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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 민주항쟁 47주년, 그날의 함성은 끝나지 않았다

시사한매니져 2026. 10. 17. 03:51

 

1979년의 역사에서 오늘의 민주주의를 묻다
시민이 맞섰던 억압과 불평등은 해소됐는가
약자의 존엄 지키는 게 민주주의 자체의 핵심

 

계엄령 발표 후 옛 부산시청(중앙동) 앞에 주둔하고 있는 탱크와 주변 모습

 

부산의 거리에서 시작된 저항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 교정에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유신헌법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치는 함성이 교정을 넘어 도심으로 번졌다. 남포동과 광복동 일대에는 학생들뿐 아니라 퇴근길 시민과 노동자, 고등학생들도 합류했다. 경찰의 진압에도 시위는 밤늦도록 이어졌다. 이틀 뒤인 18일에는 마산에서도 학생들이 거리로 나섰고 시민들이 가세했다. 부산에서 시작된 저항은 마산으로 확산하며 유신체제를 뒤흔들었다. 이것이 부마민주항쟁의 출발이었다. 1979년 10월 16일부터 부산에서 시작된 항쟁은 18일 마산으로 번졌고, 20일까지 두 도시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학생들의 시위가 시민들의 대규모 저항으로 발전했다는 점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사에 뚜렷한 자리를 차지한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을 바탕으로 장기 집권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됐고, 긴급조치와 정치적 탄압으로 반대 목소리를 억눌렀다. 국회의 견제 기능은 크게 약화됐으며 언론과 시민의 자유도 제한됐다. 국민이 주권자라는 헌법의 원칙은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권력은 국민의 뜻을 묻기보다 국민에게 복종을 요구했다. 부마항쟁은 이러한 정치 현실에 대한 저항이었다. 학생들이 먼저 움직였지만 거리의 함성은 대학 담장 안에 머물지 않았다. 시민들은 독재에 대한 분노를 함께 표출했다.

 

부마항쟁 당시 시위대 거리 행진 모습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의 생각과 요구가 모두 같았던 것은 아니겠지만, 권력이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현실을 더는 용납할 수 없다는 정서가 항쟁을 움직였다. 역사는 종종 몇몇 지도자의 결단으로 설명되곤 한다. 그러나 부마항쟁의 의미는 이름난 인물 몇 명으로 환원할 수 없다. 거리로 나선 학생과 노동자, 평범한 시민들의 용기가 역사의 방향을 흔들었다. 자신의 이름이 기록될지조차 알 수 없었던 사람들이 일상의 두려움을 넘어섰기에 항쟁은 가능했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분노의 배경

 

부마항쟁은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사건이 아니었다. 1979년 한국 사회에는 독재정권에 대한 정치적 반발과 사회경제적 불만이 누적돼 있었다. 같은 해 8월,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은 회사의 폐업 조치에 항의하며 서울 신민당사에서 농성했다. 경찰이 강제 진압에 나서는 과정에서 노동자 김경숙이 사망했다. 노동자의 생존권을 지키려는 투쟁이 공권력의 폭력과 마주한 사건이었다. 노동자들의 절박한 처지는 당시 사회의 불평등과 권력의 억압적 성격을 드러냈다. 10월에는 유신체제를 비판하던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됐다.

 

야당의 정치 활동을 제약하는 조치에 반발해 신민당 의원들이 집단 사퇴서를 제출하면서 정국은 더욱 악화됐다. 정치적 반대 세력을 제도 안에서 경쟁할 상대가 아니라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취급하는 권력의 태도가 갈등을 키웠다. 부산과 마산은 이러한 긴장이 분출한 현장이었다. 부산은 학생운동과 시민사회의 움직임이 활발했던 도시였고, 마산 역시 산업과 노동의 현장이었다.

 

부마항쟁 이후 계엄령 발표로 공수부대가 부산대 정문을 막고 주둔하고 있다

 

그러나 항쟁을 특정 지역의 기질이나 일부 학생들의 급진적 행동으로만 설명해서는 안 된다. 전국적으로 누적된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불만이 지역의 구체적인 조건 속에서 터져 나온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 시민들이 보여준 참여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학생들이 제기한 문제의식이 시민들의 호응을 얻으면서 시위는 정권의 통치 기반을 흔드는 대규모 저항으로 발전했다. 이는 독재체제가 겉으로 유지되는 것과 시민들의 동의를 얻는 것이 전혀 다른 문제임을 보여준다. 강압으로 질서를 유지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정당성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군홧발로 막은 거리, 무너진 유신체제

 

박정희 정권은 항쟁을 강경 진압했다. 부산에는 10월 18일 0시를 기해 계엄령이 선포됐고, 군 병력이 투입됐다. 마산과 창원 일대에는 10월 20일 위수령이 발동됐다. 경찰과 군의 진압으로 시위는 잦아들었으며, 참가자들은 연행과 구금, 수사와 처벌을 겪었다. 거리는 통제됐지만 시민들의 불만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부마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평가할 때 인과관계를 정확하게 짚을 필요가 있다. 항쟁은 유신체제의 심각한 위기를 드러낸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박정희 정권의 종말을 직접 가져온 사건은 10월 26일 발생한 박정희 대통령 피살이었다. 항쟁이 곧바로 정권을 무너뜨렸다고 단정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일이다.

 

부마항쟁 당시 마산지역에 붙은 격문

 

그렇다고 항쟁의 의미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부마항쟁은 유신체제가 시민들의 저항에 직면했음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국가가 군과 경찰을 동원해 시위를 억누를 수는 있었지만, 독재에 대한 분노와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을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는 없었다. 거리의 저항은 정권의 통치가 얼마나 취약해졌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징표였다. 더욱이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이 곧 민주주의의 실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1979년 12월 12일 신군부는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장악했고, 이듬해 5월 광주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이 군부의 폭력에 희생됐다.

 

유신체제가 무너진 자리에 민주주의가 자연스럽게 들어선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군사권력이 등장해 시민들의 열망을 다시 억눌렀다. 이 역사는 독재자의 퇴진과 민주주의의 정착이 별개의 과제임을 일깨운다. 권력자가 바뀌어도 권력 집중을 막을 제도와 시민의 감시가 없다면 억압은 다른 모습으로 되풀이될 수 있다. 민주주의는 한 사람의 퇴장으로 완성되는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고 권력의 한계를 정하는 지속적인 과정이다.

 

국가기념일이 되었다고 역사가 완성되는가

 

부마민주항쟁은 2019년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항쟁이 시작된 10월 16일을 국가기념일로 정한 것은 부산과 마산 시민들의 저항을 한국 민주주의의 중요한 역사로 공식 인정했다는 의미가 있다. 오랫동안 항쟁의 경험을 간직해 온 참가자와 유가족, 지역사회의 노력도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국가기념일 지정이 역사적 과제의 종결을 뜻하지는 않는다. 항쟁의 전개 과정과 피해 실태를 충실히 기록하고, 국가폭력의 피해를 입은 이들의 명예를 회복하며, 관련 자료를 보존하고 후대에 전하는 일이 계속돼야 한다. 역사적 사실을 둘러싼 논란이 남아 있다면 자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확인하고, 밝혀진 사실은 교육과 공적 기록에 반영해야 한다.

 

계엄령 발표 포고문을 읽고 있는 시민들(동아대)

 

기념식에서 민주주의를 찬양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어려운 것은 그 정신을 현재의 권력 운영에 적용하는 일이다. 자신을 비판하는 시민을 불편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 정치, 권력기관의 잘못을 감추지 않는 행정, 시민의 질문에 근거를 들어 답하는 공직사회가 필요하다. 국가가 민주화운동을 기리는 동시에 시민의 비판을 억압한다면 기념과 현실 사이에 모순이 생긴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민주주의가 저절로 성숙하는 것도 아니다. 선거에서 승리한 정치세력은 권력을 위임받았을 뿐, 무제한의 권한을 얻은 것이 아니다. 지지자의 환호가 크더라도 권력은 법과 제도의 통제를 받아야 하며, 언론과 시민사회의 감시를 존중해야 한다. 반대자의 비판을 배신이나 적대 행위로 몰아가는 정치문화 역시 경계해야 한다.

 

시민에게도 책임이 있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의 잘못을 외면하면서 상대편의 잘못만 비판한다면 권력 감시는 정파적 도구로 전락한다. 민주주의를 지키려면 내 편의 잘못에 더 엄격할 수 있어야 한다. 지지하되 숭배하지 않고, 비판하되 상대의 권리를 부정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민주주의의 가치는 누가 권력을 잡았느냐에 따라 달라져서는 안 된다.

 

부마의 정신을 오늘의 삶으로

 

부마민주항쟁을 계승한다는 것은 과거의 용기를 기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날 시민들이 맞섰던 억압과 불평등이 오늘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 살피는 일이다. 오늘 우리 사회에는 노동 현장에서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 불안정한 일자리와 주거 문제로 미래를 설계하기 어려운 청년들, 돌봄과 생계의 무게를 홀로 감당하는 가족들이 있다. 노년의 빈곤과 고립, 장애인에 대한 차별, 이주민과 사회적 소수자를 향한 혐오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정치적 자유가 보장된 사회라 해도 삶의 조건이 심각하게 불평등하다면 민주주의는 여전히 부족하다. 민주주의는 투표권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고, 부당한 대우에 맞서 권리를 주장하며, 사회의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생존을 위해 부당함을 감수해야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도 정치가 응답해야 한다. 약자의 존엄을 지키는 일은 민주주의에 덧붙이는 선행이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의 핵심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오늘 제47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에 참석해 부마민주항쟁과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아야 한다며 개헌을 촉구했다. MBC뉴스 갈무리

 

부산은 부마민주항쟁이 시작된 도시다. 그렇다면 항쟁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기억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시민의 의견이 시정에 반영되는지, 공공의 예산이 누구를 위해 쓰이는지, 노동과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을 제대로 살피는지 점검해야 한다. 개발과 성장의 성과만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밀려나는 사람들의 삶도 물어야 한다. 기념관과 추모행사뿐 아니라 정책과 예산, 교육과 시민 참여 속에서 항쟁의 정신이 살아 있어야 한다.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의 시민들은 독재권력 앞에서 침묵하지 않았다. 그들이 남긴 역사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질문한다. 권력의 잘못을 비판할 용기가 있는가. 내 편의 잘못을 인정할 양심이 있는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는가. 가장 낮은 곳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가. 부마민주항쟁은 지나간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무엇이며, 누가 민주주의를 지켜야 하는지 끊임없이 묻는 현재의 역사다. 그날의 시민들을 기념하면서 오늘의 부당함에 침묵한다면 기념은 형식에 머물고 만다.

 

민주주의는 한 번 쟁취했다고 영원히 보장되는 유산이 아니다. 시민이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과 토론의 자유를 지키며, 서로의 존엄을 존중할 때 지속될 수 있다. 그 정신은 국가의 선언만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일상에서 부당함을 외면하지 않는 시민의 실천으로 이어진다. 오늘 부마민주항쟁 47주년 기념일을 맞아 우리는 과거의 함성만 들을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사회가 내는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지워지고 있지는 않은가. 권력의 편의가 시민의 권리보다 앞서고 있지는 않은가. 이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 그리고 그 답을 우리의 삶과 정치 속에서 실천하는 것, 그것이 부마민주항쟁을 기억하는 가장 정직한 길이다.

 

[참고자료]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부마민주항쟁>.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록원,  <국경일과 법정기념일> 중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일 지정 경위. 2023 부마민주항쟁 구술자료집                                   < 박철 기자 >

 

[전국시국회의 논평] 


부마항쟁 47주년,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의 역사를 잇는 개헌을 촉구한다.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의 시민들은 유신독재의 폭압에 맞서 거리로 나섰다. 권력의 탄압과 국가폭력에도 굴복하지 않은 시민들의 저항은 독재정권의 종말을 앞당겼고, 민주주의를 향한 민중의 열망이 역사를 바꾸는 원동력임을 증명했다. 부마민주항쟁 47주년을 맞는 오늘, 부마항쟁은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되새겨야 할 역사적 기준이다.

부마항쟁의 의미는 2024년 12·3 내란 사태를 통해 더욱 선명해졌다. 유신독재에 맞선 시민들과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 나선 시민들은 시대를 달리했지만, 권력이 국민주권과 민주주의를 위협할 때 시민이 역사의 주체로 나섰다는 점에서 맞닿아 있다. 두 사건은 권력이 결코 헌법과 국민 위에 설 수 없다는 민주공화국의 원칙을 일깨운다.

부마항쟁의 정신을 계승하는 길은 과거를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12·3 내란의 진상을 철저히 밝히고 책임을 묻는 한편, 국가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강화하고 국민의 기본권과 주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기억을 실천으로, 역사적 교훈을 제도로 이어 가야 한다.

이를 위해 부마항쟁과 5·18민주항쟁의 역사와 시민 저항정신을 헌법 전문에 명확히 담아야 한다. 내란과 헌정질서 파괴를 막을 민주적 통제와 책임의 원칙을 강화하고, 국민주권의 실질화와 국가균형발전, 지방분권 등 오랫동안 미뤄 온 헌법적 과제도 개헌으로 완성해야 한다. 부마항쟁의 정신을 담은 개헌은 과거를 기리는 일을 넘어 미래의 민주공화국을 세우는 일이다.

47년 전 부산과 마산에서 타오른 저항의 불꽃은 오늘도 살아 있다. 부마항쟁의 시민정신과 12·3의 민주주의 수호 의지를 이어받아, 독재와 내란이 결코 되풀이되지 않는 나라, 국민의 주권과 민주주의가 흔들림 없이 보장되는 나라를 만드는 것, 그것이 부마항쟁의 정신을 오늘의 역사로 완성하는 길이다. 개헌으로 부마의 저항을 국민주권의 승리로, 12·3의 항쟁을 민주공화국의 도약으로 이어가자.

2026년 10월 16일
국민주권사회대개혁 전국시국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