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문서로만 남지 않습니다. 때로는 한 벌의 옷이, 한 장의 혈서가, 한 점의 핏자국이 시대를 증언합니다. 기록에는 해석이 스며들 여지가 있지만, 피는 변명이 끼어들 여지를 남기지 않습니다. 우리의 독립운동사에는 그렇게 ‘정직한 유물’들이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혈서, 윤봉길 의사의 피 묻은 유품, 그리고 백범 김구의 혈의(血衣)가 그것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혈서는 단지동맹 때 손가락을 끊어 쓴 글과 혈인으로, 동지들에 의해 보존되어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피 묻은 옷과 유품은 홍구공원 의거 뒤 일본 측에 압수되거나 수습된 것들 가운데 일부가 광복 후 돌아와 보존되고 있습니다. 반면 유관순 열사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입었던 옷이나 수의는 현재 전해지는 실물이 없습니다. 그의 마지막은 재판기록과 형무소 기록, 유족과 동료들의 증언을 통해 남아 있습니다.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흉탄을 맞고 서거한 백범의 모습. 얼굴의 상처 부위에는 응급처치의 흔적이 남아 있고, 백범은 흰옷을 입힌 채 침상에 안치되어 있다. 평생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살아온 백범은 일제의 감옥과 추격을 견뎌 살아 돌아왔으나, 해방된 조국에서 총탄에 쓰러졌다.
백범 김구의 혈의는 1949년 6월 26일 경교장 2층 집무실에서 안두희의 흉탄을 맞을 때 입고 있던 옷입니다. 일요일 아침 새로 갈아입은 정갈한 여름옷이었습니다. 백범은 새로 갈아입은 지 불과 몇 시간밖에 되지 않은 깨끗한 백의 차림으로 경교장 안에서 사람을 만나고 일을 보다가 총탄에 쓰러졌습니다. 흰 섬유 위에 번진 붉은 피가 더욱 선명하게 남은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안두희가 저격하는 순간 백범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총탄 세 발이 그의 몸을 관통한 뒤 책상 뒤편 창유리까지 뚫고 나갔습니다. 총알이 지나간 유리에는 구멍이 생겼고, 창틀과 그 주변에도 피가 튀었습니다. 당시의 유리창은 그날의 사격 방향과 현장의 참상을 보여주는 물적 증거로 남았습니다.
총격을 받고 쓰러진 백범은 침상으로 옮겨졌습니다. 측근들과 의료진은 심폐소생과 지혈을 시도했습니다. 상처 부위를 확인하고 청진기를 대기 위해 조끼적삼과 저고리, 조끼의 왼쪽 어깨와 가슴 부위를 급히 가위로 절개했습니다. 오늘날 혈의에 남아 있는 절개 흔적은 쓰러진 백범을 살리려 했던 사람들의 다급한 손길이 남은 표시입니다.
측근들은 경교장에 있던 여름용 모시 이불로 피를 닦고 백범의 몸을 덮었습니다. 시신을 눕힌 침상의 시트와 머리를 받친 베개, 몸을 덮었던 모시 이불도 피로 붉게 물들었습니다. 유족은 그것들을 세탁하지 않고 그대로 수습했습니다. 백범이 마지막까지 사용하던 침구는 한 사람의 임종을 받아낸 물건이자, 경교장의 비극을 간직한 현장 유물이 되었습니다.
백범이 입고 있던 한복 조끼에는 은으로 만든 단추 세 개가 달려 있었습니다. 총격 직후 백범을 옮기고 응급처치를 하는 과정에서 단추가 실에서 떨어져 피로 젖은 집무실 바닥에 굴렀습니다. 유족들은 그 단추들을 찾아 따로 수습했습니다. 훗날 단추를 조끼에 다시 달지 않고 별도의 유품으로 보관한 것은 그 떨어진 상태 자체가 총격과 수습의 순간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백범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날 경교장에 있던 사물들은 총성이 멎은 뒤에도 말없는 증언을 이어갑니다.
2. 백범의 혈의는 어떻게 보존되었나
백범의 혈의는 모두 8종 10점입니다. 조끼적삼 한 점, 저고리 한 점, 조끼 한 점, 개량속고의 한 점, 바지 한 점, 대님 두 점(양쪽), 양말 두 점(양쪽), 개량토시 한 점입니다.
상의는 안쪽부터 조끼적삼과 저고리, 조끼를 입었습니다. 조끼적삼은 오늘날의 면 내의 상의와 비슷한 얇은 속옷입니다. 저고리는 한여름에 입는 얇은 항라 계열의 옷감으로 지어졌고, 그 위에 조끼를 덧입었습니다. 하의는 오늘날의 사각팬티 또는 짧은 속바지와 비슷한 개량속고의 위에 흰 바지를 입고, 바짓부리를 대님으로 묶었습니다. 갈색 양말 한 켤레도 함께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 개량토시 한 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토시는 붓글씨를 쓰거나 문서를 다룰 때 소매가 흘러내리거나 바닥에 끌리는 것을 막기 위해 팔에 끼던 봉지 모양의 생활용품입니다. 백범은 늙어서도 붓을 놓지 않았습니다. 편지를 쓰고, 휘호를 쓰고, 성명서를 작성하고, 자주독립과 통일을 염원하는 문서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미군정 당국에 출두할 때도 토시를 착용했습니다. 혈의에 남은 토시는 백범의 일상과 공적 활동을 함께한 생활사 자료입니다.
그러나 혈의를 보존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백범 서거 뒤 경교장은 유족이 계속 머물며 지킬 수 있는 집이 아니었습니다. 경교장은 백범의 소유가 아니었고, 유족과 측근들은 그곳을 비워야 했습니다. 백범이 사라진 뒤 경교장을 감시하는 이승만 정권과 군·특무기관의 경계는 냉엄했습니다. 언제 군경이 들이닥쳐 유품과 문서를 압수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백범의 차남 김신과 기요비서(기밀비서) 김우전은 동지들을 보호하기 위해 경교장에 쌓여 있던 민감한 문서를 정리해야 했습니다. 경교장 집무실과 비서실에는 국내외 연락망, 편지와 명부, 방문객들의 이름이 적힌 방명록, 성금과 관계된 자료 등 정치적으로 미묘한 기록이 많았습니다. 그것들이 정권의 수중에 들어갈 경우 백범과 교류한 독립운동가와 민족주의 진영 인사들에게 화가 미칠 수 있었습니다.
김우전과 김신은 중요한 문서와 편지, 명부와 방명록을 골라 경교장 지하 아궁이에서 불태웠습니다. 백범과 함께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지우기 위해, 역사의 일부를 자신들의 손으로 태워야 했던 것입니다. 기록을 경시해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긴박한 보안 조치였습니다.
백범이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흉탄을 맞을 당시 입고 있던 피 묻은 옷. 흰 저고리와 바지 곳곳에 검붉게 굳은 혈흔이 선명하게 남아 있고, 상의에는 총격과 응급처치 과정에서 생긴 흔적도 보인다. 백범의 혈의는 조끼적삼·저고리·조끼·개량속고의·바지·대님·양말·개량토시 등 8종 10점으로 2009년 6월 26일 ‘백범 김구 혈의 일괄’로 국가등록문화재가 되었다.
그러나 백범이 마지막으로 입고 있던 피 묻은 옷은 한 점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김신과 비서들은 백범의 피가 자주독립과 남북통일을 향한 열망, 그리고 해방 정국의 비극을 증언할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유족은 혈의를 세탁하지 않았고, 핏자국과 탄흔, 의료진이 잘라낸 흔적을 모두 수습해 오동나무 함에 넣었습니다. 아들 김신은 정권의 감시와 가택수색을 염려해 유품함을 벽장 깊숙한 곳이나 일반 가구 뒤에 감추고 살았습니다. 위험이 커지면 믿을 만한 친지나 절의 지인에게 잠시 맡겼고, 이사할 때에는 다른 물건보다 혈의함을 먼저 챙겼습니다.
훗날 김신은 회고록에서 아버지의 혈의가 든 상자를 빼앗기거나 훼손당할까 평생 가슴을 졸이며 살았다고 술회했습니다. 그는 공군참모총장 등 국가의 고위직에 오른 뒤에도 아버지의 유품만큼은 안전하다고 마음 놓지 못했습니다. 한 나라의 장군이 된 아들이 아버지의 마지막 옷을 정권의 눈에서 숨겨야 했다는 사실은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또 다른 비극을 보여줍니다.
유족은 그렇게 반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혈의를 집안 깊은 곳에 비장했습니다. 혈의가 담긴 함을 약 50년 만에 다시 열었을 때는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짙은 피비린내가 배어 나왔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 있던 유족과 관계자들은 피가 굳은 옷과 냄새 앞에서 끝내 통곡했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은 냄새는 그날의 경교장이 과거의 일이 아니라는 듯 사람들을 1949년 6월 26일로 되돌려놓았습니다.
많은 서류가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불길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혈의는 오동나무 함 속에서 살아남았습니다. 방명록은 경교장을 드나든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었지만, 혈의는 한 시대의 비극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3. 혈의는 어떻게 문화재가 되었나
백범의 혈의는 처음부터 국가가 관리한 문화재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들이 간직한 아버지의 마지막 옷이었고, 정권의 감시 속에서 숨겨야 했던 위험한 유품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가족의 손에서 비밀스럽게 보존되다가 전문기관의 보존처리를 거쳐, 마침내 국민 전체가 지켜야 할 역사유산이 되었습니다.
혈액이 묻은 옷감은 시간이 지나면 혈흔이 굳고 섬유가 약해지거나 딱딱하게 경화합니다. 오동나무 함 속에서 수십 년을 보낸 백범의 혈의도 장기 보존을 위한 전문적인 처리가 필요했습니다.
보존처리를 앞두고 유족과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중요한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옷에 밴 피와 오염을 씻어내고 깨끗한 한복의 모습으로 복원해야 하는가, 아니면 핏자국을 그대로 남겨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일반적인 세탁과 복원의 관점에서 보면 피는 제거해야 할 오염이었습니다. 그러나 백범의 혈의에서 피는 유물의 본질을 이루는 역사적 증거였습니다.
유족과 보존 전문가들은 혈흔을 지우지 않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그날의 피와 탄흔, 응급처치 과정에서 생긴 절개 흔적 자체가 없애서는 안 될 역사 기록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보존의 목적은 옷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피와 훼손의 흔적을 그대로 지닌 채 더 이상 삭지 않도록 지키는 데 있었습니다.
1996년 국립문화재연구소는 혈의의 상태를 조사하고 과학적인 보존처리를 시행했습니다. 옷감에 생긴 곰팡이와 추가 손상의 원인이 되는 물질을 제거하고 섬유를 안정시키되, 백범의 피와 탄환이 남긴 흔적은 그대로 보존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혈흔을 검사해 백범의 혈액형이 AB형이라는 사실도 확인했습니다.
2009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이자 백범 서거 60주년이었습니다. 문화재청은 백범 관련 유품의 역사적·문화재적 가치를 조사해 「2009년도 등록문화재 등록조사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그 결과 백범이 암살당할 당시 입고 있던 의복 8종 10점은 「백범 김구 혈의 일괄」이라는 명칭으로 국가등록문화재 제439호에 등록되었습니다. 등록일은 백범 서거 60주기인 2009년 6월 26일이었습니다. 현재는 지정번호를 앞세우기보다 국가등록문화유산이라는 명칭을 사용합니다.
문화재청이 혈의를 높이 평가한 것은 조끼적삼과 저고리에 남은 탄흔, 의복 전체를 물들인 혈흔, 의료진이 가위로 잘라낸 절개 흔적이 백범 암살 당시의 상황을 직접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토시와 속옷, 바지, 대님, 양말까지 당시의 착장이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다는 점에서도 생활사적 가치가 컸습니다.
혈의는 한때 김신의 소유로 백범김구기념관에 소장되었고, 이후에는 재단법인 김구재단이 소유와 관리를 맡게 되었습니다. 경교장에는 현장을 이해하도록 제작한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원본은 온도와 습도, 빛을 통제할 수 있는 별도의 보존 환경에서 관리되고 있습니다. 1949년에는 아들이 목숨을 걸고 숨겨야 했던 아버지의 마지막 옷이었습니다. 그러나 60년이 흐른 뒤에는 대한민국이 함께 보존해야 할 역사유산이 되었습니다. 혈의가 문화재가 된 것은 옷 자체의 가치가 달라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켜내지 못한 독립운동가의 죽음과 그 시대의 비극을 국가의 공적 기억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문화재가 된 것은 피 묻은 한복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옷에 남은 탄흔과 핏자국, 아들이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감추며 살아온 세월, 그리고 뒤늦게 그 가치를 깨달은 국민의 기억이 함께 문화유산이 된 것입니다.
4. 혈의와 함께 남은 마지막 현장
혈의는 백범의 죽음을 증언하는 가장 직접적인 유물이지만, 그날의 경교장을 기억하는 유물은 혈의 하나만이 아닙니다. 백범의 손때가 묻은 벼루와 먹도 남았습니다. 서거 직전까지 붓글씨를 쓰는 데 사용했던 벼루에는 검은 먹물과 백범의 피가 섞였습니다. 유족은 먹물을 씻어내거나 새로 갈지 않고 그 상태로 보존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피와 먹이 한데 섞인 채 벼루 안에서 굳었습니다. 붓글씨를 쓰던 일상과 총격으로 끊긴 마지막 순간이 한 벼루 안에 함께 남은 것입니다.
백범 피격 직후 촬영된 사진에는 창유리에 두 개의 총탄 구멍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 뒤 경교장은 중화민국 대사관저, 월남대사관 등을 거쳐 1967년부터 병원시설로 사용되면서 내부가 크게 개조됐다. 2005년 강북삼성병원이 백범 집무실을 복원하면서 당시 사진을 바탕으로 두께 5mm의 투명 아크릴판에 두 개의 총탄 구멍을 재현해 유리창에 덧붙이는 방법으로 총탄 구멍을 재현했다.
피 묻은 모시 이불과 베개, 침상 시트도 수습되었습니다. 백범의 조끼에서 떨어진 은단추 세 점도 별도로 보관되었습니다. 백범의 몸을 관통한 총탄이 뚫고 나간 창유리 역시 현장을 증언합니다. 유리에 난 두 개의 탄흔은 안두희가 서 있던 위치와 총탄이 날아간 방향, 백범이 쓰러진 자리를 물리적으로 보여줍니다. 말과 기록이 엇갈리더라도 총탄이 남긴 구멍은 그날의 방향을 바꾸어 말하지 않습니다.
이 유물들은 각각 따로 존재하지만 하나의 장면을 이룹니다. 피 묻은 옷, 떨어진 은단추, 피와 먹이 섞인 벼루, 붉게 물든 침구, 총탄이 뚫은 창유리가 모여 백범의 마지막 시간을 복원합니다. 어느 하나도 스스로 말하지 않지만, 서로를 마주 놓으면 경교장 2층에서 벌어진 일이 선명하게 되살아납니다.
흉탄은 백범의 육신을 쓰러뜨렸지만, 그가 남긴 뜻까지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같은 겨레가 분단된 나라가 온전한 나라인가, 민족의 자주보다 강대국의 이해가 우선 되어야 하는가, 정치적 반대자를 폭력으로 제거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백범의 죽음 뒤에 더 선명해졌습니다.
총탄은 백범의 행동을 중단시켰지만, 그의 죽음은 자주와 통일이라는 문제를 더 크게 남겼습니다. 백범의 노선이 현실정치에서 반드시 성공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제거됨으로써 열려 있던 하나의 정치적 가능성이 닫혔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5. 한 벌의 옷이 증언하는 시대의 비극
백범의 혈의는 먼저 정치적 반대자를 대하는 시대의 야만을 증언합니다. 정치적 견해가 다르면 토론하고 설득하며 국민의 판단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총탄은 논쟁을 끝내고 한 사람을 영원히 제거했습니다. 그것은 한 개인의 잔혹한 범행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정치적 반대자를 포용하고 경쟁하는 민주적 질서가 뿌리내리지 못한 해방 정국의 야만성을 보여줍니다. 백범과 생각이 달랐던 사람은 많았습니다. 그의 남북협상과 통일정부 노선에 반대하는 세력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반대는 논쟁과 선거, 역사의 평가로 다투어야 할 문제였습니다. 총탄은 그 모든 과정을 한순간에 빼앗았습니다.
혈의는 또한 ‘미완의 해방’을 증언합니다. 백범은 일제의 감옥과 추격, 사형의 위협을 견디며 살아 돌아왔습니다. 중국 대륙에서 수십 년을 떠돌면서도 조국에 돌아갈 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돌아온 독립운동가는 해방된 조국의 한복판에서 쓰러졌습니다. 일본의 식민통치는 끝났지만, 백범이 꿈꾸었던 통일된 자주독립국가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남과 북은 갈라졌고, 외세의 이해와 내부의 적대가 민족의 앞날을 가로막았습니다. 백범의 혈의는 해방이 곧 독립의 완성은 아님을 보여주는 아픈 증거입니다. 식민지에서는 살아남았으나 해방된 조국에서는 살아남지 못한 독립운동가의 피가 그 역설을 말합니다.
백의를 적신 피는 한 시대의 가능성에 대한 종언이기도 했습니다. 백범이 살아 있었다면 분단을 막거나 통일을 이루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정치 노선이 성공했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남과 북 어느 한쪽에도 완전히 귀속되지 않은 채 민족의 자주와 통일을 주장하던 거대한 정치적 존재가 사라진 것은 분명합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남과 북의 대립 사이에서 다른 길을 모색할 가능성, 분단이 고착되기 전에 민족 내부의 대화와 타협을 시도할 가능성, 독립운동의 정통성이 해방 후 국가 건설에 더 크게 참여할 가능성도 함께 무너졌습니다. 한 사람을 제거하는 일이 한 시대의 가능성까지 사라지게 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백범의 혈의는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였는지를 가장 정직하게 증언하는 유물입니다. < 임순만 언론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