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앞에서 무력해지지 말자” 끝까지 연대 다짐

"윤석열 반드시 파면, 동조자들 역시 처벌 피할 수 없을 것”

 

 
 
'윤석열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제10차 범시민대행진'이 8일 오후 광화문 일대에서 열려 참석자들이 윤석열 탄핵을 촉구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서울서부지법 난동사태 이후 극우 기독교 세력을 중심으로 폭력·위협 행위와 혐오 표현이 만연해진 가운데 대학생들이 이를 비판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대학생들은 “혐오 앞에서 무력해지지 말자”며 끝까지 연대할 것을 다짐했다.

윤석열퇴진 전국대학생 시국회의는 8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앞에서 10차 시국대회를 열고 “극우는 똘똘 뭉쳐 폭력을 행사해서라도 윤석열 탄핵을 막으려 하지만, 윤석열은 반드시 파면될 것이고 동조자들 역시 처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외쳤다.

 

대학생들은 최근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서부지법 난동사태를 선동한 혐의로 입건된 사실을 언급하며, 혐오로 얼룩진 극우 세력을 규탄했다. 이들은 “(윤석열 대통령이 파면되는) 당연한 결과로 만족할 수 없다”며 “윤석열의 그림자, 남아있는 ‘작은’ 윤석열까지 모두 몰아내기 전까지 결코 끝이라고 할 수 없다”고 밝혔다.

 

8일 ‘윤석열퇴진 10차 대학생 시국대회’에 참여한 학생들이 현 시국에 대한 의견과 자신들이 바라는 세상에 대한 바람을 바닥에 분필로 적은 모습. 김가윤 기자

 

서울예대 시국선언 제안자인 대학생 김예담씨는 지난주 자신에게 삿대질하며 고함을 질렀던 한 극우 기독교 집회 참가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김씨는 “그분은 제가 좌파라서, 빨갱이라서, 종북이라서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굳게 믿고 계셨다. 극우 기독교 세력이 사람들을 선동하고, 집단 폭력을 사주하고 있다”며 “진심으로 신을 믿는다면, 사랑을 말하는 당신의 신 앞에 떳떳한 일을 하라”고 지적했다.

 

이화여대 학생 김서윤씨도 극우세력의 혐오 행태에 분노를 표했다. 김씨는 “한 달 전 처음으로 수요시위에 참여했는데 바로 옆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조롱하는 극우세력의 만행을 직접 목도했다”며 “더 화가 났던 건 국민의 인권을 보호해야 할 국가인권위원회가 극우세력의 손을 들어주며 사실상 피해자들에 대한 혐오에 동조하는 행태를 보였던 것”이라고 분노했다.

 

특히 서부지법 사태와 같은 폭력 행위에 가담한 이들에 대한 비판이 목소리가 쏟아졌다. 가톨릭대 학생 유수영씨는 “법원을 박살 내고 판사를 위협하는 것이 법치주의인가? 행인들을 위협하는 게 자유민주주의인가?”라고 물으며 “이제 그만 무기를 내려놓고 대화의 장으로 들어오라”고 규탄했다.

 

이날 집회에 참여한 대학생 강혜령(24)씨는 “트럼프 대통령이 처음 집권했을 때 (미국에서) 극우세력이 거리를 활개 치고 다녔던 ‘초기 증상’과 비슷하다”며 “(혐오와 폭력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지기 전에 맞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학생 유지예씨는 “혐오 앞에서 무력해지지 않으며 추위를 견디고 봄을 맞이하자”며 무엇보다 서로 연대할 것을 강조했다.

'윤석열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제10차 범시민대행진'이 8일 오후 광화문 일대에서 열려 참석자들이 윤석열 탄핵을 촉구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이어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은 이날 10차 서울 종로구 경복궁역 4번 출구 앞에서 범시민대행진을 열었다. 비상행동은 윤 대통령이 탄핵심판 변론에서 “실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탄핵 공작”이라고 주장하는 데 대해 “궤변”이라 지적하며 헌법재판소에 윤 대통령 파면을 촉구했다.   < 한겨레 김가윤 기자 >

 



10만 시민 '촛불문화제' '범시민대행진' 모여


"윤석열과 같은 희대 독재자 맞이할 수 없어"
"대통령실과 김건희가 비화폰 서버 막는 것"
"'극우세력 '탄핵 배지' 단 마트 노동자에 행패"

일본 시민 "전 세계 민주주의 파괴 흐름에 일격"

 

8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역 일대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주최 10차 범시민대행진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2025.2.8. 연합
 

시민들의 분노는 8일 최저 기온 영하 13도의 혹한도 녹였다. 내란수괴 피의자인 대통령 윤석열이 헌법재판소 탄핵 변론에서 책임을 부하들에게 떠넘기는 파렴치한 모습이 달군 열기다. "윤석열 탄핵" 함성이 추운 거리에 울려퍼졌다. 

 

촛불행동은 이날 오후 3시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인근 안국역 1번 출구 앞에서 '윤석열 파면! 국힘당 해산! 126차 전국집중 촛불문화제'를 열었다. 주최 쪽 추산 1만 여 명의 시민이 참가했다. 시민들은 "내란 수괴 윤석열을 즉각 파면하라" "특급범죄자 김건희를 구속하라" "내란정범 국힘당을 해산하라" "내란범들을 철저히 단죄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김은진 촛불행동 공동대표는 집회를 여는 발언으로 "내란 세력은 흑을 백, 백을 흑이라고 하면서 나라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다"며 "지금도 절대 느긋할 상황이 아니다"라고 외쳤다. 그러면서 "내란범들과 극우 세력은 총력전을 벌이고 있으니 우리는 매일 촛불을 들고 한마음으로 싸워야 할 때"라며 결의를 다졌다. 이어 "다시는 윤석열과 같은 희대의독재자를 맞이할 수 없다"며 "우리 국민들이 모든 것을 쏟아부어 싸워서 불법과 폭력으로 하는 극우 적폐 세력을 끝장내자는 것이다. 내란범 소탕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은진 촛불행동 공동대표가 126차 전국집중 촛불문화제에서 "윤석열과 같은 희대 독재자를 맞이할 수 없다"고 말했다. 2025.02.08. 이호 작가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실장은 육군사관학교 수업 커리큘럼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는 "2023년 8월 육군사관학교에서 홍범도 장군 흉상을 철거하려던 걸 시민들과 함께 막았다. 그런데 육사와 해사는 작년 1월 교육 커리큘럼에 북한학과 안보학을 추가했다"고 전했다. "수도방위사령부, 국군방첩사령부 등에만 (친위 쿠데타를) 지시한 게 아니라 육사 교육에 심어놓았다"라며 "국회에 있는 종북 좌파를 싹쓸이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통분했다. 방 실장이 "윤석열을 감옥에 보내고 사관학교에서 친일과 뉴라이트가 아닌 독립운동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촉구한 이유다. 

 

대중가요 '먼지가 되어'를 '파면이 되어'로 개사해서 부른 가수 성국 씨의 노래가 집회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조국혁신당 박은정 의원은 추운 날씨 집회에 나온 시민들을 격려했다. 그는 "탄핵 심판 변론기일이 진행될수록 윤석열의 거짓말과 뻔뻔함에 국민들은 분노하고 있다"며 "의원을 요원으로 바꾸고 국민 여러분을 반국가 세력으로 매도하고 부하를 팔아서 거짓말을 했다. 윤석열 파면의 일등 공신은 윤석열"이라고 짚었다.

 

조국혁신당 박은정 의원(왼)과 더불어민주당 추미애의원(오) 촛불집회에 참석했다. 2025.02.08. 이호 작가

 

박 의원은 "우리는 가장 추운 겨울을 이곳에서 보냈고,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며 "촛불 시민들이 내란을 막았고 윤석열 파면의 끝을 보여줬다. 수감 번호 0010 피고인 겸 탄핵 심판 피청구인 윤석열은 내란수괴로 처벌받고 파면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의원은 "국회와 광장이 함께 해야 윤석열을 파면시킬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내란 사태가 벌써 2달이 훌쩍 지나났지만, 윤석열이 헌재를 거짓말 대잔치장으로 여기고 법치를 우롱하고 있으니 아직도 내란 사태"라며 현상황을 요약했다. "법원을 습격한 초유의 사태도 일어났다. 내란범 김용현은 법원 습격 폭도들에게 영치금을 보내고 최상목은 국회가 합의해서 마은혁 헌재 재판관의 임명을 거부하고 있다"고 했다. "윤석열은 지금 비밀 병기 비화폰만을 믿고 있다. 그래서 정진석 대통령실 비서실장, 김건희 라인 경호처가 비화폰 서버 접근을 철통같이 막고 있다"라며 "이런 상황에도 최상목 권한대행은 국회에 내란 수사 특검을 거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시민들은 촛불문화제 집회를 마친 뒤, 헌재 앞에서 광화문으로 행진해 범시민대행진에 합류했다. 오후 5시부터 광화문(경복궁역 4번 출구) 앞에서는 주최 쪽 추산 10만 여명이 모였다.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비상행동)은 제10차 범시민대행진을 개최했다. 일반 시민, 선장, 선생님 등과 함께 일본에서 온 시민이 집회에서 목소리를 냈다.

 

이용길 비상행동 공동의장은 집회의 문을 열며 "이 광장은 국민의힘이 아니라 '시민의 힘'으로 지켜냈다"며 "시민의 힘은 탄핵과 내란 종식의 힘이다. 단결하는 시민의 힘으로 사회대개혁을 열어달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고 했다. 또 "윤석열은 무기징역이나 절대적 종신형에 처해야 한다. 이제는 다시 내란 수구 세력이 고개를 들 수 없게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강추위가 계속된 8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역 일대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주최 10차 범시민대행진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서로 은박담요를 덮어주고 있다. 2025.02.08. 연합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목소리도 이어졌다. 자신을 '선장'이라고 소개한 박성모 씨는 "강릉에서 울릉도나 독도로 여행 가본 적 있느냐"며 "그 여객선의 선장으로 일을 했는데, 하루 16시간 일을 하고 임금 체불까지 당했다. 노조에 가입한 14명이 4년째 법적 싸움을 하면서 7차례 모두 이겼다"고 소개했다.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은 법을 이용해 시간을 끌고 (노동자를) 괴롭힌다"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우리와 국민의 처지가 같다고 생각 들었다. 우리 모두 분노와 스트레스로 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 공감을 샀다. "윤석열과 내란 세력이 하는 짓이 어쩜 이리 똑같은지 뻔뻔함은 태생부터 존재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라고도 말했다.

 

마트 노동자 김미정 씨는 "마트 노동자들은 윤석열 탄핵 배지를 옷에 달았다는 이유로 극우의 표적이 됐다"며 "극우 세력들은 (온라인에) 좌표를 찍어 배지를 달고 있는 노동자를 매장에 찾아가 욕설을 했다"고 고발했다. 이어 "개인 신상을 온라인에 올리기도 한다. 이들은 법치국가를 무시하고 자신과 반대하는 사람을 빨갱이로 만들어 내전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이라고 분노했다.

 

일본 시민의 발언도 있었다. 히시야마 나오코 씨는 "오늘은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된 도쿄 독립선언으로부터 106년이 되는 날"이라며 "이런 '민주주의의 날'에 불러줘서 감사하다.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를 뉴스로 보고 충격받았다"고 심경을 밝혔다.

 

8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역 일대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주최 10차 범시민대행진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2025.2.8. 연합

 

나오코 씨는 "(한국 시민의) 투쟁은 대단했다"며 "주저하거나 당황하지 않았고 리허설을 해본 것처럼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아는 것 같았다. 길고 긴 투쟁을 이어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치하했다. "여러분의 싸움은 군사정부를 저지시키고 한국 민주주의를 지켰으며 전 세계에 진행되는 민주주의 파괴에 일격을 가했다"라고 평가했다. "일본에서도 지난해 12월 5일 한국 시민과 연대해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일본과 한국은 미래를 향해 함께 걸어가는 친구"라고 덧붙였다.

 

밤이 어두워지자 시민들이 손에 든 응원봉이 밝게 빛났고, 시민들은 "시민의 힘으로 사회 대개혁을 완성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집회 끝자락에는 합창단이 '유월의 노래'를 합창했다. 합창단이 '우리들은 일어섰다 오직 맨주먹 피눈물로 동지를 불렀다 독재 타도 민주 쟁취 하나 된 소리 민주와 해방의 나라 이뤘다'고 노래 불렀다.  이어서 '농민가', '임을 위한 행진곡' 등의 노래를 이어갔다. 시민들도 뜨겁게 호응하며 함께 노래를 불렀다. < 민들레 김민주 기자 >

 

시민 10만명, 체감 -10도에도 “내란 안 끝나” 분노의 집회

 
'윤석열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제10차 범시민대행진'이 8일 오후 광화문 일대에서 열려 참석자들이 윤석열 탄핵을 촉구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날씨가 많이 춥습니다. 그러나 12월3일 내란의 밤보다 더 추운가요.”

한낮 체감온도가 영하 10도를 밑돌았던 서울 광화문 광장에 패딩과 목도리, 은박 담요로 중무장한 시민 10만명(주최 쪽 추산)이 모였다. 헌법재판소에 출석해 ‘호수 위에 떠 있는 달 그림자를 쫓는다’며 내란 혐의를 부정한 윤석열 대통령과 달리, 모두 12월3일 매서웠던 밤을 떠올렸다. 최근 불어닥친 극우세력의 폭력과 혐오에 시민들은 “내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되새겼다. 헌법재판소에 윤 대통령 파면을 촉구하며,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세상은 민주주의·평화·인권의 가치가 자리 잡기를 바랐다.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비상행동)은 8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역 4번 출구 앞에서 10차 범시민대행진을 열었다. 비상행동은 윤 대통령이 탄핵심판 변론에서 “실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탄핵 공작”이라고 주장하는 데 대해 “궤변”이라 지적하며 윤 대통령 파면과 국민의힘 해체를 외쳤다.

 

8일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10차 범시민대행진 참석자가 자신이 만든 손팻말을 들고 있다. 김가윤 기자

 

대표 발언에 나선 이용길 비상행동 공동의장은 “윤석열이 내란의 몸통일 뿐만 아니라 극우세력을 선동하고 있는 국민의힘은 당장 해산돼야 하고, 극우세력은 해체돼야 마땅하다”며 “내란을 종식할 수 있는 힘은 바로 시민에게 있다”고 말했다. 자신을 ‘평범한 30대 남성’이라 소개한 요하네씨는 “탄핵이 인용되리라 생각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대통령이라는 직함 뒤에 숨어 몸부림치는 자를 끌어내는 것도,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날 집회를 찾은 시민들은 서울서부지법 난동사태처럼 극우세력이 갈수록 폭력과 혐오를 드러내는 것에 우려를 보였다. 이아무개(34)씨는 “너무 충격받았다. (극우세력이) 난동을 피울 때 법적 처벌이 꼭 이뤄진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김혜윤(28)씨는 “함께 사는 법을 몰라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결국 윤석열이나 국민의힘 척결을 넘어서, 사회 전반적으로 고민해봐야 할 지점”이라고 지적했다.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마트노조가 8일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10차 범시민대행진에 마련한 부스. 김가윤 기자

 

이날 무대에는 ‘윤석열 탄핵’ 배지를 달았다는 이유로 극우세력의 ‘좌표 찍기’를 겪은 마트노동자 김미정씨가 올랐다. 김씨는 “자신과 반대되는 사람은 모조리 빨갱이로 간주해 내전을 벌여 기어이 ‘제2의 계엄’을 하겠다는 것”이라며 “일상에서 함께 탄핵 배지를 달아 많은 분이 연대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10차 범시민대행진은 ‘노(NO)윤 노(NO)쓰, 윤석열도 쓰레기도 없는 날’로 진행됐다. 12·3 내란사태 이후 집회가 두달여 간 매주 진행된 만큼 기존 손팻말을 재활용하거나 모바일 손팻말을 활용하자는 것이다. 이에 시민들은 재활용 상자 귀퉁이를 뜯어내 원하는 글귀를 적거나, 각자 집에서 가져온 손팻말을 들었다.

 

무대 마지막 순서로 시민 100여명이 모인 시민합창단이 공연을 마무리한 뒤 시민들은 헌법재판소가 있는 안국역을 거쳐 을지로입구 쪽으로 행진을 이어갔다.  < 한겨레 김가윤 기자 >

 

'감옥으로 영구퇴근!' 머리띠8일 오후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윤석열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범시민대행진(10차)'에 참여한 시민 김태희씨가 윤석열 파면을 요구하며 직접 만든 피켓을 머리띠에 붙이고 있다. ⓒ 남소연
 

한낮에도 체감온도가 영하 10도에 가까웠던 서울 광화문 앞 사직로. 1982년생 동갑내기 부부인 김태희씨는 아이유 응원봉을, 조현정씨는 뉴진스 응원봉을 각각 손에 들고 '탄핵 광장'에 나왔다. 한파 특보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매서운 추위에도 이곳에 나온 이유를 묻자, 김씨는 지난 6일 헌법재판소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6차 변론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89.8대1의 경쟁률을 뚫고 20명의 방청객에 선정돼, 윤 대통령과 그 변호인들의 주장을 똑똑히 들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계속 거짓말만 했다. 평생 '인원'이라는 말을 써본 적이 없다고 했지만 금방 들통나지 않았나. 너무 어이가 없었다.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인용되고 형사재판에서 내란 혐의 유죄가 선고돼 윤 대통령이 징역을 살 때까지, 이곳에 쉬지 않고 나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강 한파에도 광화문 아스팔트 위에 앉은 부부 8일 오후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윤석열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범시민대행진(10차)'에 참여한 부부 김태희(오른쪽 뒤), 조현정(왼쪽 뒤)씨가 윤석열 파면을 요구하며 직접 만든 피켓을 머리띠에 붙이고 있다. ⓒ 남소연


김씨는 "탄핵이 인용되고 따뜻한 봄이 왔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내놓았다. 조씨는 "이제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아이가 탄핵이라는 말을 일찍 배우게 돼 속상하지만 그래도 국민들이 이렇게 나쁜 대통령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아이에게 보여줄 수 있어서 좋은 점도 있다"라고 전했다.

겨우내 거리에 선 시민들 "끝나지 않았다, 계속 모여야"

'다음 역은 '징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없습니다' 8일 오후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윤석열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범시민대행진(10차)'에 참여한 시민들이 윤석열 파면을 요구하며 피켓을 들고 있다. ⓒ 남소연


8일 오후 광화문 앞 사직로에서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주최로 '윤석열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10차 범시민대행진'이 열렸다. 주최 쪽 추산 10만 명이 모였다. 이들은 오후 5시부터 1시간 30분 동안 공연을 포함한 집회를 연 뒤 안국역, 종각, 을지로를 거쳐 명동 한국은행 앞 사거리까지 행진했다.

지난해 12월 3일 밤 비상계엄을 선포한 윤석열 대통령이 같은 달 14일 탄핵소추된 지 두 달 가까이 지났지만, '탄핵 광장'은 여전히 응원봉과 깃발로 가득했다.

'응원봉 만큼 소중한 둥이, 까미 왔어요'8일 오후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윤석열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범시민대행진(10차)'에 참여한 한 시민이 '응원봉이 없어 데려온 소중한 강아지 둥이 까미랍니다'라고 써붙이고 반려견을 돌보고 있다. ⓒ 남소연


반려견 둥이, 까미와 함께 나온 이희은(29)씨는 "지난해 12월부터 계속 (탄핵 집회에) 나오고 있다. 윤 대통령이 구속됐지만 대통령직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헌법재판소에서 파면돼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다. 더 나아가 '김건희 특검'까지 해야 제가 그만 나와도 될 것 같다"라고 말했다.

8일 오후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윤석열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범시민대행진(10차)'에 참여한 시민들이 윤석열 파면을 요구하며 직접 만든 피켓을 들고 있다. ⓒ 남소연


대학생들의 모습도 많이 보였다. 윤석열 퇴진 전국 대학생 시국회의는 이날 10차 시국대회를 연 뒤 범시민대행진에 참여했다. 홍익대학교 졸업반 강태성(25)씨는 겨우내 윤석열 대통령 관저 앞 '키세스 시위대', 남태령 대첩의 농민들과 연대하며 거리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범시민대행진에도 10번 모두 참석했다.

그는 '내란성 질환'을 호소하고 있다. "집에만 있으면 불안하다. 그래서 집회에 나오고 있다"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이 구속 기소가 됐고, 다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계속 더 모이고 '윤석열 탄핵' 목소리를 더 늘려 나가야, 앞으로 탄핵 이후에 사회 개혁까지도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대학가에서 탄핵 반대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는 일부 언론 보도를 두고 "제가 다니는 대학교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탄핵 반대 목소리가 나온다는 이야기가 진짜일지 지켜봐야 한다. 오히려 '윤석열 탄핵'을 열심히 외치는 대학생들 목소리가 더 조명받아야 한다"라고 전했다.   < 오마이 선대식 기자 >

 

 

 

대한민국 역사에서 두 번 탄핵 당한 대통령


권력 획득·유지 위해 무슨 짓이든 했던 인물
계엄·백골단·발췌개헌·사사오입·우의마의…
숱한 희생자 내고 85세 쫓겨나 90세 사망

보수 기독교 앞장 선 역사 쿠데타 성공 못해

                                                                        주진오 역사학자·상명대 명예교수

 

이승만은 대한민국에서 두 차례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두 번 모두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한번은 1925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탄핵되었고, 다른 한번은 1960년 4.19 혁명으로 대통령에서 물러났지요. 더구나 두 번 모두 원래 헌법 초안에는 대통령이라는 직위가 없었으나, 그의 억지가 관철되어 대통령 중심제가 만들졌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1919년 3.1운동으로 일어난 임시정부 수립운동에서 대표적인 지도자로 추대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는 전혀 실체가 없는 대한공화국임시정부의 국무경에 임명되었다는 연락를 받아서, 처음에는 그렇게 행세를 했습니다. 이 정부 수립안의 대통령에는 손병희, 부통령에는 박영효가 추대되어 있었어요. 이 정부는 사실상 실체가 없는 종이 정부에 불과했습니다.

 

한성정부 집정관 총재 지위가 임시정부 대통령 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이를 배경으로 사무실을 열고 국무경의 업무를 시작했어요. 그는 한국을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국가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필라델피아에서 제 1회 한인회의를 주도하였습니다. 이 대회의 의장은 필립 제이슨(서재필)이었고, 그를 통해 한국친우회를 조직했어요. 미국 정부에 편지를 보내어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소식이 서울에서 온 신흥우로부터 미국으로 도착했어요. 또 하나의 종이 정부였던 한성정부에서 집정관 총재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를 멋대로 President로 번역하여, 대통령으로 행세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내각 명단에 같은 집정관 총재인 이동휘를 마음대로 국무총리로 격하시켰어요.

 

한성정부는 주로 국내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구성했는데, 그들이 주장하는 13도 대표자회의는 열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끝까지 이를 근거로 자신이 대통령으로서의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했어요. 그 시기에는 이미 대한민국임시의정원에서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는 연락을 상하이로부터 받은 상태였으나 외면해 버렸습니다.

 

안창호가 이 소식을 듣고 아직 대통령이 선임되지 않았다고 편지를 보냈지만 무시하고, 오히려 앞으로 대통령이라는 직함으로 활동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어요. 그러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무총리로 선임했다는 사실이 미주 동포사회에 전해져 논란이 되자, 이번에는 자임한 것이 아니라 미국 언론이 자신을 대통령으로 쓴 것이라고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이승만 상하이 도착 환영회

나랏일 아닌 자기 활동을 위한 자리가 필요했던 이승만

 

이승만은 존재하지 않는 한성정부의 권한을 내세워 공채 발행권과 구미위원부 설립을 강행하였습니다. 결국 대한민국임시정부 측도 상하이, 한성, 노령 정부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한성정부의 주장을 수용하기에 이르렀어요. 그 결과 1919년 9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사후 인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바로 상하이로 가서 대통령 직무를 수행하지 않았어요.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신이 미국에서 활동하는데 필요한 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이었습니다. 그리고 국채발행권과 미주교민들이 어렵게 번 돈으로 내는 독립운동 기금을 받는 권한이었어요. 실제로 그는 수입의 18%만 상하이로 보냈고, 대부분의 지출을 자신을 포함한 인건비와 사무실 유지비로 썼습니다. 이승만이 상하이에 도착한 것은 1920년 12월이었어요.

 

그런데 상하이는 자신이 제왕 노릇을 하던 미국과 달리 다양한 경험을 가진 독립운동가들이 자리잡은 곳이었습니다. 독립운동의 방법론을 둘러싸고 이견을 좁히지 못하자, 이동휘 국무총리를 비롯한 김규식, 안창호 등이 사퇴했어요. 아울러 이승만에게 위임통치 청원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였으나, 그는 1921년 5월에 미국으로 돌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1925년 3월 18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임시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탄핵안과 면직안이 통과되었음을 알리는 독립신문 호외. 

 

결국 1924년에는 임시의정원에서 대통령 유고안이 가결되었고 마침내 1925년 3월 탄핵안이 통과되었습니다. 박은식 총리는 1925년 5월 구미위원부의 폐지령을 발표하였습니다. 이승만은 탄핵도 폐지령도 무시하고, 구미위원부를 통해 독자적인 활동을 계속했지만 활동은 미미했어요. 그러다가 1932년부터 다시 임정과 협조의 길을 걷다가 해방을 맞았습니다.

 

단정 수립 후 대통령제 관철시키고 개헌과 계엄으로 정권 연장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하자, 이승만은 귀국 길에 올랐습니다. 그는 극단적인 친미반소 노선을 걸으며 신탁통치 반대운동과 단정수립운동을 주도했어요. 1948년 5.10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동대문구 갑에 단독으로 입후보하여 무투표로 당선되었습니다. 1948년 5월 31일 개회식에서 최고령자였던 이승만은 임시 의장으로 선출되는데요.

 

그런데 헌법 제정 작업을 맡은 유진오는 국가원수의 지위와 권한은 대통령이, 정부수반으로서의 지위와 권한은 국회가 선출하는 총리가 담당하는 전형적인 내각제 헌법 초안을 국회에 제출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이 뒤늦게 대통령 중심제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섰어요. 유진오는 이승만을 설득하였으나 실패하고, 결국 대통령 중심제로 급하게 수정되었습니다.

 

48년 이승만 초대 대통령 수락연설 장면

 

마침내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계엄과 개헌을 통해 집권을 연장해 나갔어요.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여수 순천과 제주에 계엄령을 선포하였습니다. 1948년 제주에서 4.3이 발생한 가운데, 10월 19일 여수와 순천에서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키자 21일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뒤이어 1948년 11월 17일 제주에도 계엄령이 선포되었어요.

 

제주에 선포된 계엄 포고문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 24일입니다. 그러니까 여수와 순천 및 제주에서 선포되었던 계엄령은,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에 집행되었으므로 불법인 것이지요. 하지만 그로 말미암아 해당 지역에서의 막대한 인명과 재산 피해가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헌법과 법률에 위배되는 행위를 아무렇지 않게 감행하는 것이 이승만 정권이었어요.

 

직선제 ‘발췌개헌안’ 통과 위해 동원한 1952년의 백골단

 

이승만 정부의 실정으로 인한 민심 이반과 반민특위 실패로 인한 친일세력 득세에 항의하는 목소리가 들끓었습니다. 그 결과 1950년에 치러진 2대 총선에서 무소속이 약진하여 대다수를 차지했어요. 따라서 이승만은 국회가 대통령을 선출하면 당선될 가능성이 없게 되자, 자신의 추종세력을 내세워 자유당을 창당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들고 나왔어요.

 

그러나 국회가 1952년 1월 18일 개헌안을 압도적으로 부결시키자, 이승만은 백골단과 땃벌떼 등을 동원하여 관제시위를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5월 25일에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는 의원들을 불법적으로 연행하는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켰어요. 결국 군경이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가운데, '발췌개헌안’이 기립투표로 통과되었습니다.

 

독재자의 실정과 무책임, 압제를 겨냥한 독립투사의 총

 

이에 참다 못한 의열단 출신 유시태가 이승만을 저격하려다 실패하는 사건이 벌어졌어요. 같은 의열단 출신으로 안동에서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던 김시현이 배후 인물로 구속되었습니다. 그는 영화 ‘밀정’에서 공유 배우가 맡았던 김우진의 실제 인물인데요. 김시현은 3.1운동부터 시작하여 모두 6차례에 걸쳐 15년 동안 독립운동으로 감옥생활을 했던 투사입니다.

 

그들이 이승만을 저격하려 했던 이유는 민생문제에는 무능과 실정을 거듭하면서 6.25 전쟁의 책임을 지지않는 자격미달 대통령이라는 것이었어요. 민족운동가를 멀리하고 친일세력을 요직에 등용한 것도 이유였습니다. 무엇보다 전쟁이라는 국가위기에도 관권으로 금품 살포, 깡패들과 청년단 동원 등으로 국회를 압박하는 것을 비판했어요.

 

김시현은 법정에서 ’이승만은 할복자살하기 전에는 국민의 한이 풀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김시현은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로 감형되었다가, 4.19 혁명 이후 석방되었어요. 김시현은 안동에서 5대 민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5.16 군사쿠데타 이후 정계를 은퇴했습니다. 이때 형사처벌을 받았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서훈을 받지 못했어요.

 

끝내 수많은 희생자 낸 ‘사사오입’ ‘우의마의’ 의 장기집권 야욕

 

그럼에도 이승만은 1952년 8월 5일 직접 선거로 실시된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승만은 대통령 3선을 금지하는 조항을 폐지하는 개헌안을 제출하였는데, 당시 개헌 가능 의결정족수는 재적의원의 2/3 이상인 136명이었지요. 하지만 1954년 11월 27일 국회에서 투표를 한 결과, 찬성이 135표에 불과해 부결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틀 후 사사오입 이론을 들고 나와, 135표가 개헌선이라고 번복했어요. 이런 억지를 통해 1956년 3대 자유당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습니다. 이때 이승만이 ‘나이 팔십이 넘어… 물러가는 것이 옳을 줄로 생각한다"고 마음에 없는 불출마 서한을 보냈지요. 그러자 자유당은 우의마의(牛意馬意)까지 동원한 관제 시위를 벌였고 이승만은 마지못한 듯이 출마하여 당선되었습니다.

 

1960년 3월 15일 4대 대통령 선거에도 이승만은 85세의 나이로 출마를 했어요. 이번에도 야당 후보가 선거 기간 중에 사망함에 따라 그의 당선은 확정되어 있었습니다. 부정선거는 바로 장면의 재선을 막고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추진되었어요. 혹시 모를 80대 대통령의 유고 시에 야당 부통령에게 정권이 이양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부정선거에 대한 반발이 마산에서 시작되자, 일단 민심수습 5개 항목을 지시했어요.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4월 19일에 경찰이 학생, 시민들에게 발포하여 수많은 희생자를 냈습니다. 그러자 이승만은 ’잠복한 공산주의자 간첩이 배후인 폭동‘이라며 다시 계엄령을 선포했어요. 하지만 출동한 계엄군은 시위대에게 발포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4.19혁명 당시의 시위 장면

 

85세에 쫓겨난 독재자, 하와이 요양원에서 90세에 죽다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도 그에게 등을 돌렸고, 4월 25일에는 교수단이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거리시위에 나섰지요. 결국 그는 4월 27일 국회에 대통령직 사임서를 제출하였고 즉시 수리되었습니다. 4월 28일 이화장으로 물러갔다가,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하였는데, 그는 계속해서 귀국을 원했지만 미국과 박정희 정권은 허락하지 않았어요.

 

경무대를 떠나는 이승만(왼쪽) 대통령 사직서(가운데) 끌어내려진 이승만 동상

 

이승만은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의 요양원에서 90세로 사망했습니다. 유가족과 지지자들은 국장을 요구했으나 박정희 정권은 국민장을 제안했지요. 그러자 결국 7월 27일 가족장으로 현충원에 묻혔습니다. 박정희는 "이승만 노인은 국헌을 준수해야 할 본분을 망각한 채, 헌법을 유린하고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짓밟은 독재자였다“라고 규정하였어요.

 

지금 대한민국도 대통령의 친위 쿠데타 시도로 유례없는 혼돈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실패한 대통령은 여당과 극우 세력들을 선동하며 여전히 위기를 증폭시키고 있지요. 그런데 이런 모습은 이승만 시대를 연상시킵니다. 반공을 내세워 정치적 반대세력을 빨갱이로 매도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면서 국민의 기본권을 박탈하려 했어요.

 

기념관, 동상, 영화, 유투브, 보수 언론… 이승만 지지자들의 역사 쿠데타

 

이들은 최근에 이승만을 부활시키려고 집요하게 노력해 왔습니다. 전 국가보훈부 장관은 재직 시절 이승만 기념관을 건립하겠다고 공언하였고, 보수 기독교가 지원을 하고 있어요. ‘건국전쟁’이라는 다큐 영화를 만들고 관람객들을 동원했으며, 보수 언론은 물론 이영훈 무리가 운영하는 ‘이승만 학당’을 비롯한 여러 유튜브 채널들이 거짓 신화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반면에 이승만의 실체를 역사적 근거에 입각하여 대중에게 알리는 노력은 거의 보이지 않아요. 그저 ‘4.19 혁명 정신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을 내세우는 비판 정도가 대부분입니다. 이승만의 실체에 대해서 많은 연구가 있지만 거의 대중에게 알려져 있지 않아요. 그러는 가운데 극우 세력들의 역사왜곡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1995년에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대대적으로 이승만 부활을 시도할 때에도 진보 학계와 언론의 대응은 미미했어요. 모두들 이승만을 땅에 묻었다고 생각하고 전혀 대비를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최근에도 유명 출판사 대표에게 이승만에 대한 연구논문들을 모으거나, 또는 그의 평전을 제안했으나 단칼에 거절당했는데 이것이 현실이지요.

 

윤석열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압살하면서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워 종신독재를 꿈꾸었던 이승만처럼, 이번에 불법적인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추종자들은 이승만을 국부로 칭송하며 역사 쿠데타를 시도하고 있지만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으로 믿어요. 그들은 결국 이승만처럼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