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 목사 32주기…늦봄은 지지 않는다

● COREA 2026. 1. 18. 11:44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역사는 더디게 움직이지만 결국 옳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믿음

그는 신앙이 현실을 비켜가는 순간 거짓이 된다고 보았다.

 “신앙은 세상을 바꾸지 못하면 거짓이다”라는 선언

 

그는 말했고, 걸었고, 감옥에 갔다.

 

늦봄 문익환 목사

 

1월 18일,  오늘은 문익환 목사가 세상을 떠난 지 32년이 되는 날이다. 시간은 그를 역사 속 인물로 밀어 넣었지만, 그의 이름은 여전히 현재형으로 우리 앞에 서 있다. 민주주의가 위태로울 때마다, 분단이 일상처럼 굳어질 때마다, 종교가 자기 안전과 체제 순응으로 기울 때마다 우리는 다시 문익환을 떠올린다. 그는 이미 끝난 인물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문익환의 부재는 단순한 상실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그의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의 호 ‘늦봄’은 계절의 비유를 넘어선 삶의 선언이었다. 늦게 오는 봄, 그러나 쉽게 지지 않는 봄. 그는 빠른 승리를 믿지 않았고, 단기적 성과에 기대지 않았다. 역사는 더디게 움직이지만 결국 옳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믿음, 그 믿음을 그는 신앙이라 불렀다. 그러나 그 신앙은 개인의 위안이나 사후 구원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것은 이 땅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였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겠다는 선택이었다.

 

문익환에게 성서는 하늘의 책이 아니었다. 성서는 땅의 책이었고, 사람의 역사였다. 출애굽은 고대 신화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반복되는 해방의 이야기였으며, 예언자들의 분노는 오늘의 권력 앞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언어였다. 그는 성서를 연구하는 학자였지만, 성서를 해석하는 데 멈추지 않았다. 성서가 요구하는 삶의 자리에 자신을 내놓았다. 그래서 그의 설교에는 늘 구체적인 현실이 등장했다. 가난, 분단, 독재, 고문, 침묵의 공모. 그는 신앙이 현실을 비켜가는 순간 거짓이 된다고 보았다.

 

그가 남긴 가장 불편한 말 가운데 하나는 “신앙은 세상을 바꾸지 못하면 거짓이다”라는 선언이다. 이 말은 종교를 위로와 안정의 장치로 소비해 온 한국 사회에 지금도 날카롭게 꽂힌다. 그는 기도를 부정하지 않았지만, 기도가 행동을 대신할 수는 없다고 믿었다. 신앙은 현실을 견디는 도구가 아니라, 현실을 바꾸는 힘이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말했고, 걸었고, 감옥에 갔다.

 

1989년 3월 25일부터 4월 3일까지 방북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문익환 목사는 김 주석을 만나서 박용수의 '겨레말사전'을 선물했다. 사단법인 통일의 집
 

그의 삶에서 감옥은 예외가 아니라 일상이었다. 유신 독재와 군사정권 아래 그는 반복해서 연행되고 수감되었다. 그러나 그는 감옥을 피해자의 자리로만 이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감옥을 민주주의의 교실로 만들었다. 억압의 구조를 몸으로 겪으며 그는 더욱 분명해졌다. 민주주의는 제도만으로 유지되지 않으며, 헌법 조항만으로 살아남지 않는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달았다. 민주주의는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감수성이며, 침묵이 안전하다고 느낄 때 말하는 용기이고, 다수가 옳지 않을 때 기꺼이 소수가 되는 결단이다.

 

그의 민주주의는 온건하지 않았다. 동시에 폭력적이지도 않았다. 그는 비폭력을 말했지만, 그것은 무력함이나 체념이 아니었다. 불의 앞에서 중립을 가장한 침묵이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음을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권력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언제나 권력에 의해 밀려난 사람들의 언어를 선택했다. 그 선택은 편안하지 않았지만, 그는 불편을 기꺼이 감수했다.

 

1989년의 방북은 그의 삶에서 가장 큰 논쟁을 불러온 사건이었다. 정부의 허가 없이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만난 그의 선택은 곧바로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이름으로 처벌되었다. 사회는 그를 둘로 나누어 평가했다. 어떤 이는 용기라 불렀고, 어떤 이는 무모함이라 불렀다. 그러나 문익환 자신에게 그 선택은 계산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분단이라는 구조적 폭력을 더 이상 관념으로만 다룰 수 없다는 절박함의 표현이었다.

 

검열로 일부 내용이 검게 가려진 2차 투옥 시기의 편지(1979. 11. 16.). 편지를 양껏 부칠 수 없어 봉함엽서 한 장에 원고지 28장 분량을 빼곡히 적어 넣었다. 사진=늦봄 문익환 목사 기념사업회

 

그에게 통일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었다. 통일은 사람의 문제였다.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만나지 못하게 막는 체제, 왕래해야 할 삶을 가로막는 분단은 그 자체로 폭력이었다. 그는 법을 어겼을지 모르지만,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더 큰 윤리에 충실했다. 그의 방북은 체제 승인도, 이념 동조도 아니었다. 그것은 분단의 금기를 몸으로 건너는 신앙적 실천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묻는다. 법은 누구를 보호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떤 법에 복종해야 하는가.

 

문익환은 시인이기도 했다. 그의 시는 화려하지 않았지만 깊었다. 그는 언어를 장식하지 않았고, 언어로 숨지 않았다. 그의 시에는 분노와 연민이 함께 있었고, 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배어 있었다. 그는 절망 속에서도 노래했고, 감옥 안에서도 웃었다. 그 웃음은 체념이 아니라 저항이었고, 그 노래는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 관통이었다. 시는 그에게 휴식이 아니라 다시 싸우기 위한 호흡이었다.

 

1993년 출옥 후 그 해 5월 김의기 열사 13주기 기념 강연회를 마치고 서강대학교 교정에서. 박철 사진

 

문익환의 영성은 그래서 특별하다. 그것은 개인적 내면에 머무는 영성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으로 확장되는 영성이었다. 그는 신앙과 정치, 기도와 행동을 분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들을 하나의 삶으로 엮어냈다. 오늘날 종교가 자주 권력과 타협하고, 중립을 가장한 침묵으로 자신을 보호하려 할 때, 그의 삶은 더욱 또렷한 대비를 이룬다.

 

1985년 봄, 나는 문익환 목사님을 민통련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김의기 열사가 나의 처남이라는 사실을 아시고,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보내셨다. 김의기의 삶과 죽음을 단순히 가족의 아픔으로만 여기지 않고, 민중과 민족의 고통으로 인식해 주셨다. 그 마음은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민족 전체의 고통과 정의의 자리로 자연스럽게 확장되었다. 그의 연대와 애정은 단순한 동정이나 위로가 아니라, 사랑과 정의를 행동으로 구현하는 길이었다. 이 연대는 내게 신앙이 결코 개인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와 역사 속에서 증명되어야 함을 가르쳐 주었다.

 

32년 전 문익환 목사가 세상을 떠나신 때, 눈이 많이 내렸다.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길은 유난히 고요했고, 사람들은 말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이 땅이 한 사람의 죽음을 함께 애도하는 듯했다. 영정 앞에서 나는 삼배를 올렸다. 사진 속 그는 여전히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절을 하며 어떤 기도를 드렸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한 개인의 죽음이라기보다 한 시대가 떠났다는 감각이 더 또렷했다. 장례식장을 나설 때도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 그날 이후, 눈이 오는 날이면 나는 늘 문익환 목사를 떠올린다. 눈 속에서도 봄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을.

 

1987년 7월 9일, 연세대학교에서 치른 이한열 열사 장례식. 연단 위에 선 문익환 목사는 '조사' 대신 26명의 열사 이름을 부르며 절규한다.

 

문익환 목사 32주기를 맞은 오늘의 한국 사회는 여전히 그가 던진 질문 앞에 서 있다. 민주주의는 제도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사회 곳곳에서는 배제와 혐오, 침묵의 공모가 반복되고 있다. 분단은 더 이상 긴장으로조차 인식되지 않을 만큼 일상화되었고, 통일은 말하기 조심스러운 주제가 되었다. 종교는 도덕적 권위를 말하지만, 정작 가장 약한 이들의 곁에서는 자주 침묵한다.

 

이런 시대에 문익환이 살아 있다면 그는 아마 이렇게 물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누구의 편에 서 있는가. 편안함을 위해 외면하고 있는 고통은 무엇인가. 신앙과 양심을 분리한 채 살아가는 것을 우리는 언제부터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는가. 그의 질문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지만, 바로 그 불편함 속에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

 

그를 기린다는 것은 과거를 추억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질문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묻는 일이며, 그의 용기를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실천해보는 일이다. 거창한 결단이 아니라, 불의 앞에서 한 발짝 물러서지 않는 태도, 분단을 숙명처럼 받아들이지 않는 상상력, 신앙과 양심을 삶의 가장 낮은 자리까지 끌어내리는 선택이다.

 

1983년 문익환 목사가 김대중 선생께 보낸 편지. 사진=늦봄 문익환 아카이브

 

문익환 목사는 떠났지만, 늦봄은 끝나지 않았다. 늦게 오는 봄은 늘 더 간절하고 더 깊다. 그의 삶은 완결된 답이 아니라, 우리에게 남겨진 미완의 과제다. 우리가 아직 그가 꿈꾼 세계에 도달하지 못했기에, 우리는 여전히 그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가 남긴 질문에 답하려는 순간마다, 봄은 다시 시작된다.

 

늦봄은 지지 않는다. 지금도 이 땅 어딘가에서,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문익환의 봄은 계속 오고 있다.

 

아픔이 아닙니다 /결코 아픔이 아닙니다 /아픔 딛고 넘어가는 /절망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죽음도 아닙니다 /그것은 죽음 이상입니다 /그것은 겨레입니다 /겨레의 부활입니다 /겨레의 해방이요 /자유입니다 

 

문익환의 시 '당신의 청춘은' 일부

                                                                                                             < 박철 기자 >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는 독립군과 광복군

● COREA 2026. 1. 18. 06:37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아직도 바로 잡지 못한 우리 국군의 역사


80주년 맞은 국방경비대, 국군 모체 아니야
명칭부터 정체성 논란, 업무 한계도 불명확해

누리집 의하면 육군이 해·공군보다 늦게 출발
부승찬 “국군조직법에 광복군 계승 명시해야”

 

대한민국 육군은 누리집(인터넷 홈페이지) 연혁의 첫머리에 “해방 후 미 군정하 1946년 1월 15일 남조선국방경비대가 창설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국방경비대는 육군으로 개칭되어 국군에 편입되었다”고 밝혀 놓았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국방경비대’를 표제어로 올려 “1946년 1월 창설한 우리나라의 군대. 오늘날의 국군의 모체가 되었다”는 설명을 달았다. 서울 노원구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있는 육군박물관 앞과 종합경기장 입구에는 각각 ‘육군의 모체 국방경비대 창설지’ 표석과 ‘국군의 모체 국방경비대 1연대 창설기념비’가 서 있다.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앞에 세워진 국방경비대 창설지 표석. (철기이범석장군기념사업회)

 

이에 따르면 이틀 전 15일이 육군, 혹은 국군의 모체의 탄생 80주년 기념일이다. 그러나 군 당국은 이렇다 할 행사를 치르지 않았다. 국방부 산하 국방홍보원이 발행하는 국방일보가 남조선국방경비대와 함께 출범한 제1연대의 후신 육군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비호여단의 창설 80년 역사를 1월13일 소개한 것이 고작이었다.

 

국방경비대가 육군(국군)의 모체라면 그 창설일은 창군일이나 다름없을 만큼 중요할 텐데 왜 군은 이날을 기념하지 않는 것일까. 국방경비대는 과연 어떤 조직이기에 국군의 모체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

 

1946년 1월 15일 일본군 특별지원병훈련소가 있던 지금의 육군사관학교 자리에서 남조선국방경비대 제1연대 창설식이 열리고 있다.

 

미 군정 들어서자마자 광복군 등 모든 군사단체 해산 명령

 

1945년 8월 15일에 맞은 우리 민족의 해방은 곧바로 우리나라의 독립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한반도 이남에 진주한 미 군정은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는 물론 중국 충칭(重慶)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마저 인정하지 않았다.

 

임시정부의 광복군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개인 자격으로 귀환해야 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광복군 말고도 일제 징병 피해자들이 결성한 조선국군준비대, 학병동맹, 육해공군출신동지회, 건국치안대 등 크고 작은 군사단체가 난립해 있었다.

 

미 군정은 11월 13일 군정법령 제28호를 발표해 해방병단(海防兵團)을 제외한 이들 단체의 활동을 금지하고 국방사령부를 설치했다. 국방사령부 안에는 경비대 창설을 준비할 군무국과 경찰 업무를 관장하는 경무국을 두었다. 국방사령부는 1946년 국방부로 개명했다.

 

국군 창설 로드맵 없이 갈팡질팡했던 미국

 

남조선국방경비대는 창설 단계에서부터 갈팡질팡했다. 미국의 한반도 전략이나 군정의 청사진이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군정청 요원들은 일본에 대한 민족 감정이나 항일과 친일 사이의 갈등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군대 창설을 위한 로드맵을 마련하지도 않았다.

 

미 군정의 무지함과 안이함은 온갖 문제를 낳았다. 군정은 군대 창설에 앞서 한미 간 언어 소통을 위해 12월 5일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감리교신학교 자리에 군사영어학교를 설립했다. 군사영어학교에 광복군과 일본군·민주군 출신을 안배해 입교시키겠다는 계획부터 무리였다. 이에 반발한 광복군이 입교를 거부하다 보니 친일 장교들이 주류가 됐고, 미군이 이들을 중용하는 바람에 건군기의 국군이 국민 신뢰와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60명의 첫 입교생 가운데 21명이 40여일 간 교육을 받은 뒤 이듬해 1월 15일 창설된 남조선국방경비대의 장교로 부임했다.

 

군정법령에 따라 창설되고 미군의 통제를 받다 보니 갈등도 적지 않았다. 일부 임시정부 요인은 미군의 지휘를 받는 경비대를 ‘미군의 용병’이라고 폄훼하기도 했다. 실제로 1946년 8월까지는 초대 마셜에 이어 2대 러셀 베로스 대령까지 미군이 총사령관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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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진하고 있는 남조선국방경비대 대원들

 

일본군 출신 득실댔던 남조선국방경비대

 

군사영어학교는 1946년 4월 30일 폐교될 때까지 109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 가운데 78명이 별을 달았고 참모총장 13명, 합참의장 7명이 나왔다. 미처 졸업하지 못한 재학생 60명은 육사 전신인 조선경비대 사관학교로 편입돼 임관했다.

 

남조선국방경비대는 일본군 특별지원병훈련소가 있던 지금의 육사 자리에서 첫걸음을 내디뎠다. 초대 사령관과 부사령관에는 존 마셜 중령과 광복군 출신 송호성이 각각 임명됐고 만주군 출신 원용덕이 사령관 보좌관을 맡았다.

 

그러나 부대는 일본군 출신 채병덕 중대장이 이끄는 제1연대 제1대대 A중대뿐이었다. 그나마 창설 이틀 뒤에야 187명으로 편성을 마쳤다. 뒤이어 본부중대(중대장 장석윤)와 B중대(중대장 정일권)가 출범하고 3개 중대를 지휘할 1대대장에 A중대장이던 채병덕이 임명됐다.

 

남조선국방경비대 대원들이 총검술 훈련을 하고 있다.

 

소련 항의 받고 ‘국방’ 뺀 경비대로 개칭

 

남조선국방경비대는 1946년 6월 15일 조선경비대로 이름을 바꿨다.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 대표가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군사조직을 창설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항의했기 때문이었다. 해방병단도 조선해안경비대로 개칭했다.

 

국방부는 통위부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미 군정은 군정법령 86호를 공표해 국내경비부로 개칭했으나 한국 측이 반발해 재조정한 것이다. 통위부는 대한제국 당시 우영(右營)·후영(後營)·해방영(海防營)을 통합한 통위영(統衛營)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러나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도 1945년 10월 12일 모든 무장조직 해산을 명령한 뒤 소련군 출신 조선인을 중심으로 보안대를 조직했다. 이듬해 2월과 6월 각각 인민군 제2군관학교와 제1군관학교 전신인 평양학교와 중앙보안간부학교를 세운 데 이어 그해 8월 15일 보안대를 인민집단군총사령부로 개칭했다. 북한 역시 국방이란 단어만 쓰지 않았을 뿐 사실상의 군사 조직을 군정 초기부터 준비한 것이다.

 

한국 정부가 군 지휘권 넘겨받은 것은 1948년 9월 1일

 

조선경비대가 3대대로 구성된 제1연대 편성을 완료한 것은 1946년 9월 18일이다. 뒤이어 2연대(대전), 3연대(이리·1995년 익산에 통합), 4연대(광주), 5연대(부산), 7연대(청주), 8연대(춘천)가 각 도에 창설됐다. 9연대는 제주가 1946년 8월 도로 승격된 뒤 그해 11월 합류했다.

1947년 12월 1일에는 1·7·8연대를 주축으로 38선 전역을 관할하는 제1여단이 서울에 창설됐다. 뒤이어 2·3여단도 각각 대전과 부산에서 깃발을 올렸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이전까지 5개 여단 15개 연대 규모로 늘어났고 9월 1일 지휘권이 미 군정청에서 한국 정부로 넘어왔다.

 

9월 5일 조선경비대는 육군으로, 조선해안경비대는 해군으로 이름을 바꿔 국방군(국군)이 정식으로 출범했다. 1949년 4월 15일에는 해군 안에 해병대가 신설됐다. 1948년 5월 5일 창설된 조선경비대 항공부대는 육군에 편입됐다가 1949년 10월 1일 독립함으로써 육·해·공 3군 체제의 틀을 갖췄다.

 

이범석 초대 국방장관 훈령 1호는 경비대 편입

 

초대 국방부 장관에 취임한 광복군 출신의 이범석 국방부 장관은 정부 수립 이튿날인 8월 16일 국방부 훈령 1호를 발령해 “오늘부터 육·해군(경비대를 뜻함) 각급 장병은 대한민국의 국방군으로 편성되는 명예를 획득하게 됐다”고 선언했다. 국방군(국군)이 경비대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편입했다는 뜻이다.

 

이범석 초대 국방부 장관

1995년 국방군사연구소가 펴낸 ‘국방정책변천사’도 “정부 수립 후 조선경비대와 해안경비대가 국군으로 편입되어 각각 육군과 해군으로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육군 누리집 설명과 동일하다.

 

그러나 편입한 주체는 모호하다. 그러면 국군과 육군의 뿌리는 과연 어디인가. 국방경비대 시절 한국 측 인사들은 대한제국 군대에 기원을 두고자 했다. 미 군정이 국방부를 국내경비부로 바꾸려 할 때 통위부를 제안했고, 경비대 초기의 계급이나 구령 등도 대한제국 군대의 것을 그대로 썼다.

 

그러나 일제의 강요를 받은 순종의 황명으로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고 대한제국 마저 1910년 한일 강제병합으로 사라지면서 그 명맥도 끊겼기 때문에 대한제국 군대가 국군의 뿌리가 될 수는 없다.

 

대한민국 헌법은 전문에서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못박고 있다. 대한민국 국군도 임시정부의 군대인 광복군을 계승하는 것이 마땅하다. 광복군은 1940년 임시정부가 있던 충칭에서 창설됐고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독립군과 의병에 맥이 닿는다.

 

중국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창설식을 개최한 뒤 한국과 중국 관계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국방부는 산하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2018년)과 『근현대 한국군의 역사』(2019년)에서 남조선국방경비대를 국군의 모체로 봤던 기존 입장을 수정해 독립군과 광복군을 국군의 뿌리로 인정했다. 육사의 홍범도 흉상 철거 논란이 일던 2023년에도 국방부는 대변인 브리핑을 통해 이 같은 입장을 재확인했다.

 

2018년 3월 1일 육군사관학교에서 독립전쟁 영웅 5인 흉상 제막식이 열리고 있다. 왼쪽부터 홍범도·지청천·이회영·이범석·김좌진. 2018. 3. 1 연합
 

해군 ‘창군의 아버지’는 독립운동가 손원일 제독

 

공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육·해군 비행대 편성을 기획하며 독립군 비행학교 설립을 추진한 1919년 11월 5일을 누리집 연혁의 맨 윗줄에 올려놓았다. 2020년 7월 14일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윌로스 한인비행학교 설립 100주년을 맞아 원인철 공군참모총장 주재로 서울 강서구 공항동 국립항공박물관 앞에서 기념 조형물 제막식을 열기도 했다.

 

1920년에 촬영한 윌로스 한인비행학교 교관과 생도들의 모습. 사진 위에 ‘미국 가주(加州·캘리포니아주) 한인비행대, 로백린 장군 지휘 하에'라고 적어놓았다.
 

해군은 독립운동가 손원일을 ‘창군의 아버지’로 내세우며 그가 동지들을 규합해 1945년 11월 11일 조직한 해방병단을 모체로 삼고 있다. 강동길 해군참모총장은 누리집 인사말에서 “해군은 광복 직후 육·해·공군 중 가장 먼저 창설됐다”고 설명해놓았다. 육·해·공군의 누리집만 보면 국군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육군이 가장 뒤늦게 출발한 셈이 된다.

 

육군, 해군, 공군의 누리집. 창군 과정에 관한 설명이 각기 다르다.

 

부승찬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14명은 국군조직법 제1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군, 한국광복군의 역사를 계승하고 국민의 군대로서”라는 문구를 추가하자는 개정안을 2024년 10월 14일 발의했다.

 

법 개정 이전에라도 육군은 누리집을 비롯한 각종 자료에 남조선국방경비대가 모체가 아니라 독립군과 광복군이 뿌리라는 사실을 밝혀놓아야 한다. 국방부도 국군 출범 이전의 역사를 소개하고 광복군 창설을 기념하는 일에 적극 나서야 한다. 육사에 놓인 국방경비대 표석과 기념비에도 ‘국군(육군)의 모체’란 단어를 빼는 것이 바람직하다.   < 이희용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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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과 여야 지도부가 16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가진 오찬 간담회에서 개혁신당 천하람 원내대표(왼쪽)와 기본소득당 용혜인 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KTV 영상 갈무리
 

이재명 대통령과 여야 지도부의 청와대 회동 당시 개혁신당 천하람 원내대표가 이 대통령 면전에서 2차 종합특검법에 대한 거부권 행사 등을 촉구하자 진보 정당인 기본소득당 용혜인, 사회민주당 한창민 대표가 나서 조목조목 반박한 장면이 정치권 안팎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16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열린 오찬 간담회에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불참한 가운데 보수정당에서는 유일하게 천하람 원내대표가 참석했다. 그는 전날 국회 본회의에서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2차 종합특검법이 상정되자 본회의장 단상에 올라 약 19시간 동안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통한 의사 진행 방해)를 진행한 뒤 곧바로 청와대로 이동했다. 밤을 꼬박 샌 상태였지만 필리버스터 때 했던 주장을 이 대통령에게 직접 전하기 위해서였다.

 

이 대통령과 여야 지도부가 원탁 테이블에 둘러앉은 오찬 간담회의 모두발언에서 천 원내대표는 "제가 사실 19시간 정도 필리버스터를 하다가 와서 조금 군기가 덜 빠져 있을 수도 있다. 대통령이 2차 종합특검법에 대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해 주십사 하는 부탁의 말씀을 드리려고 왔다"며 "3대 특검에서 부족했던 수사들이 있다면 당연히 해야 하지만 그 부분들은 경찰 국가수사본부로 자연스럽게 다 인계가 된 상황"이라고 운을 뗐다.

 

이어 통일교 특검 및 공천헌금 특검을 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 수용해야 한다는 요구도 내놨다. 반면 민주당이 추진하고 국민의힘은 결사 반대하는 신천지 특검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천 원내대표는 "대통령님도 통일교의 정교 유착 문제를 굉장히 강하게 질타했었다"면서 "여야 가릴 것 없이 통일교 특검이라든지, 특히 이번에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는데 돈 공천 관련한 특검이라든지, 여당이나 대통령과 가까운 분이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다 하더라도 특검이라는 게 내가 쓰는 칼일 뿐만 아니라 정말 공정한 수단이라는 것을 대통령이 보여준다면 대한민국 대통령제와 정치 역사에 어마어마한 성취와 진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16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열린 정당 지도부 초청 오찬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날 행사에 국민의힘 지도부는 불참했다. 2026.1.16. 연합
 
사회민주당 한창민 대표가 16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열린 이재명 대통령 초청 정당 지도부 오찬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6.1.16. 연합
 

이에 다음 발언 순서로 마이크를 잡은 기본소득당 용혜인 대표가 천 원내대표의 특검 관련 주장을 하나하나 논박했다. 용 대표는 "준비한 말씀을 드리기 전에 2차 특검 관련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천하람 대표가 12·3 내란을 '죽은 권력'의 문제라고 말했는데, 내란 공판 과정을 보면 (윤석열이) 사형이 구형되는 그 순간까지도 실실 웃으면서 국민을 조롱했던 모습을 많은 분이 기억하실 것"이라며 "그리고 내란에 동조했던 내란 정당 국민의힘은 여전히 기세등등하다. 이게 과연 죽은 권력에 대한 문제인가 라는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또 "(2차 종합특검법에는) 외환, 군사 반란 혐의, 노상원 수첩, 양평 고속도로 문제까지 3대 특검의 미진한 수사 대상들이 정밀하게 나열돼 있다. 예산 문제도 말해주셨는데, 검찰 예산의 1% 정도도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쓰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면서 "개혁신당이 국민의힘과 공조해 필리버스터에 나선 것은 개혁신당을 위한 선택이겠으나 정치의 본질은 국민이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국회와 정부는 힘을 합쳐야 하고, 그런 부분을 더 깊이 천하람 원내대표도 헤아려 주기를 부탁한다"고 전했다.

 

마지막 발언자인 사회민주당 한창민 대표도 "2차 종합 특검은 죽은 권력에 대한 부관참시가 아니라 진실에 근거해 역사를 바로잡고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당연한 조치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다"며 "정쟁의 사안이 아니라 내란을 겪은 대한민국이 민생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고, 특검이 짧은 (수사) 기간에 많은 진실을 밝혀내지 못한 한계를 보완하는 과정이라고 꼭 말씀드리고 싶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천하람 원내대표는 국가수사본부에서 수사하는 게 좋겠다고 했는데, 오히려 그게 또 다른 정쟁을 낳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공정한 특검을 통해 진행해야 한다"면서 "돈 공천 특검과 통일교 특검은 하자고 하면서 종합 특검은 국가수사본부에 맡기자는 것은 모순적인 상황이다. (종합 특검에도) 함께 동의해주면 좋겠다"고 꼬집었다.

 

천 원내대표는 모두발언만 하고 식사는 하지 않은 채 자리를 떠났다. 천 원내대표와 마찬가지로 이 대통령과 민주당에 통일교·공천헌금 '쌍특검' 수용을 요구하고 있는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17일에도 국회 로텐더홀에서 사흘째 단식 투쟁을 벌였다.  < 김호경 기자 >

 

"당명을 또 바꿔?" 국민의힘 향한 규탄 목소리

● COREA 2026. 1. 13. 06:13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어제까지 책임당원 100만명 ARS 여론조사

14년간 여섯 차례 당명 개정, 일곱 번째 시도
"과거의 잘못 못 끊어내고 간판갈이만" 눈총

"차라리 해산하고 새롭게, 용기와 각오" 주문

 

국민의힘이 또 당명을 바꾸겠다고 나섰다. 지난 9일부터 11일까지, 책임당원 100만 명을 대상으로 ARS 조사를 돌렸다. "당의 가치와 방향을 재정립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당명 개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두 차례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새 당명 아이디어를 받겠단다. 장동혁 대표가 지난 7일 기자회견에서 밝힌 '이기는 변화'의 시작이란다.

 

'이기는 변화'라, 참 그럴듯한 말이다. 하지만 누가 봐도 이건 변화가 아니다. 그냥 책임 회피며 유권자들을 기만하는 술책이다. 12·3 비상계엄 사태로 추락한 지지율을 만회하려는 헛된 몸부림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내란 혐의로 당이 존폐 위기에 몰리자, 또다시 꺼내든 카드가 당명 바꾸기다. 옷만 갈아 입으면 새 사람이 되는 줄 아는 모양이다.

 

챗GPT 생성 이미지. Thomas Kim 시민기자

 

돌이켜보면 이들의 당명 변경 역사는 참으로 화려하다. 아니, 처참하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을 시초로 본다면, 지금까지 무려 일곱 번째 당명 변경을 시도하는 셈이다.

 

민자당(1990년)에서 신한국당(1996년)으로, 한나라당(1997년)으로, 새누리당(2012년)으로, 자유한국당(2017년)으로, 미래통합당(2020년 2월)으로, 국민의힘(2020년 9월)으로, 그리고 이제 또 바꾸겠단다. 특히 2020년 한 해에만 두 차례나 간판을 바꿔 달았다.

 

패턴은 언제나 똑같다. 정치적 위기가 오면 당명을 바꾼다. 1995년 지방선거 참패 후 민자당은 신한국당이 됐다. 2012년 이명박 정부의 레임덕과 '차떼기 당' 오명 속에서 한나라당은 새누리당으로 탈바꿈했다. 당시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파란색 당 색을 빨간색으로 바꾸는 파격을 단행했고, 19대 총선에서 승리를 거뒀다. 그게 유일하게 성공한 사례였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의 국정 농단과 탄핵 사태로 새누리당은 몰락했다. 2017년 2월, 보수의 가치를 재정립하겠다며 자유한국당으로 이름을 바꿨지만 소용없었다. 같은 해 대선에서 패배했고, 이듬해 지방선거에서도 참패했다. 그래서 또 바꿨다. 2020년 2월, 21대 총선을 앞두고 보수 통합을 내세우며 미래통합당이 됐다. 하지만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에게 180석을 내주고 대패하자, 불과 7개월 만에 또 이름을 바꿨다. 그게 지금의 국민의힘이다.

 

2020년 9월, 김종인 비대위원장은 "국민을 위하는 정당으로 거듭나라는 국민 대다수의 간절한 희망을 당명에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국민의힘에는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힘', '국민을 위해 행사하는 힘', '국민을 하나로 모으는 힘'이라는 세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단다. 보수·자유·공화 같은 이념적 색채는 지양하고, '당(黨)'자도 과감히 없앴다. 포용성과 직관성을 담았다고 자랑했다.

 

그런데 그게 불과 5년 전이다. 5년 전의 간절한 뜻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국민을 위한 힘은 제대로 발휘해봤나? 아니, 오히려 국민에게 짐이 됐다는 조롱만 받고 있지 않은가. 더불어민주당 박수현 대변인이 "유일한 당명은 '국민의짐'밖에 없다"라고 꼬집은 게 결코 빈말이 아니다.

 

이번 당명 변경 추진에 대해 국민의힘 내부에서조차 회의적인 반응이 나온다. 유정복 인천시장은 "음식점이 간판 바꿔서 영업 잘되는 것 봤냐"고 반문했다. 한지아 의원은 "당명 개정은 혁신이 아니다. 혁신은 내용과 본질을 바꾸는 것이지 포장지만 바꾸면 안 된다"라고 지적했다. 정치평론가 박상병은 "국민의힘은 그동안 당명을 바꾸면서도 제대로 혁신한 적이 거의 없다"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당명 변경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2017년 새누리당이 자유한국당으로 바뀌었지만, 지지율은 10%대 초반에 갇혔다. 내용물은 그대로인데 포장만 바꿔서 뭐가 달라지겠는가. 정말로 새로워지고 싶다면, 환골탈태하고 싶다면, 과거를 통렬히 참회하고 마음과 행실이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

 

12·3 비상계엄은 헌정 질서를 짓밟은 내란 행위였다. 국민의힘은 그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가? 윤석열 전 대통령을 출당시킬 것인가? 친윤 인사들을 당 요직에서 물러나게 할 것인가? 공천 개혁과 세대교체를 단행할 것인가? 정책 방향을 근본적으로 전환할 것인가? 이런 실질적인 변화 없이 간판만 바꾸면 뭐하나.

 

장동혁 대표는 "계엄과 탄핵의 강을 건너겠다"고 선언했지만, 정작 정책위 의장에 친윤 정점식 의원을, 지명직 최고위원에 조광한 의원을, 윤리위원장에 김건희 여사 옹호 논란이 있던 윤민우 교수를 임명했다. 이게 강을 건너는 방법인가? 아니, 오히려 강에 빠지는 방법이다.

 

국민의힘 사무처 노동조합은 성명을 통해 "당원 동지들은 '찬성'이라는 책임 있는 결단을 내려달라"고 호소했다. "국민의힘이 과거의 잘못을 단호히 끊어내고 국민과 함께 미래로 나아갈 결단의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과거의 잘못을 단호히 끊어낸다는 게 당명 바꾸기인가? 그게 전부인가? 설득력이 전혀 없는 공허한 외침이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당명 변경 역사는 너무 자주, 너무 뻔하게 반복된다. 정치적 위기 때마다 등장하는 국면 전환용 카드, 실질적 혁신 패키지 없이 진행되는 간판 갈이 쇼, 그리고 얼마 못 가 또다시 찾아오는 위기, 이 악순환의 고리를 이번에도 끊지 못한다면, 국민의힘에 미래는 전혀 없다.

 

옷만 바꿔 입는다고, 입으로만 외친다고 새 사람이 되는 게 아니다. 지난날 문제가 있었다면 과거를 통렬히 참회하고, 내면과 행실이 완전히 바뀌어야 비로소 새 사람으로 거듭 났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 국민의힘이 정말로 새로워지고 싶다면, 진짜 혁신을 원한다면, 간판이 아니라 시스템을 통째로 바꿔야 한다. 사람을 바꾸고, 정책을 바꾸고, 태도를 바꿔야 한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건 또다시 반복되는 무책임한 도피일 뿐이다. 내용은 그대로 둔 채 포장만 바꾸려는 얄팍한 술수다. 14년 동안 여섯 차례 바꾼 당명, 이제 일곱 번째를 준비한다. 이쯤 되면 묻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의힘이여, 대체 언제까지 이런 못난 장사치들이나 하는 치졸한 꼼수를 반복할 것인가? 불량품을 판 장사꾼이 욕 먹으면 간판만 바꿔 다시 장사하는 그 천박한 수법을, 소위 공당의 정치인들이 태연하게 구사하는 현실이 부끄럽지도 않은가?

 

챗GPT 생성 이미지. Thomas Kim 시민기자

 

이건 정치가 아니다. 사기극이다. 국민을 우롱하는 파렴치한 행위다. 내란의 주범을 비호하고, 헌정 질서를 짓밟은 세력들이 간판만 바꿔 달면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국민이 그렇게 호락호락해 보이는가? 진정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정치 세력으로 거듭나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만 이 비겁한 게임을 끝내라. 간판 바꾸기 놀이를 멈춰라.

 

완전히 새로운 사람들이, 완전히 새로운 이념과 정책으로, 완전히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것. 과거의 적폐와 완전히 단절하고, 내란과 부패의 역사를 청산하고, 진정한 보수의 가치를 다시 세우는 것. 그것이야말로 바로 보수 정당을 자처하는 공당이 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그럴 용기도, 각오도 없으면 차라리 당을 해산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현명하지 않겠는가?

 

국민의힘이여,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과연 보수 정당으로서 이 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자격이 있는가? 아니면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야 할 낡은 유물에 불과한가? 해답은 당신들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 토마스 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