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미국 <워싱턴 포스트> 인터뷰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인신매매의 희생자”라고 표현했다. 아베 총리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인신매매’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오는 29일 미국 상·하원 합동 연설을 앞두고 여러가지 깊은 계산 끝에 나온 용어 선택임이 분명하다.
인신매매란 말은 주로 여성이나 아동들을 성적 착취나 강제 노역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각종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해 본인의 의사에 반해 사고파는 행위를 말한다. 지금까지 아베 정부가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하지 않아온 점에 비추어 보면 인신매매란 말은 한걸음 진전된 것이라는 평가가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치장을 한꺼풀 벗기고 보면 이 발언은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는 절묘한 말장난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아베 총리의 발언에는 인신매매의 ‘주체’가 빠져 있다. 위안부 문제의 핵심은 일본군이 모집 과정에서부터 위안소 설치·운영·관리에까지 직접 개입했음을 인정하는 데 있다. 그런데 아베 총리는 범죄행위의 부당성을 말하면서도 막상 그 범죄행위를 누가 저질렀느냐는 가장 핵심적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발언의 밑바탕에는 위안부 문제는 민간업자들의 책임일 뿐 일본군과는 무관한 일이라는 발뺌이 담겨 있다. 아베 총리가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겪은 이들을 생각할 때 가슴이 아프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가해자로서 ‘사과와 반성’은 전혀 없이, 그냥 제3자적 입장에서 가슴이 아프다는 개인적 연민만 표시했을 뿐이다.
아베 총리의 물타기 시도는 “역사상 많은 전쟁이 벌어졌고 거기서 여성들의 인권이 침해됐다”는 말에서도 확인된다. 위안부들이 고통을 겪은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은 일본군이 저지른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 전쟁이 일어나면 늘 벌어지는 ‘보편적 비극’이라는 취지가 짙게 배어난다. 아베 총리는 미국 의회 연설을 앞두고 위안부 문제를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침해한 행위임을 부각시켜 국제사회의 비판을 무마하면서도 일본의 책임은 교묘히 벗어나려는 절묘한 용어 선택을 한 셈이다.


아베 총리의 미국 상·하원 합동 연설 소식이 알려진 뒤 우리 외교당국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일본이 과거사 문제에 대해 올바른 입장을 표명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해 왔다. 하지만 이번 아베 총리의 발언을 보면 이런 기대도 무망해 보인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아베 총리의 인식은 전혀 변한 게 없다. 오히려 위안부 문제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미국 사회에 일본이 과거사에 대해 충분히 사과·반성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가능성마저 있다. 아베는 과거사 문제에 관해 국제사회에서 우호적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교묘한 행보를 계속해나가는 반면에, 우리 외교당국은 ‘무대책’으로 일관하며 계속 뒤통수를 맞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