 많은 매체들이 주목했다. 그는 연습 주행을 마친 뒤 로이터 통신에 "헬멧에 그려진 사람들 중 일부는 내 친구들이었다"고 밝혔다.
헬멧에 새겨진 이들은 10대 역도 선수 알리나 페레후도바, 복싱 선수 파블로 이셴코, 아이스하키 선수 올렉시이 로기노프, 배우이자 운동선수 이반 코노넨코, 다이빙 선수이자 코치 미키타 코주벤코, 사격 선수 올렉시이 하바로프, 무용수 다리아 쿠르델 등이다. 헤라스케비치는 "올림픽을 통해 전쟁에 대한 관심을 계속 고취시키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이라고 강조했다.
헬멧이 국제적 관심사로 떠오르자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논의해보겠다고 했고, 밤늦게 문제의 헬멧 착용을 허용할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고 연합뉴스가 10일 전했다. 영국 BBC는 헤라스케비치가 선수들, 국가 올림픽위원회들, IOC의 소통을 담당하는 IOC 대표 츠루나가 도시오가 선수촌에 찾아와 올림픽 헌장 50조에 근거해 헬멧을 금지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주장했지만, IOC는 아직 공식 확인을 해주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BBC는 이어 IOC의 확인을 기다린다고 밝혔다.
올림픽 헌장 제50조 2항은 '어떤 종류의 시위나 정치적, 종교적, 인종적 선전도 올림픽 경기장, 시설이나 기타 지역에서 허용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어 IOC가 헬멧 착용을 불허한다면 이 규정을 근거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선수단 기수로 지난 6일 개회식에 참가했던 헤라스케비치는 인스타그램에 "IOC가 공식 훈련과 대회에서 내 헬멧 착용을 금지시켰다"고 밝혔다. 그는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결정이다. IOC가 올림픽 운동의 일원이었던 선수들을 배신하고 있다는 느낌, 그들이 다시는 설 수 없는 스포츠 무대에서 기려지는 일을 허용하지 않는 느낌"이라고 털어놓았다. 나아가 "IOC가 이런 추모를 허용했던 전례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우크라이나만을 위해 특별한 규칙을 정하기로 결정했다"고 개탄했다.
하지만 헤라스케비치의 주장은 면밀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전쟁 반대'의 뜻을 표명한 것을 과연 정치적 의사 표현으로 봐야 하는지도 경계가 모호하기도 하다.
2018년 평창 대회를 통해 올림픽 무대를 처음 밟은 헤라스케비치는 2022년 베이징 대회 중에도 '우크라이나 전쟁을 반대한다'(No War in Ukraine) 문구를 들어 보인 일이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며칠 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로 진격하는 '특수작전'에 들어갔다. 당시 IOC는 '평화를 호소하는 일반적 메시지'로 판단해 그를 제재하지 않았다.
그는 경기장 안에서 정치적 시위를 금지하는 올림픽 규정을 준수한다면서 대회 기간 우크라이나가 처한 비극적인 상황, 전쟁은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겠다는 의지를 밝혀왔다. 어쩌면 그가 IOC와 숨바꼭질하며 전쟁 참상을 알리려는 노력을 할 수도 있겠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헬멧을 준비한 헤라스케비치가 "우리 투쟁의 대가(무고한 희생)를 세계에 알렸다"고 찬사를 늘어놓았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텔레그램을 통해 "이 진실은 불편하지도 부적절하지도 않고, 스포츠 행사에서의 정치적인 행위로 불릴 수 없다"면서 "우크라이나는 평화와 생명을 존중하는 올림픽 운동의 역사적 사명에 충실하다. 러시아는 그 반대"라고 말했다.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한 이후, 러시아와 벨라루스 선수들은 대부분 국제 스포츠에서 제외됐으나, 이후 점진적으로 대회에 복귀하고 있다. IOC는 러시아 출신 13명의 선수를 개인 중립 선수(AIN)로 출전하도록 허용했다.

IOC "아이티 선수단 단복에서 독립 영웅 그림 빼"
IOC는 동계올림픽에 두 번째로 참가하는 아이티 선수단 단복 디자인을 바꾸도록 압력을 넣었다. 아이티계 이탈리아 디자이너 스텔라 장이 단 두 명의 이 나라 선수를 위해 핸드 페인팅이란 가장 아날로그 방식으로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단복을 꾸렸다.
그런데 화려한 그림 속 한 인물이 문제가 됐다. 18세기 말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이티의 농민 반란을 이끌어 최초의 흑인 공화국을 수립한 건국 영웅 투생 루베르튀르의 얼굴을 문제 삼았다. 옥신각신 끝에 루베르튀르의 얼굴을 빼기로 했다.
우리로 얘기하자면, 유관순이나 김구 얼굴을 넣었다고 일본 눈치를 보며 빼라고 압력을 넣은 셈이다. 그런데 스텔라 장이 루베르튀르의 얼굴 대신 그가 타던 붉은 말을 그렸는데 오히려 '주인 잃은 말'이 '영웅이 지워진 조국'을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되레 단복이 아이티가 처한 참담한 상황을 방증하게 됐다는 것이다.
2012년 런던올림픽 축구 남자 대표팀의 박종우가 '독도 세리머니'를 펼쳤다가 국제축구연맹(FIFA)로부터 A매치 두 경기 출전 정지 징계를 받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순신 현수막'과 욱일기 반입을 놓고 한국과 일본 측이 날카롭게 충돌했던 일도 있었다.
정치적 의사 표현의 원조 격은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있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스프린터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는 육상 남자 200m 1위와 3위를 차지한 뒤 시상대 위에서 검은 장갑을 낀 주먹을 높이 치켜들었다. 이들의 ‘검은 주먹’은 미국 흑인의 차별받는 현실을 전 세계에 알렸다. 은메달을 딴 호주의 백인 선수 피터 노먼도 둘에게 동조했다는 이유로 국가대표가 되지 못하는 등 셋 모두 불이익을 받았다. 반 세기가 지난 지금도 올림픽 역사에 가장 용기있는 행동으로 여겨진다.
2020년 12월 미국올림픽·패럴림픽위원회(USOPC)는 선수들의 정치적 의사표시에 대해 징계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선수들의 정치적 의사 표시를 제한한 올림픽 헌장 50조 3항과 배치되는 결정이다.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USOPC는 선수들이 메달 세리머니 때 ‘무릎꿇기’, ‘주먹 쥐어 올리기’ 등 평화적 저항을 표시하는 행동에 대해 징계를 내리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앞서 USOPC 선수위원회 소속 선수들이 제도 변화를 요구했고, USOPC가 오랜 고민 끝에 받아들였다. 이 과정에 한참 선배들인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도 기꺼이 함께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