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칼럼] 언제까지 비굴한 혈맹인가

● 칼럼 2025. 9. 12. 12:06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한마당]   언제까지 비굴한 혈맹인가

 

 

미국 조지아주에 건설 중인 현대-LG 배터리 공장 근로자들에 대한 이민세관단속국(ICE)의 모욕적인 폭거는 우리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민간인을 무차별 포박한 대테러 작전 혹은 전쟁같은 상황이었다니. 미국 내에 살면서 그렇잖아도 과도한 단속에 불안해 하던 우리 동포들은 얼마나 큰 수치와 공포감을 느꼈을까.

 

일제 치하 강제동원으로 극심한 고초를 겪은 민족적 상처 이후로, 한국인이 해외에서, 더구나 최고의 동맹국에서 4백명 가까이 굴욕적으로 강제 연행돼 포로처럼 감금시설에 내동댕이쳐진 일이 있었나 싶다. 엄청난 중범죄자들도 아닐진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들이닥쳐 쇠고랑을 채우고 휴대폰도, 접견도 금지되고 비위생적 시설로 소문난 외딴 감방에 쳐넣은 비인간적 처우에 우리 한인동포들이 내몰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번 사태를 통해 우리는 미국의 이중성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대규모 투자를 강박해놓고, 필수 인력의 합법적 비자 발급은 외면해 왔다. 다급한 기업들을 단기비자 인력 충당이라는 '관행적 편법'으로 내몬 게 미국정부였던 것이다. 한국측이 해마다 통사정을 해도 매몰차게 거절하는 취업비자(H-1B) 만 보아도 얼마나 박대하는지를 보여준다. 매년 추첨하는 8만5천개의 쿼터 중 한국은 1%에 불과하다. 이는 싱가포르와 칠레에도 미치지 못하며, 인도 70%, 중국 10%에 비하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 한다.

 

트럼프의 집요한 MAGA 압박에 순응한 한국의 투자액은 일본에 버금가는 거액이다. 더구나 ‘혈맹’이라 부르는 세계전략의 핵심 우방이다. 자기들이 도와달라 아쉬운 말을 꺼낼 정도인 맹방에, 돌연 ‘깡패나 다름없는’ 반 동맹적 난동을 부린 저의는 무엇인가. 단순한 단속기관의 한건주의 산물인가, 트럼프의 ‘교활한 거래술수’에서 나온 충동요법의 하나인가. 아니면 미국의 속성 그 자체인가?

 

이번 사태는 한미동맹의 본질에 대한 재인식과 대미 외교자세 재정립 등 획기적인 전환이 필요함을 역설적으로 웅변해주었다.

 

트럼프 비위 맞추다 뒷통수 맞아 허둥대는 외교에 머물러선 안된다는 경종이다. 합의를 휴지조각으로 만드는 동키호테 변덕에 장단맞추다 보면, 재미붙인 ‘호구 이지메’ 농간버릇은 끝이 없을 것이다. 냉정하게 챙기며 단호히 선을 그어야 한다. 나무랄 것은 호되게 꾸짖어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도 받아내야 한다.

 

 

한국인들에게 미국은 여전히 최고의 우방이다. 6.25 남침으로 곤경에 처했을 때 도와준 은인의 이미지에 기인한다. 하지만, 엄밀히 짚어보면 짝사랑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한국과 인연을 맺은 140여년 동안 미국은 예나 지금이나, ‘한국 사랑’이 아니라, 철저히 자국의 이익을 위해 활용하는 한반도 정책을 펴왔기 때문이다.

 

간단히 예를 보자. 조선말 1882년 미국이 한국과 역사적 ‘통성명’을 한 얼마 후, 일제 군국주의의 강탈위기에 처했을 때 카스라-태프트 밀약으로 국권상실을 재촉한 게 미국이다. 태평양전쟁 종결 당시는 38선을 그어 분단의 길을 열었다. 패망 일본이 우리 땅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게 만든 것도, 6.25 직전 애치슨 선언으로 북의 남침을 초래한 것도 미국이다.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을 기용하며 처벌을 막고 이승만 독재와 양민학살을 두둔한 사실, 박정희 쿠데타와 전두환의 권력찬탈, 광주학살을 묵인한 것도 미국이었다.

 

전시작전권을 거머쥐고 통제하는 미국이 이젠 한국민 뜻과는 무관하게 북의 남침 제어보다 중국을 견제하고 대만을 방어하는데 한국군을 끌어들이려 한다. 그러면서 천문학적인 미군 주둔비를 요구하고, 이제는 제조업 조선업을 망라한 기업이전과 무리한 투자를 강요하고 있다. 비단 트럼프 뿐만이 아니라, 변함없는 미국의 ‘혈맹 한국’을 대하는 방식인 것이다.

 

그런데 전작권 환수 이야기만 나오면 나라가 망할 듯이 호들갑 떠는 장군들이 수두룩하다, 미국의 극우인사들을 떠받들며 이재명 정부를 헐뜯는 자들은 ‘윤 어게인’을 외면했다는 이유로 트럼프를 좌파라 부른다고 한다. 내란사태 와중에 범죄혐의가 드러난 한 ‘원로’목사는 미국 요로에 호소하며 특검출석을 거부한다는 소문도 나돈다. 일제 침탈과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의 미국식 재건과 인재양성을 지원하며 치밀한 그루밍 작업을 벌여 온 친미와 숭미 효과의 단편들이다.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주변 강국들의 영향과 그 역학관계를 외면할 수 없다. 특히 미국과의 강한 유대를 저버려서도, 버릴 수도 없는 현실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미국 그늘에 머물 것인가. ‘인지부조화’ 좌충우돌의 이기적 횡포와 신뢰도 의리도 없는 ‘안면몰수’의 본성을 여지없이 드러낸 친구를 마냥 짝사랑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시야를 넓히고, 보다 담대하며 자주적인 외교행보가 긴요해졌다. 계제에 대등과 호혜를 강단있게 밀고 나가 국익과 국민적 자존을 세우는 명분과 실리의 결단이 필요하다. 더이상 약소국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시대가 아닌 것이다.

 

K문화, K기술, K국방에, 나아가 K국력과 K민주주의가 세계의 선망을 받는 열강의 반열에 들어섰다면, 그에 맞는 처신과 외교를 강구해야 한다. 양복입고 갓쓰고 짚신을 신은 우스꽝스런 모습에 언제까지 자족할 것인가. 이제 그 낡은 의식적-무의식적 열등과 사대의 옷을 서둘러 벗어던지지 않으면 만년 미숙아, 약소국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편집인 칼럼] 김대중 노벨평화상과 트럼프

● 칼럼 2025. 9. 1. 12:36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한마당]   김대중 노벨평화상과 트럼프

 

 

한강 작가가 지난 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한국은 복수의 노벨상을 보유한 나라가 됐다. 첫 번째 영예는 4반세기 전인 2000년에 평화상을 받은 김대중 대통령이다.

 

노벨상과는 거리가 멀었던 한국에 노벨평화상의 영광을 안겨준 김대중 대통령은 목숨까지 노린 독재정권과 평생을 싸워 온 정치인이다. ‘인동초’라는 별칭을 얻은 것처럼 5차례나 감옥살이에 내몰린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파란만장의 정치행로를 걸으며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를 위해 진력한 백절불굴의 인물이다. 넬슨 만델라에 버금가는 인권정치인으로 국제사회에도 널리 알려졌으니, 노벨상 반열에 오른 것을 이상하게 여길 이유는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다른 곳도 아닌 김대중의 모국에서 일어났다. 국가적인 경사로 모두가 기뻐하며 축복해야 할 김대중의 노벨상을 트집잡고, 욕하고, 집요하게 훼방한 세력이 있었으니, 그를 평생 괴롭힌 독재정권의 잔재들이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현직이었는 데도 야당과 수구언론은 집요한 수상 폄훼공작을 벌였다. 상을 돈으로 샀다는 둥, 로비로 받아냈다는 등의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 심지어 노벨위원회에 “상을 주지 마라, 그만한 인물이 아니다. 상을 취소하라”고 요청한 사실도 알려졌다. 속담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했는데, 그들에게는 사촌은 고사하고 ‘웬수’라고나 할만한 ‘적수’가 역사에 기록을 남기게 된 대박사건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노벨위원회는 “우리는 수년동안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김 대통령의 투쟁노력을 추적해 왔다”고 선정이유를 분명히 밝히는 한편, 로비설에 대해서는 “맞다. 한국으로부터 로비가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기이하게도’ 김대중 정부로부터가 아니라 정치적 반대자들로부터 상을 주면 안된다는 로비가 있었다”고 밝혀 한국민의 낯을 뜨겁게 하며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세계인이 인정하는 수상에 축하는 못할 망정 훼방 로비라니, 제 얼굴에 침뱉기와 뭐가 다른가, 더구나 눈곱만큼의 반성도 아쉬운 가해세력이 오히려 방해공작에 목매다는 꼴은 얼마나 뻔뻔하며 평생의 스토커같은 사악한 짓거리인가.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국정원까지 동원해 ‘김대중 노벨상 취소공작’을 벌인 사실이 밝혀져, 비열과 추잡의 끝판왕이라는 지탄을 들었다.

 

저들의 끈질긴 김대중 노벨상 알레르기는 역시 매국적인 친일수구 DNA와 민족분단을 악용하는 냉전적 사고에서 연유한 열등감의 발로와 생트집이라는 것 외에는 도무지 설명이 안된다.

 

지난 8월18일로 서거 16주기를 맞은 김대중 전 대통령은 독재극우 후예들의 여전한 발호와 12.3 내란사태를 어떤 심정으로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을까.

 

 

노벨 평화상은 노벨위원회가 세계 평화에 이바지한 사람이나 단체에 수여하는 권위있는 상이다.

 

노벨상 6개 분야 가운데, 유일하게 스웨덴이 아닌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대상자를 선정해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매년 12월10일 시상한다.

 

문학, 화학, 물리학, 생리의학, 경제학상 등 다른 노벨상이 모두 특정 분야의 학문적 공로와 업적을 근거로 선정해 시상하는 것과 달리, 평화상은 ‘평화 기여’라는 다소 추상적이고 정치적인 업적을 수상자 선정의 기초로 삼는다는 점 또한 노벨상 가운데 유일하다. 다른 분야와 달리 평화상에 대해 종종 논란과 이견이 뒤따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지난 2009년에 취임한지 9개월 밖에 안된 버락 오바마 미국대통령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자 “새 대통령에게 아첨한다”며 당시 미국주재 노르웨이 대사가 비난을 받기도 했다. 노벨평화상 후보 접수 최종 시한은 2월1일 이었는데, 오바마는 1월20일 취임했다. 그렇다면 불과 열흘간의 업적으로 수상자에 선정된 셈이니 고개를 갸우뚱할 만도 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흑인 최초로 대통령이 되었다는 정치적 성공담 외에 ‘평화업적’은 이제 만들어가야 할 취임 초였다. 노벨위원회는 “국제 외교와 사람들 간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그의 특별한 노력”을 선정이유로 밝힌 게 전부였다. 오바마 자신도 퇴임을 몇 달 앞둔 방송 출연에서 수상이유에 대해 “솔직이 나도 아직 모르겠다”고 실토했고, 2020년 펴낸 회고록에서도 자신이 선정됐다는 소식에 “왜 주지(For what)?”라며 놀랐다고 했다.

 

요즘 국제질서를 멋대로 뒤흔들고 있는 도날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 수상이 소원인 듯 하다. 일부 한국사람 중에도 북한과 대화에 성과를 내 평화상을 받으라는 식의 ‘의타적’인 말도 한다. 역대 노벨평화상 수상자 가운데 오바마처럼 뒷말이 나오는 경우도 많고, 심지어 히틀러나 스탈린, 푸틴, 한국의 전두환 같은 인물이 후보에 추천된 적도 있어 트럼프가 평화상 후보에 추천되거나 설령 상을 받는다 한들 누가 뭐라 하겠는가.

 

하지만, 그는 상식의 기준에서 한마디로 ‘깜’이 안된다. 지구촌의 보편적 룰과 약소국을 무시하고, 민주주의를 훼손하며 이민자 박해와 인종 차별적 정책을 강제하는가 하면, 가진 자와 힘있는 자 편에서 탐욕과 독선의 리더십으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인물인 것도 분명하다. 그런 말썽꾼에게 ‘평화상’이라는 고상한 훈격을 부여하는 것이 과연 인류사회에 합당하고 정의로운 일 일까?                                     

[목회 칼럼] 축복의 통로로서의 우리의 사명

● 칼럼 2025. 9. 1. 12:31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목회칼럼]  축복의 통로로서의 우리의 사명

- 왜 우리는 캐나다 국가기도회와 예수대행진에 감격할까? -

 

                        양요셉 목사 (기쁨이충만한교회 담임, 예수대행진한인교회책임자)

 

2025년 8월30일 오후 3시에 소망교회에서 제12주년 캐나다국가기도회가 (5시에 식사), 9월6일(토) 정오에 Queens Park(온주의사당 앞 광장)과 도심에서 예수대행진 (Jesus in the City Parade)이 열린다. 예수 대행진은 26년 전 솔로몬 목사가 창시한 이래 매년 9월 초 토요일에 열린다. 이 도시의 모든 교회들이 인종과 교파를 초월하여 성회를 갖고 경찰의 도로경로 엄호를 받으며, 각 나라별 또는 교회들이 각각 트레일러에 악기와 찬양팀이 올라서서 찬양을 인도하며 수많은 신도들이 그 뒤를 행진하며 예수가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구원자이며, 이 도시의 주인이자, 유일한 희망임을 선포하며 행진한다. 이 도시 위에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가득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기를 갈망하며 목이 터져라 선포하고 찬양하고 전도하며 행진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캐나다 국가기도회는 온주한인목사회와 온주한인교회협의회를 중심으로 모든 한인교계 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주관하고, Jesus in the City Parade의 본부와 다른 모든 나라를 포함한 온주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최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Toronto와 Canada를 위해 한마음 한뜻으로 간절히 기도하며, 기도회 후에는 하나님의 응답과 승리를 확신하며 뷔페 식사와 함께 축제와 친교를 나누며, 예수대행진에서 다시 만나 승리의 행진을 기약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그러면 우리 한인들은 왜 이 국가기도회와 예수대행진에 참여해야 할까?

그것은 우리 한인들의 가장 큰 사명이자 특권이자 복을 누리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복의 근원)이 될지라...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세기 12:1-3)라고 말씀하실 때,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함으로 인하여 복을 받아 온 인류의 믿음의 조상이 되었으며, 축복의 근원자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과 믿음 안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으며, 축복의 근원자가 되었다. 특별히 우리 한인동포들은 아브라함처럼 고국을 떠나 캐나다의 이주자(Diaspora)가 되어 축복의 주인공이 되었으며, 모든 캐나다인들을 위한 축복의 통로로서의 사명과 특권을 갖게 되었다. 특별히 우리는 6.25 참전과 복음전파를 위해 순교한 캐나다인들에게 큰 사랑의 빚을 지고 있다. 이제 이 사랑의 빚을 갚으며 하나님의 지상명령과 지상계명을 성취해 드릴 수 있는 위대한 축복의 통로로서 기회가 주어졌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실천을 통해 가능하다;

 

첫째로, 캐나다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과 모든 백성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로서 축복하는 것. 둘째로, 이를 위해 모든 캐나다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예배자의 축복을 누리도록 기도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 셋째로, 언제 어디서나 만나는 사람마다 함박 미소를 지으며 다음과 같이 선포하는 것;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God loves you!”/ “하나님이 당신을 축복합니다! God Bless you!”

 

이러한 뜻 깊은 일에 주안에서 하나 되어 함께 모여 기도의 축제를 누리는 제12주년 캐나다 국가기도회와 제26주년 Jesus in the Cith Parade에 우리 모두 동참하여 위대한 영광을 누리고 나누는 축복의 통로가 됩시다!

 

[목회칼럼]  교회 다니지 않아도 신앙생활 할 수 있지 않나요?

 

                                               김치길 목사 (빌라델비아장로교회 담임) 

 

얼마전 새가족 공부를 하던 중, 질문을 하나 받았습니다.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꼭 교회를 다녀야 합니까?” “예수님만 믿는다면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괜찮은 것 아닙니까?”

 

이에 대한 답을 하기 전에 교회에 이해가 먼저 선행되어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교회 생활을 할 것인가에 대한 정의가 됩니다. 바른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을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성경이 말하는 교회에 대해 이해해야 합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잘 모르면 교회를 자기의 관점에서 해석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것입니다. 몸의 건강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교회가 어떤 곳인가를 아는 것이 유익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일반 조직체와 다릅니다. 교회 공동체는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가진 몸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지상에 또 다른 몸을 남겨 놓으셨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입니다. 즉, 지상의 교회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드러내야 하는 분신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몸’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개념입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나는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것입니다. 아무리 매력적인 코라고 해도 얼굴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굴러다닌다면 섬뜩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등록을 한다는 것은 세상의 멤버십과는 다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멤버십은 마음에 안 들면 탈퇴하면 되지만, 그리스도 몸 안에서는 탈퇴가 불가능합니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체를 이루었지만 내 마음에 드는 사람들만 모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외에는 다른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때로는 갈등 관계에 빠지기도 하고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지만, 한 몸이기 때문에 거부할 수 없습니다.

 

가족이라면 따뜻하고 좋은 느낌이 들지만 동시에 가장 많이 싸우는 곳이 가족관계입니다. 별것 아닌 것, 사소한 것으로 많이 싸우지만 며칠 지나면 웃고 함께 뒹굴며 살아갑니다.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가족 공동체입니다.

 

어떤 분은 교회를 너무 이상적으로만 생각합니다. 일종의 결벽증 같은 것인데 조금이라도 불편한 일이 일어나면 “교회가 왜 이래? 난 더 이상 안 다닐 거야!”라며 갈등이 없는 곳을 찾아가려고 합니다. 공동체를 거부하는 것은 신체 일부가 몸을 벗어나는 것이고 그것은 영적으로는 죽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영적 성장을 하려면 반드시 서로가 필요합니다. 홀로 자랄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는 함께 지어져 가야 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엡 2:22).

 

같은 배에서 난 형제도 다른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을 볼 때 인내하고 용납하고 이해하고 기다려주는 곳이 교회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받아들이는 훈련을 하는 가운데 조금씩 영적으로 자라가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