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갤럽 5월 ~10월 여론조사 분석]


긍정평가 5월 63%에서 9월 38%로 급락
진보 29%P ·중도 27%P ·보수 21%P 빠져
1차 보수→ 2차 중도→ 3차 진보 순 하락
보수결집·정책불만·진영 갈등 등 원인 복합적
정책 성과는 인정해도 정치적 판단에 실망도
'정상화·합리화·상식'의 초심으로 신뢰 얻어야
대통령과 내각, 민주당 지도부 제 역할 해야

 

이재명 대통령의 국정운영 긍정 평가(지지율)가 지난 5월 63%에서 9월 38%로 25% 포인트 하락했다. 10월 첫 조사(2주차)에서도 37%, 3주차 조사에서는 39%로 2% 포인트 올랐지만 여전히 30%대에 머물고 있다.

 

지지율 하락 원인과 해법을 찾기 위해 한국갤럽(이하 갤럽)의 5~9월 월간 통합자료를 분석하고 10월 두차례 여론조사를 살펴봤다. 원인을 알아야 해법도 찾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 기간 동안 여론조사 이념성향 표본 구성비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이념 성향을 가리지 않고 악화됐다. 진보층의 긍정 평가는 29%포인트, 중도층은 27%포인트, 보수층은 21%포인트 하락했다. 40대와 50대 등 핵심 지지 연령층도 예외가 아니었다. 보수층의 결집이나 진보층의 여론조사 불참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변화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 지지율(긍정 평가) 하락은 한 번의 단일 사건으로 발생하지 않았다. 6·3 지방선거 직후 선거관리 논란과 보수층 결집이 초기 하락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후 중도층의 이탈과 핵심 지지층의 긍정 평가 약화가 순차적으로 이어졌다. 부동산과 경제, 인사 등 국정운영 전반의 불만이 누적된 것으로 분석된다.

 

이재명 대통령이 16일 부산시청에서 열린 부마민주항쟁  47주년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이날 부마민주화 항쟁과 광주민주화 운동을 헌법 전문에 담아야 한다며 국회에 헌법개정을 위한 의견수렴과 토론을 촉구했다.  2026.10.16 연합   

 

특히 8·17 전당대회를 둘러싼 진영 내 갈등이 겹쳤다. 6월 말부터 유시민 작가가 여러 차례 대통령의 정치적 판단을 비판하고 경고한 것은 겉으로 보면 지지율 하락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지만 핵심 지지층 내부에 존재하던 의문과 불만이 공개적으로 드러난 시점으로 이해 할 수 있다.

 

9월 18일 이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통해 국민의 실망과 우려에 답하고 통합의 메시지를 내놓았다. 그러나 이후에도 인사와 검찰개혁, 여권 내부 갈등을 둘러싼 논쟁은 이어지고 있다. 10월 갤럽 2주차 조사에서 부정평가는 다소 낮아졌지만 긍정 평가의 뚜렷한 반등은 나타나지 않았다. 가장 최근 조사인 3주차 조사 결과는 반등의 조짐이 조금은 보인다. 비록 전주에 비해 2% 포인트 지지율이 상승했지만 표본의 이념성향 구성비를 보면 보수성향 표본이 진보성향 표본보다 6.6% 포인트 더 많았다. 이는 표본이 고르게 표집됐다면 오차범위 내이지만 지지율 상승 여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국정운영의 모든 분야가 똑같이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외교와 복지 분야에서는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평가가 유지되고 있다. 이는 대통령의 국정 현안 대응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정치적 판단에는 실망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시사한다. 개별 정책의 성과와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신뢰가 반드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대통령 지지율을 끌어내린 것은 무엇이며, 회복의 길은 어디에 있을까. 여론조사에서 직접 확인되는 불만은 부동산과 인사, 경제와 안보 등 다양하다. 그러나 서로 다른 불만이 장기간 누적되는 과정에서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식, 검찰 개혁 등 정치적인 색채가 강한 개혁과제에 대한 지지층의 신뢰가 약해진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해법 역시 일회성 인사나 기자회견등으로 여론을 단기에 반등시키기는 현재로서는 어렵다. 정책의 일관성을 회복하고 정치적 갈등을 조정하며 대통령과 참모, 내각과 여당이 제 역할을 하는 국정운영 체계를 갖춰야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질 것으로 판단된다.

 

연령별 대통령 지지율 변화도 컸다. 5월부터 9월까지 40대의 긍정평가는 75%에서 49%, 50대는 77%에서 47%로 떨어졌다. 각각 26%포인트와 30%포인트 하락했다.

 

18~29세는 50%에서 29%, 30대는 53%에서 32%, 60대는 61%에서 35%, 70세 이상은 54%에서 33%로 낮아졌다. 10월 첫 조사에서는 50대가 긍정평가 55%로 반등했지만 40대는 44%, 30대는 30%, 18~29세는 24%에 그쳤다. 그러나 희망적인 점은 3주차 조사에서는 40대 긍정 평가가 53%로 과반이었다. 반면 50대는 45%였다. 이는 표본 표집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현상으로 여전히 40대와 50대는 이재명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높은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연령층이 같은 이유로 대통령에게 실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청년층은 주거와 일자리, 경제 전망에 민감할 수 있고, 40·50대는 경제뿐 아니라 검찰개혁과 정치적 갈등에 대해서도 다른 기대를 갖고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한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6월부터 드러난 지지기반의 균열

 

지지율 하락의 첫 번째 변화는 6·3 지방선거 직후 나타났다. 5월 셋째 주 64%였던 대통령 긍정평가는 6월 둘째 주 57%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민주당 지지율은 45%에서 41%로 낮아졌고, 국민의힘은 22%에서 29%로 상승했다.

 

 

선거관리 과정의 투표용지 부족 논란과 보수층 결집, 서울시장 선거 패배에 따른 진보 진영의 실망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6월 하순에는 다른 양상이 나타났다. 대통령 긍정평가는 둘째 주 57%에서 넷째 주 51%로 다시 6%포인트 떨어졌지만 민주당 지지율은 41%로 변하지 않았다. 국민의힘 지지율도 29%에서 27%로 낮아졌다. 중도층의 대통령 긍정 평가는 60%에서 51%로 하락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6월 26일 유시민 작가가 김어준 씨의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이 대통령의 외연 확대 방식을 비판했다. 기존 지지 기반을 유지하면서 중도와 보수로 지지층을 넓히는 '증축'이 아니라, 기존 지지 기반을 허무는 '재건축'을 시도하는 것 아니냐는 문제 제기였다.

 

유 작가의 발언이 대통령 지지율을 떨어뜨린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미 지지율은 상당히 하락한 상태였다.

 

오히려 주목할 것은 그의 발언에 공감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통령의 정치적 판단을 지켜보면서 뭔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면서도 그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던 국민들에게 유 작가의 발언은 자신의 생각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9월 18일 기자회견을 통해 갈등 수습에 직접 나섰지만 이후 여전히 민주 진보‧개혁 진영의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전당대회가 끝나도 해소되지 않은 갈등

 

6월 말부터 드러난 여권 내부의 갈등은 민주당 8·17 전당대회를 앞두고 더욱 격화됐다. 정청래 전 대표와 김민석 전 국무총리, 송영길 전 대표 등이 경쟁하는 과정에서 당대표 선거는 정치적 주도권을 둘러싼 대결로 전개됐다.

 

특히 대통령이 누구를 지지하느냐는 이른바 '명심' 논란이 불거지면서 대통령의 정치적 중립성까지 쟁점이 됐다.

 

7월 첫째 주 54%였던 대통령 긍정평가는 8월 11~13일 조사에서 44%로 떨어졌다. 부정평가는 46%로, 처음으로 긍정평가를 넘어섰다. 전당대회가 열리기 나흘 전이었다.

 

8월 17일 김민석 후보가 54.08%를 얻어 45.92%의 정청래 후보를 누르고 당대표로 선출됐다. 그러나 전당대회 직후인 18~20일 조사에서 대통령 긍정평가는 45%, 부정평가는 45%였다. 직전 조사와 비교해 거의 변화가 없었다.

 

전당대회가 지지율 반등의 계기가 되지 못한 것이다. 경쟁은 끝났지만 그 과정에서 생긴 불신까지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대통령과 당대표의 관계, 경선 과정에서 갈라진 지지층, 조국혁신당과의 정치적 협력 문제 등이 여전히 과제로 남았다.

 

물론 전당대회 갈등이 지지율을 얼마나 떨어뜨렸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당시 대통령 부정평가 이유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부동산정책이었다. 8월 셋째 주 부정 평가자의 28%가 부동산정책을 꼽았다. 그러나 진영내 갈등은 이 대통령 지지율 하락에 최소한 10%~15%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현재 대통령의 지지율이 37%~39%인 점과 진영내 갈등이 없었더라면 대통령 국정운영 긍정 평가가 50% 초‧중반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판단에따른 것이다.

 

진영내 정치적 갈등과 민생에 대한 불만이 동시에 진행됐다는 사실을 함께 봐야 한다.

 

부동산·인사·경제 불만…정치적 갈등만으로 설명 못 해

 

한국갤럽의 7월 첫째 주 조사에서 부동산정책 긍정평가는 26%로, 3월의 51%보다 25%포인트 낮았다. 부정평가는 27%에서 46%로 높아졌다.

 

앞으로 1년 동안 집값이 오를 것이라는 응답은 55%, 임대료가 오를 것이라는 응답은 65%였다. 부동산정책에 대한 불만은 주택 소유자들의 반발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집값과 임대료 상승에 대한 불안은 무주택자와 청년층에도 영향을 미친다.

 

9월 셋째 주에는 앞으로 1년간 경제가 좋아질 것이라는 응답이 27%, 나빠질 것이라는 응답이 42%였다. 경제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이 우세했다.

 

10월 정책 분야별 평가에서도 부동산정책은 긍정 19%, 부정 61%, 공직자 인사는 긍정 20%, 부정 57%였다. 대북정책은 긍정 24%, 부정 55%, 경제정책은 긍정 35%, 부정 47%로 나타났다.

 

반면 복지정책은 긍정 48%, 부정 32%, 외교정책은 긍정 43%, 부정 38%였다. 모든 정책이 똑같이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결과는 정부의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다른 분야에서는 불만을 느끼는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지지율 하락을 정치적 갈등만으로 설명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특히 9월에는 인사 문제가 두드러졌다. 9월 9~10일 조사에서 대통령 긍정평가는 38%, 부정평가는 51%였다. 부정평가 이유는 부동산정책 24%, 인사 16%, 경제·민생 10% 순이었다.

 

검찰개혁 논쟁도 이어졌다. 보완수사권을 남기는 것이 개혁 취지를 약화시킨다는 의견과 수사 공백 및 피해자 보호를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이 맞섰다. 이는 제도 설계의 차이를 넘어 정부가 어떤 원칙을 우선하는지에 대한 논쟁으로 번졌다.

 

9월 15~17일 조사에서 대통령 긍정평가는 37%, 부정평가는 56%였다. 부정평가 이유는 부동산정책 20%, 인사 16%, 검찰 권한 축소 5%였다.

 

검찰개혁의 정치적 파장은 컸지만 자유 응답에서는 부동산과 인사에 대한 불만이 훨씬 많이 나타났다. 정책 불만과 진영내 갈등 등 정치적 신뢰의 문제를 구분해 분석해야 하는 이유다.

 

9월 18일 대통령 통합약속, 뚜렷한 반등은 아직

 

대통령은 9월 18일 기자회견을 열고 지방선거 이후 국민의 실망과 걱정에 직면해 당황했다고 밝혔다. 개혁과 진보의 가치를 유지하면서 다양한 의견을 국정에 반영하는 통합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강조했다.

 

특히 통합을 위한 인선과 정책이 오히려 갈등과 균열을 초래하지 않도록 더 깊이 숙고하겠다고 약속했다. 지지율 하락을 단순히 경제나 부동산 문제로만 보지 않고 정치적 갈등과 소통의 문제로도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발언이었다.

 

기자회견 이후에는 친노·친문 세력과의 연대, 지지층 내부의 혐오 중단을 강조하는 메시지도 내놓았다.

 

지넌달 18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이재명 대통령 기자회견에서 취재진이 질문하기 위해 손을 들고 있다. 2026.9.18 연합

 

그러나 기자회견이 지지율 회복의 전환점이 됐다고 평가하기는 아직은 이르다. 10월 첫 갤럽 조사에서 긍정평가는 37%로 여전히 낮고, 3주차 조사도 39%로 사실상 변화가 없는 상황이다.

 

기자회견 이후에도 인사와 검찰개혁, 대통령의 SNS 발언을 둘러싼 논쟁은 이어지고 있다. 통합을 강조하는 메시지가 실제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는 행동으로 연결되고 있는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여권 내부 갈등이 지지율을 떨어뜨리고, 지지율 하락이 갈등을 격화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정치적 신뢰가 약해지면 과거에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던 대통령의 말과 행동도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강한 추진력은 독단으로, 세밀한 국정 관리는 지나친 개입으로, 직접적인 SNS 소통은 불필요한 논쟁으로 받아들여진다.

 

해법은 초심으로,정상화·합리화·상식의 실천

 

지지율을 회복하기 위한 특별한 묘책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부동산정책을 바꾼다고 모든 국민이 만족하는 것도 아니고, 인사를 몇 명 교체한다고 정치적 신뢰가 곧바로 회복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재명 대통령이 강조해온 정상화·합리화·상식이라는 원칙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상화는 경제와 행정뿐 아니라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에도 적용돼야 한다. 합리화는 대통령이 모든 문제의 답을 갖고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의견을 충분히 듣고 검토하는 과정에서 이뤄진다. 상식은 자신에게 우호적인 사람뿐 아니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에게도 납득할 수 있는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다.

 

우선 부동산과 인사처럼 부정 평가가 높은 분야부터 정책의 기준을 명확히 해야 한다. 단기적인 여론 변화에 따라 방향을 바꾸기보다 무엇을 목표로 하고 어떤 비용과 부작용을 감수할 것인지 솔직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국정운영 방식도 점검해야 한다. 이 대통령은 개별 현안에 빠르게 판단하고 직접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국무회의 생중계와 SNS를 통한 직접 소통도 이러한 방식의 연장선에 있다. 공개성과 투명성이라는 장점이 있지만 대통령이 모든 현안에 직접 개입하면 장관과 참모들의 자율성과 책임이 약해질 우려도 있다.

 

개별 현안을 해결하는 능력과 정부 전체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능력은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다.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지시를 충실히 수행하는 참모만이 아니다. 정책의 부작용을 검토하고 대통령에게 불편한 의견도 전달하며, 정부와 여당의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참모들이 필요하다.

 

국무회의 역시 대통령의 지시를 전달하는 자리에 그치지 않고 정책을 놓고 실질적으로 토론하는 공간으로 기능해야 한다. 장관은 자신의 정책에 책임지고, 참모는 대통령에게 이견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여당 지도부도 정치적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대통령의 뜻을 앞세워 주도권 경쟁을 벌이기보다 정부 정책을 국민에게 설명하고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하는 데 힘써야 한다.

 

조국혁신당을 비롯한 진영내 다른 정치세력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통합과 연대를 말하면서 실제로는 상대를 배제하거나 불신을 키운다면 협력은 어려워진다. 정치적 연대가 필요하다면 그에 맞는 원칙과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

 

대통령의 메시지 관리 역시 단순히 SNS 사용을 줄이는 문제는 아니다. 국민에게 직접 설명해야 할 사안과 정부의 공식 절차를 통해 조정해야 할 사안을 구분하고, 대통령의 발언이 국정운영의 방향과 일치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기존 지지층의 신뢰를 회복하는 일과 중도층으로 외연을 확대하는 일을 대립적인 과제로 봐서는 안 된다. 이 대통령이 말한 '구조적 다수' 역시 기존 지지 기반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계층과 세대의 동의를 넓혀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갤럽 조사에서 확인되는 지지율 하락의 원인은 하나가 아니다. 집권 2년 차가 되면 지지율 하락 압력은 커질 수 밖에 없다. 부동산 때문에 실망한 사람과 검찰개혁 때문에 실망한 사람은 서로 다른 판단으로 대통령을 평가한다. 여전히 정책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정치적 판단에는 비판적인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서로 다른 불만이 누적되면서 대통령의 여러 가지 판단에 대한 신뢰가 약해졌다면 개별 현안의 해결만으로 지지율을 올릴 수 없다.

 

대통령이 강조해온 정상화·합리화·상식이 정책뿐 아니라 정치적 판단과 의사결정 과정에서도 일관되게 적용됐으면 한다. 지지율의 숫자보다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은 그 숫자 뒤에 쌓여 있는 국민의 불만과 불신이라고 생각한다.

 

갤럽 10월 3주차 조사는 13일부터 15일까지 18세 이상 1003명을 대상으로 전화면접조사(CATI)방식으로 진행했으며 표본오차는 ±3.1% 포인트, 응답률은 10.4%였다. 가중치 적용 후 이념성향 진보 표본은 231명,보수 표본 297명,중도표본 344명,의견유보는 131명이었다.

(여론조사의 보다 상세한 내용은 한국갤럽 홈페이지나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된다.)                                                        < 강동형 기자 > 

 

 

조희대 탄핵, '계산'말고 '법대로' 하라

● COREA 2026. 10. 17. 10:06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탄핵의 목적은 권력의 책임을 묻고 헌법의 원칙을 바로 세우는 데 있어

홍순구 만평작가의 '동그라미 생각'

 

탄핵의 목적은 상대를 무너뜨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책임을 묻고 헌법의 원칙을 바로 세우는 데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조희대 대법원장을 향해 ‘자진 사퇴 촉구’에서 ‘탄핵 추진’으로 기조를 선회하는 모양새다.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라도 헌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사법부 수장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것은 의미 있는 변화다. 사법부의 독립은 삼권분립의 원칙에 따라 존중받아야 하지만, 그것이 사법부 수장의 개인적·법적 책임까지 면제하는 방패가 될 수는 없다.

 

조 대법원장을 둘러싼 논란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12·3 불법 비상계엄 당시 사법부의 미온적 대응부터 이재명 대통령의 대선 관련 사건 파기환송을 둘러싼 공정성 논란, 대법관 재제청 거부, 법인카드와 업무추진비 집행 의혹까지 따져봐야 할 사안이 적지 않다.

 

물론 논란과 의혹만으로 탄핵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각 사안의 사실관계와 법적 책임을 엄정하게 검증하고, 헌법과 법률에 비춰 탄핵 요건을 충족하는지 면밀히 따져 추진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윤석열의 비상계엄이 검찰개혁의 단초가 되었다면, 조 대법원장을 둘러싼 논란은 사법개혁이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개혁은 특정 기관을 공격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권력도 견제와 책임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원칙을 바로 세우는 데서 시작한다. 권력을 가진 기관이 스스로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데 실패한다면, 헌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는 검찰이든 법원이든 예외일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의힘은 기다렸다는 듯 조 대법원장 탄핵 추진에 이재명 대통령 탄핵이라는 맞불을 놓겠다고 나섰다. 대법원장의 책임을 따지는 문제에 대통령 탄핵을 끌어들인 것이다. 조 대법원장의 헌법·법률 위반 여부를 따져야 할 자리에 대통령 탄핵을 맞불로 내세운다고 해서 제기된 의혹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에게 탄핵 사유가 있다면 그 역시 별도의 근거와 절차에 따라 판단하면 될 일이다. 서로 다른 사안의 책임을 맞불 놓듯 대응하는 것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정쟁만 키울 뿐이다.

 

탄핵이라는 무거운 용어가 어느새 우리 정치에서 흔한 일상어가 된 지 오래다. 그러나 탄핵은 정당 간 힘겨루기를 위한 정치적 구호가 아니다. 헌법과 법률 위반 여부를 따지고, 그 위반이 파면을 정당화할 정도인지를 판단하는 엄중한 절차다. 민주당 역시 탄핵을 지지율을 끌어올리거나 국면을 전환하기 위한 정치적 승부수로 삼아서는 안 된다. 어떤 행위가 헌법과 법률을 위반했는지, 그것이 왜 탄핵 사유에 해당하는지 구체적이고 명확한 근거를 국민 앞에 제시해야 한다.

 

지금 정국에 필요한 것은 ‘조희대 탄핵’과 ‘이재명 맞불 탄핵’의 소모적인 대결이 아니다. 탄핵을 정쟁의 무기로 삼는 순간 헌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명분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탄핵의 목적은 상대를 무너뜨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책임을 묻고 헌법의 원칙을 바로 세우는 데 있다. 정치적 이해득실이 아닌 헌법의 원칙에 따라 판단할 때 비로소 사법개혁은 정당성을 얻고, 무너진 국가기관에 대한 신뢰도 회복의 길을 찾을 수 있다. <홍순구 시민기자>

 

 

 

총 보다 잡지를 든 편집장, '박정희의 천적' 장준하

● COREA 2026. 10. 17. 10:02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일본군 탈출 6000리 걸어 중국서 광복군 활동
'사상계' 창간, 한국 지식사회의 중심에 우뚝
박정희 군사정권 월남파병에 반대하다 구속돼
1967년 옥중 출마 국회의원 당선, '사상계' 떠나
김지하 '오적' 게재했다 등록 취소로 발행 중단
긴급조치 위반 15년 선고받고 형집행정지 석방
포천 약사봉 등산 중 추락사… 타살 의혹 남아

 

일본군을 걸어 나온 학병

 

장준하(1918–1975)를 한 줄로 소개하면 이렇다. 일본군을 탈출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해방 뒤에는 잡지를 만들어 독재와 맞서다 산골짜기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은 사람. 이력서 한 줄이 이토록 무거운 사람도 드물다.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그는 1944년 1월 학병으로 끌려갔다. 이름은 지원병인데 지원하지 않으면 집안이 곤란해지는, 참으로는 강제된 지원이었다. 그해 7월 중국 쉬저우의 일본군 부대를 김준엽(1920–2011) 등과 함께 탈출했다. 혹한과 굶주림을 견디며 6천 리를 걸어 이듬해 1월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도착했다. 지도도 길 안내 기계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서 이범석(1900–1972)의 지휘아래 미국 전략정보국과 국내진입 작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작전은 중단됐다. 8월 18일 비행기로 여의도에 들어왔지만 일본군의 제지로 돌아가야 했다. 해방된 조국에서 입국을 거절당한 광복군이었다. 그해 11월에야 귀국한 뒤 김구(1876–1949)의 비서로 일했다.

 

장준하 1944년(위키피디아)

 

총 대신 붓을 든 편집장

 

광복군시절에도 잡지 『등불』을 만들었으니, 이 사람의 팔자는 총보다 편집 쪽에 가까웠다. 1953년 4월 월간 종합교양지 『사상계』를 창간했다. 잡지는 돈이 되지 않았다. 편집장은 발행인이자 영업사원이었고, 때로는 돈을 구하러 다니는 사람이었다. 원고료 걱정은 끊이지 않았지만 실어야 할 말은 넘쳤다.

 

『사상계』는 대학생과 지식인 사이에서 널리 읽히며 1950~60년대 한국 지식사회의 중심에 섰다.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고, 1958년에는 필자 함석헌(1901–1989)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발표한 뒤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는 필화도 겪었다. 장준하와 주간 안병욱도 조사를 받았다.

 

1962년 장준하는 막사이사이상 언론부문상을 받았다.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는 잡지가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은 셈이다. 그러나 박정희(1917–1979) 군사정권의 탄압은 그치지 않았다. 세무사찰과 판매방해가 이어졌고, 장준하는 1966년 월남파병을 비판하다 구속됐다.

 

사상계 잡지 운영했던때 장준하(위키피디아)

 

「오적」이 불러온 탄압, 등록취소라는 칼날

 

1961년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 직후 장준하는 군사정권에 한때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길로 가자 비판자로 돌아섰다. 한 사람은 일본군을 탈출해 광복군 장교로 복무했고 다른 한 사람은 일제 때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다. 해방된 나라에서는 일본군 장교 출신이 오히려 권력을 잡고 광복군 장교 출신이 감옥을 드나들었다. 우리역사의 짓궂은 비극이다.

 

1967년 장준하는 옥중출마 끝에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이후 『사상계』의 발행권은 부완혁(1919–1984)에게 넘어갔다. 따라서 1970년 잡지폐간 당시 발행인은 장준하가 아니라 부완혁이었다.

 

결정적인 사건은 1970년 5월호에 실린 김지하(1941-2022)의 담시 「오적」이었다. 재벌과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다섯 도둑에 빗대 부패한 권력층을 풍자한 작품이었다. 권력의 치부를 날카롭게 드러낸 이 글은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불러왔다. 부완혁과 편집인 김승균 등이 구속됐고 잡지발행은 사실상 중단됐다.

 

공식적인 등록취소는 그해 9월 29일 이뤄졌다. 문화공보부가 내세운 이유는 인쇄시설을 갖추지 않은 경우 인쇄인을 등록해야 한다는 관련규정을 어겼다는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인쇄와 등록의 문제를 이유로 들었지만, 「오적」 게재 이후 이어진 탄압의 흐름에서 이를 단순한 행정처분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사상계』는 통권 205호를 끝으로 발행이 중단됐다.

 

부완혁은 법정투쟁을 이어갔고, 1972년 4월 대법원에서 등록취소처분을 취소하라는 판결을 받아냈다. 그러나 법적으로 길이 열렸다고 잡지가 되살아난 것은 아니었다. 재정은 바닥났고 필자를 구하기도, 인쇄를 맡길 곳을 찾기도 어려웠다. 박정희는 잡지의 등록을 취소했지만, 그보다 먼저 잡지가 설 자리를 좁혀놓았던 것이다.

 

고상만의 저서

 

약사봉의 물음표

 

1973년 말 장준하는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했다. 박정희는 서명대신 수갑으로 답했다. 19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돼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지만 그해 12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1975년에도 함석헌 등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힘을 모으려 했다.

 

그러나 1975년 8월 17일, 그는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박정희 정권은 등산 중 실족해 추락한 사고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사망경위에는 의문이 남았다.

 

2012년 8월 묘소를 옮기는 과정에서 두개골 오른쪽 귀 뒤쪽에 지름 5~6센티미터의 함몰 흔적이 발견됐다. 이듬해 유족 측이 의뢰한 법의학 감정에서는 머리를 가격당한 뒤 추락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필자가 몸담았던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앞서 사건을 조사했지만 사망원인을 규명하지 못했다.

 

타살의혹이 제기됐다고 해서 살해주체까지 밝혀진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규명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의문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약사봉의 물음표는 여전히 한국현대사의 미해결 과제로 남아 있다.

 

장준하와 함석헌(함석헌기념사업회)

 

장준하에게서 오늘을 배우다

 

첫째, 국가가 가진 기록은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존재한다. 자료가 공개되지 않아 진실을 밝히지 못하는 일이 되풀이된다면 과거사 조사는 이름뿐이다. 진실화해위원회와 같은 조사기구에는 자료를 확보하고 책임 있는 답변을 받아낼 실질적인 권한이 필요하다.

 

둘째, 진실규명에는 유효기간이 없어야 한다. 한시적인 조사기구가 활동시한에 쫓겨 미완의 사건을 남기고 문을 닫는다면 피해자와 유족은 다시 애타게 기다려야 한다. 조사기간을 연장하거나 상설적인 진실규명기구를 두는 방안을 적극 검토할 때다.

 

셋째, 잘못된 판단을 인정하고 돌아설 줄 알아야 한다. 처음에는 군사정변에 기대를 걸었던 장준하는 박정희 정권의 실체를 확인한 뒤 비판자로 나섰다. 한 번 틀리는 것은 실수지만, 틀렸음을 알면서도 고집하는 것은 선택이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 이후 장동혁, 주진우, 김진숙, 김태규 등 정치인들은 자신의 잘못된 판단과 행동을 얼마나 돌아보았는가.

 

넷째, 연대는 차이를 넘어서는 일이다. 편집장 장준하와 종교인 함석헌, 민중신학자 안병무(1922-1996). 해직교수 김동길(1928-2022) 등은 민주주의라는 목표 아래 만났다. 생각과 배경이 다르더라도 공동의 위기 앞에서 손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말에는 책임이 따른다. 『사상계』가 권력의 탄압을 받은 것은 사람들이 그 글을 읽었고, 글을 쓰는 이들이 그 대가를 감수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누구나 글을 발표할 수 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가 넓어졌다고 해서 말의 무게까지 가벼워져서는 안 된다.

 

장준하는 총 대신 잡지를 들었다. 그가 남긴 것은 독립운동의 무용담이나 잡지 한 권만이 아니다. 독재 권력이 감추려는 것을 묻고, 잘못된 것을 비판하며, 서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행동하는 시민의 책임이었다.

 

약사봉의 물음표가 언제 마침표를 찍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진실을 묻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장준하가 오늘 우리에게 남긴 숙제다.   

                                                 < 김성수 시민기자, 반헌법 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 

 

파주시 장준하 공원에 위치한 장준하의 묘소(위키피디아)

 

 

 

부마 민주항쟁 47주년, 그날의 함성은 끝나지 않았다

● COREA 2026. 10. 17. 03:51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1979년의 역사에서 오늘의 민주주의를 묻다
시민이 맞섰던 억압과 불평등은 해소됐는가
약자의 존엄 지키는 게 민주주의 자체의 핵심

 

계엄령 발표 후 옛 부산시청(중앙동) 앞에 주둔하고 있는 탱크와 주변 모습

 

부산의 거리에서 시작된 저항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 교정에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유신헌법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치는 함성이 교정을 넘어 도심으로 번졌다. 남포동과 광복동 일대에는 학생들뿐 아니라 퇴근길 시민과 노동자, 고등학생들도 합류했다. 경찰의 진압에도 시위는 밤늦도록 이어졌다. 이틀 뒤인 18일에는 마산에서도 학생들이 거리로 나섰고 시민들이 가세했다. 부산에서 시작된 저항은 마산으로 확산하며 유신체제를 뒤흔들었다. 이것이 부마민주항쟁의 출발이었다. 1979년 10월 16일부터 부산에서 시작된 항쟁은 18일 마산으로 번졌고, 20일까지 두 도시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학생들의 시위가 시민들의 대규모 저항으로 발전했다는 점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사에 뚜렷한 자리를 차지한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을 바탕으로 장기 집권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됐고, 긴급조치와 정치적 탄압으로 반대 목소리를 억눌렀다. 국회의 견제 기능은 크게 약화됐으며 언론과 시민의 자유도 제한됐다. 국민이 주권자라는 헌법의 원칙은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권력은 국민의 뜻을 묻기보다 국민에게 복종을 요구했다. 부마항쟁은 이러한 정치 현실에 대한 저항이었다. 학생들이 먼저 움직였지만 거리의 함성은 대학 담장 안에 머물지 않았다. 시민들은 독재에 대한 분노를 함께 표출했다.

 

부마항쟁 당시 시위대 거리 행진 모습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의 생각과 요구가 모두 같았던 것은 아니겠지만, 권력이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현실을 더는 용납할 수 없다는 정서가 항쟁을 움직였다. 역사는 종종 몇몇 지도자의 결단으로 설명되곤 한다. 그러나 부마항쟁의 의미는 이름난 인물 몇 명으로 환원할 수 없다. 거리로 나선 학생과 노동자, 평범한 시민들의 용기가 역사의 방향을 흔들었다. 자신의 이름이 기록될지조차 알 수 없었던 사람들이 일상의 두려움을 넘어섰기에 항쟁은 가능했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분노의 배경

 

부마항쟁은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사건이 아니었다. 1979년 한국 사회에는 독재정권에 대한 정치적 반발과 사회경제적 불만이 누적돼 있었다. 같은 해 8월,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은 회사의 폐업 조치에 항의하며 서울 신민당사에서 농성했다. 경찰이 강제 진압에 나서는 과정에서 노동자 김경숙이 사망했다. 노동자의 생존권을 지키려는 투쟁이 공권력의 폭력과 마주한 사건이었다. 노동자들의 절박한 처지는 당시 사회의 불평등과 권력의 억압적 성격을 드러냈다. 10월에는 유신체제를 비판하던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됐다.

 

야당의 정치 활동을 제약하는 조치에 반발해 신민당 의원들이 집단 사퇴서를 제출하면서 정국은 더욱 악화됐다. 정치적 반대 세력을 제도 안에서 경쟁할 상대가 아니라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취급하는 권력의 태도가 갈등을 키웠다. 부산과 마산은 이러한 긴장이 분출한 현장이었다. 부산은 학생운동과 시민사회의 움직임이 활발했던 도시였고, 마산 역시 산업과 노동의 현장이었다.

 

부마항쟁 이후 계엄령 발표로 공수부대가 부산대 정문을 막고 주둔하고 있다

 

그러나 항쟁을 특정 지역의 기질이나 일부 학생들의 급진적 행동으로만 설명해서는 안 된다. 전국적으로 누적된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불만이 지역의 구체적인 조건 속에서 터져 나온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 시민들이 보여준 참여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학생들이 제기한 문제의식이 시민들의 호응을 얻으면서 시위는 정권의 통치 기반을 흔드는 대규모 저항으로 발전했다. 이는 독재체제가 겉으로 유지되는 것과 시민들의 동의를 얻는 것이 전혀 다른 문제임을 보여준다. 강압으로 질서를 유지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정당성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군홧발로 막은 거리, 무너진 유신체제

 

박정희 정권은 항쟁을 강경 진압했다. 부산에는 10월 18일 0시를 기해 계엄령이 선포됐고, 군 병력이 투입됐다. 마산과 창원 일대에는 10월 20일 위수령이 발동됐다. 경찰과 군의 진압으로 시위는 잦아들었으며, 참가자들은 연행과 구금, 수사와 처벌을 겪었다. 거리는 통제됐지만 시민들의 불만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부마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평가할 때 인과관계를 정확하게 짚을 필요가 있다. 항쟁은 유신체제의 심각한 위기를 드러낸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박정희 정권의 종말을 직접 가져온 사건은 10월 26일 발생한 박정희 대통령 피살이었다. 항쟁이 곧바로 정권을 무너뜨렸다고 단정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일이다.

 

부마항쟁 당시 마산지역에 붙은 격문

 

그렇다고 항쟁의 의미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부마항쟁은 유신체제가 시민들의 저항에 직면했음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국가가 군과 경찰을 동원해 시위를 억누를 수는 있었지만, 독재에 대한 분노와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을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는 없었다. 거리의 저항은 정권의 통치가 얼마나 취약해졌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징표였다. 더욱이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이 곧 민주주의의 실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1979년 12월 12일 신군부는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장악했고, 이듬해 5월 광주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이 군부의 폭력에 희생됐다.

 

유신체제가 무너진 자리에 민주주의가 자연스럽게 들어선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군사권력이 등장해 시민들의 열망을 다시 억눌렀다. 이 역사는 독재자의 퇴진과 민주주의의 정착이 별개의 과제임을 일깨운다. 권력자가 바뀌어도 권력 집중을 막을 제도와 시민의 감시가 없다면 억압은 다른 모습으로 되풀이될 수 있다. 민주주의는 한 사람의 퇴장으로 완성되는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고 권력의 한계를 정하는 지속적인 과정이다.

 

국가기념일이 되었다고 역사가 완성되는가

 

부마민주항쟁은 2019년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항쟁이 시작된 10월 16일을 국가기념일로 정한 것은 부산과 마산 시민들의 저항을 한국 민주주의의 중요한 역사로 공식 인정했다는 의미가 있다. 오랫동안 항쟁의 경험을 간직해 온 참가자와 유가족, 지역사회의 노력도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국가기념일 지정이 역사적 과제의 종결을 뜻하지는 않는다. 항쟁의 전개 과정과 피해 실태를 충실히 기록하고, 국가폭력의 피해를 입은 이들의 명예를 회복하며, 관련 자료를 보존하고 후대에 전하는 일이 계속돼야 한다. 역사적 사실을 둘러싼 논란이 남아 있다면 자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확인하고, 밝혀진 사실은 교육과 공적 기록에 반영해야 한다.

 

계엄령 발표 포고문을 읽고 있는 시민들(동아대)

 

기념식에서 민주주의를 찬양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어려운 것은 그 정신을 현재의 권력 운영에 적용하는 일이다. 자신을 비판하는 시민을 불편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 정치, 권력기관의 잘못을 감추지 않는 행정, 시민의 질문에 근거를 들어 답하는 공직사회가 필요하다. 국가가 민주화운동을 기리는 동시에 시민의 비판을 억압한다면 기념과 현실 사이에 모순이 생긴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민주주의가 저절로 성숙하는 것도 아니다. 선거에서 승리한 정치세력은 권력을 위임받았을 뿐, 무제한의 권한을 얻은 것이 아니다. 지지자의 환호가 크더라도 권력은 법과 제도의 통제를 받아야 하며, 언론과 시민사회의 감시를 존중해야 한다. 반대자의 비판을 배신이나 적대 행위로 몰아가는 정치문화 역시 경계해야 한다.

 

시민에게도 책임이 있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의 잘못을 외면하면서 상대편의 잘못만 비판한다면 권력 감시는 정파적 도구로 전락한다. 민주주의를 지키려면 내 편의 잘못에 더 엄격할 수 있어야 한다. 지지하되 숭배하지 않고, 비판하되 상대의 권리를 부정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민주주의의 가치는 누가 권력을 잡았느냐에 따라 달라져서는 안 된다.

 

부마의 정신을 오늘의 삶으로

 

부마민주항쟁을 계승한다는 것은 과거의 용기를 기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날 시민들이 맞섰던 억압과 불평등이 오늘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 살피는 일이다. 오늘 우리 사회에는 노동 현장에서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 불안정한 일자리와 주거 문제로 미래를 설계하기 어려운 청년들, 돌봄과 생계의 무게를 홀로 감당하는 가족들이 있다. 노년의 빈곤과 고립, 장애인에 대한 차별, 이주민과 사회적 소수자를 향한 혐오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정치적 자유가 보장된 사회라 해도 삶의 조건이 심각하게 불평등하다면 민주주의는 여전히 부족하다. 민주주의는 투표권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고, 부당한 대우에 맞서 권리를 주장하며, 사회의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생존을 위해 부당함을 감수해야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도 정치가 응답해야 한다. 약자의 존엄을 지키는 일은 민주주의에 덧붙이는 선행이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의 핵심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오늘 제47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에 참석해 부마민주항쟁과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아야 한다며 개헌을 촉구했다. MBC뉴스 갈무리

 

부산은 부마민주항쟁이 시작된 도시다. 그렇다면 항쟁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기억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시민의 의견이 시정에 반영되는지, 공공의 예산이 누구를 위해 쓰이는지, 노동과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을 제대로 살피는지 점검해야 한다. 개발과 성장의 성과만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밀려나는 사람들의 삶도 물어야 한다. 기념관과 추모행사뿐 아니라 정책과 예산, 교육과 시민 참여 속에서 항쟁의 정신이 살아 있어야 한다.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의 시민들은 독재권력 앞에서 침묵하지 않았다. 그들이 남긴 역사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질문한다. 권력의 잘못을 비판할 용기가 있는가. 내 편의 잘못을 인정할 양심이 있는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는가. 가장 낮은 곳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가. 부마민주항쟁은 지나간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무엇이며, 누가 민주주의를 지켜야 하는지 끊임없이 묻는 현재의 역사다. 그날의 시민들을 기념하면서 오늘의 부당함에 침묵한다면 기념은 형식에 머물고 만다.

 

민주주의는 한 번 쟁취했다고 영원히 보장되는 유산이 아니다. 시민이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과 토론의 자유를 지키며, 서로의 존엄을 존중할 때 지속될 수 있다. 그 정신은 국가의 선언만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일상에서 부당함을 외면하지 않는 시민의 실천으로 이어진다. 오늘 부마민주항쟁 47주년 기념일을 맞아 우리는 과거의 함성만 들을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사회가 내는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지워지고 있지는 않은가. 권력의 편의가 시민의 권리보다 앞서고 있지는 않은가. 이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 그리고 그 답을 우리의 삶과 정치 속에서 실천하는 것, 그것이 부마민주항쟁을 기억하는 가장 정직한 길이다.

 

[참고자료]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부마민주항쟁>.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록원,  <국경일과 법정기념일> 중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일 지정 경위. 2023 부마민주항쟁 구술자료집                                   < 박철 기자 >

 

[전국시국회의 논평] 


부마항쟁 47주년,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의 역사를 잇는 개헌을 촉구한다.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의 시민들은 유신독재의 폭압에 맞서 거리로 나섰다. 권력의 탄압과 국가폭력에도 굴복하지 않은 시민들의 저항은 독재정권의 종말을 앞당겼고, 민주주의를 향한 민중의 열망이 역사를 바꾸는 원동력임을 증명했다. 부마민주항쟁 47주년을 맞는 오늘, 부마항쟁은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되새겨야 할 역사적 기준이다.

부마항쟁의 의미는 2024년 12·3 내란 사태를 통해 더욱 선명해졌다. 유신독재에 맞선 시민들과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 나선 시민들은 시대를 달리했지만, 권력이 국민주권과 민주주의를 위협할 때 시민이 역사의 주체로 나섰다는 점에서 맞닿아 있다. 두 사건은 권력이 결코 헌법과 국민 위에 설 수 없다는 민주공화국의 원칙을 일깨운다.

부마항쟁의 정신을 계승하는 길은 과거를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12·3 내란의 진상을 철저히 밝히고 책임을 묻는 한편, 국가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강화하고 국민의 기본권과 주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기억을 실천으로, 역사적 교훈을 제도로 이어 가야 한다.

이를 위해 부마항쟁과 5·18민주항쟁의 역사와 시민 저항정신을 헌법 전문에 명확히 담아야 한다. 내란과 헌정질서 파괴를 막을 민주적 통제와 책임의 원칙을 강화하고, 국민주권의 실질화와 국가균형발전, 지방분권 등 오랫동안 미뤄 온 헌법적 과제도 개헌으로 완성해야 한다. 부마항쟁의 정신을 담은 개헌은 과거를 기리는 일을 넘어 미래의 민주공화국을 세우는 일이다.

47년 전 부산과 마산에서 타오른 저항의 불꽃은 오늘도 살아 있다. 부마항쟁의 시민정신과 12·3의 민주주의 수호 의지를 이어받아, 독재와 내란이 결코 되풀이되지 않는 나라, 국민의 주권과 민주주의가 흔들림 없이 보장되는 나라를 만드는 것, 그것이 부마항쟁의 정신을 오늘의 역사로 완성하는 길이다. 개헌으로 부마의 저항을 국민주권의 승리로, 12·3의 항쟁을 민주공화국의 도약으로 이어가자.

2026년 10월 16일
국민주권사회대개혁 전국시국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