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REA
‘고문 기술자’ 이근안 사망…“죽음은 만행 지울 수 없다”
시사한매니져
2026. 3. 27. 01:54
고문 등 가혹 행위로 허위 자백을 받아낸 이력으로 ‘고문기술자’

김근태 초대 민청련 의장을 고문한 이근안(가운데)씨가 1999년 11월 검찰에 송치되고 있다. 1988년부터 11년 가까이 도망 다니다 자수한 이씨는 7년의 실형을 살고 나온 뒤 목사로 변신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군사정권 시절 악랄한 고문 수사를 자행해 ‘고문기술자’로 이름을 떨친 이근안(88) 전 경감이 25일 사망했다.
26일 한겨레 취재에 따르면, 이씨는 건강 악화로 입소해 치료를 받던 서울의 한 요양병원에서 전날 숨졌다.
1970∼80년대 치안본부 대공수사관이었던 이씨는 고문 등 가혹 행위로 허위 자백을 받아낸 이력으로 ‘고문기술자’라는 별칭까지 얻은 인물이다. 이씨는 1979년 남민전 사건 등 주요 공안 사건에서 고문을 주도했고, 1981년에는 ‘서울대 무림사건’을 ‘해결’한 공로를 인정받아 내무부 표창을 받았다.
이씨는 1985년 9월 김근태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을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전기고문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해 12월 김근태 의장의 변호인단이 고문 경찰들을 고발했으나, 이씨의 신원이 알려지지 않아 고발장에는 ‘이름 모를 전기고문 기술자’로만 기재됐다. 이후 3년만인 1988년 12월21일 한겨레가 이씨의 실명과 얼굴 사진을 보도하면서,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뒤 11년간 수배를 피해 도피 생활을 하던 이씨는 1999년 자수했고, 고문·불법 구금 혐의로 기소돼 대법원에서 징역 7년과 자격정지 7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이씨는 2006년 출소한 지 2년 만에 목사 안수를 받고 종교 활동을 했다. 이씨는 종교 활동 중 ‘과거를 반성한다’면서도 자신의 행위를 ‘애국’이라고 두둔하는 발언을 해 논란이 됐다. 이씨는 2010년 2월 언론 인터뷰에서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이라며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애국’이었으니까. 애국은 남에게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2011년 12월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던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이 별세한 뒤 이씨에 대한 비판 여론이 들끓자, 이듬해 그가 소속됐던 교단은 이씨의 목사직을 박탈했다.
이씨가 관여한 공안 사건은 최근까지 고문으로 인한 조작 수사로 드러나고 있다. 지난 2024년 6월 서울중앙지법은 이씨와 국가가 고문으로 인한 허위자백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납북어부 고 박남선씨의 유족에게 총 7억여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이날 성명서를 내 “그는 고문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진정성 있는 사죄나 반성의 뜻을 밝히지 않은 채 생을 마감했다”며 “가해자의 죽음은 그가 저지른 만행을 지울 수 없으며, 민주주의 역사에 새겨진 피해자들의 고통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밝혔다. 사업회는 “오랜 세월 고통을 견뎌온 피해자와 그 가족들께 깊은 위로와 연대의 마음을 전한다”며 “이근안의 사망을 계기로 우리 사회가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더욱 확고히 지키며, 과거의 잘못을 성찰하고 올바른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밝혔다. < 임재우 기자 >
‘고문기술자’ 이근안을 이렇게 보낼 순 없다
88세 사망 소식이 안기는 당혹감
이해찬·김근태 고문 후유증 때 이른 죽음 대비
이근안 목사 안수 받고 스스로 용서받았다 말해
전두환 90세 장수와도 겹쳐 …천수는 우연일까
때로는 누군가의 죽음은, 특히 그것이 천수를 누린 자연사라면, 그 죽음이 쉽게 용납되기 힘든 경우가 있다. 죽음은 본래 애도의 대상이지만, 어떤 죽음은 추모를 보내기가 힘들다. 아니, 애도를 보내는 것 자체가 부정의라고 해야 마땅한 일이기도 하다. 한 사회가 그 죽음을 받아들이려면 필요한 선행 조건이 있는 죽음이다. 사죄와 반성, 그리고 합당한 처벌이 있어야만 하는, 그것 없이 천수를 다한 자연사라면 그 인물의 죽음 이상으로 한 사회가 일종의 '죽음'을 겪게 되는 그런 죽음이다. 이를 테면 그런 죽음은 사회의 허락, 정리와 청산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허락을 구하지 않은 채, 대신 스스로를 용서한 채 한 인물이 '일방적으로' 먼저 가버렸다.

'고문 기술자' 이근안 전 경감이 25일 숨졌다는 소식이 하루 뒤인 26일 알려진 것을 접하면서 우리 사회가 갖는 복잡한 심경, 적잖은 당혹감이 바로 그렇다.
향년 88세. 이른바 '천수'(天壽)를 누렸다. 88이라는, 인간의 삶의 길이로는 결코 작지 않은 그 숫자의 생애를 보내고 자연사한 인물의 죽음 앞에서 떠올리게 되는 몇몇 인물들이 있다. 두달 전에 별세한 이해찬 전 총리, 그의 향년은 73세였다. 지금의 장수 시대에는 너무도 때 이른 죽음의 주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로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겪은 혹독한 구타와 고문의 후유증이 꼽혔다.
그리고 이 전 총리의 별세와 함께 다시 환기됐던 이름 하나를 이근안의 죽음을 맞아 다시 선명히 떠올리게 된다. 김근태 전 의원. 민청련 의장이었던 그야말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이근안으로부터 23일간의 ‘지옥’을 경험했던 사람이다. 그의 향년은 겨우 64세였다. 고문 후유증으로 오랜 고통을 겪다가 60대 중반,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는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 전 총리나 김 전 의장처럼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근안의 고문으로 인해 삶이 파괴되고 결국 일찍 세상을 뜬 이들 중의 하나가 이을호 민청련 상임위 부의장이다. 김 의장과 함께 끌려가 이근안 일당에게 23일에 걸쳐 수십번의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한 그는 후에 이렇게 술회한다.
“잠 안재우고, 물고문 며칠 하면 변이 안나온다. 전기고문과 칠성판이 더해지면 '내가 올빼미'라는 환상이 든다. 죽고 싶다는 것 외에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된다.”
이을호는 결국 김 의장이 사망한 지 10년 여 후에 고문후유증에 따른 복합증세로 세상을 떠나 김 의장이 묻혀 있던 마석 모란 공원묘원 묘역으로 뒤따라갔다.
이근안은 '고문 기술자' 외에도 '인간 백정', '지옥에서 온 장의사' 등의 별칭으로 불렸다. 그의 고문 수법은 잠 안 재우기, 물고문, 전기고문, 날개 꺾기, 통닭구이, 관절 빼기에 이르기까지 실로 ‘현란’했다. 남영동에 끌려갔던 이들이 증언하는 '칠성판' 물고문은 나무판자에 사람을 눕히고 가죽끈으로 묶어 물을 퍼붓는 방식이었다. 뛰어난 고문 기술로 영화 〈1987〉에서 박처원 남영동 대공분실장이 가장 아꼈다는 부하가 바로 이근안이었다. 1981년 '서울대 무림사건'에서도 가혹 행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지목됐던 그는 그해 내무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민주화 이후 수배된 그는 12년간 도피 끝에 자수했고, 받은 형량은 징역 7년이었다. 출소 이후 그는 목사가 됐다. 공개 간증을 통해 과거를 반성한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이 신앙을 통해 용서받았다고 했다. 자신이 스스로를 사면한 것이었다. 그리고 생전 자서전에는 이런 말도 남겼다. "간첩과 사상범을 잡는 것은 애국이었다." 교회 신앙 간증에서는 "고문도 하나의 예술이다"고 하기도 했다.
이근안의 천수는 또 다른 이름을 떠올리게 한다. 광주 5·18 유혈 진압의 주범 독재자 전두환이다. 그는 호사를 누리며 살다가 2021년 만 90세로 자연사했다. 사죄 없이,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처벌 없이 그는 편안하게 죽었다.
이근안에게 전성기를 안겨준 것이 전두환의 독재였다면, 두 사람의 천수는 우연이 아니라 한국 현대사의 한 부분, 한국 사회의 한 구조적 현실처럼 보인다. 국가폭력에 짓밟힌 몸은 더 일찍 무너지지만 생명과 인권을 유린한 이들은 장수하는 뒤집힌 역사와 현실의 실상을 보여준다.
이근안의 죽음을 이렇듯 그의 사망 뉴스 한 줄로 쉽게 보낼 수 없는 이유다.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이해찬 전 총리의 이른 죽음과 그 두 달 뒤의 고문기술자의 자연사. 70을 갓 넘기고, 70에 못 미쳐 세상을 떠난 이해찬과 김근태, 두 사람의 몸이 무엇을 증언하는지를 묻는 것. “고문이 애국이고 예술이었다”고, 자신을 스스로 용서한 이의 88년의 장수와 함께 물어야 할 일이다. < 이명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