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논어 위령공편(衛靈公篇) 29장에서 2500년이 지난 오늘도 모두가 새겨들을 경구를 남겼다.
위나라의 28번째 군주였던 위령공을 공자는 무도한 혼군, 즉 도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군주였다고 보았다. 실제로 위령공의 아들이 왕후인 어머니를 죽이려다 실패해 다른 나라로 도주하는 일도 있었다니,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와는 거리가 멀었던 인물인 것 같다.
공자는 논어 위령공 편에서 41장에 달하는 문답 가운데 29번째 장에서 “과이불개 시위과의(過而不改 是謂過矣)니라”고 했다. 풀이하면 "허물이 있는데도 고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허물이다." 라는 준엄한 꾸짖음이다. 공자는 논어 학이편에서도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 즉 "잘못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고 가르쳐, 잘못은 인정하고 바로잡을 것을 강조했다. 앞서 위령공편 14장에서는 ‘궁자후이박책어인(躬自厚而薄責於人)이면 즉원원의(則遠怨矣)니라’고 했다. "자신에게 엄하게 꾸짖고, 남에게는 가볍게 꾸짖으면 원망이 멀어진다."는 것이다.
짐작들 하겠지만, 공자의 교훈을 거론하는 것은 내란청산 작업이 진행 중인 요사이 ‘과이불개’의 인물들 민낯을 너무 많이 보는 괴로움 때문이다.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사과나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모르쇠 발뺌이나 책임전가, 뭉개기, 심지어 “그래서 어쩔건데” 라는 적반하장까지, 뻔뻔한 얼굴들과 몰염치 작태가 국내외 동포들의 스트레스와 불안을 조장하고, 나라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을 본다.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 내란우두머리 윤석열 부부의 남탓과 오만과 억지, 교활한 오리발 행진을 필두로한 공범과 종범들, 당시 주도적 고위직들의 발언과 행태는 몰양심·철면피 외에 묘사할 말이 없다. 자기들만 살겠다고 발버둥칠 뿐, 국민과 국가는 안중에 없다.
탄핵과 선거로 명백한 심판을 당했으면서도 여전히 ‘윤 어게인’을 외치며 내란선동과 국정혼란을 꾀하는 국민힘당과 소속 의원들, 그들은 사이비 종교단체에서 뇌물과 당원가입에 의한 선거개입이 드러나는 데도 극구 부인하며 “탄압과 보복”이라는 물타기와 되치기 수법 후안무치로 일관하고 있다.
유례없는 법해석으로 내란수괴를 석방해 국민을 놀라게 하고, 늘어진 재판으로 지탄받는 지귀연 판사, 그는 룸살롱 접대의혹에도 꿋꿋이 버티는 쇠심줄을 과시한다. 윤석열 간택에 보은행태인지 모르나, 항소심 무죄사건을 단 9일만에 파기환송해 대통령후보를 제거하려 한 ‘사법쿠데타’ 장본인 조희대 대법원장은 법원직원들의 규탄에도 아랑곳 없이 “사법독립”만을 중얼대며 역시 두꺼운 얼굴로 버티고 있다.
민족 정체성을 더럽히는 식민사관으로 무장한 뉴라이트들은 어떤가. 국사편찬위원회, 독립기념관, 한국학중앙연구소, 동북아역사재단 등 국가 주요 역사단체를 장악한 자들도 물러날 기미가 없다. 권위를 자랑하던 인권기관의 국내외 위상을 망친 국가인권위원장, 권익 향상이 아니라 국민고충을 가중시킨 국민권익위원장, 진실화해위원장, 대통령 하명 감사에 열올렸던 감사원장도 안면몰수는 마찬가지다. 사죄와 개심(改心)도 부족하거늘, 헌법소원을 하겠다는 둥 파렴치 반발하는 패가망신 정치검찰족의 일부와 방송장악의 앞잡이로 온갖 구린내를 풍긴 방통위원장까지….
다윗은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다. 이스라엘이 국기에 다윗의 방패를 의미하는 육각별을 새긴 연유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신임을 한 몸에 받은 다윗왕은 그러나 일생일대의 악행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된다. 수많은 처첩을 거느렸음에도 부하 장군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적진에 내몰아 죽이는 잔인하고 사악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앞서 그는 밧세바가 임신하자 전장에서 우리아를 호출해 밧세바와 동침하도록 술수를 부리기도 했다. 두 차례나 명하는 다윗의 ‘음흉한 호의’에도 불구하고 우리아는 전쟁 중에 전우들 처지를 아는 군인이 호사를 누릴 수 없다고 고사하며 자기 집에 가지 않고 왕궁문에서 잠을 청한다. 아무 죄없는 충직한 참 군인이 여색에 눈먼 다윗의 비열한 모략에 아내를 빼앗기고 목숨까지 희생을 당한 것이다.
인면수심의 죄악을 범한 다윗은 밧세바를 아내로 맞이해 태연한 일상으로 돌아가려 한다. 하지만 선지자 나단을 통해 하나님의 서릿발같은 징벌경고를 듣게 된 다윗은 자신의 중죄를 자인하게 된다. 그리고 곧바로 사죄한다. 진정어린 참회에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다. 이후 왕자의 모반을 비롯해 책벌과 저주를 감당해야 했지만.
다윗은 그런 악독한 범죄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이 가장 사랑했던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잘못을 덮거나 회피하지 않고, 즉시 솔직하게 인정하며 엎드려 회개, 사죄했기에 하나님의 신임을 회복했던 것이다.
성경에는 다윗 외에도 죄를 자복(自服)하고 회개하여 용서받고 사함을 받은 수많은 인물들이 나온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를 필두로, 십자가에 달려 죽기 직전 구원받은 강도는 대표적 사례다. 인류의 원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대속으로 사면하고 구원한 ‘사랑과 용서’가 기독교의 본령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세상을 미혹하는 일부 정치목사와 교계원로라는 이들은 범법처벌을 ‘종교탄압’이라고 강변하며 회개와 용서를 외면하고 있다.
누구나 죄는 지을 수 있고, 허물없는 인간도 없다. 다만 범죄와 허물을 쌓은 이후의 개과천선 여부다. 죄과를 성찰하는 양심과 인성, 지성, 도덕과 윤리감각 등을 얼마나 발휘하느냐에 죄와 벌의 경중과 인간됨의 척도가 달려있을 것이다. 특히 공직에 나가 국민을 섬길 사람들은 거기에 더해 멸사봉공의 소양이 필요하니, 최소한 ‘뻔뻔한 낯짝’ 소리는 듣지 말아야 한다.
가을이 익어갑니다. 하늘은 높고 푸르고, 숲은 붉고 노란빛으로 물들어 갑니다. 화려한 색채 사이로 나뭇잎이 하나둘 떨어집니다. 흙빛에 황적색을 띤 낙엽을 보니 가을이 짙어가고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가을비에 젖은 낙엽, 세찬 바람에 이리저리 뒹구는 낙엽, 길 한 모퉁이에 모여 속삭이는 낙엽, 발에 짓밟혀 아파하는 낙엽…. 나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되어 동병상련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떨어지는 낙엽을 한참이나 바라다보면, 내 마음에도 한잎 두잎 떨어지는 낙엽을 보게 봅니다. 그렇게 푸르고 당당했던 나뭇잎도 떨어지니 “나도 저렇게 되겠구나”. 어느새 마음이 쓸쓸해지고 서글퍼집니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낙엽 지는 날에는 거닐지 말라”고 했나 봅니다. 가슴에 지는 낙엽을 보며 이별의 슬픔에 눈물을 흘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낙엽이 지는 날’과 같은 상실, 슬픔, 고독의 계절이 찾아옵니다. 그런 때에는 안 떨어지려고 발버둥 치거나, 애쓰기보다는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해야 합니다. 풍성함을 자랑하던 나뭇가지들도 정들었던 나뭇잎을 떠나보냅니다. 초록빛으로 가득했던 친구들을 더는 붙들지 않고 놓아줍니다. 앙상한 빈 가지가 되어 홀로 있게 되더라도 떠나보냅니다. 내려놓음의 미학을 배우게 됩니다. 내려놓을 때 비로소 자유롭게 됩니다. 내일을 기약하게 됩니다.
솔로몬의 말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다.” 그렇습니다. 버릴 때가 있습니다. 버려야 할 때 지키기 위해 붙들고 있다면 어리석은 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한계를 인정하고 내려놓는 자를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십니다. 영원을 사모하게 하십니다.
이 가을에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나의 삶에서 내려놓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자만심, 상처, 원망, 집착, 우울감, 두려움, 걱정…. 지금 십자가 앞에 나의 연약한 낙엽들을 내려놓습니다. 내려놓는 비움의 공간에 하나님은 더 풍성한 봄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미국 조지아주에 건설 중인 현대-LG 배터리 공장 근로자들에 대한 이민세관단속국(ICE)의 모욕적인 폭거는 우리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민간인을 무차별 포박한 대테러 작전 혹은 전쟁같은 상황이었다니. 미국 내에 살면서 그렇잖아도 과도한 단속에 불안해 하던 우리 동포들은 얼마나 큰 수치와 공포감을 느꼈을까.
일제 치하 강제동원으로 극심한 고초를 겪은 민족적 상처 이후로, 한국인이 해외에서, 더구나 최고의 동맹국에서 4백명 가까이 굴욕적으로 강제 연행돼 포로처럼 감금시설에 내동댕이쳐진 일이 있었나 싶다. 엄청난 중범죄자들도 아닐진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들이닥쳐 쇠고랑을 채우고 휴대폰도, 접견도 금지되고 비위생적 시설로 소문난 외딴 감방에 쳐넣은 비인간적 처우에 우리 한인동포들이 내몰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번 사태를 통해 우리는 미국의 이중성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대규모 투자를 강박해놓고, 필수 인력의 합법적 비자 발급은 외면해 왔다. 다급한 기업들을 단기비자 인력 충당이라는 '관행적 편법'으로 내몬 게 미국정부였던 것이다. 한국측이 해마다 통사정을 해도 매몰차게 거절하는 취업비자(H-1B) 만 보아도 얼마나 박대하는지를 보여준다. 매년 추첨하는 8만5천개의 쿼터 중 한국은 1%에 불과하다. 이는 싱가포르와 칠레에도 미치지 못하며, 인도 70%, 중국 10%에 비하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 한다.
트럼프의 집요한 MAGA 압박에 순응한 한국의 투자액은 일본에 버금가는 거액이다. 더구나 ‘혈맹’이라 부르는 세계전략의 핵심 우방이다. 자기들이 도와달라 아쉬운 말을 꺼낼 정도인 맹방에, 돌연 ‘깡패나 다름없는’ 반 동맹적 난동을 부린 저의는 무엇인가. 단순한 단속기관의 한건주의 산물인가, 트럼프의 ‘교활한 거래술수’에서 나온 충동요법의 하나인가. 아니면 미국의 속성 그 자체인가?
이번 사태는 한미동맹의 본질에 대한 재인식과 대미 외교자세 재정립 등 획기적인 전환이 필요함을 역설적으로 웅변해주었다.
트럼프 비위 맞추다 뒷통수 맞아 허둥대는 외교에 머물러선 안된다는 경종이다. 합의를 휴지조각으로 만드는 동키호테 변덕에 장단맞추다 보면, 재미붙인 ‘호구 이지메’ 농간버릇은 끝이 없을 것이다. 냉정하게 챙기며 단호히 선을 그어야 한다. 나무랄 것은 호되게 꾸짖어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도 받아내야 한다.
한국인들에게 미국은 여전히 최고의 우방이다. 6.25 남침으로 곤경에 처했을 때 도와준 은인의 이미지에 기인한다. 하지만, 엄밀히 짚어보면 짝사랑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한국과 인연을 맺은 140여년 동안 미국은 예나 지금이나, ‘한국 사랑’이 아니라, 철저히 자국의 이익을 위해 활용하는 한반도 정책을 펴왔기 때문이다.
간단히 예를 보자. 조선말 1882년 미국이 한국과 역사적 ‘통성명’을 한 얼마 후, 일제 군국주의의 강탈위기에 처했을 때 카스라-태프트 밀약으로 국권상실을 재촉한 게 미국이다. 태평양전쟁 종결 당시는 38선을 그어 분단의 길을 열었다. 패망 일본이 우리 땅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게 만든 것도, 6.25 직전 애치슨 선언으로 북의 남침을 초래한 것도 미국이다.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을 기용하며 처벌을 막고 이승만 독재와 양민학살을 두둔한 사실, 박정희 쿠데타와 전두환의 권력찬탈, 광주학살을 묵인한 것도 미국이었다.
전시작전권을 거머쥐고 통제하는 미국이 이젠 한국민 뜻과는 무관하게 북의 남침 제어보다 중국을 견제하고 대만을 방어하는데 한국군을 끌어들이려 한다. 그러면서 천문학적인 미군 주둔비를 요구하고, 이제는 제조업 조선업을 망라한 기업이전과 무리한 투자를 강요하고 있다. 비단 트럼프 뿐만이 아니라, 변함없는 미국의 ‘혈맹 한국’을 대하는 방식인 것이다.
그런데 전작권 환수 이야기만 나오면 나라가 망할 듯이 호들갑 떠는 장군들이 수두룩하다, 미국의 극우인사들을 떠받들며 이재명 정부를 헐뜯는 자들은 ‘윤 어게인’을 외면했다는 이유로 트럼프를 좌파라 부른다고 한다. 내란사태 와중에 범죄혐의가 드러난 한 ‘원로’목사는 미국 요로에 호소하며 특검출석을 거부한다는 소문도 나돈다. 일제 침탈과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의 미국식 재건과 인재양성을 지원하며 치밀한 그루밍 작업을 벌여 온 친미와 숭미 효과의 단편들이다.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주변 강국들의 영향과 그 역학관계를 외면할 수 없다. 특히 미국과의 강한 유대를 저버려서도, 버릴 수도 없는 현실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미국 그늘에 머물 것인가. ‘인지부조화’ 좌충우돌의 이기적 횡포와 신뢰도 의리도 없는 ‘안면몰수’의 본성을 여지없이 드러낸 친구를 마냥 짝사랑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시야를 넓히고, 보다 담대하며 자주적인 외교행보가 긴요해졌다. 계제에 대등과 호혜를 강단있게 밀고 나가 국익과 국민적 자존을 세우는 명분과 실리의 결단이 필요하다. 더이상 약소국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시대가 아닌 것이다.
K문화, K기술, K국방에, 나아가 K국력과 K민주주의가 세계의 선망을 받는 열강의 반열에 들어섰다면, 그에 맞는 처신과 외교를 강구해야 한다. 양복입고 갓쓰고 짚신을 신은 우스꽝스런 모습에 언제까지 자족할 것인가. 이제 그 낡은 의식적-무의식적 열등과 사대의 옷을 서둘러 벗어던지지 않으면 만년 미숙아, 약소국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한강 작가가 지난 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한국은 복수의 노벨상을 보유한 나라가 됐다. 첫 번째 영예는 4반세기 전인 2000년에 평화상을 받은 김대중 대통령이다.
노벨상과는 거리가 멀었던 한국에 노벨평화상의 영광을 안겨준 김대중 대통령은 목숨까지 노린 독재정권과 평생을 싸워 온 정치인이다. ‘인동초’라는 별칭을 얻은 것처럼 5차례나 감옥살이에 내몰린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파란만장의 정치행로를 걸으며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를 위해 진력한 백절불굴의 인물이다. 넬슨 만델라에 버금가는 인권정치인으로 국제사회에도 널리 알려졌으니, 노벨상 반열에 오른 것을 이상하게 여길 이유는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다른 곳도 아닌 김대중의 모국에서 일어났다. 국가적인 경사로 모두가 기뻐하며 축복해야 할 김대중의 노벨상을 트집잡고, 욕하고, 집요하게 훼방한 세력이 있었으니, 그를 평생 괴롭힌 독재정권의 잔재들이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현직이었는 데도 야당과 수구언론은 집요한 수상 폄훼공작을 벌였다. 상을 돈으로 샀다는 둥, 로비로 받아냈다는 등의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 심지어 노벨위원회에 “상을 주지 마라, 그만한 인물이 아니다. 상을 취소하라”고 요청한 사실도 알려졌다. 속담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했는데, 그들에게는 사촌은 고사하고 ‘웬수’라고나 할만한 ‘적수’가 역사에 기록을 남기게 된 대박사건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노벨위원회는 “우리는 수년동안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김 대통령의 투쟁노력을 추적해 왔다”고 선정이유를 분명히 밝히는 한편, 로비설에 대해서는 “맞다. 한국으로부터 로비가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기이하게도’ 김대중 정부로부터가 아니라 정치적 반대자들로부터 상을 주면 안된다는 로비가 있었다”고 밝혀 한국민의 낯을 뜨겁게 하며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세계인이 인정하는 수상에 축하는 못할 망정 훼방 로비라니, 제 얼굴에 침뱉기와 뭐가 다른가, 더구나 눈곱만큼의 반성도 아쉬운 가해세력이 오히려 방해공작에 목매다는 꼴은 얼마나 뻔뻔하며 평생의 스토커같은 사악한 짓거리인가.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국정원까지 동원해 ‘김대중 노벨상 취소공작’을 벌인 사실이 밝혀져, 비열과 추잡의 끝판왕이라는 지탄을 들었다.
저들의 끈질긴 김대중 노벨상 알레르기는 역시 매국적인 친일수구 DNA와 민족분단을 악용하는 냉전적 사고에서 연유한 열등감의 발로와 생트집이라는 것 외에는 도무지 설명이 안된다.
지난 8월18일로 서거 16주기를 맞은 김대중 전 대통령은 독재극우 후예들의 여전한 발호와 12.3 내란사태를 어떤 심정으로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을까.
노벨 평화상은 노벨위원회가 세계 평화에 이바지한 사람이나 단체에 수여하는 권위있는 상이다.
노벨상 6개 분야 가운데, 유일하게 스웨덴이 아닌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대상자를 선정해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매년 12월10일 시상한다.
문학, 화학, 물리학, 생리의학, 경제학상 등 다른 노벨상이 모두 특정 분야의 학문적 공로와 업적을 근거로 선정해 시상하는 것과 달리, 평화상은 ‘평화 기여’라는 다소 추상적이고 정치적인 업적을 수상자 선정의 기초로 삼는다는 점 또한 노벨상 가운데 유일하다. 다른 분야와 달리 평화상에 대해 종종 논란과 이견이 뒤따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지난 2009년에 취임한지 9개월 밖에 안된 버락 오바마 미국대통령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자 “새 대통령에게 아첨한다”며 당시 미국주재 노르웨이 대사가 비난을 받기도 했다. 노벨평화상 후보 접수 최종 시한은 2월1일 이었는데, 오바마는 1월20일 취임했다. 그렇다면 불과 열흘간의 업적으로 수상자에 선정된 셈이니 고개를 갸우뚱할 만도 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흑인 최초로 대통령이 되었다는 정치적 성공담 외에 ‘평화업적’은 이제 만들어가야 할 취임 초였다. 노벨위원회는 “국제 외교와 사람들 간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그의 특별한 노력”을 선정이유로 밝힌 게 전부였다. 오바마 자신도 퇴임을 몇 달 앞둔 방송 출연에서 수상이유에 대해 “솔직이 나도 아직 모르겠다”고 실토했고, 2020년 펴낸 회고록에서도 자신이 선정됐다는 소식에 “왜 주지(For what)?”라며 놀랐다고 했다.
요즘 국제질서를 멋대로 뒤흔들고 있는 도날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 수상이 소원인 듯 하다. 일부 한국사람 중에도 북한과 대화에 성과를 내 평화상을 받으라는 식의 ‘의타적’인 말도 한다. 역대 노벨평화상 수상자 가운데 오바마처럼 뒷말이 나오는 경우도 많고, 심지어 히틀러나 스탈린, 푸틴, 한국의 전두환 같은 인물이 후보에 추천된 적도 있어 트럼프가 평화상 후보에 추천되거나 설령 상을 받는다 한들 누가 뭐라 하겠는가.
하지만, 그는 상식의 기준에서 한마디로 ‘깜’이 안된다. 지구촌의 보편적 룰과 약소국을 무시하고, 민주주의를 훼손하며 이민자 박해와 인종 차별적 정책을 강제하는가 하면, 가진 자와 힘있는 자 편에서 탐욕과 독선의 리더십으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인물인 것도 분명하다. 그런 말썽꾼에게 ‘평화상’이라는 고상한 훈격을 부여하는 것이 과연 인류사회에 합당하고 정의로운 일 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