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교회로부터 ‘거리두기’

● 칼럼 2020. 8. 23. 15:58 Posted by SisaHan

[칼럼] 교회로부터 거리두기

          

세계 50개 초대형교회 중 23개가 한국에 있다는 사실은 한국 교회가 세속도시의 한 성소가 아니라 업소가 된 현실을 씁쓸하게 증명한다.

         

노모에게 교회는 구원이었다.

남편을 잃고 딸 여섯에 아들 하나를 혼자 건사해야 했을 때, 교회가 있었다. 삶은 언제나 춥고 바람 불었지만, 교회에 가면 견딜 만했다. 거기엔 오늘의 위안이 있었고 내일의 믿음이 있었다. 어렵게 본 아들이 학교에서 잇따라 사고를 치자, 시누이의 권유로 개종한 기독교였다. 다니던 점집에서 철마다 굿을 하던 노모는, 정화수를 떠놓고 자식들의 안녕과 무탈을 빌었듯 매일 새벽기도에 나갔다. 또 하나의 기복신앙이었지만, 그 열의는 바지런한 것이어서 훗날 권사가 됐을 정도였다. 교회에서 받았다고 여긴 만큼, 어렵게 모은 재산의 10분의 1을 교회에 십일조로 냈다가 자식들과 한때 소원해진 일도 있었다. 노모가 십일조를 낸 뒤 교회 목사는 에쿠스로 차를 바꿨다. “물질 있는 곳에 마음 있다며 예배시간마다 헌금을 채근하던 목사를 비난하면, “교회 보고 다니지 사람 보고 다니는 게 아니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신천지부터 사랑제일교회까지 코로나19의 진앙지는 공교롭게도 교회였다. 두번의 코로나19 팬데믹이 문제적 두 교회를 중심으로 번져나갔다는 사실은, 대다수 교회엔 억울한 일이겠지만, 한국 교회에 대한 세간의 부정적인 인식을 더 강화시켰다. 종교의 자유가 아닌 종교로부터의 자유를 고민하는 이들이 늘고 있는 까닭이다.

부동산 정책, 홍수 대책, 경제 파탄 등 범죄행위를 숨기고 마치 전광훈이 중국 우한 바이러스(코로나19)를 전파하는 사람으로 매도하는 범죄적 행위를 하고 있다.” “문재인과 그 패거리들은 저희 신도들이 바이러스를 퍼뜨렸다는 흑색선전 중이다. 격리 수용을 핑계로 국민을 체포, 연행하고 있다. 계엄령보다 더 무서운 방역공안 통치다.”

현재 코로나19 확진으로 입원 치료를 받고 있는 전광훈 서울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21일 오전 유튜브 채널 너알아티브이(TV)’와 변호인을 통해 밝힌 성명서의 한 대목들이다. 시민적 상식을 가졌다면, 아니 상식을 떠나 사리분별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내뱉지 못할 말들이다.

전광훈과 이만희로 대표되는 극우기독교세력이 벌인 일은 비단 코로나19의 대유행만이 아니다. 그들은 수많은 자영업자들의 살림살이를 나락으로 빠뜨렸고 수많은 중증환자들을 위험에 처하게 했으며, 학생들의 학창시절을 시들게 했고 일하는 사람들의 여가와 휴식을 망쳤다. 의료비용의 낭비와 국가재정의 손실은 차치하더라도 말이다.

신천지와 같은 이단도 아니고 사랑제일교회와 같은 사이비도 아닌, 노모가 다녔던 교회를 비롯한 대다수 교회는 종교의 순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고난받는 이들 곁에 머무르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교회도 적지 않다.

그러나 물신주의와 배금주의를 운영 원리로 삼은 두 문제적 교회와 한국 교회 일반의 성장제일주의의 간극이 그리 멀지 않은 것도 엄연하다. 세계 50개 초대형교회 중 23개가 한국에 있다는 사실은 한국 교회가 세속도시의 한 성소가 아니라 업소가 된 현실을 씁쓸하게 증명한다. 그곳에 예수는 없다.

물론 한국 교회가 이 꼴이 된 책임을 전광훈과 이만희 같은 자들에게만 물을 순 없다. 정치적 자유를 철저히 금압했던 독재정권은 종교적 자유만은 무한정 허용했고, 한국 교회는 독재자의 왼편에 앉아서 그를 축복한 대가로 세금 안 내고 세습되는 교회를 누렸다. 극우기독교에 일용할 양식을 준 것은어제의 공화당과 민정당이자 지금의 미래통합당이었고, 전광훈의 황당한 말을 받아 그를 태극기부대의 스타로 만들어준 것은 조중동 등 보수언론이었다. 21세기 한국 사회를 여전히 중세시대에 머물게 만든 건 기독교-통합당-수구언론의 삼각동맹이었다.

교회발 코로나 확산의 역설은 있다.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알던 노모도 이젠 자식의 말을 듣고 집에서 예배를 본다. 장삼이사들의 소박한 바람 위에 거대한 바벨탑을 지은 한국 교회로부터 이제 본격적인 거리두기를 해야 할 때다. 예수는 교회 밖에도 있다.

 < 오승훈 한겨레신문 전국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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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당] 트럼프 씨, 이제 그만!

● 칼럼 2020. 8. 14. 14:45 Posted by SisaHan

칼럼 [한마당트럼프 씨, 이제 그만


트럼프 대통령이 큰바위 얼굴로 널리 알려진 미국 사우스 다코타 주의 러시모어 산 거대 얼굴상에 자신의 두상을 추가하는 방안을 검토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원주민들이 신성한 산으로 여겼다는 러시모아산 얼굴상은 미국의 위인들로 추앙받는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에이브러햄 링컨, 시어도어 루스벨트 등 4명의 전직 대통령 얼굴이 새겨져 있다. 거기에 자신의 얼굴을 넣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2018년 사우스 다코타의 크리스티 놈 주지사는 한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처음 만났을 때 "러시모어산에 내 얼굴이 새겨지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놈 지사는 그 말이 농담인 줄 알고 웃고 말았는데, 트럼프는 정말로 진지하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그 뒤 백악관의 한 참모가 주지사실에 전화해서 연방 국립공원인 러시모어 산에 다른 대통령들을 추가하는 절차가 어떻게 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는 뉴욕타임즈 보도를 보면, ‘감히자기 얼굴을 새겨넣고 싶다는 트럼프의 허욕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의 말을 듣고 주지사가 웃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큰바위 얼굴의 반열에 들어가고 싶다는 트럼프의 꿈이 허망한 욕심인 것은 구태여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고 본다.

소설가 나다니엘 호손의 큰바위 얼굴’(Great Stone Face)은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유명한 이야기다. 나중에 큰바위 얼굴로 거듭난 주인공 이름이 어니스트(Honest)’. 정직과 성실 등의 고매한 인품을 표현한다.

러시모어 산에 새겨진 인물들이 정직하고 성실했는지는 살펴봐야 하겠지만, 미국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이들인 것은 사실이다. 그들도 성인(聖人)은 아닌 이상 완벽할 수는 없었겠으나, 미국사회나 세계사에 나쁜 영향 보다는 헌신과 진보의 발자취를 남긴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들은 현직에 있을 때 자기 얼굴을 새겨 남기려 하지도 않았고, 특히 트럼프 처럼 뻔뻔하게 이기적인 언행으로 세상을 뒤흔들었다는 뒷말도 안들린다.

그런데, 우리가 지난 3년여 동안 보고 듣고 느낀 트럼프는 어떤 인물인가. 소설 큰바위 얼굴에 나오는 재력가 개더 골드(Gather Gold)나 사업가 스캐터 코퍼(Scatter Copper), 전쟁 영웅이라는 올드블러드 앤드 썬더(Old Blood And Thunder) 같은 인물들을 뒤섞어 놓은 듯, 위선과 허풍과 자기과시에 빠진 동키호테식 인물이라면 과한 혹평인가. 그의 조카가 오죽하면 사이코라고 책에서 까발렸을까만.

트럼프가 대통령에 오른 이후 미국 제일주의라며 외쳐대고 행한 일들은, 거의 깨뜨리고, 갈라치고, 선동으로 깔아뭉개는 일들로 사람들에게 각인되지 않았나 싶다. 맨 먼저 기후협약을 무력화시켜 지구를 살리자는 인류의 약속과 호소를 외면했다. 이란과의 핵합의를 파기해 중동을 위기에 몰아넣더니 NATOEU와의 전통적 협력을 무시해 반발을 샀고, 핵무기 감축을 약속한 러시아와의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 연장을 회피했다. 세계 무역질서를 깨뜨리고 WTO(세계무역기구) 등 국제기구들도 뒤흔들며 중국과 무역전쟁으로 세계경제에 파장을 불렀다. 최근엔 코로나 창궐 와중에 애꿎은 세계보건기구(WHO)에 화풀이를 하며 탈퇴를 선언했다.

적극적인 북한과의 대화로 우리에게 희망을 부르기는 했으나, ‘시진핑, 아베와 함께 김정은을 좋아한다는 속내를 드러낸 그의 대북협상은 노벨상을 노린 제스추어가 아니었는지, 냉철히 살펴 볼 일이 됐다. 멀쩡한 FTA(자유무역협정) 재협상을 강요하고 천문학적인 방위비를 요구하는 동맹무시의 행동 역시 우리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다.

미국의 일부 백인들은 환호한다지만, 그것은 세계 최강이었던 미국의 쇠락과 민주주의 선진국의 모델적 위상을 포기한 역설과 강변에 다름 아니다. 무엇보다 그가 끼친 나쁜 영향은 전세계로 파급돼 사람들의 도덕과 윤리, 가치관 마저 타락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취임 후 36개월 간 무려 2만 번에 달한다는 거짓말의 달인인 그의 등장과 함께 가짜뉴스가 지구촌의 유행어가 됐다. 인종과 빈부, 지역, 그리고 이민자를 차별하는 발언과 정책들로 인해 미국은 물론 세계 곳곳에서 갈등과 분열과 대립과 헐뜯기의 심화가 부채질 당하는형국이다.

일부 보수적 종교인들이 그의 신앙적 행동을 평가하며 지지를 표하지만, 오인도 지나친 것이다. 가령 기독교라면 사랑과 화평과 긍휼과 용서 등이 그리스도 정신 일진대, 어느 하나 어울리는 덕목을 찾을 수 없다. 어쩌면 그에게 고매한 인품이나 지도자의 덕목 운운하는 것은 우스울 뿐더러, 격에도 맞지않는 사치로 들린다.

11.3 대선이 어찌될지 모르지만, 사람들에게 스트레스와 상처를 주는 트럼프의 기행과 허욕은 단 한번의 임기로도 과하지 않을까. 거의 매일 그의 뉴스를 봐야하는 입장에서는 이제 제발 무대를 떠나 주면 좋을 것 같다.

< 김종천 편집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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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검찰 중립성과 노무현의 후회

● 칼럼 2020. 8. 6. 13:52 Posted by SisaHan

[칼럼] 검찰 중립성과 노무현의 후회

 

검찰의 정치적 독립과 정치적 중립은 다른 문제였다. 검찰 자체가 정치적으로 편향되어 있으면 정치적 독립을 보장해주어도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

자서전 <운명이다>에 나오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이다. 딜레마다. 민주공화국의 헌법 원리에 따라 선출되지 않은 권력은 선출된 권력이 통제해야 한다. 그러나 검찰은 준사법적 기관이라는 이유로 독립성을 보장해줘야 한다. 그런데 독립성을 보장한다고 중립성도 저절로 따라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독립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편향되게 검찰권을 행사할 자유의 공간이 열리는 셈이다. 여기에서 검찰이 응집된 조직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움직이면 통제받지 않는 권력이 되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 뒤로는 한동안 이런 딜레마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검찰이 보수정권과 결탁해 독립성과 중립성을 스스로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에 들어와 다시 검찰개혁이 추진되면서 데자뷔가 펼쳐지고 있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지난 3일 신임 검사 신고식에서 한 독재·전체주의발언은 분명히 정치적 중립성의 원칙을 깬 행위다. 비록 주어를 명시하지 않은 교묘한 문장으로 빠져나갈 틈을 만들기는 했지만, 정치권이 일제히 정부·여당을 겨냥한 발언으로 해석하며 떠들썩한데도 윤 총장이 며칠째 침묵하는 걸 보면 의도를 지닌 발언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야당이 최근 정부·여당에 대한 정치공세용으로 사용하는 단어들이 어색한 문맥 속에 도드라지게 박혀 있는 것을 우연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 단어들에 현실정합성이 있다고 봤다면 이 또한 정치적 편향을 드러낸 것에 다름 아니다.

설령 정치적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평가가 달라지진 않는다. 검찰에 관한 유럽연합의 원칙을 정한 로마헌장을 보면 검사는 독립적이고 중립적어야 하며 그렇게 보이기 위해서도최선을 다해야 한다. 중립성과 배치되는 정치적 행위를 삼가야 한다”(6)는 원칙이 제시돼 있다. 사법적 정의는 실현돼야 할 뿐 아니라 외관상 실현되고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게 중요하다는 오래된 법언대로다. 윤 총장의 행위는 이런 원칙을 벗어났다. 윤 총장이 차기 대권주자 선호도 조사 대상에 계속 오르는 것도 외관상의 중립성을 해친다. 스스로 원한 일은 아니라고 해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누가 검찰의 중립성을 믿을 수 있을까. 그 후과는 검찰에도, 사회 전체에도 치명적이다. 윤 총장은 지난 2월 전국 지검장 회의에서 이런 말을 했다. “검찰의 정치적 중립은 생명과도 같다. 검사가 정치적으로 편향된 것은 부패한 것과 같다.” 이 말에 윤 총장 스스로 답해야 할 때다.

검찰의 중립성을 어떻게 담보할지는 오래된 숙제다. 1997년 국회는 검찰총장은 퇴임 후 2년 동안 공직에 임명되거나 정당의 당원이 될 수 없다는 검찰청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그 몇해 전 김도언 검찰총장이 퇴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당 후보로 총선에 출마해 당선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 조항은 당시 김기수 검찰총장의 헌법소원으로 위헌 결정을 받았다. 헌법재판소는 검찰의 정치적 중립은 검찰총장을 비롯한 모든 검사가 이에 대한 확고한 소신 아래 구체적 사건의 처리에 있어 공정성을 잃지 않음으로써 확보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며 제도적 장치의 의미를 소홀히 다뤘다. 하지만 검찰의 중립성을 한 인간의 선의에 맡긴다는 게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는 이후의 검찰사가 증명해준다.

윤 총장은 신임 검사 신고식에서 법의 지배를 강조했다. 법의 지배의 반대는 사람에 의한 지배다. 검찰이야말로 총장 개인의 뜻에 따라 여당 편이 되기도 하고 야당 편이 되기도 한다. 법의 지배로 중립성을 담보하려면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집중된 검찰권과 총장의 권한 분산, 민주적 통제 강화 등으로 견제와 균형을 제도화해야 한다. 이것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뒤늦게 깨달았던 딜레마의 해법이다.

·경 수사권 조정과 공수처 설치를 밀어붙이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스러웠다. 이러한 제도 개혁을 하지 않고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려 한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 퇴임한 후 나와 동지들이 검찰에 당한 모욕과 박해는 그런 미련한 짓을 한 대가라고 생각한다.”(<운명이다> 중에서)

< 박용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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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민주주의 허울 쓴 독재’? 라는데

 

대한민국 70년 세월의 노멀이야말로 보수, 극우, 독재였다. 김대중-노무현-문재인으로 이어지는 13년은 그 세월에 비하면 뉴노멀이고 비정상이며 가보지 못한 나라. 보수는 13년 동안 색깔론과 독재론으로 딴지걸기를 해왔다. 국민이 선거에서 180석을 준 것은 무난하게 정권을 유지하라는 게 아니라 그에 걸맞은 권한과 책임을 과감하게 행사하라는 것이다.

 

민간독재, 파시즘, 전체주의, 광기. 보수 정치인과 언론이 일제히 나서 현 정권을 몰아붙인다. 정치 중립을 지켜야 할 검찰총장마저 교묘한 언사로 민주주의 허울을 쓴 독재라는 표현을 들이댄다. 독재 치하에서 이처럼 자유로운 권력 비판이 가능한지 알 수 없지만 모두들 독재몰이에 여념이 없다.

이런 모습은 4·15 총선을 몇달 앞둔 올해 초에도 있었다. 지난해 말 더불어민주당이 정의당 등과 함께 선거법과 검찰개혁 법안을 패스트트랙으로 처리한 직후다. 그즈음에도 독재니 사회주의니 동물농장이니 하는 험한 말이 넘쳐났다. 독재의 망령이, 파시즘의 망령이 우리 사회를 떠돈다는데, 정말 그런가.

총선을 앞두고 보수 야당이 그렇게 독재라고 외쳤지만 국민들은 집권 여당에 180석 가까운 의석을 몰아줬다. 적어도 독재라는 비판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는 게 총선에서 판명난 것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중시해온 진보개혁 세력에게 독재 비판은 뼈아프다. 촛불혁명으로 등장한 문재인 정부가 촛불을 든 시민 위에 군림하는 독재라면 존립 근거가 무너지는 일이다. 하지만 보수 일각의 독재 주장은 번지수가 틀렸다.

현재의 미래통합당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3분의 1을 조금 넘는 의석으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개원 협상 과정에서 상임위원장 할당분을 걷어찬 건 최소한의 저지선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상황에선 아예 여당에 모든 책임을 떠넘긴 뒤 독재로 몰아붙이는 게 쉬운 선택이다.

그간 우리 정치사로 보면 지금 정국은 분명 뉴노멀’, 비정상이다. 대한민국 70년 세월의 노멀이야말로 보수, 극우, 독재였다. 김대중-노무현-문재인으로 이어지는 민주정부’ 13년은 그 긴 세월에 비춰보면 뉴노멀이고 비정상이며 가보지 못한 나라인 셈이다. 지난 13년간의 뉴노멀 시대에 보수는 색깔론과 독재론을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들며 딴지걸기를 해왔다.

도대체 무엇이 독재인가. 합법적 독재라는데, 이 정도의 입법 독주를 놓고 파시즘이라는 건 설득력이 없다. 히틀러가 선거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은 뒤 모든 권력을 차지한 걸 갖다대지만 경우가 다르다. 알다시피 히틀러의 파시즘은 인종 말살, 침략주의 등 반휴머니즘으로 점철됐다.

부동산시장이 시시각각으로 출렁이는 상황에서 임대차 3, 부동산 3법을 야당 반대를 뚫고 단독 처리했다고 해서 독재라는 건 너무 나갔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제 충격을 시급히 해소하기 위해 35조원의 3차 추경을 밀어붙인 게 어떻게 독재가 되나. 차라리 미래통합당 윤희숙 의원처럼 나는 임차인이라며 정부 정책의 허점을 매섭게 파고드는 게 좋다.

입법 강행에 따른 정책적 성패에 대해선 정부여당이 책임을 질 일이다. 부동산 정책이 잘못됐다면 내년 봄 보궐선거나 내후년 대선에서 심판받을 수밖에 없다. 정책적 문제들을 독재의 영역으로 몰아넣는 건 이념의 과잉이고, 과거 민주 대 반민주론의 보수 버전일 뿐이다.

적어도 노무현 정부 때와 지금은 다르다. 그때는 총선에서 이겨놓고도 제대로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주저앉았지만, 이번엔 어찌됐든 의도한 정책들을 일관되게 밀고 나가고 있다. 참여정부 시절엔 이념형 정책을 밀어붙이다 실패했지만 지금은 민생형 입법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다.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갈등, 감사원장 소신을 둘러싼 논란은 어찌 보면 민주주의 틀 안에서 벌어지는 불필요한 소모전이다. 독재 정부가 눈 밖에 난 검찰총장과 감사원장을 자리보전 시키면서 불만을 터뜨리는 일은 없다. 검찰총장이 사실상 정권을 상대로 독재 운운하는 것 자체가 지금이 독재와는 거리가 멀다는 반증이다. 대통령 임명직인 검찰총장과 감사원장의 궤도이탈적 행태는 독재의 문제가 아니라 효율적인 국정 운영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갈등 구조는 어떻게든 하루빨리 정리하는 게 좋다.

국민이 선거에서 180석을 준 것은 그냥 무난하게 정권을 유지하라는 게 아니다. 그 의석에 걸맞은 권한과 책임을 과감하게 행사하라는 것이다. 180석을 헌 칼 쓰듯 휘두르는 것도 문제지만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는 건 더 큰 문제다.

4·15 총선 이후 시대적 과제는 16년 만에 다시 들어선 진보개혁세력 우위의 권력구도를 토대로 70년 세월의 잔재를 극복하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부분적 쏠림과 과속은 오랜 세월 동안 한쪽으로 기울었던 균형추를 바로잡기 위한 불가피한 진통인지도 모른다.

< 백기철 한겨레신문 편집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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