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적 조(朝敵朝)와 조적 조(曺敵曺)

● 칼럼 2025. 5. 21. 01:39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조희대가 옳았다"는 방씨 조선일보 박정훈

"그들의 적은 바로 그들이었다"

 

조희대가 이끄는 사법부가 최대 위기에 처했다. 원인은 간단하다. 조 씨가 주권자인 국민의 무시한 채 뜻을 거스르며 무리하게 판결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되어있다. 사법부의 권력도 당연히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하지만 조 씨는 사법부가 이어오던 오랜 관행과 절차를 무시하며 결과적으로 국민의 권력 행사를 막으려 했다. 특히 내란 우두머리 피고인 윤석열의 반국가범죄를 막고 나선 이재명 후보에 대한 요상한 상고심은 사법부의 구성원들조차 의구심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방씨조선일보의 논설실장 박정훈 씨는 대법원이 왜 민주당 반발을 무릅쓰고 이재명 대선 후보에 대한 선고를 강행했는지, 재판부는 명시적으로 설명한 적이 없다고 쓰고 있다. 언론인의 본분은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끈질기게 묻는 일이다. 박 씨는 대법원이 사건 배당과 동시에 전원 합의체에 회부해 전광석화처럼 2차 심리까지 마치고 선고 기일을 5월 1일로 지정하는 등 속도전을 펼쳤다고 전한다. 대법원이 전광석화처럼 속도전을 벌였다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개인을 넘어 국가의 운명까지 좌우할 수 있는 중차대한 판결을 이처럼 무리하게 서두른 이유를 대법원은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한다. 그리고 박 씨는 끝까지 묻고 그 까닭을 밝혔어야 했다.

 

조적조(朝敵朝)라는 말이 있다. ‘조선일보의 가장 큰 적은 조선일보’라는 뜻이다. 방씨조선일보가 원칙보다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자들이기에 흔히 관찰되는 모습이다. 박정훈 씨는 조희대 대법원장을 원칙주의자라고 하며 대법원이 전광석화처럼 속도전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원칙주의자가 전광석화처럼 속도전을 했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전광석화나 속도전이 원칙이라는 뜻일까? 박 씨는 대법원이 그 이유를 명시적으로 설명한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질문을 잃은 박 씨의 추측에 의하면 대법원이 선고를 대선 전에 하려 했으리라는 것이다.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개입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박정훈 씨가 조희대 씨를 원칙주의자라며 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될 지경이다. 

 

조선일보 5월17일자 박정훈 칼럼. 

 

국가 지도자를 뽑는 중요한 선거에 대한 판결일수록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과정과 절차를 거쳐 양심적으로 선고해야 마땅했다. 누군가에 쫓기듯 전광석화나 속도전처럼 판결을 해치운 대법원을 이해할 국민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리고 사법부만이 진실을 밝힐 수 있다는 오만은 또 어떤가? 윤석열의 내란 사태는 물론 극우 폭도들의 서부지원 침탈이나 추문에 휩싸인 지귀연의 윤석열 탈옥 허용에도 단 한마디 없던 사법부에 진실을 기대하는 국민이 과연 얼마나 될까? 조희대의 오만이 사법부의 몰락을 재촉하는 것은 아닌지 물어야 한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윤석열의 임명을 받았다. 그는 취임사에서 ‘지난날 서슬 퍼런 권력이 겁박할 때 사법부는 국민을 온전히 지켜주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다시는 권력에 굴하지 않고 국민을 지켜주겠다는 뜻이었으리라. 하지만 그는 사법 절차의 공정성과 일관성을 훼손하며 사법부의 정치적 중립성에 타격을 주었다. 대법원판결을 앞둔 시점에 내란 세력과의 우려스러운 행보에 대한 구체적인 풍문이 돌고 있다. 새삼 대법원의 뒤에 서슬 퍼런 권력의 겁박은 없었는지 묻게 된다.

 

조 대법원장은 또한 취임사에서 어떤 선입견이나 치우침 없는 판단을 강조했다. 또한 국민의 눈높이와 상식에 맞는 재판을 하도록 노력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불공정하게 처리한 단 한 건이 사법부의 신뢰를 통째로 무너지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사법부의 일원으로서 강한 사명감을 가지고, 한결같은 마음가짐과 자세를 갈고 다듬어 재판의 독립을 수호하는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기를 부탁하고 있다. 이쯤에서 조적조(曺敵曺)라는 말이 떠오른다. 조 대법원장이 조 대법원장에게 가장 큰 적이라는 뜻이다. 그가 취임사에서 한 말을 보란 듯이 스스로 뒤집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조희대 대법원장. 연합
 

박정훈 씨가 ‘조희대가 옳았다’라는 칼럼을 쓴 날, 방씨 조선일보 권순완은 ‘기자 수첩’을 통해 “이재명에 묻는다, 국회는 깨끗한가”라고 썼다. 박정훈 씨의 칼럼과 연결하니 묘한 생각이 든다. 마치 사법부가 깨끗하지 못하다는 것은 인정하고 국회는 사법부에 “깨끗한 법정” 운운할 만큼 깨끗한지를 되묻고 있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헌법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며 유독 법관에게 양심을 요구한다. 지킬 수 있는 사람들에겐 무한히 자랑스럽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참으로 끔찍한 저주처럼 들릴 말이다.

 

이제 조희대가 옳았다는 박정훈을 생각해본다. 그동안 방씨조선일보 지면에서 박 씨가 보여온 행적을 바탕으로 그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양심의 직업인 조희대 대법원장에게 묻는다. 최근 당신이 이끄는 사법부가 당신이 옳았다고 단정하는 박정훈 씨 말에 침묵할 만큼 양심적이었는지를 말이다. 내 생각에는 방씨조선일보의 논리나 주장은 틀려먹었고, 박 씨의 심보는 한참 글러 먹었다. 그리하여 다시 방씨조선일보는 폐간만이 답이다.  < 이득우 언소주 정책위원·조선일보폐간시민실천단 단장 >

[편집인 칼럼] 한 표의 위력 보일 역사적 선거

● 칼럼 2025. 5. 15. 15:34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한마당]  한 표의 위력 보일 역사적 선거

 

 

모국의 제21대 대통령 선거 재외투표 기간이 다음 주(5.20~25)로 다가왔다.

 

이번 선거에 해외에 있는 한인 동포 약 26만 명이 유권자로 등록됐다고 한다. 캐나다는 1만5천여명, 그리고 토론토 총영사관 관할지역은 6천214명으로, 북미를 통털어 LA(10,341)와 뉴욕(8,502), 그리고 밴쿠버(7,314)에 이어 4번째로 많다. 재외투표 비중으로 볼 때 캐나다도 만만찮은 지역인 셈이다.

 

하지만, 토론토 지역의 경우 약 4만명으로 추산되는 ‘참정권자’, 즉 모국 선거에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한인 동포 재외국민 수치로 따져본다면 약 15% 남짓 밖에 되지 않는다. 전세계로 범위를 넓혀 보아도 약 7백만명인 해외 한인동포 가운데 외국 국적자를 제외한 재외국민은 246만 여명으로 집계되는 것을 감안하면, 26만명 가량인 재외유권자수는 더 낮아진 10% 남짓에 그친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 투표하겠다는 유권자들 중 실제로 투표하는 인원은 얼마나 될까?. 지난해 22대 총선때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던 재외투표율 62.8%를 적용한다고 할 때 대략 16만여명이 해외에서 투표에 참여할 것으로 추정하게 된다. 토론토의 경우는 약간 높아서 66.7% 였으므로 약4천1백여명, 캐나다 전체로는 지난 22대 68.7%를 대입하면 약 1만 5백여명이 실제 투표한다는 추정치가 나온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밝힌 이번 21대 대선의 재외선거 비용은 약115억원에 달한다. 이는 전체 대선 예산 3,867억원의 약 3%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단순 계산으로 115억원을 들여 재외투표자 16만 여명이 참여한다면, 1인당, 즉 한 표당 비용이 7만2천원 꼴로 들어간다는 이야기가 된다. 캐나다 달러로는 70달러 쯤 된다. 결코 싸게 먹히는 비용이 아니다. 물론 더많은 재외국민이 투표에 참여해 투표율이 높아지면 한 표당 선거비용이 낮아져 투입 예산 대비 효용성이 높아지겠고, 반대로 투표율이 낮아지면 이른바 ‘가성비’가 떨어져, 예산을 쏟아부은 만큼의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지난 2016년부터 가능해진 재외국민 참정권은, 해외동포들에게도 모국의 정치에 참여하여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다. 해외에 거주하면서도 대한민국 국적을 버리지 않고, 모국의 안위에 관심을 기울이는 동포들이 총선 때는 정당에, 대선 때는 후보자에게 직접 표를 던질 수 있다. 하지만 매 선거마다 투표율이 기대치를 하회하면서 “재외선거 무용론‘이 심심치 않게 거론된다. 투표에 적극 참여해 투표율을 높여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한 표 한 표마다 주권자의 소중한 뜻이 담겨있는 이상, 투표율이 낮다는 이유만으로 참정권 부여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캐나다와 미국을 포함해 선진 각국이 전자투표·우편투표 등을 활용하면서 해외거주 국민의 참정권을 확대-보장하는 추세를 감안하면, 재외동포 참정권은 제도적으로 유지하면서 보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재외동포들의 바램이고, 지구촌 SNS소통 정보화시대에 맞다는 국내 학계와 정치권 등의 압도적 주장이기도 하다.

 

특히 선거에서 단 한 표 차이로 당락이 갈리는 경우도 더러있다. 지난 4.28 캐나다 총선에서 퀘벡의 테르본 선거구는 재검토 끝에 단 한 표 차이로 당선자가 바뀌었다. 단 12표, 35표 차이로 승패가 결정된 곳도 있었다. 바로 한 표의 위력을 증명해 준다.

 

지난 20대 대선에서는 불과 0.73%, 24만7천여 표 차이로 대통령이 당선됐다. 대략 재외 유권자수에 버금간다. 그런데, 그 ’하찮은‘ 표 차이의 선거결과 때문에, 나라와 국내외 동포들이 얼마나 뼈아픈 후회와 고통을 견뎠는가. 3년도 채 되지않아 탄핵과 파면이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 민주주의와 역사는 퇴행하고, 국격은 추락했고, 나라 곳곳 엉망진창이 되어 엄청난 물량적, 정신적 피해가 국민부담으로 남았다. 자칫 ’서울의 봄‘과 ’5.18 항쟁‘이 재연될 뻔한 위기도 겪어야 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내 한 표를 정말 냉철하고 현명하게 행사해야 한다는 살아있는 교훈이다.

 

지난 20대 대선에 앞서 경고음과 적색 신호는 수없이 발령됐었다. 검찰출신 벼락 후보의 문제점부터 일가의 부패비리와 무속정치 우려까지 낱낱이 지적했건만, 다수 유권자들은 마이동풍, 쇠귀에 경 읽기였고, 세심한 후보 분별을 하지 않았다. 그 소홀했던 업보로 혹독한 댓가를 치른 것이다.

 

이번 대선은 그런 성찰 위에 유권자들은 소중하고 정의로운 나의 한 표를 절대 포기하지 말고 행사해야 한다. 내란을 사죄하기는 커녕 오히려 옹호하고 제2 제3의 내란을 꾀하는 세력이 다시 외피만 바꿔 표를 구걸하고 있지는 않은가. 불법 공작과 술수로 반전을 노리는 것은 막아야 한다. 그들 사악한 이권권력 카르텔에 본 때를 보여야 할 역사적인 선거일 진대, 귀하고 귀한 한 내 표를 행사하지 않고 쓰레기통에 허투루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투표의 대상 또한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하는 유권자라면, 내란혐의로 파면된 권력자를 끝까지 감싸고 도는 정당이나 후보자에게 표를 줄 수는 없을 것이다. 다시는 헌정 파괴나 친위 쿠데타 같은 반민주적인 권력행사는 꿈도 꾸지 못하도록 주권자의 단호한 한 표 위력을 압도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역사적인 선거가 바로 다음 주, 21대 대선이다. 바야흐로 투표의 힘을 보여줄 때가 왔다.

                                                                                                         < 김종천 편집인 >

[목회 칼럼] 때로는 위로보다 도전이 필요하다

● 칼럼 2025. 5. 15. 15:30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때로는 위로보다 도전이 필요하다

 

송만빈 목사 (노스욕 한인교회 담임)

 

    주위에 고통받고 어려움에 처해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까요? 당연히 위로와 격려, 희망의 말을 해주어야겠지요. 베드로전서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던 초대 교회 성도들, 특히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 지역에 흩어진 성도들을 위해 쓰인 서신서입니다. 따라서 이 서신서의 내용이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로 가득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우리에겐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요. 하지만 베드로전서를 찬찬히 읽어보면, 우리가 예상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위로와 격려보다는 도전과 명령의 메시지를 더 많이 전합니다. 믿음의 행동을 취하여서 행진하고 싸우라는 강한 도전의 언어가 주를 이룹니다. 그 당시 성도들은 극심한 핍박 하에 있었기에 위로와 격려를 받아도 버텨내기 힘겨웠을 상황인데, 행진하고 싸우라는 도전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으니 너무 냉정하고 가혹하다는 느낌이 들죠. 하지만 진정한 위로란 때론 따뜻한 말보다, 절망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게 하는 강한 도전의 말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실망하고 낙담할 때, 상처 받고 두려울 때, 본능적으로 내 자신만을 챙기고 싶은 생각, 내 문제만 해결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시야가 좁아집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연약함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단순한 위로에 그치지 않고 성도들에게 고난을 견디며 나아갈 수 있는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위로 대신 강력한 도전을 통해 성도들에게 믿음의 길을 걷도록 이끌었어요.

 

    베드로전서 1:17입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위로의 말로 전혀 느껴지지 않지요. 도전과 명령으로 읽혀지잖아요. 그렇다면 사도 베드로가 말하고자 하는 두려움은 무엇이겠어요? 단순히 무서워하는 공포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깊은 존경과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경외심이예요. 사랑과 존경심을 동시에 품는 마음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존경심이 없으면, 그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니지요.

또한 존경심 없이 사랑하는 것 역시 참된 존경심이 아닙니다. 사랑과 존중은 함께 있어야 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 마음대로 밀어붙이시는 사랑인가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실 정도로 희생하셨으니까, 잔말 말고 그 사랑을 받아들이라고 우리에게 강요하시는 사랑입니까? 아니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존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것은 능력이 없으셔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무언가를 빚지셨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를 인격체로 존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을 열고 그 사랑을 받아들일 때까지 오래 참으시며 기다리시는 거에요.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사랑으로 하나님을 존경하고, 존경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순종하기로 결심하는 것, 쉽지 않은 선택 앞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마음 먹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도전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기를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도전으로 우리는 위로 이상의 힘과 용기를 받는 것이예요. 힘들때 때로는 우리에게 위로보다 도전이 필요합니다.

[편집인 칼럼- 한마당]   ‘미몽 카르텔’, 그들은 정녕 모르나 

                                                  그 뻔뻔함의 뒷백이 무엇인가...

 

 

2025년 4월4일 오전 11시22분. 참으로 절묘한 시간이었다. 한국에서 사랑하는 형님이 하늘나라로 가셔서 하관예배를 드리고 막 안장에 들어간 때였다. 엄숙한 장례가 진행 중이지만, 헌재 선고가 너무나 궁금한 나머지 셀폰을 잠깐 들여다 본 그 순간, ‘파면’ 단어가 번쩍 눈에 띄며 탄성이 절로 나왔다. “형님, 장하십니다. 스스로 묘혈을 판 내란범의 목덜미를 쥐고 형님이 무덤으로 끌고 가셨네요!” 안장식이 끝난 후 소식을 전하자 참석자들 모두가 “정말이네!”라고 동감 박수를 쳤다.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는 헌법재판소 재판장의 단호한 선고가 화면에 뜬 순간 법석이 났다. 광장의 시민들, 잠 못 이룬 세계 곳곳의 동포들, “이겼다” 함성과 눈물, 환호의 급전으로 SNS도 순식간에 불이 났다. 12.3 비상계엄 이후 ‘일각 여삼추’로 참고 견딘 넉달 만의 쾌거였다. 속시원한 전원일치 파면 결정은 짙은 먹구름에 캄캄하던 하늘이 갑자기 광명천지로 바뀐 것 같았고, 체한 듯 응어리로 꽉 막혔던 국민들 가슴을 일거에 뻥 뚫어주었다. “이제는 잠을 잘 잘 것 같다. 저 괴물이 사라졌으니 다 잘 풀리지 않겠느냐…”

 

 

불과 2주도 안된 이야기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괴물’의 퇴장이 끝이 아닌, 역시 친위 쿠데타의 뒤끝은 만만치가 않다. 탄핵에서 풀려난 총리가 곧바로 국민들 뒤통수를 치며 도전을 감행했다. 대통령 대행이랍시고 내란공범 용의자를 헌재 재판관에 지명하는 월권적 조치로 ‘배째라 노추’를 과시했다. 내란을 적극 비호해 ‘내란당’ 소리를 듣는 정당은 그에게 대선후보로 오라고 읍소하고 있다. 자기네 1호 당원이 파면됐는데도, 승복이나 사죄, 대선 양보는 고사하고 파면된 자에게 줄을 서서 친분을 자랑하고 그의 허풍을 흉내내기에 바쁜 낯두꺼운 후보군.

 

그래서 그가 의기양양한가. 파면 이후 일주일간이나 관저에서 뭉개며 날마다 국비로 호화 송별만찬을 즐겼다고 했다. 교통체증도 아랑곳없이 경호를 받으며 사가로 가서는 “이기고 돌아왔다. 어차피 5년 하나 3년 하나~”라고 읊어 댔다는 그 후안무치의 뇌 구조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폭넓고도 끈질긴 내란공범과 동조세력의 몰염치 양태는 법원까지 예외가 아니다. 위법적인 시간계산으로 내란범을 풀어 준 판사가 그 내란범과 일당의 재판을 맡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인데, 집중된 국민 시선도 모른 체 온갖 특혜로 내란 우두머리를 감싸 분노를 자아냈다. 지하출입구 출석, 촬영 불가, 피고인 좌석 편의, 답변 대신해 준 인정신문, 그리고 1시간 반 동안이나 혼자 떠벌리게 허용한 것 까지, 실로 일반 피고인은 물론, 전 대통령들의 재판에서 조차 보지못한 극진한 예우로 떠받들었다. 빗발치는 비난에도 눈 질끈감고 밀실재판을 밀어붙이는 외골수 판사에게 무슨 속사정이 있는 것인지, 사법신뢰의 추락에도 무반응인 법원의 배짱 역시 내란 옹호세력이 아니냐는 의심과 지탄에 할 말이 없게 됐다.

 

그런 법정에 더 신이 났을게다. 사형 아니면 무기징역 뿐인 내란죄 피고인 주제에 풀이 죽기는 커녕 기세등등 새빨간 거짓말 쇼를 벌였다고 한다. 공소사실 전체를 부인하며 “넌센스다, 로직이 잘못 됐다. 난 잘못없다”고 되레 역정을 냈다는 것이다. “계엄은 대국민 평화 메시지, 계몽령이었다”… 헌재 결정마저 전면 무시하며 부하들에게 책임을 씌우는 비겁도 여전했다.

하지만 증인으로 나온 군 영관급 간부들은 명확하게 증언해 대통령이었던 자의 뻔뻔한 거짓말을 반박했다. “국회의원을 끌어내라고 했다. 부하들이 다 안다. 나는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된다”

 

 

이런 일련의 철면피 몰지각한 작태들은 도대체 무슨 뒷배와 자신감에 가능한 일 일까. 어쩌면 도처에 알박기로 뿌리내려 또아리를 틀고 설치는 내란 동조세력들이 저들의 믿는 구석일 게다. 국민과 나라는 안중에 없이 오직 자기들 권력과 이권 카르텔 지키기에만 정신팔린 자들이, 벼랑끝에서 음흉한 밀약과 공작으로 반전을 꾀하는 파렴치의 몸부림…

 

하지만 그 미몽이 얼마나 갈까. 대한 국민들의 저력과 투지를 간과했거나 과소평가한 무지와 허세의 소산임을 언제쯤 깨달을까.

 

계엄 소식에 잠옷바람으로 국회에 달려나간 사람들이 있었다. “안 돌아오면 죽은 줄 알라”던 비장한 남편과 “아이들 좀 부탁한다”며 뛰쳐나간 엄마, 은박지를 두르고 밤새워 눈폭풍을 견딘 도로위의 ‘키세스’들… “나라를 지키자! 민주주의를 살리자”며 도시의 광장과 관저 앞과 헌재 앞, 그리고 남태령을 메웠던 수십만의 깨시민들이 있었다. 넉달간 외치고 매달려 싸웠던 그들은 기약없는 시위에 코피를 쏟기도 했고 지쳐 쓰러질 때면 링거를 맞았다고 했다. 노숙을 마다않고 독감에 걸려 고생도 했지만, 오로지 ‘정의가, 진실이 이긴다. 빛이 어둠을 이긴다’는 사필귀정의 섭리를 믿었다. 그 민초들이 한국혼과 민주주의의 위대한 자산임을 저들은 정녕 모르는 것일까.

 

이제 조기대선이 다가온다. 소중한 주권의 한 표로 저들 몰염치 미몽 카르텔에 철퇴를 가할 때다.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