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칼럼- 한마당]   ‘미몽 카르텔’, 그들은 정녕 모르나 

                                                  그 뻔뻔함의 뒷백이 무엇인가...

 

 

2025년 4월4일 오전 11시22분. 참으로 절묘한 시간이었다. 한국에서 사랑하는 형님이 하늘나라로 가셔서 하관예배를 드리고 막 안장에 들어간 때였다. 엄숙한 장례가 진행 중이지만, 헌재 선고가 너무나 궁금한 나머지 셀폰을 잠깐 들여다 본 그 순간, ‘파면’ 단어가 번쩍 눈에 띄며 탄성이 절로 나왔다. “형님, 장하십니다. 스스로 묘혈을 판 내란범의 목덜미를 쥐고 형님이 무덤으로 끌고 가셨네요!” 안장식이 끝난 후 소식을 전하자 참석자들 모두가 “정말이네!”라고 동감 박수를 쳤다.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는 헌법재판소 재판장의 단호한 선고가 화면에 뜬 순간 법석이 났다. 광장의 시민들, 잠 못 이룬 세계 곳곳의 동포들, “이겼다” 함성과 눈물, 환호의 급전으로 SNS도 순식간에 불이 났다. 12.3 비상계엄 이후 ‘일각 여삼추’로 참고 견딘 넉달 만의 쾌거였다. 속시원한 전원일치 파면 결정은 짙은 먹구름에 캄캄하던 하늘이 갑자기 광명천지로 바뀐 것 같았고, 체한 듯 응어리로 꽉 막혔던 국민들 가슴을 일거에 뻥 뚫어주었다. “이제는 잠을 잘 잘 것 같다. 저 괴물이 사라졌으니 다 잘 풀리지 않겠느냐…”

 

 

불과 2주도 안된 이야기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괴물’의 퇴장이 끝이 아닌, 역시 친위 쿠데타의 뒤끝은 만만치가 않다. 탄핵에서 풀려난 총리가 곧바로 국민들 뒤통수를 치며 도전을 감행했다. 대통령 대행이랍시고 내란공범 용의자를 헌재 재판관에 지명하는 월권적 조치로 ‘배째라 노추’를 과시했다. 내란을 적극 비호해 ‘내란당’ 소리를 듣는 정당은 그에게 대선후보로 오라고 읍소하고 있다. 자기네 1호 당원이 파면됐는데도, 승복이나 사죄, 대선 양보는 고사하고 파면된 자에게 줄을 서서 친분을 자랑하고 그의 허풍을 흉내내기에 바쁜 낯두꺼운 후보군.

 

그래서 그가 의기양양한가. 파면 이후 일주일간이나 관저에서 뭉개며 날마다 국비로 호화 송별만찬을 즐겼다고 했다. 교통체증도 아랑곳없이 경호를 받으며 사가로 가서는 “이기고 돌아왔다. 어차피 5년 하나 3년 하나~”라고 읊어 댔다는 그 후안무치의 뇌 구조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폭넓고도 끈질긴 내란공범과 동조세력의 몰염치 양태는 법원까지 예외가 아니다. 위법적인 시간계산으로 내란범을 풀어 준 판사가 그 내란범과 일당의 재판을 맡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인데, 집중된 국민 시선도 모른 체 온갖 특혜로 내란 우두머리를 감싸 분노를 자아냈다. 지하출입구 출석, 촬영 불가, 피고인 좌석 편의, 답변 대신해 준 인정신문, 그리고 1시간 반 동안이나 혼자 떠벌리게 허용한 것 까지, 실로 일반 피고인은 물론, 전 대통령들의 재판에서 조차 보지못한 극진한 예우로 떠받들었다. 빗발치는 비난에도 눈 질끈감고 밀실재판을 밀어붙이는 외골수 판사에게 무슨 속사정이 있는 것인지, 사법신뢰의 추락에도 무반응인 법원의 배짱 역시 내란 옹호세력이 아니냐는 의심과 지탄에 할 말이 없게 됐다.

 

그런 법정에 더 신이 났을게다. 사형 아니면 무기징역 뿐인 내란죄 피고인 주제에 풀이 죽기는 커녕 기세등등 새빨간 거짓말 쇼를 벌였다고 한다. 공소사실 전체를 부인하며 “넌센스다, 로직이 잘못 됐다. 난 잘못없다”고 되레 역정을 냈다는 것이다. “계엄은 대국민 평화 메시지, 계몽령이었다”… 헌재 결정마저 전면 무시하며 부하들에게 책임을 씌우는 비겁도 여전했다.

하지만 증인으로 나온 군 영관급 간부들은 명확하게 증언해 대통령이었던 자의 뻔뻔한 거짓말을 반박했다. “국회의원을 끌어내라고 했다. 부하들이 다 안다. 나는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된다”

 

 

이런 일련의 철면피 몰지각한 작태들은 도대체 무슨 뒷배와 자신감에 가능한 일 일까. 어쩌면 도처에 알박기로 뿌리내려 또아리를 틀고 설치는 내란 동조세력들이 저들의 믿는 구석일 게다. 국민과 나라는 안중에 없이 오직 자기들 권력과 이권 카르텔 지키기에만 정신팔린 자들이, 벼랑끝에서 음흉한 밀약과 공작으로 반전을 꾀하는 파렴치의 몸부림…

 

하지만 그 미몽이 얼마나 갈까. 대한 국민들의 저력과 투지를 간과했거나 과소평가한 무지와 허세의 소산임을 언제쯤 깨달을까.

 

계엄 소식에 잠옷바람으로 국회에 달려나간 사람들이 있었다. “안 돌아오면 죽은 줄 알라”던 비장한 남편과 “아이들 좀 부탁한다”며 뛰쳐나간 엄마, 은박지를 두르고 밤새워 눈폭풍을 견딘 도로위의 ‘키세스’들… “나라를 지키자! 민주주의를 살리자”며 도시의 광장과 관저 앞과 헌재 앞, 그리고 남태령을 메웠던 수십만의 깨시민들이 있었다. 넉달간 외치고 매달려 싸웠던 그들은 기약없는 시위에 코피를 쏟기도 했고 지쳐 쓰러질 때면 링거를 맞았다고 했다. 노숙을 마다않고 독감에 걸려 고생도 했지만, 오로지 ‘정의가, 진실이 이긴다. 빛이 어둠을 이긴다’는 사필귀정의 섭리를 믿었다. 그 민초들이 한국혼과 민주주의의 위대한 자산임을 저들은 정녕 모르는 것일까.

 

이제 조기대선이 다가온다. 소중한 주권의 한 표로 저들 몰염치 미몽 카르텔에 철퇴를 가할 때다.                          < 김종천 편집인 >

[목회칼럼] 고난주간, 상대방을 축복-공-격?

● 칼럼 2025. 4. 18. 12:31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고난주간, 상대방을 축복공격?

                                                                            생명나무교회  전상규 담임목사

 

고난주간, 뉴스를 켜니 어김없이 갈등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좌와 우의 끝없는 공방, 빈부 격차의 날카로운 대립, 심지어 교회마저 서로 다른 색깔로 갈라져 비판을 주고받습니다. 친구와의 대화는 어느새 “누가 더 옳으냐”로 흐르고, SNS는 비난의 화살로 뒤덮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해야 할 이 시기에, 세상도 교회도 깨진 조각처럼 흩어져 있습니다.

 

그 분열의 뿌리에는 두려움과 불안이 있습니다. 내 믿음과 자리를 잃을까 두려워 상대방을 적으로 만들고, 높은 담을 쌓습니다. 심리학자 피터 T. 콜먼은 그의 저서 ’분열의 시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서 분열의 근원을 두려움과 분노로 봅니다. 우리 안에는 두려움과 증오의 늑대, 그리고 사랑과 희망의 늑대가 싸웁니다. 우리가 어떤 늑대에 먹이를 주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달라집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어떤 이는 정치적 입장으로, 어떤 이는 자기 신앙만 옳다며 서로를 멀리합니다. 같은 예배당 안에서도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집니다. 고난주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이 깨진 세상에 무엇을 내놓을 수 있을까요?

 

신약성경 에베소서 2장 12-22절에서 우리는 희망의 길을 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모든 막힌 담을 허무셨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서로 적대하던 이들을 화평의 복음으로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화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기적, 하나됨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죄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하나님 나라 안에서 하나됨을 선물하셨습니다. 옳고 참된 것을 찾는 열정은 소중하지만, 가장 옳고 참된 것은 예수님이 열어주신 사랑의 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우리 안에 친절과 희망의 늑대를 키워냅니다. 첫째, 상대방을 위해 기도합니다. 다른 생각을 가진 이웃의 필요와 아픔을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기도는 두려움의 늑대가 아닌 희망의 늑대에게 먹이를 주는 선택입니다. 둘째, 축복의 말을 건넵니다. 비난과 비판으로 상대방을 밀어내기보다, 그들의 가치를 인정하는 따뜻한 말 한마디를 전합니다. 셋째, 공감의 손을 내밉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그들의 두려움을 마음으로 느낍니다. 마지막으로, 격려로 힘을 북돋웁니다. 넘어진 이웃에게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는 말과 행동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실천입니다. 이것이 바로 축복, 공감, 격려의 ‘축복·공·격’ 태도입니다.

 

고난주간,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희망의 늑대를 선택하는 용기를 줍니다. 두려움으로 상대방을 밀어내기보다, 축복과 공감으로 그들을 끌어안는 길입니다. 오늘, 곁에 있는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의 말을 건네고,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하며, 격려해 줍시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우리를 하나로 묶는 힘이 될 것임을 믿습니다.

[목회 칼럼] 광장이 아닌 광야의 영성으로

● 칼럼 2025. 4. 9. 13:43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광장이 아닌 광야의 영성으로

김주엽 목사 (토론토 강림교회 담임)

 

지난 3월 첫 주일 예배는 전교인 연합예배로 드리면서 3.1절 기념주일로 지켰습니다.

남, 녀 젊은이들이 나와서 한글과 영어로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고, 공약 3장은 전교인이 함께 낭독하며 축도 후에 애국가 1절을 제창하였습니다.  어지러운 조국을 멀리서 바라보며, 모처럼 조국의 미래를 위해 어느 주일보다 간절히 기도하는 주일이었습니다. 

 

 

제 모교 신학교의 대학원 건물 로비에는 3. 1 독립운동 대표 33인가운데 졸업생 출신인 7인의 흉상이 나란히 있습니다. 일개의 신학교에서 일곱명의 30, 40대 젊은 졸업생들이 민족대표가 되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는 사실은 선교사들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조선 기독교의 출발이 굉장히 현실 참여적인 신앙 운동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선 땅에 들어온 기독교는 조국의 해방과 독립이라는 조선인들의 보편적인 가치와 소망에 적극 동참하는 현실참여적임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지금도 머나먼 타국에서 이민교회들이 기도제목으로 삼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한다’는 기치는 한국교회의 보편적 가치와 전통을 따라 오늘날에도 한국교회에 이어져 오고 있는 가치입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참석하였던 에큐메니칼 예배나 기도 모임에서는 이런 기도제목이 아닌 다른 접근과 내용들이 있는 것을 보면, 굉장히 독특한 한국교회의 전통이요 흐름이라 하겠습니다.

 

7인의 대표들 가운데 김창준은 30세에 민족대표가 될 정도로 리더십도 있고, 1919년이전에 이미 미국 유학까지 다녀와서 신학교에서 교수하는 전도유망한 목회자였지만, 6.25중에 자진 월북하여 남한에서는 잊혀 버린 존재가 되었고, 흉상을 세우는 것에 대한 많은 논란도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다른 두 인물은 3.1운동 이후에 노골적 친일운동에 참여하며 변절하게 되었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은 감리교회에서 출교, 면직당하게 되었고, 2000년 대 초반에 청주의 삼일공원에 세워진 동상이 공개적으로 무너지는 불명예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헌신보다도 이념과 신념의 가치, 자신의 미래에 대한 영달과 안위가 더 중요한 가치로 자리잡고 있기에 예수의 영(耶蘇 - 靈)이 아닌 이데올로기와 자기 영달에 사로잡혀서 영원한 나라의 생명을 잃어버린 안타까운 모습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최근 한국 기독교의 일부가 정치적 이슈에 스스로 뛰어 들면서 사도 바울이 그렇게 고백한 그리스도의 노예가 아닌 이념의 노예가 되는 안타까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는 6.25을 겪으면서 북한 공산주의의 엄청난 핍박을 경험하고 순교를 당하면서, 어떤 종교보다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고, 반공 이데올로기에 앞장 설 수 있는 정당성이 역사적 아픔가운데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방식과 내용이 예수님의 방식이 아닌 것 같습니다.       

 

광야의 영성으로 세워지고, 땅끝의 절박함에서 하나님을 만나 그 분의 영으로 자신을 굳게 세워져야 할 기독교가 광장의 종교가 되고, 거리의 종교가 되어서 숫자의 힘을 내세우는 안타까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26: 52-53절),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하겠습니다. 칼의 힘과 숫자로 상징되는 세상의 권세가 세상과 사람의 마음을 정복할 수 없음을 예수님께서 분명히 선포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를 살려 내시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부활을 경험케 합니다. 바울이 강조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5;24절) 고백이 자신의 뜻과 감정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편집인 칼럼] 키세스들이 원하는 세상

● 칼럼 2025. 3. 13. 11:32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 한마당]   키세스들이 원하는 세상

눈폭풍 속에 빛을 발한 인고(忍苦)의 영웅들 ‘키세스 시위대’, 그리고 주말마다 광장에 나와 ‘정의’를 외치는 시민들을 생각한다. 무엇을 위해 저리도 고생하나, 시키지도 않은 행동에 발벗고 나서 열정을 쏟아내는 저들이 원하는 세상은 어떤 곳인가.

 

문득 몸도 마음도 편하게 행복을 누릴 살기좋은 세상은 어디일지, 잠시 주변을 가늠한다.

산좋고 물 좋은 양지바른 초가삼간에서 유유자적 사는 ‘신간이 편한’ 삶이려나? 저 푸른 초원 위의 그림같은 집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오순도순 즐기는 정감어린 인생일까, 아니면 대도심에서 분주하게 ‘일하는 재미’로 사는 삶일까, 바닷가 값비싼 별장을 오가면서 하인들 부리고 친우들과 어울리며 풍족하고 부유하게 즐기는 ‘부티나는’ 삶이면 좋을까.

 

저마다 취향과 기준이 다르니 당연히 각양 각색이겠지만, 어쩌면 그 모두를 조화롭게 하나로 만든 것이라면 최고일지 모른다. 마음이 평안하고, 정감이 넘치며, 일하는 재미에 부와 명예와 권력도 따르는 삶이면 부러울 게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또 조건이 있다. 그런 삶이 어디에서 가능하며 만족도가 높아지겠느냐는 것이다. 가령 북미와 아프리카, 혹은 캐나다와 러시아를 비교해 본다면 어떤 결론이 나오나.

 

캐나다에서 그런 여건과 환경을 갖춘 일상이라면 꽤나 부러운 삶일 것이다. 정치와 사회가 안정돼 있고, 차별이 덜하고, 시스템이 비교적 잘 작동되고, 또한 생활환경도 우수한 편이어서다. 그런데, 갱단이 설쳐 사회질서가 불안하고 정치가 혼미한 중남미 혹은 중동·아프리카·동남아 등의 소요가 심한 나라들이라면 어떨까. 사회적 악의 카르텔과 국가폭력이 일상적으로 안위를 위협하는 곳들에서도 ‘신간 편하게’ 여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마음 편히 여유를 만끽하며 살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풍요보다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만족과 평안이 중요하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진리의 하나다.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위협과 공포에 시달린다면 불안과 초초, 스트레스에 결코 행복감을 맛볼 수 없는 일상인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래서 왕정이나 독재가 아닌 민주적 정치체제는 물론이고 사회질서와 복지체계가 안정적이고 공평하며 공정하게 법과 시스템이 유지되는 나라가 ‘살기좋은 곳’으로 평가를 받고, 행복을 누릴 만한 곳으로 선호되는 것이다.

 

그러면 광장의 시민들이 바라는, 우리들의 고향 땅은 어떤가. 살기좋은 곳인가.

 

삼일운동은 일제 군국주의에 저항해 자주독립국의 소망으로 전국이 결집된 민의의 맹렬한 분출이었다. 그런데 그 땅이 나뉘면서 남과 북은 불행히도 다른 길을 걸었다.

 

북한은 세습 왕조와도 같은 1인 독재국가다. 자유도 항거도 생각할 수 없는 곳이 됐다. 사람들이 평안하며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는 곳이다. 분단 80년동안 그렇게 굳어지고 습성화된 일상을 산다.

 

반면 남한은 민주주의를 정착시켜 오면서 수많은 시행착오와 파열음에 ‘피와 눈물’이 밑거름되어 세계적 수준의 민주국가로 성장했다. 물질적 풍요와 함께 자유를 향유하고, 권리를 주장하며, 할 말은 하고, 하고싶은 일을 하는 사회가 됐다. 심각한 빈부 격차 등의 문제는 있지만, 사람들은 그래도 자긍심을 느낀다. 적어도 자유 평등과 민주적 시스템에 대한 체질적 선호와 믿음은 확고해 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그에 대한 의문과 불신이 커지면서 정치 사회적 갈등이 깊어지는 불길한 조짐에 평범한 시민들이 나선 것이다. 집권 이후 공정과 상식을 뭉개고, 법치의 오남용으로 균열을 키우던 윤석열 정권이 느닷없는 계엄사태를 촉발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국정을 혼란에 빠뜨리면서 국민 행복권에 심각한 도전장을 던진 때문이다.

더구나 탄핵의 심판정에서까지 불법을 특권으로, 부당을 정당으로, 그리고 야당 탓 부하 탓이라는 오기와 억지로 덮어씌우기와 판 뒤집기 선동에 목매달면서 사람들에게 심한 불안과 스트레스를 준 것이다.

 

계엄발동 소식에 뛰쳐나간 시민들은 박정희 전두환 독재 트라우마에 심한 공포감을 안고 국회로 달렸다고 증언했다. 윤석열 구속을 촉구하며 눈폭풍을 버틴 시민들도 그 두려움이 원동력이었다. 국회의원들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즉생의 각오로 국회 담장을 넘었다고 했다. 모두가 평안과 행복을 누려야할 나라가 억압과 공포의 독재국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절박함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성조기에 성직자들까지 동원된 극우광장에서는 상식이 통하지않는 폭력적인 선동과 ‘행복 파괴-불안 조장’의 언동이 넘쳐난다.

소명의 기름부음을 받았다며 성스런 ‘제사장’ 직분자를 자칭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쏟아진 악담과 요설, 성적비하 발언들은 귀를 의심케 한다.

온갖 상스런 욕설과 믿거나 말거나인 주장들, 막무가내 편승해 흥분한 목청에는, 그들 자신이 누리고 혜택을 받았던 헌법과 법치와 민주주의를 향한 ‘자폭(自爆)적’인 저주와 살기마저 느껴질 정도다.

스스로 맘껏 누리는 자유를 ‘자유 파괴’의 흉기로 휘두르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소위 집권당의 국회의원이라는 사람들이 다투어 선동대열에 영합해 정치와 사회를 이간질하고, 국민 행복욕구에 독물을 뿌리며 선량한 시민들 마음을 후벼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