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칼럼] 무감각, 위험한 헌법경시 풍조

● 칼럼 2026. 5. 9. 01:46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한마당]  무감각, 위험한 헌법경시 풍조

 국내외 동포들의 헌법경시 일반화...다시 헌정파괴 사태 온다면 누굴 탓하나

 

홍순구 작가

 

헌법은 나라의 정체성과 국정방향을 규정한 법적 토대라고 할 수 있다. 국가의 통치구조와 운영 원칙을 규율하고, 국민의 기본적 권리와 의무를 명시한 최상위 법으로, 모든 법률의 기초가 되는 ‘법 중의 법’이다. 그 위상에 있어 국민정신과 국가의 혼맥(魂脈)이 담긴 가치규범이라고도 할 수 있다.

 

헌법을 위배하면 반헌법이 된다. 삼권분립과 공직의 규범을 어긴 정치권력과 공직자들이 탄핵대상인 것은 헌법에 반한 때문이다. 박근혜가 국회의 탄핵소추로 헌법재판소에 의해 파면되고, 12.3 친위쿠데타로 윤석열이 탄핵, 파면되어 징벌을 받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수사와 재판, 국정조사에 드러난 권력 사유화와 국정을 망가뜨린 행태는 법적 형벌이라도 처할 수 있고, 그 정도에서 멈췄기에 천만다행이나, 돌아보면 윤석열 정권의 헌법 무시는 해도 너무했다. 의법 조치마저 할 수 없는 반헌법적 일탈, 특히 국민정신과 자존에 상처를 준 일들은 얼마나 많았고 심화시켰는지, 오히려 심각했다는 생각이다.

 

독립기념관장을 필두로, 한국학중앙연구원, 국사편찬위원회, 동북아역사재단 등 민족 정체성에 직결된 역사문화 연구 보존과 학술적 근거를 쌓아나갈 국가기관 챔임자들을 모조리 헌법정신을 부정하는 뉴라이트 인물들로 채워 넣었다. 엄연히 헌법에 명시된 3.1운동과 독립투쟁사를 평가절하 하며 ‘5.18은 북한군 개입’ 운운하는 자들에게 잔치판을 깔아준 것이다.

 

그들은 3.1운동 당시 “일본 제국주의 통치에 대한 도전이자 국법질서를 흔드는 위험한 선동”이라느니,“독립은 허황된 꿈이다 조선의 발전과 민족문화 향상은 오직 일본의 힘으로만 가능하다”고 으름장을 놓은 이완용 등 친일파와 다를바 없는 주장을 한다. 그런데, 정권이 바뀐지 1년이 넘은 지금도 대부분은 ‘법적임기’을 붙들고 숨을 죽인 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들이 역사관이나 가치관을 바꾸고 회심했다고 믿을 근거는 아무 것도 없는데.

 

지난해 21대 대선에서 많은 이들은 파면당한 대통령을 배출했던 정당 후보의 완패를 점쳤지만 결과는 무려 41.15%나 득표했고, 당선자와는 겨우 8.27%p 밖에 격차가 나지 않았다. 4할이 넘는 국민이 헌법을 짓밟은 세력에 표를 주었다는 이야기다.

 

최근 요란한 지방선거 여론조사도, 이른바 ‘윤 어게인’세력과 인물들을 지지한다는 국민이 많다. 특히 TK지역은 무슨 상관이냐는 듯 지지세가 대략 40% 이상에 달하고, 선거 한달 전인데 이미 당선 확정됐다는 지역도 있다. 내란옹호를 문제삼는 게 아니라, 문제삼는 자들이 문제라는 시각인 것이다. 그런 민심에 기대 계엄해제 방해혐의로 기소된 인물까지 버젓이 공천한 당에서는 파면 대통령의 최측근 비서실장이 왜 나만 외면할 거냐고 큰소리 치는 기막힌 일도 벌어지고 있다.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 새로운 전범(典範)을 만들었다는 한국에서, 오늘 이런 반헌법적이고 반 민주적인 일들이 어찌 횡행하게 되었는가. 거슬러 올라가면 민족사와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데 치명상을 입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곧 ‘반민특위’ 무력화가 그 뿌리라고 아니할 수 없다.

 

정부가 기미(己未) 삼일운동으로 건립돼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한다고 헌법 전문에 명시해 공표하고도, 이를 부정한 원조 친일세력 척결을 못한 데서 역사정의가 좌절되며 헌법경시가 일상에 젖어든 것이다.

 

올해 46주년을 맞는 5.18 민주화운동을 헌법전문에 수록하는 개헌안이 국회문턱에 있다. 한국 민주주의를 위기에서 구한 시민항쟁으로 헌법에 그 정신을 담아 기려햐 한다는 여망이 강하다. 하지만, 헌법에 실리면 폄훼와 부정적 시각이 사라질 것인가. 시민들을 압살했던 전두환이 단 한마디 사죄없이 천수를 누렸고, 그 앞잡이로 승승장구 호의호식한 자들, 민주인사들을 고문, 조작살인까지 저질렀던 자들이 여지껏 훈포장을 자랑하는 현실에서, 5.18 왜곡처벌법을 조롱하며 억지를 부리는 자들이 헌법인들 두려워할까 말이다.

 

국내의 그런 인식과 분위기는 해외동포 사회도 멍들게 하고 있다. 다시 5.18 항쟁의 기념식이 다가오는데,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며 국가기념일이라는 공식 의미부여에, K-민주 역사문화 자산으로 자랑스럽게 기념할 민족행사임에도, 탐탁치 않게 여기는 시선은 46년 전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다. 호주머니 돈을 모아가며 지키고자 하는 동포들의 의로운 뜻과 모국을 향한 충정을 가상히 여길 만도 하련만, 진보적 민간 동포단체가 개최하는 행사여서 떨떠름한 것인지, 국가행사로 기념하면 인식과 호응도가 달라질 것인지… 안타까움이 교차할 뿐이다.

 

 

권력자들의 헌법경시가 일반화된 사회에서 국민들의 헌법존중과 헌법 준수의지가 강할 리가 없다. 헌법을 소홀히 여기는 국민들에 의해 선출된 권력자들 또한 헌법을 도외시할 터이니, 누가 먼저랄 것 없는 악순환이요, 언제 다시 헌정파괴와 중단 사태가 재발한다 해도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민주주의가 위기에 몰릴 때 거리로 나선 시민들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1항과 2항을 소리 높여 외치곤 한다. 국민에게 권력을 위임받은 머슴들이 헌법을 무시하고 주인 행세하며 국정을 유린하는 꼴을 좌시할 수 없다는 불호령이다. 대다수 국민이 그러한 헌법의 정신과 중요성을 깨닫고 존중하며 지켜 나갈 때, 헌법 파괴자들이 감히 표를 달라고 뻔뻔한 낯짝을 내밀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시대가 올 때 진정한 민주주의 선진국의 민주 국민임을 자부할 수 있으리라.                                                                                                                < 편집인 >

[편집인 칼럼] "메타인지 결핍증 중환자들"

● 칼럼 2026. 4. 18. 12:56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한마당]    "메타인지 결핍 중환자들"

 

 

요즘 자주 회자되는 말 중에 ‘메타인지’라는 단어가 있다. 미국의 발달 심리학자 John H. Flavell 이 1976년에 정의를 내려 널리 쓰이게 됐다는 이 용어는 다소 생소하긴 하지만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인간관계와 처세를 포함해 ‘세상 경영’에 아주 유용하고 필요한 말이 아닌가 싶다.

 

메타인지(Metacognition:高次認知)에 대해 위키백과(Wikipedia)는 “자신의 인지 과정에 대해 한 차원 높은 시각에서 관찰 · 발견 · 통제 · 판단하는 정신 작용으로 '인지에 대한 인지' 혹은 '사고(생각)에 대한 사고'나 '다른 사람의 의식에 대해 의식하는‘ 고차원의 생각하는 기술”을 의미한다고 풀이하고 있다. 또 AI에게도 물어보니,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능력을 뜻한다. 자기 객관화를 통해 학습 전략을 수정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 능력”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인지‘를 인지하고 ’사고‘를 사고하며 ’의식‘을 의식한다니, 꽤 어렵고 헷갈리는 말 같지만, 알고보면 소크라테스가 강조한 “너 자신을 알라”, 혹은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아는가”라는 뜻과 일맥상통해 쉬운 풀이가 될 것 같다. 그러면 50년 전에 Flavell이 최초로 ’인지‘한 이론이 아니라,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2천4백여년 전에 이미 자기성찰의 메타인지 개념을 도입했던 게 될지도 모르겠다.

 

 

시대가 너무 험악하고 어수선하다 보니 메타인지라는 말이 매일매일 뇌리를 맴돈다. 나 자신은 과연 메타인지를 갖춘 사람인가 하는 자문에서부터, 근래 극히 ’험하고 풍진 ‘세상을 만들고있는 원흉들이 심각한 메타인지 결핍의 중환자들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서다.

 

“자신이 무엇을 알고 모르는지 파악하는 능력이 낮아, 자신의 능력이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과대 혹은 과소평가하는 경향에, 임기응변식 대처, 자기성찰 부족, 타인배려 부족 등의 특징을 보인다”는 문구를 읽으며 즉시 떠오르는 인물이 없는가.

 

기자가 이란전쟁에 관해 질문하면서 “민간시설 공격은 국제법 위반 전쟁범죄 가능성”을 따지자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어떻게 국제법을 정의하느냐에 달려 있다"며 ”나 자신을 멈추는 것은 오직 내 자신의 도덕성뿐“이라고 오만의 극치적 답변을 내뱉은 인물, 전쟁을 장난처럼 여기는 문제적 리더인 미국 대통령 도날드 트럼프다.

 

트럼프의 언행이 어디로 튈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안하무인과 조변석개, 좌충우돌 천방지축의 행태는 지구촌에서 모르는 이가 없다. AI가 분별한 메타인지 결핍증의 전형적 특징에 정확히 부합한다. 지금 미국과 이란은 물론 전세계인을 어떻게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하는지, 원성이 하늘을 찌르는데도 그 자신은 전혀 모르는 건지 괘념치 않고 오불관언 내닫고 있다. 교황을 모욕하고, 예수 흉내까지 서슴지않는 것을 보면 결핍정도가 아닌 중증에 틀림없다.

 

 

또 한 인물이 있다. ’부패 덩어리‘라는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다. 트럼프를 충동질해 이란 공격을 시작하게 만들더니, 휴전하겠다는 트럼프 만류도 묵살한 채 전방위 공격을 멈추지 않으면서 대놓고 휴전과 종전을 방해하고 있다. 가자지구 학살 만행과 초토화에 이어 이젠 레바논의 헤즈볼라를 잡겠다며 민간과 남녀노소를 불문한 폭탄세례를 퍼붓고 있다.

 

지금껏 홀로코스트의 트라우마를 감싸며 예우해오던 유럽의 각국이 맹비난하고, 심지어 ’가해국‘ 독일까지 가세해 등을 돌리는데도 못들은 척, 그 역시 메타인지 결핍 중증의 폭주족이다. 

오죽하면 한국의 이재명 대통령이 점잖게 국제적 인도주의 규범을 지키라고 타일렀을까만, 오히려 발끈하며 “용납할 수 없다” “홀로코스트 경시발언”이라고 반발했다. 보편적 인권중시를 강조한 내용 어디에 문제가 있고, 도대체 홀로코스트를 어떻게 경시했다는 것인지 어처구니가 없다.

 

홀로코스트의 역사적 상흔을 간직한 자들이 홀로코스트나 다름없는 학살적 전쟁을 즐기는 것도 몰양심, 곧 파렴치려니와, 홀로코스트를 전가의 보도삼아 궁지에 몰릴 때마다 ’신검‘(神劍)’인 양 휘두르는 행태야 말로 시대착오적이고 조상을 모독하는 몰상식임을 모르는 것일까.

 

 

메타인지를 겸비한 리더는 자신의 언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예측하여 더 나은 결정을 위해 노심초사하게 되어있다. 자기성찰도, 보편적 상식과 규범도 묵살하는 리더가 민심을 두려워하고 역사 앞에 옷깃을 여미면서 인류의 평화 공영과 공동선 구현을 위한 헌신이라는 고차원의 리더십에 무슨 관심을 두겠는가?.

 

자신의 행동이 자국민은 물론 이웃 나라 국민들, 나아가 지구촌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반향과 평가를 받는지를 모르고 관심도 없는 이기적 인물이라면, 결코 지도자가 아닌 사욕의 탐욕자요 해악만을 끼치는 권력 기생충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니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요즘 우리는 지도자에게 메타인지가 얼마나 중요하고 필수불가결한 덕목인지를 국내외적으로 고통 속에 체감하는 중이다.

나와 우리가 평안하고 세계인류가 평화를 누리려면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 세계인 모두가 메타인지 결핍증 환자를 다시는 지도자로 선택하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뼈아프게 되씹을 일이다.

[편집인 칼럼] "난세 광인의 무덤이 궁금하다"

● 칼럼 2026. 4. 4. 13:23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한마당]   

 

   난세 광인의 무덤이 궁금하다

 

홍순구 작가 만평

 

지금 중동에서의 전쟁으로 전 지구촌이 몸살을 앓고 있는데, 회심의 미소를 감추며 득을 보고 즐기는 일부가 있다. 러시아 푸틴은 최대 수혜자이고, 중국 시진핑도 그에 못지 않다. 미국을 끌어들여 ‘차도살인(借刀殺人)’을 저지르고 학살을 서슴지 않으면서 자기 범죄를 가리고있는 이스라엘의 네타냐후는 어쩌면 가장 질이 나쁜 인물이 아닐까.

 

이들은 “남의 손 빌어 코를 푸는” 행운에 신나서 칭송을 보낼지도 모르지만,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현재 전 세계인의 원망과 지탄을 한몸에 받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미국의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일 것이다.

 

도대체가 무슨 전략과 목적과 후과를 염두에 두고 느닷없이 이란을 전면 공격하고 나선 것인지, 전쟁과 살상을 재미로 아는 듯한 막말과 오락가락 전황대처, 전쟁기밀 악용한 사익편취 논란 등도 겹쳐지면서 중동파고의 장본인에게 세계인의 손가락질과 욕설이 쏟아지고 있다. 초등학생 170여명 폭살을 시작으로 수많은 무고한 인명 살상도 개탄스러울 뿐더러, 원유공급이 막혀 그렇지 않아도 침체에 빠진 세계경제가 유가 폭등에 휘청대면서 민생과 기업, 각국 정부 모두 고달픈 상황에 처한 때문이다.

 

 

지난해 6월14일 트럼프의 79번째 생일날 미국 전역 2,100개 이상의 도시에서 5백만명이 모여 외친 “No Kings!” 시위는 이란전쟁이 딜레마에 빠진 지난 3월28일에는 무려 3,300곳으로 늘어나 8백만명 이상 참가하는 미국 역사상 최대규모의 반 트럼프, 반전(反戰) 시위로 폭발했다. 미국인들이 자국의 대통령에게 “당신은 왕이 아니다. 당장 물러나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무모하고 반인륜적인 전쟁을 벌여 국력을 소진하고 생활고를 가중시킴은 물론 국제적인 배척대상이 되고있는 ‘막가파’ 대통령을 좌시할 수 없다는 분노의 외침이 미 전역에 확산일로이고, 전세계로도 번지고 있다.

 

최근 세계 각국의 수학자들은 오는 7월 필라델피아에서 열릴 ‘국제 수학자대회’ 거부와 개최 장소 변경을 요구하고 나섰다. 유명 수학자 5천명 안팎이 모이는 이 대회는 국제 수학자연맹(IMU)이 주관해 4년마다 개최하는 최대규모 학술대회로 ’수학 올림픽‘이라고도 불린다. ’수학 노벨상‘이라고도 하는 필즈상(Fields Medal)을 수여하는데, 지난 2022년 대회 때 한국인 허준이(June Huh) 교수가 수상해 큰 관심을 모은 바 있다. 그런데 올해 미국 대회를 앞두고 각국의 수학자들과 초청연사 등이 현재 미국 상황을 지적하며 ’보이콧‘ 운동에 돌입, 다른 나라로 옮기라는 청원에 3월 말까지 2천명이 서명했고, 프랑스는 아예 불참을 선언했다.

 

이들은 청원서에서 “트럼프 정부는 미국 내에서 뿐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기본적인 인간성을 저버리는 조처들을 하고 있다”며 “수학자들 간의 국제적 연대감을 고취하는 게 대회의 목적인데 이것이 불가능하다. 현재 미국은 개최 자격이 없다”고 비판했다. 이어 “이민세관집행국(ICE)의 무차별 단속과 시민 살해, 미 대법원의 검문 허용 등 현재 미국 정부는 이민자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감을 명백히 드러냈다”고 지적, “전세계 수학자들은 ICE 요원에게 무차별적인 괴롭힘과 신체적 폭력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연맹(IMU)이 위험을 조장하는 것은 무책임한 행위”라고 IMU에 미국 아닌 곳으로 옮겨 열라고 요구했다.

 

청원서에서 수학자들은 “미국이 광범위한 공격을 통해 세계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며 구체적인 사례도 제시했다. “이민자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와 ICE 무차별 단속, 가짜 ‘마약과의 전쟁’을 명분으로 베네수엘라 지도자를 불법적 납치한 사건, 이란에 대한 파렴치하고 무모한 전쟁, 팔레스타인에서 진행 중인 대량 학살을 방조하고 조장하는 행위, 쿠바에 대한 강압적이고 징벌적인 봉쇄, 거주민 의사에 반해 그린란드를 식민지화하려는 시도” 등이다.

한마디로 불안하고 위험한 ‘불한당 미국’엔 가기 싫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집권 1기에도 무수한 거짓말과 허풍으로 국제사회에 파장을 일으킨 바 있다. 그런데 2기에는 증세가 더 위중해졌다. 그는 지구촌을 지탱하고 유지해 온 국제질서를 멋대로 깨부셨다. 대표적으로 유엔과 나토, 기후협약 등을 무력화하고 관세전쟁에 집착했다. 전통적으로 내걸었던 미국식 자유 민주주의와 인권외교의 기조를 아예 무시했다. 이민자와 사회적 약자, 약소국을 짓밟는 무지막지한 힘의 논리에 취했다. 태생적인 장사꾼 탐욕 기질이 뒤엉킨 권력의 교만과 과시적 자만에 독선과 아집, 종잡을 수 없이 튀는 몰지각한 저질 언동 등 파시스트 괴물군주화 했다. 국정이 난관에 봉착하고 이른바 앱스타인 스캔들에 몰리며 ‘면피성 발광’은 증세가 심해졌다, “No Kings!” “No Dictators!”라는 미국시민들 외침이 그걸 증명한다. 차츰 그의 실상과 폐해를 체감한 미국인들이 자격없는 지도자를 뽑은 걸 후회하며 옐로우카드에 그치지 않고 레드카드를 꺼내 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 트럼프를 ‘광인(狂人)’이라고 부름에 주저함이 없는데, 나중 역사가들은 그를 어떤 단어들로 기록할까. 글자의 본 뜻이 으뜸이고 승자라는 ‘Trump’의 오만과 기고만장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그는 여전히 “전쟁은 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믿으며 노벨평화상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인간의 기행과 괴벽은 개성의 영역일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치부 욕망을 나무랄 수는 없다. 엄청난 거부가 자기 배 두드리며 떵떵거리고 산다해서 누가 뭐랄 수 있나. 다만 개인적 전횡에 그치지 않는 인류적 난동질이라는 데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초강국 미국을 추락시키고 국제사회에 풍파를 일으켜 세계인을 심적·물적 고통에 몰아 넣은 것은 분명 ‘패악질’에 다름 아니다.

 

한국사회를 수십년 후퇴시킨 윤석열이 자승자박, 제 발등을 찍더니 마침내 몰락한 것처럼, 사악한 권력자들은 제 꾀에 제가 넘어가고 결국은 제 무덤을 파는 게 인류역사의 굴곡진 단면이기도 하다. 트럼프의 대통령직은 미국은 물론 세계의 불행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잘못된 선택이고 불운이다. 미국민들의 울분지수 상승과 이란전쟁 패착에, 중간선거 폭망론 등을 앞에 둔 ‘난세 광인’의 향후 인생행로가 궁금하다.                   < 편집인 >

박순찬 작가 만평

[편집인 칼럼] 이란계 애국적 결집의 파워

● 칼럼 2026. 2. 21. 13:19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한마당]  이란계 애국적 결집의 파워

 

 

우리 민족과 동포들의 애국심과 애족 정신은 남다르다고 생각한다.

 

일제치하 해외로 이주한 동포들은 고난과 신음 속에서도 쌈짓돈을 모아 독립운동에 보태면서 조국의 자주독립을 애타게 간구했다. 독재 정권하에서는 민주화 운동을 성원하며 국제사회 동조에 힘을 쏟았다. 5.18 민주항쟁의 피해자와 가족을 위해 토론토 동포들도 성금을 전달하고 학살정권 규탄대열에 나섰다. 부패 무능한 지도자를 끌어내리는 촛불광장에도 많은 동포들이 합류해 궐기했다. 아시아는 물론 세계 각지 민주투쟁 현장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주제가로 불린다. 트럼프의 이민정책과 폭주에 항의하는 미국시민들도 한국의 응원봉 평화시위를 흉내낸다는 뉴스를 듣는다.

 

그렇게 우리 한인들의 애국 애족정신과 정의감과 ‘행동하는 양심’은 ‘타의 추종을 불러올’ 만큼 대단하고, 그 열정과 참여도에 있어서는 절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오늘의 민주주의를 일궈낸 초석이 되었다고 자부하며 자긍심을 갖는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그런 자부와 자만은 객관적이지 않은 주관적 평가일 뿐이요 자화자찬이 아니었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어쩌면 우물안 개구리 같은 자신감의 발로였다는 민망함과 의구심이 한 순간에 밀려든 때문이다.

 

 

바로 지난 2월14일 토요일 낮 토론토 노스욕의 영 스트리트를 가득 메운 이란계 시민들의 시위를 접하면서다. 같은 시각 설날 대잔치로 2백여 동포가 한인회관에서 흥겨운 축제를 즐기고 있을 때 들려 온 도심의 성난 파도(怒濤)같은 이란군중 소식은 마치 뒤통수를 친 것 같은 대비로 다가왔다.

 

한인 설잔치에 메시지만 보낸 더그 포드 온주 수상도 동참했다는 시위는 무엇보다 참여 규모와 결집력에서 놀라움을 주었다. 경찰 집계로도 무려 35만명이 모였다니 실제론 더 모였을 것이다. 앞서 2월초 다운타운에서 열린 시위에도 이란인들은 15만명이나 모였다고 한다. 열흘 남짓 간격으로 열린 두 차례 집회에 연인원 45만명 이상이 운집한 것이다.

 

이란계 사람들이 대거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은 올해 초 반정부 유혈사태로 수천명이 피살당한 충격에서 비롯된 사실은 잘 알려져있다. 동족애와 분노로 모여 캐나다 대로를 장악하고 모국의 살상 만행과 실정을 한마음으로 규탄하며 독재퇴진과 정권교체를 쩌렁쩌렁 외친 것이다.

 

온타리오 지역에 거주하는 이란계 이주민은 한국계보다 대략 1.5~2배 정도인 18만명에서 20만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캐나다 전체 거주자 30만명 내외의 6할 정도가 토론토를 중심으로 캐나다 동부에 몰려 산다고 한다.

 

이날 이란정부 규탄 ‘세계 행동의 날’ 집회는 전세계 각지에서 동시 다발로 열렸다. 망명상태에서 규탄행동을 제창한 레자 팔라비 왕세자 측은 특히 뮌헨(독일), 로스앤젤레스와 함께 캐나다 토론토가 세계 3대 핵심거점이라며 대규모 시위를 예고해, 타지 원정참여와 타민족 응원참여도 상당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쳐도 현지 거주자 수를 2배 가까이 훨씬 뛰어넘는 35만여 명이나 집회에 모였다는 사실은 무얼 말해주는가. 한인사회에서는 한가위축제 수만 명을 제외하고는 ‘상상’조차 어려운 인원이다. 그들의 모국 사랑 애국심을 바탕으로 한 결집과 행동의 파워, 그리고 강한 정의실현 욕구의 발로 외에 달리 설명할 말이 있을까.

 

 

해외에 나가면 모두가 애국자가 된다고 한다. 모국이 잘 되어야 해외에서도 가슴을 펴고 당당히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해외동포들은 모국의 동향과 정정에 민감하다. 모국의 정변 때마다 함께 규탄하고 항의집회를 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그 참여 강도와 열의와 투지가, 과연 이란인들에 비해 우리가 낫다고 내세울만 한가. 이란의 반정부 시위가 유혈진압으로 약화될 때, “한국이면 어땠을까” “한국은 5.18 정신과 키세스 군단의 저력으로 결판냈을 텐데” 라는, 자못 우월적인 동정심을 느낀 적이 있다. 참으로 오만하고 주제넘은 착각이 아니었나, 민망할 뿐이다.

 

10년 전 박근혜 국정농단 탄핵촉구 토론토 집회 때나, 최근 12.3 내란으로 나라가 요동칠 때 멜라스먼 광장 규탄집회 역시, 전세계 연대집회로 열렸지만 1백명이 채 안되는 동포들이 참여했을 뿐이다.

 

물론 한국과 이란의 정변사태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지정학적·역사적 맥락이 다르고, 사안의 성격과 국제사회 역학관계도 판이하다. 피해와 규탄 인원이 많고 적음으로 사안의 본질과 경중을 가린다는 것도 논리적이지는 않다.

 

이란의 경우 수천명에 달하는 억울한 죽음은 국경을 초월한 연민과 분노를 샀다. 캐나다 주류 정치인들이 항의시위에 동참한 것처럼 사태의 국제화 또한 수십만 운집을 촉발한 측면이 있다. 그렇다해도 모국의 국체(國體) 위기와 국제적 파장을 부른 윤석열 내란 규탄마저 남의 일처럼 별 관심을 보이지 않은 한인사회와는 너무나 큰 편차에 자괴감이 없지않다.

 

위대한 소수의 저력이 오늘의 한민족사를 일궜다는 자부와 위안에도 불구하고, 이란인들의 놀라운 결집과 연대의 파급력, 참여의 힘은 너무나 부러운 타산지석이다. 100명의 사색가(Thinkers)는 1명의 행동가(Doer)를 당해낼 수 없다는 금언을 절실하게 되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