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칼럼] 무뇌정권의 치명적 자살골

● 칼럼 2023. 3. 15. 04:39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한마당 칼럼]

 

무뇌정권의 치명적 자살골

불과 일년 전 이야기다. 되돌아보기도 싫은 ‘손가락 절단’ 해프닝의 추억을 떠올린다. 허상과 위선의 맹신, 고집과 방관과 어깃장 등등이 얽혀서 초래한 사고투성이 운행 참사를 겪게 되면서, 허퉁한 미련이 진하게 남아있는 회한의 추억을 되씹어보게 된다.

일행은 듣지 않았다. 사고위험이 크다고, 설명하고 외쳐도 보고, 아무리 두 손 들어 말려도, 허상에 취한 그들에겐 ‘쇠귀에 경 읽기’에 불과했다.

 

엔진에 이상 신호가 뚜렷한데다 타이어도 펑크날 정도로 낡아 불안한데 운전사는 술까지 거나했다. 일행은 ‘괜찮다 운전 잘한다’고 감싸더니 ‘그래도 외제차인데 잘 굴러가지 않겠냐’며 고속도로 질주를 고집했다. 이 차로는 불안하니 다른 운전사가 모는 좋은 차로 가는 게 좋겠다고 거듭 말려보아도 “술 좀 먹으면 어떠냐”고 손사래 치며, ‘외제차’라는 철지난 매력을 내세워 다짜고짜 꿈의 고속도로인 아우토반을 향했다. 그리곤 잘한다는 운전술과 외제차 맹신에 힘입어 겁없이 폭주의 본색을 드러내더니, 아니나 다를까 불안예감 그대로 ‘십리도 못가’ 만신창이 사고투성이가 되었다. 난폭차량 한 대 만의 사고라면 모르되 갈팡질팡 좌충우돌, 연쇄추돌과 역주행에 상대 차선까지 엉망으로 만들어 온통 난장판을 만들었다.

일행은 진작부터 귀가 따갑게 외친 경고를 들을려고도 듣지도 않다가 곤경에 처했다. 장담코 손가락을 자르겠다던 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 뒤에 손을 감췄다. 뻔뻔한 입으로 상처입은 운전자 변명하고 눈치보며 염치없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릴 뿐….

 

목이 터져라 외쳐 불길한 예감을 경고한 사람들은 현실이 된 불행 앞에 울화통이 치밀어 “마이동풍 흘려 듣더니 꼴 좋다!” 고 호통을 쳐보지만, 이미 엎질러진 오물투성이를 이젠 어떻게 쓸어 담아야 하나.

예견된 경고 그대로 마침내 사고를 쳐 난장판이 됐어도, 여전히 주취 운전자도 괜찮고 외제차라 문제없다던 맹종자들은 “너네들이 잘못해서 사고난 것”이라 덤터기 씌우며 주변에 큰 피해를 준것도 자기들과는 상관없다고 우긴다. 손가락은 커녕 손톱도 자르지 않은 손으로 삿대질을 해대는 맹신과 고집 덩어리의 두꺼운 얼굴들, 대를 이어 내로남불의 자기만족을 즐기는 그들이 아직도 30% 안팎은 남아서 우겨대고 있다는 가상 아닌 현실의 이야기다.

 

승객을 호도한 난폭운전 차량의 예화는 그야말로 간단히 윤곽만 스케치한 데생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실제 우리들 눈앞에 펼쳐진 지난 1년의 생화와 동영상을 펼쳐본다면, 참으로 가관이어서 더 이상 견디기 힘들 몰꼴들이 현실이니까.

 

나라 구석구석을 검사들이 꿰차고 앉아 수사권 기소권으로 겁박하며 점령군처럼 위세를 부리는가 하면, 자기 편 범죄는 눈감고 뭉개는 조폭적 검찰왕국이 됐다. 전 정권과 야당 죽이기에 올인하며 여당 조종만 노릴 뿐 실종돼 버린 정치, 비판 언론을 스토커범으로 모는 치졸한 언론정책도 천박하다. 무역적자·물가불안은 심각한데 대책없는 경제 쇠락, 남북간 전쟁위기 조성과 미일 종속을 가속화하는 안보와 외교무능에 속이 탄다. 가진 자들만을 위한 감세와 복지축소·민영화 꼼수, 국립공원 마저 훼손하는 난개발도 설친다. 사회 곳곳에 똬리 튼 수구 적폐들의 발호와 역사의 뒷걸음질이 거세다, 그렇게 민주주의 공든 탑이 무너져 내리는 깊은 탄식소리….

 

민족 자존과 처철한 항쟁의 숨결을 되새기는 삼일절에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란 사람이 피흘려 투쟁한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과 자주독립의 고귀한 가치를 자학적 망언으로 짓밟고 모욕한 것도 생화의 한 컷이다. 일제 군국주의의 전쟁범죄를 불문에 부치며 ‘가치를 공유하는 협력파트너’라고 아양떠는 칭찬을 늘어놓아 일본 극우의 찬사를 들었다. 3.1혁명 후 104년 역사에 처음있는 망동이다. 그런데 거기에 그쳤으면 자유니 미래지향이니 버무린 미사여구에 현혹돼 유야무야 넘어갈 뻔 했다. 하지만 아무런 가치지향도 국정철학도 찾아 볼 수 없는 무뇌(無腦)의 본색은 이내 그 내장을 드러낼 수밖에.

그야말로 날강도에게 찔리고 얻어맞았는데, 미안하다는 반성의 말 한마디 듣기는커녕 “내 상처 내가 싸맬테니, 날 외면하지 마시고 제발 잘 돌봐주세요”하고 통사정하는 비굴하고 치욕적인 이른바 ‘강제징용 제3자 변제 해법’이란 것을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아마도 위태위태한 ‘무뇌 정권’의 최대 최악의 치명타가 될 자살골을 날린 것이 아닐까.

 

한국민에게 일본이 어떤 나라인가. "어느 나라 대통령이냐!, 그런 돈은 굶어 죽어도 안 받는다!"는 양금덕 할머니의 외침 그대로,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이 아닌 이상 어느 한국 사람이 일본에 굽신대고 무릎꿇기를 달가워하는가.

지난 1년간 ‘무뇌의 일탈’은 차곡차곡 수없이 쌓였다. 불의를 참지못하는 한국인들의 인내심은 비등점을 지나치지 않는다. 아무리 선비적인 아량을 지닌 민족이라지만, 끓어오르는 결기의 분출을 5년이나 견딜 것이라고 어느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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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칼럼] 더이상 부흥을 논하지 말라

● 칼럼 2023. 3. 15. 04:35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우리교회 기쁨과 소망]

박용덕 목사/ 소망교회 담임

 

더이상 부흥을 논하지 말라

최근에 미국 캔터키 주 에즈버리 대학 안에서 일어난 부흥으로 인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놀라운 기쁨과 함께 큰 파장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다보니 유명하다는 목사님들도 부흥의 현장을 찾아 유튜브를 통해 얼굴을 알리고 미국 곳곳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부흥의 현장을 직접 보고자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너무나 감사하고 기쁜 일입니다. 또한 이런 부흥이 에즈베리 뿐 아니라 우리가 사는 토론토 곳곳에서도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지금 현재 쿠바에 단기선교를 와서 사역중인 제게는 이런 모습이 많이 낯설게 보입니다. 그것은 에즈베리의 부흥을 부정하거나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사역하는 동안 에즈베리 이상의 수많은 부흥을 날마다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년 전 선교사들의 무덤이라고 말하던 북인도의 파트나에 갔을 때도 이미 그곳에서 엄청나게 역사하시던 주님, 그리고 수없이 많이 몰려오던 흰두교인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곳 쿠바에서도 하룻 밤 집회에 40명 이상이 회심하고 돌아오는 정말 강력한 은혜들을 체험하는 중입니다.

어제는 심지어 현지 성도님들과 같이 단지 2시간30분 동안 가가호호 전도를 나갔었는데 무려 30명의 비기독교인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현장에서 영접기도를 하고 주소와 이름을 등록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제 마음 속에 드는 생각이 이것입니다. 과연 부흥이 그렇게 희귀한 것이었는가? 과연 주님의 임재가 그토록 몇 십년 만에 일어나는 일이던가?

지금 에즈베리에 일어나는 부흥을 과소평가하고 싶지 않고 그래서도 안되겠지만 실제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조금만 더 눈을 열고 돌아보면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무수히 많은 주님의 임재와 부흥들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부흥을 그저 신기한 듯 혹은 특별한 것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가 예배하고 밟는 모든 땅마다 주님의 강력한 임재와 부흥이 일어나는 것을 당연히 생각할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이미 그 부흥의 불길과 그것을 담아 낼 교회들을 이 땅에 허락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캔터키 에즈베리에서 사역 중이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또한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우리 주님께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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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자 칼럼] 3월의 단상

● 칼럼 2023. 3. 15. 04:32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임순숙 칼럼]

임순숙 수필가

 

3월의 단상

연일 이어지는 폭설속에서 모국의 꽃소식은 긴 겨울의 끝을 예고하고 있어 설렌다. 남녘의 동백꽃을 시작으로 산수유, 매화까지 북상하면 지구 반대편 이곳도 따스한 기운이 전해지리라는 기대로 그곳 뉴스를 꼼꼼히 살펴 나간다. 문득 연보라, 연분홍 등 화사한 배낭을 맨 등굣길 어린이들의 사진이 눈길을 끌어 들여다 보니 ‘어린이는 가방무게에 눌리고 학부모는 가방 가격에 허리가 휜다.’ 는 부제가 달려있다. 산뜻한 분위기에 비해 다소 무거운 메시지는, 신학기를 앞둔 일본에서 ‘란도셀’이라는 어린이용 고가 책가방 구매 열풍으로 부모들의 경쟁이 뜨겁다는 소식이었다. 묵직한 가죽소재에다 허리아래까지 내려가는 가방 길이, 필요한 학용품을 장착하면 무게가 무려 10kg에 육박하며, 가격 또한 상상을 초월한다는 전언이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저 출산 영향으로 아이들이 귀해진 요즘, 뭔가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부모들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진정으로 아이를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한번쯤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얼마 전 가족모임에서 작은 며느리의 일성이 내내 가슴에 박혀 수차례나 되새김질을 하고 있다. 올해 열 살, 초등학교 4학년인 아이의 머릿속에서 설계되고 실행된 작은 사건은 감동을 넘어 아이의 미래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아이의 언행을 눈여겨 보게 된다.  

둘째 손녀 리아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속도는 물론 친구와의 소통도 조금 느린 편이라 예의주시한 아이였다. 어느 날, 몇몇 친구들이 소지한 셀룰러 폰을 갖고 싶은 아이는 어미에게 졸랐지만 거금의 폰을 어린아이에게 선뜻 안기는 건 부담이 되었으리라. 아이의 요구를 몇 차례 거부한 어미는 ‘꼭 갖고 싶으면 직접 벌어서 사라’며 지나가는 말로 흘려버렀다.

어미의 강한 부정에 오히려 귀가 번쩍 뜨인 아이는 꿈을 향한 청사진을 그려나가게 된다. 허리까지 차오른 눈을 직접 파내어 자신만의 사업장을 만들고 그 안에서 꿈을 향한 갖가지 아이디어를 하나 둘 펼쳐나갔다. 조그만 탁자 위에 자신이 아끼는 초콜렛과 소지품 등을 진열하여 실전에 들어간 날, 하필 한파까지 겹쳐서 사람들의 움직임이 전무한 상태였다. 강추위 속에서 한동안 자리를 지키던 아이는 손님을 모여들게 할 궁리를 했던 모양이었다. 다음날은 음악을 틀어놓았더니 몇몇 손님이 관심을 보였다며 아이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애초의 목적인 셀룰러 폰에 대한 욕심은 접어두고 손님들을 불러들이는데 초점을 맞춘 아이는 셋째 날엔 직접 피리를 불며 열을 올렸다. 추운 날씨가 걱정된 부모는 연신 그만 철수하기를 종용했지만 아이는 개의치 않고 손님과의 약속시간을 철저히 지킨 후 폐장을 했다. 결국 진열대의 모든 상품은 부모 차지가 되었지만 어려운 과정을 잘 견뎌낸 아이는 부쩍 성장한 면모를 보인다. 간절히 원하는 바가 있어도 억제할 줄 아는 슬기를 터득한 아이, 통장에 거금을 저축해 두고서도 돈이 아까워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간이 작은 아이로 거듭난 리아가 기특하기만 하다.

 ‘귀한 자식일수록 거칠게 키우라’는 옛어른들의 말씀이 꼭 필요한 시대이다. 천편일률적인 ‘란도셀’ 때문에 부모와 아이가 함께 고생하기 보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는 교육환경을 위해 우리 모두 함께 고심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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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칼럼] 무능한 지도자와 불행지수

● 칼럼 2023. 3. 1. 12:39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시사 한겨레 칼럼 한마당]

 

 

현재까지 5만명 가까이 사망자가 나온 튀르키에-시리아 대지진 참사의 여파가 현지 정권들의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23년 독재자 바샤르 알아사드가 지배하는 시리아는 지진 피해가 ‘자유 시리아’ 반군 지역에 집중됐다. 아사드는 엄청난 재난을 호기로 판단한 듯 국경을 막고 국제 구호조치도 방해하며 오히려 공습을 단행했다. 피눈물도 없다는 국제사회 비난이 일자 마지못해 외부의 구호물품 반입을 허용하기는 했지만, 평소 눈엣가시로 여겨 온 반군지역의 지진 피해를 내심 반겼음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반정부군 소탕작전이야 잠시 미룰 수도 있으련만 지진 참사를 기다렸다는 등 공세를 벌인 것은 냉혈한인 그의 잔인한 품성을 드러낸다. 오래 전부터 그 땅에 터잡고 살아 온 주민들에겐 지진 참사로 생사의 기로에 섰는데 정부군 공격까지 닥치니 그야말로 이중의 참상과 생지옥에 맞닥뜨린 셈이다. 그들이 무슨 잘못이 있기에 설상가상의 고통을 겪어야 하나. ‘팔자소관’으로 그 땅에 살게 된 것과 악독한 독재자를 만났다는 것 외에 다른 이유란 없었다.

 

튀르키에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정부는 지진 피해 초기 대처에 늑장을 부렸을 뿐만 아니라 구조작업도 허술해 국민적인 공분을 사고있다. 오는 5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어서 이대로 가다가는 정권을 내주게 될 것이라는 관측까지 나온다. 그래서 에르도안이 선거를 연기할 것이라는 전망도 한다.

국민들의 분노가 더욱 커진 것은 그가 약속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부패와 불법을 방관했기 때문이다. 에르도안은 1999년에 있었던 대지진 피해 당시 완벽한 복구와 재발방지를 내세워 압승하고 2003년 정권을 잡았다. 그는 지진세를 도입해 방진시설을 강화하겠다고 했다. 지금까지 거둔 지진세만 6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세금만 거두고는 여지껏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고, 심지어 불법 건축물들 철거를 면제 해주는 ‘사면세’까지 챙겨 수많은 불법건축물을 존치시켰다. 그로인해 이번 지진 지역에서만 부실건물 7만5천채 이상이 ‘사면’ 돼 대참사를 빚은 원인이 됐다는 것이다.

 

에르도안은 지난 20년 동안 장기 집권하며 야당과 반대자들을 무차별 탄압한 독재자다. 지난 2016년 불발 쿠데타를 전후해 군과 정치 사법 교육 언론 등 구석구석의 반대자 수만명을 색출해 처벌했다. 심지어 미국에 망명해 있는 반정부 인사 귈렌도 송환을 요구하면서 비난하는 등, 강경한 민족주의적 독재정치를 해왔다. 국명을 바꾸고, 이슬람주의 정책을 강화했으며, 군사력을 증강해 그리스 등 주변국들과 마찰도 늘어났다. 나토 회원국임에도 러시아와 군사교류를 확대해 미국과 나토를 곤혹스럽게 했다. 최근에는 쿠르드·반이슬람 시위 등을 빌미로 스웨덴의 나토 가입에 유일하게 제동을 걸어 애를 먹이고 있다. 대지진 구호 중에도 현장소식을 비판적으로 전한 SNS 사용자들을 수사 체포하는 등 무소불위 독재권력을 휘두르는 그가 이번에 진짜 실력과 속내가 드러나면서 정치역정에 최대 위기를 맞은 것이다.

 

이번 대지진 진앙지에서 가까운 튀르키에 하타이주의 인구 4만2천여 명인 에르진 시는 기적적으로 단 한 명의 사망자나 건물 피해가 없었던 것으로 밝혀져 화제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이 도시에 지진 피해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알고보니 ‘기적’이 아니라 ‘필연’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또 한 번 화제가 됐다. 시장 외케시 엘마소을루 씨가 불법 건축물은 절대 허용하지 않는 강골 원칙주의자로 확인된 것이다. 그래서 시내 건물과 시설들은 방진 기준을 제대로 갖춘 설계와 시공으로 튼튼하게 건축돼 규모 7.8의 역대급 지진에도 피해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가까운 친척이 부탁해도 들어주지 않는 정직한 소신과 청렴으로 시정을 해오는 바람에 “당신만 정직하냐”라는 힐난과 비난을 듣기도 하며 사람들과 관계가 나빠지고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고 털어 놓았다.

 

대재앙으로 생사를 넘나든 사람들은 권력에만 취한 독재자의 허언 정치와 정직한 시골 시장의 청렴정치가 가져온 결말에서 지도자의 중요성과 진면목을 새삼 실감했음에 틀림없다.

태어나 살고있는 터전에 닥친 천재지변이야 운명이라고 감내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견제없는 독재자의 오만과 권력 오용이 초래한 피해의 가중은 국민들에게 정말 억울하고 화가 치미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민주사회라고 다른가. 권력을 위임한 지도자의 공복으로서의 자세, 국민적 불행을 예방하고 대처하는 능력의 유무와 수준, 그에따른 여파와 불행지수는 고스란히 국민들 몫이다. 그러니 무능하고 무지한 지도자를 둔 국민들은 불행을 안고 사는 셈이어서 언제든 국가적 재난상황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적극 의지로 선택했든, 속아서 표를 주었든, 아니면 무관심 속에 방관했든, 지도자를 택한 국민 개개인의 판단과 책임에도 귀결되기 때문이다.  ‘눈 떠보니 후진국’이라며 탄식이 쏟아지는 한국 사람들 역시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절감하며 절치부심하는 이유 또한 그러하리라.         

                                                                                   < 2023. 2. 23자 게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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