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개혁 지지자를 아이히만에 비유하고 모독 보완수사권 폐지는 검찰 개혁의 필연적인 결론 한국 리버럴세력, 단일하지도 철저하지도 않다
지배 질서의 일부가 된 자유주의 세력의 문제점 사실과 맥락이 틀린 레닌과 소비에트 구호 비유 어설픈 인용보다 검찰 피해와 고통에 공감부터
<한겨레>의 아주 오랜 독자로서 꼭 챙겨보는 필자의 글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글도 있다. 미안한 말이지만 이세영 논설위원의 글은 시간이 부족하면 잘 챙겨보지는 않았다. 지적 능력과 지식을 과시하는 듯한 문장들, 그리고 불필요하게 길고 이해하기 어려운 글이라는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 간결하고 명료하며 힘 있는 문장들을 좋아하는 개인적 선호도 작용했다. 그래서 이번 검찰 관련 칼럼 역시 그냥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온라인 공간에서 많은 이들이 비판하고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보면서, 어떤 내용인지 궁금증과 호기심이 생겨 글을 찾아 읽게 되었다. 끝까지 읽고 느낀 것은 실망감과 함께, 너무 나갔다는 씁쓸함이었다. 이번 검찰 개혁 법안이 통과되는 과정 속에서, 그것을 주도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난 모습이 "아렌트가 피고인 아돌프 아이히만한테서 감지해 낸 감정 상태"라고 단정 지은 문장이 대표적이다.
이 문장은 검찰의 무소불위 권력을 해체하기 위해 싸워 온 수많은 시민과 정치인들을, 홀로코스트라는 전대미문의 인종 학살을 기획하고 집행한 나치 핵심 학살자에 비유하며 매도하고 조롱한 셈이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두고 제시한 '악의 평범성'을 검찰 개혁이라는 민주적 권력 통제 시도에 왜곡 적용하여, 시민적 열망을 무비판적 광기나 사유 부재의 상태로 깎아내린 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닐 수 없다.
한겨레 이세영 논설위원의 칼럼 화면 갈무리
이런 식으로 검찰 개혁의 과제와 지지자들을 깔아뭉개고 욕보이는 화법은, 검찰 개혁에 원래부터 반대해 온 윤석열과 국민의힘, 그리고 친검 족벌 언론들의 입을 통해서는 오랫동안 식상하도록 반복되어 왔다. 그러나 진보적 개혁 언론인 <한겨레>의 논설위원이라면,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훨씬 더 깊이 있고 품격 있는 접근을 기대하는 것이 독자로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이세영 논설위원은 검찰의 보완수사권 폐지 논의를 가리켜 "최초의 목적 자체를 증발시켜 버리는 증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이러한 진단은 그가 과연 지난 수십 년간 한국 사회에서 검찰 개혁이 왜 그토록 중요한 시대적 과제로 제기되었는지, 그 역사적 이유와 목적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는지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한국 검찰 문제의 핵심은 기소권뿐만 아니라 수사권까지 한 손에 쥐고 스스로 수사하고 기소하며 처분까지 내리는 유례없는 '권력의 독점'에 있었다. 이러한 권력의 분리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할 때, 수사권의 변형된 일부인 보완수사권의 폐지는 '목적의 증발을 보여주는 증상'이기는커녕, 너무나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논리적 결론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보완수사권은 남겨두자'는 이재명 정부 일부 관료들과 법무부의 타협적 주장에 대해, 많은 검찰 개혁 지지자들이 '검찰 개혁의 목적은 어디로 갔느냐'고 강력히 반발했다. 더욱이 이해할 수도 없고 동의할 수도 없는 것은 이세영 논설위원이 '검찰 수사권 박탈'을 "한국 리버럴의 핵심 슬로건"이라고 규정하는 부분이었다. 이것은 왜곡이 아니면 오판이다.
먼저, 한국의 리버럴(자유주의) 세력은 결코 단일하지 않다. 이세영 논설위원이 몸담고 있는 <한겨레>나 <경향신문> 같은 대표적인 자유주의적 개혁 언론들이 그동안 검찰 개혁에 대해 보여준 심드렁한 태도만 보더라도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대개 많은 자유주의적 지식인과 언론들은 검찰 개혁에 무관심하거나, 흔히 '먹고사는 문제'와 무관한 여야 간 진흙탕 정쟁 정도로 깎아내리기 일쑤였다.
나아가 그들은 오히려 엘리트 검사들의 시각과 법률가적 논리에 이입하여 그들의 편에서 문제를 접근하고 설명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이것은 '자유주의 세력'이 역사 속에서 언제나, 어디서든 억압적 국가기구의 민주적 개혁이나 근본적 구조 개혁의 문제 앞에서 불철저하고 타협적인 한계를 드러내 왔다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자유주의 세력이 자유주의적 개혁 과제에서 오히려 한 발 빼고 타협하는' 이 모순적 현상은, 오늘날 그들이 기존 지배체제와 권력 질서의 일부라는 사실과 관련 있다. 오늘날의 자유주의 세력은 과거 봉건적 질서에 피를 흘리며 싸우던 혁명적 자코뱅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자본주의 체제와 국가기구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운영하는 기득권의 일부이다.
아이히만. 나무위키
예컨대 미국 민주당의 리버럴 주류 세력이 트럼프의 집권과 극단적 폭주를 가능하게 만든 비민주적인 승자독식 선거제도나 헌정체제의 구조적 허점을 굳이 건드리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도 이와 같다. 비민주적인 그런 제도 자체가 자신들이 권력을 나누어 가질 수 있게 만든 오랜 정치적 기반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더욱 심화하는 경향이 있다. 국가 주도의 강력한 자본 축적 과정과 권위주의적 방식이라도 동원해 선진국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국가의 억압기구는 지배 엘리트 모두의 유용한 통치 도구였다. 따라서 '한국 자유주의 세력의 핵심 과제'로서 검찰 수사권 박탈을 설명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렇다면 왜 정부 수립 후 78년이 지나도록, 더구나 자유주의 세력이 국가권력을 공유하게 된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40년 가까이 검찰 수사권 박탈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미루어져 왔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또한, 자유와 민주주의의 핵심적 걸림돌인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해 자유주의 정치세력과 지식인, 언론 대다수가 큰 관심이 없는지 설명할 수 없다.
나아가 대부분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면 갖추고 있는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일에도, 한국의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표 계산을 더 앞세우는지도 이해하기 어렵다. 자유주의 세력은 억압적 국가기구의 민주적 개혁과 철저한 민주적 권리를 약속하지만, 막상 권력을 잡으면 기득권 세력의 반발에 쉽게 타협하고 물러섰다는 게 진실에 가깝다. 또 자신들의 정권 안정과 통치를 위해 억압적 국가기구를 활용하기도 했다.
현재 이재명 정부가 검사 출신의 인사를 민정수석 자리에 거듭 임명하고, 정성호 법무부 장관이 '이재명 정부의 검찰은 다르다'라는 발언으로 거센 반발을 산 이유도 비슷하다. 검찰이라는 칼의 본질이 달라지지 않음에도, '우리가 잡은 검찰은 다를 것'이라는 착각과 타협이 반복된다. 그렇기에 이세영 논설위원이 이번 칼럼의 첫 부분에서 레닌을 인용한 것은 뜬금없으면서도 지적 허세로 느껴진 것이 사실이다.
아마도 '슬로건을 중시하던 혁명가 레닌조차도 구체적 상황에 맞게 구호를 수정하거나 폐기할 줄 알았다'고 강조하며 자신의 급진성도 보여주고 싶었던 듯 하지만, 이것은 현재 한국의 상황과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1917년 당시 레닌과 볼셰비키가 펼쳤던 구체적 실천과도 맞지 않다. 우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는 레닌과 볼셰비키에게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혁명의 성격을 규정하는 전략적 방향이었다.
1920년의 레닌. 위키피디아
이 구호는 1917년 2월 혁명으로 차르(전제군주) 정권을 타도한 이후, 부르주아 임시정부의 한계 안에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노동자와 농민의 자치 기구인 소비에트 권력으로 이행할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이정표였다. 혁명의 궁극적 과제와 권력의 계급적 성격에 관한 문제를, 정세에 따라 언제든 폐기할 수 있는 구호의 문제로 설명하는 것은 무지가 아니면 왜곡에 가깝다.
1917년 7월의 불리한 정세 속에서 이 구호가 잠시 보류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소비에트 내부에서 볼셰비키가 다수를 차지하기 시작한 9월에 이 구호는 즉시 되살아났다. 무엇보다 이 구호는 단지 레닌이 발명해 낸 것이 아니라, 러시아의 공장과 거리의 투쟁 속에서 볼셰비키 당원들과 노동자 대중이 스스로 만들어 낸 열망의 결정체였기에 지도부의 임의적인 판단으로 철회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레닌과 볼셰비키의 강령과 역사를 조금만 살펴본다면, 그들이 차르 체제의 억압 기구였던 검찰과 사법 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와 철저한 개혁을 항상 핵심적 과제로 제기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검찰의 기소 독점권과 관료적 면책권을 해체하고, 모든 수사 과정과 재판을 대중 앞에 투명하게 공개하며, 특권화된 법률 관료들을 언제든 선출하고 파면해야 한다는 요구를 내걸었다.
그 이유는 명확했다. 차르 전제 정권이 민중을 수탈하고 권력을 유지하던 핵심 수단이 바로 비밀경찰과 검찰, 사법부, 그리고 이들과 결탁한 반동 언론이었고, 레닌과 볼셰비키 스스로가 바로 그러한 검찰 권력의 표적 수사와 편파 기소, 독일의 첩자로 몰아가는 여론재판과 마녀사냥에 의해 수많은 동지를 잃었던 직접적인 피해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왼쪽에서 두 번째)와 한동수 변호사(네 번째) 등이 6월 5일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바람직한 검찰개혁을 위한 시민 주도 신형사소송법 개정 촉구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조국혁신당 박은정 의원 페이스북
따라서 이세영 논설위원이 진심으로 '레닌에게서 지혜를 배워라'고 충고할 생각이었다면, 기득권과의 어설픈 타협에 안주하지 말고 더욱 철저하게 검찰 권력을 해체해야 하며, 특히 '검찰 수사권의 박탈'이라는 전략적 방향성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는게 더 타당했다. 물론 레닌과 볼셰비키가 언제나 옳았던 것은 아니며, 그들이 구축한 체제의 한계와 오류에 대해서는 오늘날 비판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대목이 수없이 많다.
그렇기에 지금 중요한 것은 레닌이나 아렌트 같은 이름을 과시적으로 끌어와 어설프게 인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78년이라는 세월 동안 검찰 권력에 의해 얼마나 많은 피해자들이 얼마나 참혹한 피해와 고통을 겪어야 했는지 직시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목도해 온 보통의 시민들이 왜 그토록 거리와 광장에서 '검찰 개혁'을 외쳐 왔는지 그 절박한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 전지윤 사회운동가·연구평론가 >