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첫 10개월간 주한 미국대사대리로 활동한 조셉 윤이 16일(현지시각)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1년을 맞아 한미의회교류센터(KIPEC)가 주최한 대담에서 발언하고 있다. 워싱턴/김원철 특파원
조셉 윤 전 주한 미국대사대리가 16일(현지시각) 향후 재개될 가능성이 있는 북미 대화와 관련해 “한국의 도움 없이는 미국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며 한국 정부의 역할을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윤석열 전 대통령을 구해줄 것’이라는 한국 내 일부 극우 시위에 대해선 “미쳤다고 생각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이재명 정부 출범 초기 미국 내에 팽배했던 ‘반미·친중’ 우려가 현재는 해소되었다고도 평가했다.
윤 전 대사대리는 이날 미국 워싱턴에서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1년을 맞아 한미의회교류센터(KIPEC)가 주최한 대담에서 “한국은 북미 간 모든 대화의 핵심 요소(pivotal factor)”라고 단언했다. 그는 “한국의 도움 없이는 어떤 대화도, 어떤 성과도 이룰 수 없다”며 “과거 트럼프 1기 시절의 북미 대화 역시 2018년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문재인 정부의 중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짚었다.
그는 현재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과의 접촉을 원하고 있지만,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나설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진단했다. 그는 북한이 대화 테이블에 나오지 않는 이유로 ‘하노이 노딜’의 학습효과와 함께 우크라이나 파병 등을 통한 대러 밀착, 중국과 관계 개선, 사이버 절도 등을 통한 상당한 이익 등을 꼽았다.
그는 “북한에게 가장 시급한 목표는 두가지다. 하나는 제재 해제이고, 두번째는 그들의 핵무기를 인정받고 수용받는 것”이라며 “핵보유국으로 인정받는 것과는 조금 다르겠지만 그들은 최소한 파키스탄과 유사한 수준으로 대우받길 원한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윤 전 대사대리는 북한의 이런 요구가 국제사회는 물론 ‘중국조차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과 미국, 일본은 물론이고 심지어 중국조차도 북한의 핵 보유를 허락하거나 북한이 원하는 조건을 들어주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라며 북한이 원하는 조건과 국제사회의 레드라인 사이에 간극이 크다고 지적했다.
이날 대담에서 윤 전 대사대리는 이재명 대통령 당선 전후 미국 조야의 분위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솔직히 선거 기간과 당선 초기, 미국 내에는 이재명 후보에 대한 많은 추측과 의구심이 있었다”며 “그가 친북·친중 성향이며 반미, 반동맹일 것이라는 우려 섞인 시각이 존재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윤 전 대사대리는 “위성락 의원(당시 외교멘토) 등 외교 경험이 풍부한 인사들이 이 후보의 진의를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며 “현재는 이 대통령에 대한 그런 의구심(suspicion)이 거의 사라졌으며, 한미 동맹은 굳건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주한 미국대사대리 근무 시절 목격한 한국 내 일부 극우 성향 시위대에 대해 직설적인 표현을 사용하며 비판했다. 그는 “대사관 밖이나 관저 뒤편에서 미국 국기를 흔들며 시위하는 사람들을 볼 때 ‘미쳤다(Crazy)’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들은 마치 윤석열 전 대통령이 ‘신으로부터 선택받은(anointed by God)’ 사람인 것처럼 떠받들었다”며 “면전에 대고 말하진 않았지만, 정말 기이한 모습이었다”고 회상했다.
한국계인 윤 대사는 직업 외교관 출신으로,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말레이시아 대사를 지낸 뒤 2016년 10월 국무부 대북특별대표로 임명됐다. 트럼프 1기 행정부 출범 이후에도 역할을 계속하다 2018년 3월에 물러났다. 조 바이든 전임 미국 행정부는 필립 골드버그 전 대사가 지난해 1월 이임하자, 트럼프 행정부 출범에 앞서 그를 주한 미국대사대리로 임명했다. 지난해 10월 케빈 김 전 대사대리가 부임할 때까지 양국 가교 구실을 했다.
“제2 전두환 못막은 실수 되풀이 안돼” KBS 기자 “내란재판땐 ‘초범’ 사정 제한적일 듯”
▲조현용 MBC 앵커가 16일 뉴스데스크 앵커멘트에서 윤석열 전 대통령의 특수공무집행방해 선고에서 초범인 점을 정상참작해 징역 5년에 처한 재판부에 대해 의아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사진=MBC 뉴스데스크 영상 갈무리
법원이 윤석열 전 대통령의 특수공무집행 방해와 직권남용 혐의 대부분을 인정하면서도 ‘초범’이라는 정상을 참작해 구형의 절반인 징역 5년을 선고한 점을 두고 MBC와 JTBC 앵커 등이 잇단 비판을 쏟아냈다. MBC 앵커는 “의아하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들이 많을 것”이라고 했고, JTBC 앵커는 고개가 갸웃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고 비판했다. 초범이 아닐 수 없는 특수한 범행에 초범이라는 점을 정상참작했다는 점이 납득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조현용 MBC 앵커는 지난 16일 ‘뉴스데스크’ <초범이라 징역 5년만?…“사실상 최저형 선고”> 앵커멘트에서 “재판 생중계를 보면서 많은 이들이 의아해했던 부분이 있다”라며 “주요 혐의 대부분이 유죄였는데 윤석열 피고인이 초범이라는 점 등을 고려해, 구형의 절반인 징역 5년을 선고했다는 건데, 초범이 아닌 경우가 있기 어려운 대통령의 특수한 범죄에 대해 이런 참작 사유를 적용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이 나온다”라고 비판했다. MBC는 해당 리포트에서도 “내란을 저지른 자신의 안위를 위해 경호처 직원들을 사병화한 전직 대통령에게 초범인 걸 감안해주는 게 맞느냐는 지적이 나온다”라며 “가장 높은 수준의 처벌을 요구했지만 사실상 최저형이 선고됐다는 비판”이 나온다라고 지적했다.
조현용 앵커는 클로징멘트에서도 “전과 없는 초범, 나이, 성향, 범행동기와 경위, 수단과 결과, 범행 후 정황을 종합해 형을 정했다는데, 저런 체포방해를 또 하는 건 불가능하며 해서도 안 되고, 나이는 충분히 많고, 성향은 포악하고, 범행의 동기와 경위, 수단은 극히 나쁘고 범행 후의 정황을 봐도, 반성이 전혀 없는 피고인”이라며 “의미 있는 판결이었지만 형량 감경사유에 대해선 이해하기 어려운 이들이 많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이영은 MBC 주말앵커도 17일 ‘뉴스데스크’ 클로징멘트에서 윤 전 대통령 선고 형량을 두고 “특검 구형량의 절반에 그친 선고에 아쉬움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라고 지적했고, 이어 김경호 주말앵커도 “뉘우침 없는 내란 우두머리 피고인의 재판에 우리가 끝까지 관심을 놓아선 안 되는 이유다. 제대로 단죄하지 못해 제2의 전두환을 막지 못한 역사의 실수를 되풀이해선 안 되지 않느냐”라고 반문했다.
오대영 JTBC 앵커도 16일 ‘뉴스룸’ <“초범인 점 등 고려” 양형 이유> 앵커멘트에서 윤 전 대통령 징역 5년형을 두고 “특검 구형의 절반인 5년에 그쳤다”라며 “체포 방해를 비롯해 윤 전 대통령 혐의는 사실상 재범이 불가능한 것들인데도 초범인 걸 참작했다고 했다”라고 지적했다. 오 앵커는 ‘앵커 한마디’ <재범이 될 수 없는 초범>에서도 “일반적으로 형을 깎아줄 때 말하는 ‘초범’을 그의 형량에 참작했다는 대목에서는 고개가 갸웃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라며 “계엄을 선포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는 현직 대통령이고, 그의 내란은 재범이 불가능하다. 그는 단 한 번의 단죄로 책임을 물어야 할 가장 무거운 범죄 피고인”이라고 성토했다.
▲오대영 JTBC 앵커가 16일 앵커 한마디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해 초범이라 정상을 참작했다는 재판부에 대해 고개가 갸웃했다는 목소리가 나왔다고 지적하고 있다. 사진=JTBC 영상 갈무리
장훈경 SBS 기자는 16일 ‘8뉴스’ 스튜디오에 출연해 “특검이 구형한 징역 10년의 절반인 5년을 선고한 건 허위 공보지시 혐의 등 일부 무죄 판단과 함께 윤 전 대통령이 전과가 없다는 점 등 법원에서 판단하는 양형 요소들이 고려된 결과로 보인다”라고 분석했다. 장 기자는 특검 관계자가 SBS와의 통화에서 “징역 7년형을 기대했는데 다소 미흡한 부분은 있다”라면서도 “서부지법 폭동 사태도 최대 징역 5년이 선고돼 이번 선고도 중형 선고로 볼 수도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전했다. 다만 내란우두머리 재판 등 향후 받을 나머지 재판에서 윤 전 대통령이 중형이 선고되면 형량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김태희 MBN 기자는 16일 ‘뉴스7’ 스튜디오에 출연해 “저희가 취재해보니 10년을 구형한 특검도 징역 7년을 예상했는데 아쉽다고 밝혔다”라면서도 “사실 다음 달 내란 ‘본류 재판’에서 형이 더 무거워질 가능성이 큰 만큼, 오늘 선고는 형량 자체보다 법원이 주요 쟁점을 어떻게 판단했는지가 더 중요하다”라고 평가했다.
▲이윤희 KBS 주말앵커가 17일 뉴스9 오프닝멘트에서 윤석열 전 대통령의 징역 5년 판단이 향후 이어질 모든 재판의 출발점이자 기준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보고 있다.사진=KBS 뉴스9 영상 갈무리
이윤희 KBS 주말앵커는 17일 ‘뉴스9’ 오프닝멘트에서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징역 5년, 어제(16일) 나온 1심 선고는 윤 전 대통령이 직면한 8개 재판 중 첫번째 결론일 뿐”이라면서도 “법원이 처음 내린 이 판단은, 향후 이어질 모든 재판의 출발점이자 기준점이 될 걸로 보인다”라고 해석했다. KBS는 톱뉴스 <‘징역 5년 선고…사형 구형 판결 영향은?>에서 “법원은 형을 선고할 때 피고인의 나이나 성품 외에도 ‘범죄 전력’을 고려하는데, 확정된 전과가 없는 윤 전 대통령에게도 같은 기준이 적용된 것”이라고 봤다.
이 방송은 특히 사형과 무기형 밖에 없는 윤 전 대통령의 내란 우두머리 사건 형량을 두고 “만약 유죄가 선고되더라도 재판부가 재량으로 형을 감경할 수 있어 유기징역 선고도 이론상 가능하다”라면서도 “다만 중대성이 엄중하고 재범이 사실상 불가능한 내란 우두머리 혐의 특성상 ‘초범’이란 사정이 양형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전망”이라고 내다봤다.
1월 18일, 오늘은 문익환 목사가 세상을 떠난 지 32년이 되는 날이다. 시간은 그를 역사 속 인물로 밀어 넣었지만, 그의 이름은 여전히 현재형으로 우리 앞에 서 있다. 민주주의가 위태로울 때마다, 분단이 일상처럼 굳어질 때마다, 종교가 자기 안전과 체제 순응으로 기울 때마다 우리는 다시 문익환을 떠올린다. 그는 이미 끝난 인물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문익환의 부재는 단순한 상실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그의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의 호 ‘늦봄’은 계절의 비유를 넘어선 삶의 선언이었다. 늦게 오는 봄, 그러나 쉽게 지지 않는 봄. 그는 빠른 승리를 믿지 않았고, 단기적 성과에 기대지 않았다. 역사는 더디게 움직이지만 결국 옳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믿음, 그 믿음을 그는 신앙이라 불렀다. 그러나 그 신앙은 개인의 위안이나 사후 구원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것은 이 땅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였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겠다는 선택이었다.
문익환에게 성서는 하늘의 책이 아니었다. 성서는 땅의 책이었고, 사람의 역사였다. 출애굽은 고대 신화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반복되는 해방의 이야기였으며, 예언자들의 분노는 오늘의 권력 앞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언어였다. 그는 성서를 연구하는 학자였지만, 성서를 해석하는 데 멈추지 않았다. 성서가 요구하는 삶의 자리에 자신을 내놓았다. 그래서 그의 설교에는 늘 구체적인 현실이 등장했다. 가난, 분단, 독재, 고문, 침묵의 공모. 그는 신앙이 현실을 비켜가는 순간 거짓이 된다고 보았다.
그가 남긴 가장 불편한 말 가운데 하나는 “신앙은 세상을 바꾸지 못하면 거짓이다”라는 선언이다. 이 말은 종교를 위로와 안정의 장치로 소비해 온 한국 사회에 지금도 날카롭게 꽂힌다. 그는 기도를 부정하지 않았지만, 기도가 행동을 대신할 수는 없다고 믿었다. 신앙은 현실을 견디는 도구가 아니라, 현실을 바꾸는 힘이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말했고, 걸었고, 감옥에 갔다.
1989년 3월 25일부터 4월 3일까지 방북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문익환 목사는 김 주석을 만나서 박용수의 '겨레말사전'을 선물했다. 사단법인 통일의 집
그의 삶에서 감옥은 예외가 아니라 일상이었다. 유신 독재와 군사정권 아래 그는 반복해서 연행되고 수감되었다. 그러나 그는 감옥을 피해자의 자리로만 이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감옥을 민주주의의 교실로 만들었다. 억압의 구조를 몸으로 겪으며 그는 더욱 분명해졌다. 민주주의는 제도만으로 유지되지 않으며, 헌법 조항만으로 살아남지 않는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달았다. 민주주의는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감수성이며, 침묵이 안전하다고 느낄 때 말하는 용기이고, 다수가 옳지 않을 때 기꺼이 소수가 되는 결단이다.
그의 민주주의는 온건하지 않았다. 동시에 폭력적이지도 않았다. 그는 비폭력을 말했지만, 그것은 무력함이나 체념이 아니었다. 불의 앞에서 중립을 가장한 침묵이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음을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권력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언제나 권력에 의해 밀려난 사람들의 언어를 선택했다. 그 선택은 편안하지 않았지만, 그는 불편을 기꺼이 감수했다.
1989년의 방북은 그의 삶에서 가장 큰 논쟁을 불러온 사건이었다. 정부의 허가 없이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만난 그의 선택은 곧바로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이름으로 처벌되었다. 사회는 그를 둘로 나누어 평가했다. 어떤 이는 용기라 불렀고, 어떤 이는 무모함이라 불렀다. 그러나 문익환 자신에게 그 선택은 계산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분단이라는 구조적 폭력을 더 이상 관념으로만 다룰 수 없다는 절박함의 표현이었다.
검열로 일부 내용이 검게 가려진 2차 투옥 시기의 편지(1979. 11. 16.). 편지를 양껏 부칠 수 없어 봉함엽서 한 장에 원고지 28장 분량을 빼곡히 적어 넣었다. 사진=늦봄 문익환 목사 기념사업회
그에게 통일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었다. 통일은 사람의 문제였다.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만나지 못하게 막는 체제, 왕래해야 할 삶을 가로막는 분단은 그 자체로 폭력이었다. 그는 법을 어겼을지 모르지만,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더 큰 윤리에 충실했다. 그의 방북은 체제 승인도, 이념 동조도 아니었다. 그것은 분단의 금기를 몸으로 건너는 신앙적 실천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묻는다. 법은 누구를 보호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떤 법에 복종해야 하는가.
문익환은 시인이기도 했다. 그의 시는 화려하지 않았지만 깊었다. 그는 언어를 장식하지 않았고, 언어로 숨지 않았다. 그의 시에는 분노와 연민이 함께 있었고, 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배어 있었다. 그는 절망 속에서도 노래했고, 감옥 안에서도 웃었다. 그 웃음은 체념이 아니라 저항이었고, 그 노래는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 관통이었다. 시는 그에게 휴식이 아니라 다시 싸우기 위한 호흡이었다.
1993년 출옥 후 그 해 5월 김의기 열사 13주기 기념 강연회를 마치고 서강대학교 교정에서. 박철 사진
문익환의 영성은 그래서 특별하다. 그것은 개인적 내면에 머무는 영성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으로 확장되는 영성이었다. 그는 신앙과 정치, 기도와 행동을 분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들을 하나의 삶으로 엮어냈다. 오늘날 종교가 자주 권력과 타협하고, 중립을 가장한 침묵으로 자신을 보호하려 할 때, 그의 삶은 더욱 또렷한 대비를 이룬다.
1985년 봄, 나는 문익환 목사님을 민통련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김의기 열사가 나의 처남이라는 사실을 아시고,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보내셨다. 김의기의 삶과 죽음을 단순히 가족의 아픔으로만 여기지 않고, 민중과 민족의 고통으로 인식해 주셨다. 그 마음은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민족 전체의 고통과 정의의 자리로 자연스럽게 확장되었다. 그의 연대와 애정은 단순한 동정이나 위로가 아니라, 사랑과 정의를 행동으로 구현하는 길이었다. 이 연대는 내게 신앙이 결코 개인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와 역사 속에서 증명되어야 함을 가르쳐 주었다.
32년 전 문익환 목사가 세상을 떠나신 때, 눈이 많이 내렸다.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길은 유난히 고요했고, 사람들은 말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이 땅이 한 사람의 죽음을 함께 애도하는 듯했다. 영정 앞에서 나는 삼배를 올렸다. 사진 속 그는 여전히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절을 하며 어떤 기도를 드렸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한 개인의 죽음이라기보다 한 시대가 떠났다는 감각이 더 또렷했다. 장례식장을 나설 때도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 그날 이후, 눈이 오는 날이면 나는 늘 문익환 목사를 떠올린다. 눈 속에서도 봄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을.
1987년 7월 9일, 연세대학교에서 치른 이한열 열사 장례식. 연단 위에 선 문익환 목사는 '조사' 대신 26명의 열사 이름을 부르며 절규한다.
문익환 목사 32주기를 맞은 오늘의 한국 사회는 여전히 그가 던진 질문 앞에 서 있다. 민주주의는 제도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사회 곳곳에서는 배제와 혐오, 침묵의 공모가 반복되고 있다. 분단은 더 이상 긴장으로조차 인식되지 않을 만큼 일상화되었고, 통일은 말하기 조심스러운 주제가 되었다. 종교는 도덕적 권위를 말하지만, 정작 가장 약한 이들의 곁에서는 자주 침묵한다.
이런 시대에 문익환이 살아 있다면 그는 아마 이렇게 물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누구의 편에 서 있는가. 편안함을 위해 외면하고 있는 고통은 무엇인가. 신앙과 양심을 분리한 채 살아가는 것을 우리는 언제부터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는가. 그의 질문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지만, 바로 그 불편함 속에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
그를 기린다는 것은 과거를 추억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질문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묻는 일이며, 그의 용기를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실천해보는 일이다. 거창한 결단이 아니라, 불의 앞에서 한 발짝 물러서지 않는 태도, 분단을 숙명처럼 받아들이지 않는 상상력, 신앙과 양심을 삶의 가장 낮은 자리까지 끌어내리는 선택이다.
1983년 문익환 목사가 김대중 선생께 보낸 편지. 사진=늦봄 문익환 아카이브
문익환 목사는 떠났지만, 늦봄은 끝나지 않았다. 늦게 오는 봄은 늘 더 간절하고 더 깊다. 그의 삶은 완결된 답이 아니라, 우리에게 남겨진 미완의 과제다. 우리가 아직 그가 꿈꾼 세계에 도달하지 못했기에, 우리는 여전히 그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가 남긴 질문에 답하려는 순간마다, 봄은 다시 시작된다.
늦봄은 지지 않는다. 지금도 이 땅 어딘가에서,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문익환의 봄은 계속 오고 있다.
대한민국 육군은 누리집(인터넷 홈페이지) 연혁의 첫머리에 “해방 후 미 군정하 1946년 1월 15일 남조선국방경비대가 창설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국방경비대는 육군으로 개칭되어 국군에 편입되었다”고 밝혀 놓았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국방경비대’를 표제어로 올려 “1946년 1월 창설한 우리나라의 군대. 오늘날의 국군의 모체가 되었다”는 설명을 달았다. 서울 노원구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있는 육군박물관 앞과 종합경기장 입구에는 각각 ‘육군의 모체 국방경비대 창설지’ 표석과 ‘국군의 모체 국방경비대 1연대 창설기념비’가 서 있다.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앞에 세워진 국방경비대 창설지 표석. (철기이범석장군기념사업회)
이에 따르면 이틀 전 15일이 육군, 혹은 국군의 모체의 탄생 80주년 기념일이다. 그러나 군 당국은 이렇다 할 행사를 치르지 않았다. 국방부 산하 국방홍보원이 발행하는 국방일보가 남조선국방경비대와 함께 출범한 제1연대의 후신 육군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비호여단의 창설 80년 역사를 1월13일 소개한 것이 고작이었다.
국방경비대가 육군(국군)의 모체라면 그 창설일은 창군일이나 다름없을 만큼 중요할 텐데 왜 군은 이날을 기념하지 않는 것일까. 국방경비대는 과연 어떤 조직이기에 국군의 모체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
1946년 1월 15일 일본군 특별지원병훈련소가 있던 지금의 육군사관학교 자리에서 남조선국방경비대 제1연대 창설식이 열리고 있다.
미 군정 들어서자마자 광복군 등 모든 군사단체 해산 명령
1945년 8월 15일에 맞은 우리 민족의 해방은 곧바로 우리나라의 독립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한반도 이남에 진주한 미 군정은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는 물론 중국 충칭(重慶)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마저 인정하지 않았다.
임시정부의 광복군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개인 자격으로 귀환해야 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광복군 말고도 일제 징병 피해자들이 결성한 조선국군준비대, 학병동맹, 육해공군출신동지회, 건국치안대 등 크고 작은 군사단체가 난립해 있었다.
미 군정은 11월 13일 군정법령 제28호를 발표해 해방병단(海防兵團)을 제외한 이들 단체의 활동을 금지하고 국방사령부를 설치했다. 국방사령부 안에는 경비대 창설을 준비할 군무국과 경찰 업무를 관장하는 경무국을 두었다. 국방사령부는 1946년 국방부로 개명했다.
국군 창설 로드맵 없이 갈팡질팡했던 미국
남조선국방경비대는 창설 단계에서부터 갈팡질팡했다. 미국의 한반도 전략이나 군정의 청사진이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군정청 요원들은 일본에 대한 민족 감정이나 항일과 친일 사이의 갈등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군대 창설을 위한 로드맵을 마련하지도 않았다.
미 군정의 무지함과 안이함은 온갖 문제를 낳았다. 군정은 군대 창설에 앞서 한미 간 언어 소통을 위해 12월 5일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감리교신학교 자리에 군사영어학교를 설립했다. 군사영어학교에 광복군과 일본군·민주군 출신을 안배해 입교시키겠다는 계획부터 무리였다. 이에 반발한 광복군이 입교를 거부하다 보니 친일 장교들이 주류가 됐고, 미군이 이들을 중용하는 바람에 건군기의 국군이 국민 신뢰와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60명의 첫 입교생 가운데 21명이 40여일 간 교육을 받은 뒤 이듬해 1월 15일 창설된 남조선국방경비대의 장교로 부임했다.
군정법령에 따라 창설되고 미군의 통제를 받다 보니 갈등도 적지 않았다. 일부 임시정부 요인은 미군의 지휘를 받는 경비대를 ‘미군의 용병’이라고 폄훼하기도 했다. 실제로 1946년 8월까지는 초대 마셜에 이어 2대 러셀 베로스 대령까지 미군이 총사령관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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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진하고 있는 남조선국방경비대 대원들
일본군 출신 득실댔던 남조선국방경비대
군사영어학교는 1946년 4월 30일 폐교될 때까지 109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 가운데 78명이 별을 달았고 참모총장 13명, 합참의장 7명이 나왔다. 미처 졸업하지 못한 재학생 60명은 육사 전신인 조선경비대 사관학교로 편입돼 임관했다.
남조선국방경비대는 일본군 특별지원병훈련소가 있던 지금의 육사 자리에서 첫걸음을 내디뎠다. 초대 사령관과 부사령관에는 존 마셜 중령과 광복군 출신 송호성이 각각 임명됐고 만주군 출신 원용덕이 사령관 보좌관을 맡았다.
그러나 부대는 일본군 출신 채병덕 중대장이 이끄는 제1연대 제1대대 A중대뿐이었다. 그나마 창설 이틀 뒤에야 187명으로 편성을 마쳤다. 뒤이어 본부중대(중대장 장석윤)와 B중대(중대장 정일권)가 출범하고 3개 중대를 지휘할 1대대장에 A중대장이던 채병덕이 임명됐다.
남조선국방경비대 대원들이 총검술 훈련을 하고 있다.
소련 항의 받고 ‘국방’ 뺀 경비대로 개칭
남조선국방경비대는 1946년 6월 15일 조선경비대로 이름을 바꿨다.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 대표가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군사조직을 창설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항의했기 때문이었다. 해방병단도 조선해안경비대로 개칭했다.
국방부는 통위부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미 군정은 군정법령 86호를 공표해 국내경비부로 개칭했으나 한국 측이 반발해 재조정한 것이다. 통위부는 대한제국 당시 우영(右營)·후영(後營)·해방영(海防營)을 통합한 통위영(統衛營)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러나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도 1945년 10월 12일 모든 무장조직 해산을 명령한 뒤 소련군 출신 조선인을 중심으로 보안대를 조직했다. 이듬해 2월과 6월 각각 인민군 제2군관학교와 제1군관학교 전신인 평양학교와 중앙보안간부학교를 세운 데 이어 그해 8월 15일 보안대를 인민집단군총사령부로 개칭했다. 북한 역시 국방이란 단어만 쓰지 않았을 뿐 사실상의 군사 조직을 군정 초기부터 준비한 것이다.
한국 정부가 군 지휘권 넘겨받은 것은 1948년 9월 1일
조선경비대가 3대대로 구성된 제1연대 편성을 완료한 것은 1946년 9월 18일이다. 뒤이어 2연대(대전), 3연대(이리·1995년 익산에 통합), 4연대(광주), 5연대(부산), 7연대(청주), 8연대(춘천)가 각 도에 창설됐다. 9연대는 제주가 1946년 8월 도로 승격된 뒤 그해 11월 합류했다.
1947년 12월 1일에는 1·7·8연대를 주축으로 38선 전역을 관할하는 제1여단이 서울에 창설됐다. 뒤이어 2·3여단도 각각 대전과 부산에서 깃발을 올렸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이전까지 5개 여단 15개 연대 규모로 늘어났고 9월 1일 지휘권이 미 군정청에서 한국 정부로 넘어왔다.
9월 5일 조선경비대는 육군으로, 조선해안경비대는 해군으로 이름을 바꿔 국방군(국군)이 정식으로 출범했다. 1949년 4월 15일에는 해군 안에 해병대가 신설됐다. 1948년 5월 5일 창설된 조선경비대 항공부대는 육군에 편입됐다가 1949년 10월 1일 독립함으로써 육·해·공 3군 체제의 틀을 갖췄다.
이범석 초대 국방장관 훈령 1호는 경비대 편입
초대 국방부 장관에 취임한 광복군 출신의 이범석 국방부 장관은 정부 수립 이튿날인 8월 16일 국방부 훈령 1호를 발령해 “오늘부터 육·해군(경비대를 뜻함) 각급 장병은 대한민국의 국방군으로 편성되는 명예를 획득하게 됐다”고 선언했다. 국방군(국군)이 경비대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편입했다는 뜻이다.
이범석 초대 국방부 장관
1995년 국방군사연구소가 펴낸 ‘국방정책변천사’도 “정부 수립 후 조선경비대와 해안경비대가 국군으로 편입되어 각각 육군과 해군으로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육군 누리집 설명과 동일하다.
그러나 편입한 주체는 모호하다. 그러면 국군과 육군의 뿌리는 과연 어디인가. 국방경비대 시절 한국 측 인사들은 대한제국 군대에 기원을 두고자 했다. 미 군정이 국방부를 국내경비부로 바꾸려 할 때 통위부를 제안했고, 경비대 초기의 계급이나 구령 등도 대한제국 군대의 것을 그대로 썼다.
그러나 일제의 강요를 받은 순종의 황명으로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고 대한제국 마저 1910년 한일 강제병합으로 사라지면서 그 명맥도 끊겼기 때문에 대한제국 군대가 국군의 뿌리가 될 수는 없다.
대한민국 헌법은 전문에서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못박고 있다. 대한민국 국군도 임시정부의 군대인 광복군을 계승하는 것이 마땅하다. 광복군은 1940년 임시정부가 있던 충칭에서 창설됐고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독립군과 의병에 맥이 닿는다.
중국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창설식을 개최한 뒤 한국과 중국 관계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국방부는 산하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2018년)과 『근현대 한국군의 역사』(2019년)에서 남조선국방경비대를 국군의 모체로 봤던 기존 입장을 수정해 독립군과 광복군을 국군의 뿌리로 인정했다. 육사의 홍범도 흉상 철거 논란이 일던 2023년에도 국방부는 대변인 브리핑을 통해 이 같은 입장을 재확인했다.
2018년 3월 1일 육군사관학교에서 독립전쟁 영웅 5인 흉상 제막식이 열리고 있다. 왼쪽부터 홍범도·지청천·이회영·이범석·김좌진. 2018. 3. 1 연합
해군 ‘창군의 아버지’는 독립운동가 손원일 제독
공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육·해군 비행대 편성을 기획하며 독립군 비행학교 설립을 추진한 1919년 11월 5일을 누리집 연혁의 맨 윗줄에 올려놓았다. 2020년 7월 14일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윌로스 한인비행학교 설립 100주년을 맞아 원인철 공군참모총장 주재로 서울 강서구 공항동 국립항공박물관 앞에서 기념 조형물 제막식을 열기도 했다.
1920년에 촬영한 윌로스 한인비행학교 교관과 생도들의 모습. 사진 위에 ‘미국 가주(加州·캘리포니아주) 한인비행대, 로백린 장군 지휘 하에'라고 적어놓았다.
해군은 독립운동가 손원일을 ‘창군의 아버지’로 내세우며 그가 동지들을 규합해 1945년 11월 11일 조직한 해방병단을 모체로 삼고 있다. 강동길 해군참모총장은 누리집 인사말에서 “해군은 광복 직후 육·해·공군 중 가장 먼저 창설됐다”고 설명해놓았다. 육·해·공군의 누리집만 보면 국군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육군이 가장 뒤늦게 출발한 셈이 된다.
육군, 해군, 공군의 누리집. 창군 과정에 관한 설명이 각기 다르다.
부승찬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14명은 국군조직법 제1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군, 한국광복군의 역사를 계승하고 국민의 군대로서”라는 문구를 추가하자는 개정안을 2024년 10월 14일 발의했다.
법 개정 이전에라도 육군은 누리집을 비롯한 각종 자료에 남조선국방경비대가 모체가 아니라 독립군과 광복군이 뿌리라는 사실을 밝혀놓아야 한다. 국방부도 국군 출범 이전의 역사를 소개하고 광복군 창설을 기념하는 일에 적극 나서야 한다. 육사에 놓인 국방경비대 표석과 기념비에도 ‘국군(육군)의 모체’란 단어를 빼는 것이 바람직하다. < 이희용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